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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28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85 by 아데라
바람의 아들
장혜영


 서울까지 돌아오는 동안 줄곧 아기 거취문제에 대해 머리를 짜 보았지만 신통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시설에 보내자니 미라한테 미안하고.
 청량리를 지나 신설동으로 진입하는데 갑자기 휴대폰벨소리가 울렸다. 준범이와 미라가 죽고 나서는 전화가 오는 차수도 절반이나 줄어들었다. 그리고 기다려지는 전화도 별로 없었다. 심드렁하게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속에 당연히 기다리고 있어야 할 상대방의 말이 비어 있다.
 “여보세요. 윤정돕니다.”
 “………”
 “전화를 걸었으면 말씀을 하셔야죠.”
 “저예요. 윤정이예요.”
 윤정이라고? 아니. 자기……당신이 어쩌다가……”
 의외에도 아내의 전화였다. 산사로 입산해서는 처음으로 걸어오는 전화다. 그래서 기쁨보다는 궁금증이 앞선다. 사실 그녀만 집에 있었다면 아기를 부둥켜 안고 이렇게 방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남편의 핏줄인데 어머니 채순희처럼 받아들일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아기를 저한테 맡기세요.”
 “아기라니. 당신 벌써 알고 있었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자기……자기야……”
 통화가 뚝 끊어졌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질 않는다.
 윤정이 나에게 아이가 있다는 걸 언제, 어떻게 알았을까?
 정말 부처님이 되어서 신통력이라도 생긴 걸까?
 그런데 아기를 자기한테 맡기라는 건 또 무슨 뜻이지?
 수 많은 의문들이 거품처럼 부걱거렸지만 석연한 해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정도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한 조각 자존심도 없고 수치심마저 모르는 뻔뻔스러운 자가 되고 말았다. 아무 데라도 매달려서 그 애가 의탁할 곳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집념 하나 뿐이었다. 자신의 바람이자 미라의 소망이기도 했다.
 아내에게 애를 맡기는 것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의 어리석은 선택일 지도 모른다. 아내를 배신한 남편의 죄악에 대한 복수가 그 애의 불행한 운명의 시작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밖에는 다른 선택이란 없었다. 어설픈 시설에 맡기는 것 보다는 그래도 나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아내의 착한 심성을 알기 때문이다.
 차머리를 북쪽으로 유턴시켰다. 그리고는 가속페달을 밟은 발바닥에 지그시 힘을 주입했다. 차체가 부드러운 아스팔트노면에 찰싹 달라붙으며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빠끔하게 틔워 놓은 창 틈으로 바람이 불어들며 훅- 후-욱! 후-욱 훅! 부산한 소리를 냈다.
 암주庵主가 된 아내 윤정은 벌써 암자 섬돌에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도가 아이를 품에 안고 나타나자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합장하며 예의를 갖춘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고개를 숙인 그녀의 삭발한 두부頭部가 햇빛을 받아 유난히 반짝거렸다. 비옥한 기름기마저 잘잘 흐른다. 이제 그녀는 세속의 범속한 말들은 아예 다 망각한 듯싶다. 누구랑 낳은 아이냐? 이럴 수가 있느냐. 아내가 아직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엄마는 누구냐?……이러루한 말들은 일언반구도 없다.
 “누구 앤지 알고 싶지도 않습니까?”
 그녀의 신변에서 풍기는 도인의 도고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저도 모르게 경어가 튕겨 나갔다.
 “모두가 중생이고 모두가 부처이십니다. 나무아미타불!”
 몽롱한 말로 대답을 대신하며 아기를 품에 받아 안는다.
 “이 책을 받으시오. 책의 저자인 이 사진의 여자가 바로 이 아이의 생모입이다. 이 다음 성장한 다음에……”
 “필요 없습니다. 잠시 몸을 빌렸을 뿐 엄마와 자식이란 그 이상의 인연은 없습니다. 굳이 없는 인연을 만들어 아이를 고통 속에 몰아넣으려고 하십니까. 제가 이 애를 받아들여도 우리 사이는 같은 불자일 뿐 아무런 인연도 없습니다. 누구도 이 애에게 길을 가르쳐 줄 사람은 없어요. 깨달음은 이 애가 스스로 얻게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정도는 완곡하게 거절하는 윤정의 손에서 책을 돌려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 애는 사미승이 되는 겁니까?”
 “부처님이 되실 겁니다.”
 윤정은 돌아서서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미미가 보고 싶지 않습니까?”
 “모두가 불쌍한 중생들입니다. 힘겨운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인연 때문에 길을 버리지 못하는 거지요.”
 “당신이 열심히 부처님께 불공을 드려 미미의 불치병이 기적적으로 완쾌되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정도는 발길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또다시 길을 따라 어디론 가로 가야만 한다.
 그 길이 과연 그를 어디로 인도해줄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아내의 말처럼 한번 쯤은 이 길의 규제와 폭력에서 해탈하고 싶다. 길이 없는 곳으로. 그러나 정도는 이미 그 길 아닌 길에서 만회할 수 없는 엄청난 실수를 했다.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났고  발생하지 말았어야 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이를 산사에 두고 발길을 돌리려니 웬일인지 만감이 교체하며 저도 모르게 정도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려 시선을 가린다. 괜히 허둥지둥하느라 안전띠를 착용하는 것마저 깜빡했다. 아니, 깜빡한 것이 아니라 오늘따라 안전띠는 그의 심신을 꽁꽁 얽매는 무슨 쇠고랑처럼 속박으로 만 느껴지며 거부감이 들었다.
 차는 주차장을 떠나 가파른 비탈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산길은 경사면이 급하고 코스가 구불구불하여 산발이나 숲,  낭떠러지들이 빈번하게 앞을 가로막아 자주 브레이크를 밟아야 만 했다.
 윤정은 길 같은 건 쓸모없다고 한다. 그런데 난 못난이처럼 이 길이 아니고는 한 걸음도 옮길 수가 없다. 아내는, 아니, 득도승은 우리더러 이 길에서 떠나라고 한다. 대지위에서 발을 떼라고 한다.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무의미한 인생길에서.
 어떻게 발을 떼란 말인가? 발을 떼면 금방 넘어질 것이고 허공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을 것이고……
 그렇다. 스피드!
 차의 스피드를 가속시키면 노면과 타이어가 분리되어 새나 바람처럼 길을 떠나 훨훨 날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정도는 황홀한 상상에 도취된 채 저도 모르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발에 지그시 힘을 주입했다. 차체가 흠칫 떨더니 쏜살같이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씽씽 달리는 폼이 금방이라도 하늘로 부-웅! 날아오를 것만 같다. 숲들이며 산들이며 계곡들이 휙-휙- 시창 옆을 스쳐 지나간다.
 그래 이 길에서 발을 떼고 마음껏 날아 보자. 날 수만 있다면 성가시게 『교차로』,『굽은 도로』,『오르막경사』,『내리막경사』,『도로공사중』,『미끄러운 도로』,『노면 고르지 못함』,『과속방지턱』,『낙석도로』,『횡단보도』,『어린이보호』,『유턴금지』,『회전금지』,『터널』,『횡단금지』등등 온갖 교통규칙들의 지배와 구속의 군림에서 해탈하여 팔이 아프게 핸들을 비틀어 대지 않고도 눈이 아프게 안전표지를 쳐다보지 않고도 발바닥이 닳게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도 더 빨리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불현듯 눈앞에 빨간색의 물체가 흔들흔들 춤을 추며 달려온다.
 설마 위험경고?!
 정도는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쾅!
 그러나 요란한 굉음과 함께 정도의 눈에서 불이 번쩍 튕겼다. 가슴팍을 거세게 핸들에 들이박으며 극심한 충격을 느꼈다. 가까스로 통증을 참고 고개를 쳐들고 보니 고속도로 질주하던 차가 급커브 길에서 미처 유턴을 못한 채 『위험DANGER』이라고 쓴 교통안전 표지판을 들이받아 버린 것을 알았다. 조금만 더 내려갔더라면 그 밑의 아득한 골짜기에 굴러 떨어져 황천객이 될 번 했음을 보고 정도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식은땀을 쫙 흘렸다. 교통안전 표지판이 그를 구해준 셈이다. 영문도 없이 빨간색의 경고판이 아버지와 윤정의 외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보인다.
 내가 뭐랬어. 여기 가파른 계곡이 있으니까 운전에 주의하라고 했잖아.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여기는 내리막이고 여기는 위험구간이고 여기는 건널목이고 여기는 급커브이고……
 정도는 차에서 내려 사고현장을 두루 살펴 보았다. 가파르고 깊은 계곡은 아버지가 장승을 깎을 나무를 채벌하던 싸리골의 그 골짜기를 무척이나 닮아 있다.
 아니. 무슨 길이 이 따위야. 커브가 이렇게 급하니 사고를 칠 수밖에 있나. 산을 깎고 계곡을 메우고서라도 길을 곧게 내야지……
 정도는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리며 불평불만을 터트렸다.
 이 사람아. 그래서 여기다가 위험표지판을 세워놓은 거 아닌가. 속도를 줄이고 안전운전을 하라고. 당신이 안전표시판을 무시한 결과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이상하게도 사람은 없다.
 누구지? 아주 귀에 익은 목소리인데.
 차의 보닛은 보기 흉하게 찌그러들어 있고 표지판 강철기둥도 엿가락처럼 구부러들어 있다.
 정도는 교통경찰에 알리려고 휴대폰을 꺼냈다. 내일이면 이곳의 상황은 원상복구가 될 것이다. 아니. 표지판은 더 견고하게 세워질 것이며 사고다발구간으로 지정되어 특별히 가드레일이나 거울 같은 것이 추가 설치될 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 길은 원래의 길이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길이 될 것이다.
 물론 그런다고 부주의운전, 불법운전, 음주운전, 난폭운전과 폭설, 폭우, 낙석 등 환경변화에 의한 교통사고가 근절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만큼 이 길의 안전시설도 보강될 것이 틀림없다.
 윤정은 인생길은 한번 가면 돌아올 수 없다고 하지만 내 뒤를 이어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갈 것이기 때문에 안전표지판은 내가 죽은 다음에도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나의 이번 사고도 뒷사람의 안전운행에 도움이 되는 하나의 경고표지판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아버지, 윤정의 외할아버지, 은미라, 준범이, 미경이도……
 정도定道를 만들어가는 교통안전표지판으로! 
 
 
                                                              -전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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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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