바람의 아들
장혜영
2
미라는 자신의 눈부시고 싱싱하고 섹시한 몸매로 호색한인 석재수 사장의 넋을 뿌리 채 뽑아버렸다. 오늘도 석 사장은 그녀의 현란한 섹스몸짓과 유혹에 침대위에서 벌벌 길 정도로 기운이 완전히 탈진해 있었다.
미라는 사실 석 사장이 이렇게 쉽게 자신의 육탄공격에 무너질 줄은 몰랐었다. 그가 호색한이라는 풍문을 듣고 그의 약점을 악용돌파구로 삼고 준범에게로 접근하기로 작정을 했지만 어려움은 적지 않을 것이라 예측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언니의 원수를 갚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각오하고 있었다. 신분노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복수의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이름마저 복수의 여인이라는 뜻으로 강복녀라고 고쳤었다. 순결은 둘째고 자신에게 죽음이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언니의 원한을 풀어 주리라고 맹세했다. 이 세상엔 정의가 살아있고 그 정의는 선을 보호하고 악을 징벌한다는 진리를 자신의 실천으로 입증하고 싶었다. 그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그녀는 물론이고 힘없는 약자들은 정말이지 삶에 대한 미련이나 의욕을 상실할 것 같았다.
그런데 석재수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쉽게, 거의 싱거울 만큼 간단하게 올가미에 목을 들이밀었다. 화장을 곱게 하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나자 말 몇 마디도 없이 석재수는 미라의 미모에 혹해 자신의 비서로 채용했다. 면접하는 동안 석재수의 눈길은 줄곧 스커트 밖으로 뻗어 나온 그녀의 미끈한 두 다리와 열린 셔츠 깃 사이로 살짝 엿보이는 풍만한 가슴에 풀기 있게 접촉되어 있었다. 그 눈길에는 체통이나 예의마저 상실한, 문자 그대로 무례하고 게걸스러운 것이었다.
비서로 입사한 지 일주일도 못되어 석재수는 그녀에 대한 음탕한 수욕을 참지 못하고 호텔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미라가 아직 본격적인 추파와 유혹 작전을 개시하기도 전에 그는 스스로 알아서 불구덩이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사장님이 싫어서가 아니에요. 사장님의 당당한 아내가 되고 싶지 노리개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나신이 드러나고 석재수가 미친 듯이 수욕이 발작할 즈음 미라는 쌀쌀하게 사내의 등을 떠밀었다. 호색한인 석재수로로서는 알몸뚱이의 미녀 앞에서 마지막 한 치의 인내성마저 상실했다.
“알았어. 집사람을 당장 정리하고 복녀를 정실로 맞아들일 거라고.”
“그렇게 쉽게 이혼을 해준대요. 부인께서?”
“돈만 듬뿍 안겨주면 돼. 아파트도 그대로 주고 평생 살 돈을 준다는데 싫어할 여자가 어디 있어”
모든 것을 돈으로 행사하는 장사꾼의 인생그대로다. 부인의 나이가 35세지만, 50대의 석 사장에게는 조카벌이나 되지만 23세의 아가씨와는 라이벌이 못되었다.
한 달도 안 되어 석재수는 부인과 이혼하고 미라를 네 번째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당시 석재수가 경영하는 광명전자회사는 미라가 장악한 정보에 의하면 경기부진으로 부도위기에 처해있었다. 재고상품만 산더미처럼 쌓였고 매점에 넘긴 상품마저도 반품이 되어 돌아왔다. 직원들의 임금도 반년이나 체불된 상태였다. 은행대출금상환기한초월로 대출거래는 정지되었다. 석재수는 기업회생의 마지막 기회로 기술개발상품생산에 회사의 운명을 걸었다. 선풍기성능을 개발하여 실내온도변화에 따른 자체풍속기능을 추가한 개발제품생산을 추진 중이었다. 절대 비밀보장을 위해 사장과 기술팀의 몇 사람만 설계내막을 알고 있을 뿐 특허청에 기술특허권신청도 아직 하지 않은 중에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처럼 중요한 내부기밀이 석재수가 가장 믿던 미라의 손에서 흘러나갈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이다. 미라는 제품생산과정의 상세한 설계도면을 촬영한 필름을 그녀가 아는 삼광전자회사에 슬쩍 넘겨주었던 것이다. 석재수는 자금조달이 어려워 사채를 맡아 간신히 작업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삼광전자회사에서는 사내자체투자로 순리로운 제품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게다가 한 술 더 떠 인체감응개폐작동기능까지 추가하여 제품의 신선도를 높였다.
홍 회장의 말에 의하면 오늘이나 내일 첫 상품이 선을 보일 것이고 중소기업전시회에 출품될 것이라고 하니 석재수의 회사는 부도를 넘어 파산선고의 위험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광명전자회사에서는 아직 완제품출품은 고사하고 부품생산도 자금이 부족해 기계작동을 멈춘 채 자금조달 때문에 도처로 뛰어다니는 중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석재수는 회사일은 모두 총무한테 일임하고는 호텔방에 처박혀 이렇게 주색에만 여념이 없다.
“신제품만 시장에 출시되면 우리 광명도 빚더미를 털고 일어나 다시 흥성할 거야. 나는 수 많은 계열회사를 거느린 회장님이 될 거고. 복녀는 회장사모님이 될 거고.”
탈진할 대로 탈진해 미역줄기처럼 축 늘어진 석재수는 물자루가 된 전신의 땀도 닦을 생각을 않고 허황된 꿈을 꾸고 있다. 여색에 눈이 어두운 자에게 여자의 알몸뚱이 외에 또 무엇이 보이겠는가.
따르릉- 따르릉-
갑자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받아봐. 귀찮게. 어떤 놈이지.”
석재수는 아예 이불을 머리위에 뒤집어썼다. 회사의 많은 실무들은 총무와 미라에게 맡기고 그 자신은 주색과 골프에만 전념한다. 벌어서는 죄다 유흥에 쏟아 붓는 것이다. 채무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직원들의 봉급조차도 체불한 지금도 석재수의 방탕과 유흥은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만 갔다. 그가 믿는 건 단 하나 신제품개발이다. 그걸 믿고 가격이 엄청난 외제차도 미라의 말 한마디에 뽑아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은행대출은 가능했으니 망정이지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을 것이다.
“새엄마 구실은 몰라도 생색은 내야 할 거잖아요. 정실이가 외제차를 부러워하는 것 같은 데 새엄마의 이름으로 한 대 뽑아주면 안돼요. 그래야 당신 아들 준범이한테 체면도 설 거잖아요.”
그렇게 한마디만 슬쩍 던졌었다. 그러자 외제차는 보름도 안 되어 정실의 손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석재수는 인젠 그런 호기조차도 부리지 못하게 되었다. 내일이면 백수가 될 것이고……
어쩌면 이 전화도 신제품에 관한 소식일지도 모른다. 홍 회장의 말에 의하면 오늘쯤은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고 했었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사모님. 접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지금 당장 그리로 올라가야겠습니다.”
석재수의 오른팔인 이한섭이다. 그가 골프장의 호텔까지 직접 달려온 걸 보면 삼광전자회사의 신제품이 중소기업상품전시회에 출품된 소식을 입수한 것이 틀림없다.
미라는 환성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애써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께서는 지금 주무시거든요. 이따 다시 와 보세요.”
“안 됩니다. 지금 당장 사장님을 뵈야 합니다. 우리가 개발한 신제품이 지금 다른 회사에서 생산돼 중소기업상품전시회에 전시되었단 말입니다. 내일부터는 시중에 쫙 덮일 텐데……빨리 대책을 강구해야 됩니다. 제발 좀!”
“그래요.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이 총무가 왔어요. 급한 일이 있대요. 꼭 만나야 한다는데 어떡하죠?”
“이 총무가 무슨 일로 호텔까지 왔대?”
“우리가 개발한 신제품이 다른 회사에서 생산해 전시회에 출품했다는데요.”
“뭐, 뭐라고! 신제품이 어쩌고 어째?”
석재수는 머리위에 뒤집어썼던 이불을 홱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벌써 처지기 시작한 살가죽들이 육신의 경련으로 보기 흉하게 흔들거린다.
허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릴 사이도 없이 어느새 달려 올라온 이한섭이 다급하게 문을 노크했다. 그 사이 겨우 속옷만 걸친 미라는 겉옷까지 천천히 걸치고 나서야 느릿느릿 문을 열어주었다.
방 안에 들어선 이한섭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 있었다.
“큰일 났습니다! 사장님.”
“그게 어느 회산데?”
“삼광전자회삽니다.”
아직 석재수는 알몸 그대로였으나 전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미라가 양복저고리를 그의 어깨에 걸쳐주었지만 그는 상의를 어깨에서 잡아당겨 방바닥에 휙- 내던졌다.
“그것들이 우리기술을 어떻게 알아냈다는 거야?”
“글쎄요. 저도 어리둥절합니다. 방금 전시회에서 오는 길인데요 우리 회사제품과 똑 같습니다. 자동개폐기능이 하나 더 추가되었을 뿐. 부품, 디자인까지도……”
“그러니까 내가 묻는 거잖아. 우리기술이 어떻게 걔네들 손에 들어갔냐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 비밀은 총무와 나 그리고 디자이너 민종이밖에 모르잖아. 그러면 민종의 입에서 비밀이 누설됐다는 얘기가 아니야.”
“민종인 설계를 책임진 사람이니까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사장님께서는 저도 믿지 못하십니까?”
“그러니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잖아. 아무튼 빨리 전시회에나 가 보자.”
서둘러 옷을 입고 호텔에서 나왔다. 석재수의 기름한 아래턱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미리 특허신청이나 해놓았을 걸 그랬습니다. 법에 송사할 수도 없고. 꼼짝 못하고 당했습니다. 숱한 사채를 맡아서 시작한 건데 이렇게 되면 우리 회사는 인젠……”
그 무시무시한 결과를 입에 담기조차 두려운 듯 이한섭은 입을 다물어버린다.
“비밀을 누설한 놈이 어떤 자식이야? 개새끼!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 총무, 그 자식을 꼭 알아내야 해.”
석재수는 분노한 나머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의 두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번뜩인다.
그러나 미라는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고 행차 뒤의 나발이지 다 망한 다음에 떠들어 보았자 죽은 애 찌찌 만지기고. 이제 회사는 한 달 내에 부도가 나고 파산을 선고할 것이고 법정관리로 이어지며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 것이다.
미라는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것은 근근이 강복녀가 계획한 복수극의 서막에 불과할 따름이다. 아직도 그녀 앞에는 쓰러트려야 할 두 개의 목표가 남아 있다. 정실이와 준범이다.
언니를 죽인 장본인은 준범이다. 물론 그가 직접 살인한 것은 아니다. 언니가 임신을 포기하고 시골로 내려갔더라면 죽음 같은 건 아예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경 언니를 죽음에로 내몬 것은 준범이가 아닌가. 설령 준범이가 죽였다고 하더라도 언니의 원수를 갚는 데는 준범이 한 사람을 복수하는 것으로도 족할 것이 아닌가. 그 복수의 비수가 준범이를 넘어 그 아내와 아버지에게까지 해를 끼친다는 건 너무 잔인하고 복수를 초월한 범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 적이 있었다.
그런데 준범이 한 사람에 대한 복수는 그 한이 너무 커 풀어질 것 같지 않았다. 남편의 불륜을 방임했거나 명분을 제공해 주었을 정실이다. 그리고 자식의 잘못을 징계할 대신 묵과하고 감싸주며 다른 사람의 목숨 같은 건 파리보다도 못하게 천시했던 그 아비의 죄악을 함께 징벌하지 않고는 저승에 간 언니의 억울한 혼을 달래어 안식시킬 것 같지 않았다. 그래야만 권선징악의 명분이 공정해질 것이고 정의는 자신의 권좌를 고수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이번 복수는 언니의 억울한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도, 악의 횡포에 매몰당할 번한 정의를 위해서도 이중으로 의미 있는 것이다.
전시장에 도착하자 삼광전자회사에서 출품한 신제품인 『하늘 바람』표 선풍기는 첫날부터 인기가 대단했다. 수많은 청약자들이 몰려들어 제품소개를 청취하기도 하고 홍보전단지를 받아가기도 했다. 즉석에서 매매계약을 체결하는 판매회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것을 보자 분통이 터진 석재수의 관자놀이가 심하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총무 이한섭이 사장이 졸도라도 할까봐 걱정되었던지 다급히 그의 겨드랑이를 부축해준다. 그러나 석 사장은 이한섭의 팔을 사정없이 뿌리쳤다. 여색에 진이 빠진 탓인지 늘 창백하던 그의 얼굴빛이 푸르죽죽한 얼룩이 흉하게 묻어 있다.
우연하게 미라의 눈길과 마주친 삼광전자회사의 홍 회장은 의미심장한 눈짓을 슴벅거려 보인다. 누구도 그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미라만은 알아보았다.
“아니 당신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겁니까? 이 제품은 우리 회사에서 개발한 기술인데 어떻게 되어 당신들 회사에서 생산했나 말입니다.”
흥분한 석 사장은 사장의 체통마저 잊고 상놈처럼 마구 고함을 질러댔다.
“당신네 회사에서 개발한 기술이라니요? 그럼 특허라도 신청했습니까? 특허권허가서를 보여주시면 저희들은 당장이라도 제품을 걷어 들이겠습니다.”
“특허신청은 안 했지만……”
“미안하지만 저희 회사에서는 특허까지 받아놓은 겁니다. 이렇게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법천지로 남의 회사를 매도하고 사기치려 하시면 안 되죠. 세상엔 법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남의 회사일을 방해하지 말고 볼 일 없으시면 그만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들이 정말! 사기를 쳐도 분수가 있지. 백주에 남의 기술을 도둑질하여……”
실내치안담당경찰이 달려와 펄펄 뛰는 석재수를 전시장 밖으로 끌어내갔다.
“말 한마디 못하고 당했습니다.”
길가의 포장마차에 들어가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한섭 총무가 울상이 되어 중얼거린다.
“당하다니. 그래 정말 아무런 대책도 없어? 이대로 당하고 마는 거야.”
“무슨 수가 있습니까. 남들은 특허까지 냈다는데……”
“그럼 우린 망하는 거잖아!”
“글쎄요……”
“글쎄요 라니. 당신 총무가 아니야. 실무는 다 당신한테 맡겼었잖아.”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누가 알았습니까.”
“그런다고 맥을 버리면 안 되지. 우리도 생산을 다그쳐 상품을 시장에 출품하면 어떻겠어?”
“오래지 않아 삼광신제품이 시장을 모두 독점할겁니다. 우리가 상품생산을 강행한다고 해도 한 달은 걸릴 겁니다. 그것도 자금이 정상적으로 융통될 때야 말입니다. 게다가 우리 상품을 시장에 출시해도 기능면에서 삼광제품에 뒤지고, 모조품이라고 법에 소송하면 특허권침해죄까지……”
“시끄러! 그렇다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으라는 거야. 회사는 망해도 회사를 망친 장본인은 잡아내야 할 게 아니야. 어떤 놈인지 그놈더러 회사가 진 채무며 사채를 다 갚도록 해야 해! 그걸 왜 내가 갚아.”
“무슨 수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야, 이놈아! 넌 그러고도 총무냐!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개자식, 등신 같은 놈!”
석재수는 포장마차 안이 떠들썩하도록 마구 욕설을 퍼부으며 난동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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