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에 해당되는 글 79건

  1. 2014.06.14 하성란/풀 by 아데라 1

하성란/풀

문학/소설문학 2014. 6. 14. 21:07


하성란



여자는 저 아래 펼쳐지는 텅 빈 놀이터의 흰 모래밭을 보며 서있다. 미끄럼틀의 미끄럼대와 그 그림자는 시계의 시침과 분침처럼 90도 각도로 벌어져있다. 해가 서서히 건물 측면을 지나 옥상 한가운데로 올라오면서 미끄럼대와 그림자는 막 아홉시 십 분을 지난다. 여자는 아까부터 창가 에어컨 환기구에 반쯤 엉덩이를 기댄 채 건물과 건물이 놀이터 위에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본다. 건물과 옆 건물의 그림자가 교차하듯 떨어지는 그 틈새에 케이크 조각 같은 양지가 있다. 미끄럼틀은 그 작은 양지 속에 서있다. 미끄럼대의 양철판이 눈부시다. 놀이터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키 낮은 낡은 양옥들이 줄지어 서있다. 건물들 쪽으로 뚫린 창마다 커튼이 쳐져있다. 건물 꼭대기 첨탑의 그림자가 놀이터를 넘어 길 밖으로 늘어진다. 뾰족한 첨탑 그림자가 양옥의 옥상에 반쯤 걸친다. 옥상 옥탑의 문이 조금 열려있다. 검은 잡종견 한 마리가 옥상으로 올라온다. 그 뒤를 얼룩무늬의 새끼가 뒤따른다. 검정개는 옥상 한편에 놓인 장독 사이를 돌며 가끔 하늘을 향해 컹 짖어댄다. 미로 같은 장독 사이를 허둥대며 새끼가 어미를 쫓는다. 빨랫줄에 걸린 빨래 하나가 바람을 안고 날아다닌다.

여자의 시선이 반원을 그리며 미끄럼틀의 응달로 돌아오려는 찰라, 여자가 서있는 맞은편으로 낡은 이층 벽돌집 베란다가 눈에 들어온다. 일층은 가게로 개조해 분식을 파는 집이다. 벽돌집 뒤에 얼마 전까지 서있던 양옥 한 채는 어느새 헐렸는지 움푹 파인 검은 구덩이에 굵은 관정봉이 박혀있다. 관정봉이 육중한 몸을 들어 땅을 내리칠 때면 여자가 서있는 바로 앞의 유리창이 파르르 떨린다. 한 사내가 베란다에 나와 서성거리고 있다. 고층건물의 그림자에 베란다는 그늘져있다. 베란다 가장자리를 따라 키가 작은 화분들이 납작 땅에 붙어 놓여있다. 파란색 물통을 쥔 사내의 하얀 손목이 후들거린다. 화분에 물을 주다 말고 베란다 턱에 걸터앉는다. 사내의 한쪽 다리가 기역자로 꺾인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피워 문다. 베란다 밖으로 드러난 사내의 상반신, 방수처리가 된 번들거리는 트레이닝복 속으로 언뜻 푸른 정맥 같은 줄무늬 러닝셔츠가 비친다. 이층 벽돌집 지붕을 들썩이며 그 뒤로 쇠기둥이 땅을 다지고 있다. 사내는 담배를 비벼 끄고 화분들 앞의 공간에 엎드린다. 하나 둘 셋. 사내는 팔굽혀펴기를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굵은 쇠봉이 땅을 칠 때마다 두 팔을 굽히고 상체 무게를 싣는다. 관정봉 너머 지하철의 복복선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공사를 알리는 노란색 칸막이들이 도로 일차선 안까지 들어와 세워져있다. 안전모를 쓴 사내 하나가 붉은 깃발을 들고 흔들어댄다. 일차선으로 좁혀지는 도로에서 차들이 얽혀 꼼짝도 하지 않는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하나둘 사람들이 빠져나오면서 여자의 등 뒤로 사무실 안은 다시 소란스러워진다. 책상에서 의자를 빼내면서 바퀴가 바닥을 끌리는 소리, 서랍을 여닫는 소리, 슬리퍼 소리가 요란하다. 여자는 여전히 에어컨 환기구에 엉덩이를 기댄 채 얼굴만 창에서 돌린다. 지각으로 편집부 부서 회의에 들어가지 못한 미스터박이 얼굴을 처박고 들여다보던 ‘환상의 매직 아이3’이라는 책에서 슬그머니 눈을 뗀다. 볼펜 끝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부스스한 채 회의실 밖으로 나온 정차장은 자리로 가다 말고 담배를 꺼내 문다. 옆구리에는 ‘웨딩케이크’ 5월호 기획안이라고 쓰인 노란 파일이 끼어있다. 여자는 유리창을 떠나 자기 자리로 돌아온다. 풀이며 가위, 로터링펜과 인화지 조각들로 여자의 책상은 어지럽다. 어젯밤 퇴근하면서 놓고 간 그대로다. 벌써 일주일 넘게 야근을 하고 있다. 편집부에서 쓴 기사들이 마감 날짜를 훨씬 넘기고도 자꾸 결재가 나지 않아 한번에 일이 몰린 것이다. 의자에 앉으려는데 여자의 책상 위로 원고더미가 풀썩 떨어진다. 그 바람에 잘라놓은 작은 쪽자 종이들이 서류 몇 장과 함께 바닥에 날린다. 여자는 책상 밑으로 고개를 수그리고 쪽자들을 줍는다. 책상다리 밑으로 미스 정의 구두가 보인다. 바닥에 주저앉아 놀려다보니 미스 정이 원고더미를 쏘아보며 서있다. 여자는 미스 정의 구두 한 짝을 손으로 들어 그 밑에서 깨알 같은 쪽자 하나를 들어올린다. 혼전 순결? 그런 건 물 건너간지 이미 오래라구. 요새 하룻밤 엔조이 상대 어쩌구저쩌구 하는데, 누가 그런 것에 흥미를 갖겠어? 결혼식 날짜를 보름 앞두고 있는 미스 정의 태속에는 벌써 아기가 들어서있다. 원고나 제때제때 넘겨줘. 여자는 책상 밑에 얼굴을 처박은 채 손을 뻗어 마지막 쪽자를 주우며 대꾸한다. 그때 여자의 책상에 놓은 전화에서 벨이 울린다. 미스 정이 볼멘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자기 전화야. 여자는 급히 상체를 일으키려다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박는다. 한 손을 뻗어 미스 정이 건네주는 송수화기를 받으며 여자는 불현듯 어제 그가 준 꽃다발을 떠올린다. 송수화기 속에서 은행의 순서를 알리는 벨 소리가 울린다. 여보세요. 그는 송수화기 자기 창구에 있는 책상에 잠깐 내려놓은 모양이다. 아뇨. 지급창구로 가십시오. 저쪽입니다. 조금 거리를 두고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젯밤 야근을 마치고 빌딩 로비를 지나는데 불쑥 무언가 여자의 앞가슴에 안겨진다. 장미꽃다발이다. 아침 일찍 사두었는지 잎사귀는 벌써 말라 둥그렇게 말리고 있다. 여자는 수화기를 손가락으로 톡톡 친다. 여자의 손가락 끝은 허물처럼 살갗이 벗겨져 쪼글쪼글하다. 남자는 지폐다발을 풀어 돈 세는 기계에 집어넣는다. 지폐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여태까지 너 같은 밋밋한 여잔 처음이야. 별안간 그의 목소리가 여자의 귓속에 쏟아진다. 여자의 얼굴 표정을 살피던 미스 정이 원고뭉치를 들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어제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서 보니까 이미 네 손엔 꽃다발이 없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남자는 쏘아붙인다. 그럼 진즉에 거기서 말해줬으면. 여자는 말끝을 얼버무린다. 난 원래 지독한 건망증. 여자의 말을 자르듯 전화 저편으로 낯선 여자의 음성이 끼어든다. 이건 어떻게 처리하죠. 잠깐만 봐주세요. 금방 전화기 속은 깜깜해진다. 그는 수화기를 손바닥으로 누른 채 곁의 어떤 여자와 이야기한다. 그는 여자와 같은 건물 1층 K은행 출장소에 있다.1층 출장소에 선 그의 머리를 밟듯 여자는 9층 사무실에 서있다. 여자의 발밑으로 순식간에 수많은 시멘트 바닥들이 겹겹으로 둘 사이를 막는다. 답답하다. 수화기를 손에 꼭 쥔 채 여자의 생각은 사무실 문을 박차고 복도로 뛰어나간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엘리베이터는 22층에 머물러있다. 복도를 서성거리다가 여자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8층,7층, 6층. 붉은 문자판을 초조하게 쳐다본다. 건망증? 은행의 벨소리가 튕기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자의 생각은 엘리베이터 5층에 갇힌다. 꼭 그런 식으로 돌려 나한테 할 얘기라도 있는 모양인데. 만나서 얘기해요. 대답 대신 수화기가 거칠게 내려지며 뚜 신호음이 들린다. 여자의 책상 맞은편 편집부 칸막이에서 미스 정이 얼굴만 내밀고 무슨 일이냐며 입을 뻐끔 거린다. 여자는 바퀴가 달린 자신의 의자를 밀어 제도판으로 다가 간다. 제도판 위에는 여자가 어제 붙이다만 대지 용지가 펼쳐져있다. 대지 용지 위에 지우갯밥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손바닥으로 밀어 제도판 아래로 떨어뜨린다. 연도별 신혼여행지 조사. 여자가 붙여놓은 색색의 그래프 막대기 사이로 지우갯밥이 낀다. 대지 용지를 얼굴께로 들어올려 후 불면서 여자는 현기증을 느낀다. 여자의 자리 앞 정면에 걸린 ‘웨딩케이크’라는 회사 간판의 푸른색 로고가 불쑥 튀어나온다. 여자는 제도판 위에 팔꿈치를 괴고 미간을 누른다. 눈을 뜨니 색색의 그래프 가장자리가 부옇게 흐려지면서 한데로 합쳐진다. 좀처럼 현기증은 가시지 않는다. 점심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일은 무슨 일이야? 미스 정이 여자의 어깨를 툭 친다. 부연 사무실 안의 낯익은 사물들이 하나둘 선명히 드러나면서 여자의 목덜미로 식은땀이 흐른다. 미스터 박은 책상에서 멀찍이 떨어져 사팔눈을 해가지고 여전히 ‘환상의 매직아이 3’이라는 책을 보고 있다. 숨은그림찾기야? 근처를 지나치던 사람들이 미스터 박의 책상으로 몰려들어 얼굴을 가까이 했다가 멀리했다 하면서 책을 들여다본다. 도대체 어떻게 보이는 거야. 눈에 힘을 빼. 어떻게? 이렇게? 정말 이 속에서 삼차원적인 입체영상이 나타난단 말이지? 희한한데. 쉬운 것부터 시작해 봐. 미스터 박은 서랍을 열어 ‘환상의 매직아이’ 1권을 꺼낸다. 정 차장이 바지춤에 손을 낀 채 미스터 박을 부른다. 어정쩡하게 일어나 정 차장에게 다가가는 미스터 박을 보며 여자는 미스 정을 따라 복도로 나온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앞에서 12층 자료실로 들어가는 미스 정의 엉덩이는 어느새 조금 더 펑퍼짐해진 것 같다. 비로드 털이 눌린 엉덩이는 다른 곳보다 허옇게 닳아 있다. 미스 정이 일간신문을 뒤적거려 기사를 찾아 복사를 하고 있는 사이 여자는 미스 정이 적어준 메모지를 들고 책을 찾기 위해 자료실 안쪽의 도서실로 들어선다. 가나다순으로 꽂힌 책들을 눈으로 훑으며 책꽂이 사이를 여러 번 돌아 따라가다가 여자는 어느새 제일 안쪽까지 들어와 버린다. 햇빛이 들지 않는 책꽂이와 책꽂이 사이 먼지가 하얗게 내려앉아있다. 책장이 누렇게 바랜, 간행된 지 이십 년이 훨씬 지난 문고판들이 먼지를 안은 채 꽂혀있다. 누군가 책을 빼낸 손자국이 먼지 위에 스쳐있고 다른 곳보다 얇은 먼지 층이 그 위에 다시 내려앉았다. 창은 두꺼운 휘장이 늘어져있고 그 앞을 책꽂이가 막아서 있다. 꽂힌 책 위의 작은 틈으로 손을 집어넣으니 겨우 휘장자락에 손이 닿는다. 여자의 팔꿈치에 금방 하얀 먼지가 묻는다. 휘장을 조금 걷어낸다. 휘장 사이로 들어온 햇빛을 따라 가느다란 먼지 띠가 생긴다. 소용돌이치는 먼지 띠 사이로 무언가 실낱같은 것이 반짝인다. 거미줄이다. 실낱을 쫓아 여자는 책꽂이 맨 위를 쳐다본다. 책꽂이와 천장 사이에 걸쳐 거미줄이 쳐져있다. 거미줄은 빈 채다. 여자는 다리를 오므리고 반대편 책꽂이에 걸터앉는다. 여자의 눈 가득 책등에 인쇄된 책의 제목들이 들어온다. 여자가 읽었던 책들도 간간이 눈에 띈다. 그러다가 여자는 책꽂이 맨 위 구석에서 그 책을 발견한다. ‘천일야화’라는 책 제목 밑에 작은 활자로 ‘에버그린8’이라고 적혀있다. 전집에서 벗어나와 그 책만 다른 단행본들 사이에 끼어있다. 누군가 읽으려고 빼냈다가 제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끼워놓은 것 같다. 여자는 발돋움을 해서 가까스로 책을 빼낸다. 장정에 잎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금박으로 찍혀있다. 금박은 거의 벗겨지고 군데군데 자국만 남아있다. 여자는 책을 멀찍이 들고 책장을 넘긴다. 표지에 붙어 덜렁 12페이지가 펼쳐진다. 세로 활자가 빽빽하다. 샤프리 야르 앞에서 세헤라자데의 긴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녀의 양기는 늘 샤프리 야르이 호기심이 절정에 달한 그때 끝이 난다. 책장밑에 도장처럼 찍힌 침 자국은 다른 곳보다 도드라져 누렇게 변색되고 좀먹은 종잇장은 마른 나뭇잎처럼 버석거린다. 책을 든 채 여자는 책꽂이를 천정부터 훑는다. 책꽂이 맨 밑 칸에 진녹색 장정의 에버그린 전집들이 꽂혀있다. 전집 틈새를 가까스로 벌려 7권과 9권 사이에 그 책을 끼운다. 외풍이 심한 천장 낮은 다락방에 누우면 여자의 바로 눈 위로 이 전집의 카탈로그가 붙어있다. 아버지가 며칠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자, 쓸데없어진 책 카탈로그를 어머니는 하루 종일 다락방에 발랐다. 매일 저녁마다 여자는 허리를 굽히고 온통 글씨와 그림투성이인 다락방으로 들어와 눕는다. 코끝가지 이불을 덮고 누우면 여자의 얼굴위로 인쇄된 환자들이 별들처럼 쏟아진다. 세계의 라이브러리, 에버그린 전집, 누구를 위하여 종은, 모비딕, 실낙원, 천일야화, 전 세계를 감동의 소용돌이로, 각권 450원. 천장을 가득 메운 총천연색의 카탈로그에 박힌 글씨를 천장 저 끝에서부터 차례로 읽어오다 보면 어느새 두 눈은 무거워진다. ‘천일야화’라는 큰 글자 밑에는 머리에 터번을 감은 어린 소년이 낙타의 등에 올라앉아 사막을 건너고 있다. 사막의 낮은 구릉 위로 아라비아의 달이 떠 있다.

목안이 깔끄러워 여자는 목울대를 손으로 어루만진다. 미스 정이 부탁한 책을 다시 들고 일어서면서 여자는 밭은 기침을 한다. 책꽂이 사이사이를 돌면서 몇 권의 책을 새로 빼어든다. 마지막 한 권을 찾기 위해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훑는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다시 되돌아가 차례로 훑어오지만 찾을 수가 없다. 번번이 여자의 생각은 책 등의 활자에서 떠나 어젯밤 자신이 어딘가에 두고 왔을 꽃다발을 찾는다. 좁은 계단을 올라 들어섰던 칸막이가 쳐진 어두운 카페 안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카페에서 나와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했던 행동들을 그대로 떠올리다보면 어느새 여자는 다시 어두운 카페 모퉁이 탁자에 앉아있다. 어디에 두고 온 것일까? 탁자 모서리에 새겨진 ‘12’라는 번호 팻말까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정작 꽃다발에 이르면 생각은 흐릿해진다. 여자는 나머지 한 권을 찾지 못한 채 자료실로 나온다. 웬 먼지야? 복사물을 정리하던 미스 정이 여자를 흘낏 올려다본다. 여자의 팔꿈치와 치맛자락에는 흰 먼지가 묻어있다.

여자는 미스 정과 대출한 책을 반씩 나눠들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층수 숫자판 앞에서 하마터면 1을 누를 뻔하다가 다시 고쳐 0를 누른다. 건물 로비로 나가 왼편으로 돌면 남자가 일하고 있는 K은행출장소의 자동문이 보인다. 그는 은행 제일 안쪽 유리박스 안에 앉아있다. 타원형으로 뚫린 구멍을 통해 돈을 찾는 사람들에게 돈을 건넨다. 그가 앉은 자리 뒤편으로 스테인리스 강철로 덧문을 해단 금고 출입구가 있다. 한달에 한 번씩 키 당번을 맡는 날이면 출근을 일찍 해서 그는 덧문을 열고 배의 조타수처럼 생긴 손잡이를 돌려 금고문을 연다. 여자는 은행에 들를 때마다 그의 뒤에 있는 금고가 푸줏간의 냉동 창고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복도 정면에 붙은 지난 4월호 ‘웨딩케이크’의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다. 복도를 지나 사무실로 들어서려는데 여자의 곁을 웨딩드레스를 허벅지까지 들어올린 모델이 스튜디오 쪽으로 뛰어간다. 여자보다 머리가 두어 개는 더 클 듯한 모델의 어깨에 부딪히며 여자가 들고 있던 책 꾸러미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떨어진 책을 주워 팔위에 얹다가 여자는 낡은 표지의, 눈에 익은 책을 발견한다. ‘천일야화.’ 분명 전집이 있는 자리를 찾아 7번 다음 자리의 칸을 벌려 꽂아두었었다. 조금 전의 그 행동이 여자의 머릿속에서 슬라이드처럼 분명한데 어느새 다른 책들에 묻어왔을까. 여자는 그 책을 들어올려 자신의 팔위에 얹힌 책 더미 위에 가까스로 올려놓는다. 벌써 점심식사를 하러 나갔는지 사무실 안은 텅 비어있다. 가지고 간 책 꾸러미를 조심스럽게 미스 정의 책상 위에 내려놓는데 미스 정이 손가락으로 그 책 끝을 들어 여자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인다. 때아니게 무슨 ‘천일야화’야? 여유 있어 좋다. 여자는 그 책을 건네받아 자리로 돌아온다.

책 카탈로그가 가득 든 무거운 가방을 며칠 들고 다니던 아버지는 오후 늦게까지 방안에 배를 깔고 누워있다. 출판사에 나가는 동안 아버지는 한 권의 책도 팔지 못했다. 부엌에서는 도마질 소리며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노냥 우리가 요 모양으로 살라는 법 있냐? 아니 사내라는 위인이 대학씩이나 나와 빈둥거릴라치면 그 알량한 대학 안 나오는 게 낫다. 그 대학, 다 소용없다. 사내는 그저 힘이 제일이다, 힘! 저녁 밥상에 둘러앉아서도 어머니의 수저질은 소란하다. 옆집 야금회사 나가는 근철이 아버지 말요. 벌이가 썩 괜찮은 모양입디다. 보너스도 있고, 여자는 야금회사 정문 옆 공고판에 붙은 구인광고를 떠올린다. 아버지는 대꾸 없이 숟가락으로 국 대접을 휘젓고 있다. 새끼들은 쑥쑥 커가는 데 빈둥거리면 어쩔 거요? 숟가락을 밥상에 내려놓으며 아버지는 뒤돌아 앉는다. 그 알량한 자존심은, 자존심이 어디 밥 먹여…. 순식간에 밥상이 뒤집어진다. 앉은 여자의 바지 위로 벌건 김칫국물이 끼얹어지며 바닥으로 그릇들이 나뒹군다. 막내가 영문을 모른 채 움찔 놀라다가 밥알이 잔뜩 든 입을 벌리고 울기 시작한다. 입가로 씹다 만 콩나물이 한 가닥 대롱거린다. 내팽겨쳐진 그릇들을 발로 차대며 아버지는 씩씩댄다. 그 다리 한쪽을 둘째가 와락 달려들어 매달린다. 아버지가 다리를 흔들러 밀쳐내면 방 한구석에 나동그라졌다가 다시 달려들어 매달린다.

회전문을 밀치고 건물 밖으로 나오면서 여자는 은행 쪽을 흘낏거린다. 건물 모퉁이를 돌아 은행의 일방시(一方視) 통유리창을 지난다. 어슴푸레한 유리창 너머 남자의 자리는 비어있다. 사서함에서 우편물을 들고 뒤따라 나오던 미스 정이 은행 유리창 가까이 얼굴을 갖다댄다. 벌써 나갔나보다. 없어. 지하철 공사로 정체된 차들이 건물 앞에까지 줄지어 서서 클랙슨을 눌러댄다. 여자와 미스 정은 놀이터 모래밭을 가로지른다. 날씨 좋다! 미스 정은 기지개를 켜며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발이 퉁퉁 붓는다며 슬리퍼 차림으로 나온 미스 정의 발은 온통 모래알투성이다. 여자는 미스 정을 앞서 미끄럼틀 곁을 지난다. 미끄럼판의 응달 속에서 순간 무언가 반짝이며 흔들린다.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미끄럼판 밑을 들여다본다. 볕 한점 들지 않는 축축한 바닥 위에 작은 풀 한 포기가 돋아 있다. 아이들이 먹다 버린 아이스바 껍질에서 흘러나온 붉은 식염이 한쪽 잎사귀에 진득거리며 묻어있다. 민들레야? 뒤따라온 미스 정이 미끄럼판 밑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묻는다. 여자는 대답 대신 풀 잎사귀를 손끝으로 만져본다. 톱니가 나있는 이파리 위에 솜털처럼 하얀 털이 돋아있다. 속이 드러난 여자의 손끝에 까슬까슬한 솜털이 만져진다.

여자는 미스 정을 따라 놀이터를 빠져나온다. 놀이터 화단 턱에 발 한쪽을 올려놓고 미스 정은 슬리퍼에 묻은 모래알을 털어낸다. 놀이터 앞 골목을 따라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놀이터를 기점으로 여자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 쪽으로는 이미 몇 개의 고층건물이 지어졌고 또 다른 건물이 공사 중이지만 그 반대쪽은 아직 낡은 양옥들이 남아있다. 지하철이 뚫리고 재개발이 될 때를 기다리며 가정집을 개조한 음식점들이다. 가게를 고치지 않아 간판조차 없는 음식점을 기웃거리는 여자는 별로 식욕이 없다. 여자의 앞으로 가게 문이 열리며 누군가 길 밖으로 물을 뿌린다. 물을 피해 한 걸음 물러서며 미스 정이 소리 지른다. 베란다 화분에 물을 주던 그 사내다. 사내는 빈 양동이를 들고 가게 안의 주방 쪽으로 걸어간다. 상체만 유난히 발달한 사내의 역삼각형 몸체의 가는 한쪽 다리는 한 박자마다 힘없이 기역자로 꺾인다. 그 때문인지 건강한 한쪽 다리는 마치 땅에 호치키스를 박은 모양이다. 머리카락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머리에는 하얀 두건을 둘렀다. 뽀빠이 같은데. 미스 정이 웃는다. 분식집 유리창 너머로 여자는 사내의 뒤를 쫓다 우연히 가게 한쪽에 앉아있는 그를 발견한다. 긴 나무의자 한쪽 끝에 걸터앉아 그는 같이 온 은행의 동료들이 소곤대는 이야기에서 벗어나 옆으로 고개를 튼 채 탁자에 턱을 괴고 있다. 와이셔츠 팔을 걷은 남자의 손가락에는 나무 젓가락이 꽂혀있다. 그의 머리 위로 음식 찌꺼기가 튄 주류회사의 광고용 달력이 걸려있다. 그 속에서 비키니를 입을 여자가 거리를 향해 터질 듯 웃고 있다. 같이 가던 미스 정이 저만큼 서서 손나팔을 하고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 반쯤 열린 분식점 문틈으로 그 소리가 들렸는 지 남자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황급히 돌아서다가 여자는 깨진 보도블록 사이에 발이 낀다. 넘어지면서 땅을 짚은 손바닥이 뾰족한 무언가에 찔린다. 통증을 느끼는 동시에 순간 여자의 머릿속에서 수동타자기처럼 활자체가 찍힌다. 왜, 나, 는, 꽃, 을, 두, 고, 나, 왔, 을, 까. 여자는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검지 손가락 끝이 벌어지며 피가 배어나온다. 미스 정이 놀라 뛰어온다. 검지 손가락에서 배어나온 피가 손바닥 손금을 타고 손가운데로 고인다. 어머, 피가 나네? 여자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미스 정을 올려다보며 묻는다. 어디에 두고 나홨을까? 무슨 소리니? 미스 정이 여자를 일으켜 세운다. 여자는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지독한 허기가 밀려오면서도 당장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

검지 손가락에 동여맨 일회용 밴드에 걸려 여자는 몇 번이나 인화지를 뗐다 붙였다 한다. 손가락 끝에 자꾸 풀이 묻는다. 부록 혼수품 싸게 사는 곳 12가게 탐방. 이번 호 ‘웨딩케이크’에 들어갈 반쪽 페이지짜리 부록이다. 독자들이 가게를 쉽게 찾아가도록 가게마다 약도가 있다. 여자는 약도를 올 뒷면에 풀을 뿌린다. 대지 위에 제자리를 찾아 약도를 붙이고 머리글자를 하나씩 오려 물이 흐르는 모양으로 붙여 나간다. 부록 혼수품 싸게 사는 곳 12가게. ‘탐’자를 붙이려고 보니 책상 위에 어젯밤 오려두었다. ‘탐’자가 보이지 않는다. 책갈피 사이를 뒤적거리고 책상 밑을 살펴보지만 찾을 수가 없다. 오전에 미스 정이 책상 위에 원고뭉치를 내던질 때 어디론가 날아간 것 같다. 옷을 털고 신발을 들어 밑창을 살펴보지만 ‘탐’자는 보이지 않는다. 여자는 책상에서 일어나 책상에서 1미터 원 안을 앉은걸음으로 걸으며 손바닥으로 바닥을 더듬는다. 바닥은 깨끗하다. 오가는 누군가의 신발 끝에 묻어 나갔을 수도 있다. 뭘 그렇게 찾아? 미스 정이 팔짱을 낀 채 여자를 내려다보고 서있다. ‘탐’자가 없어졌어. 여자는 여전히 바닥을 손바닥으로 짚은 채 미스 정을 올려다본다. 미스 정이 바닥에 구부리고 앉아 책상 모서리 틈새를 들여다본다. 아무리 찾아도 없어. 미스 정은 손바닥을 털며 일어선다. 얼굴에 피가 모려 씩씩댄다. 아무튼 ‘탐’자가 문제라니까. 취재로 밖에 나가는 지 미스 정은 핸드백을 메고 있다. 이따 다시 찾아보자. 미스 정은 문 쪽으로 몸을 돌리다 생각난 듯 한마다 툭 던지다. 앵초꽃인 것 같아. 여자는 일어서며 바닥을 다시 한번 훑어본다. 아까 우리가 봤던 풀 말야. 그제야 여자는 미끄럼틀 응당 속의 풀을 떠올린다. 왜 작년 봄이던가, 자기랑 나랑 가평 근처를 지난 적이 있잖아. 오월 토요일 오후였을 거다. 미스 정과 퇴근을 하다 건물 로비에서 은행 밖으로 나오는 그를 만난다. 그를 따라 그의 동료가 모는 차를 얻어 타고 근교로 나간다. 토요일인데도 다른 날보다 길이 막히지 않는다. 차는 속력을 낸다. 오랜만에 여자는 가뿐하다. 청평댐을 지나다 차를 멈추고 근처의 횟집으로 들어간다. 가게 마당의 평상에 앉아 향어회를 먹는다. 평상 아래로 댐이 펼쳐져있다. 미스 정의 우스갯소리에 일행은 소리 내어 웃는다. 술을 마신 그가 노래를 부른다. 돌아오는 길은 자꾸 차가 막힌다. 잠깐 바람이나 쐬자며 그가 말한다. 차는 도로에서 벗어나 비포장 길을 달린다. 차가 멈춘 곳은 가평 근처 야트막한 야산이다. 여자와 미스 정은 야산을 돌아 논두렁 아래로 내려간다. 치마를 들치고 나란히 앉는다. 논두렁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자전거 체인 자국이 인가 쪽으로 사라진다. 오줌 줄기가 논두렁을 타고 무논 안으로 숨어든다. 치마를 치키며 엉거주춤 일어서려는데 여자의 신발 앞에 보라색 작은 꽃이 땅바닥에 잎사귀를 기댄 채 피어있다. 주위를 살펴보니 살찐 개쑥이 이곳저곳에 무더기로 퍼져 있다. 그 꽃은 무리도 없이 외따로 꽃을 피우고 있다. 여자와 미스 정은 꽃을 들여다본다. 야산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울려 미스 정과 여자는 황급히 논두렁을 올라온다.

여자는 유리창 밖으로 눈길을 준다. 관정봉 박는 소리가 들린다. 그럼 꽃이 필까? 복사물을 집어 핸드백에 넣으며 사무실 문을 나서는 미스 정의 뒤에 대고 다급히 묻는다. 대답 대신 미스 정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여자는 서랍을 열어 쪽자 박스를 찾는다. 서랍 밑바닥에서 낡은 과자상자를 꺼낸다. 이곳 잡지사로 오기 전 다른 직장에서부터 가지고 온 상자다. 상자 위에 영국 병정과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가 나란히 서있다. 상자 모서리는 닳아 종이가 부풀어있다. 여러 모양의 크고 작은 글씨들이 상자 가득 들어있다. 잃어버린 글자와 같은 크기의 글자를 찾아 뒤적거린다. 쪽자더미 사이에서 여자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상자에서 사진을 꺼내들자 사진에 붙어있던 쪽자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벚꽃이 꽃보라처럼 떨어지는 속에 아버지가 서있다. 카메라 초점이 흔들리고 인물을 멀리 잡아 아버지의 얼굴은 뚜렷하지 않다. 어느덧 가게가 자리를 잡는 것 같다. 서울 보다 훨씬 봄이 빨리 오는 곳이다. 짤막한 몇 줄의 글을 적어 사진과 함께 보낸 아버지의 편지다. 언제 이 사진이 이곳에 들어와 있었을까. 직장을 옮겨올 때 서랍 밑에 넣어두었던 다른 쪽자용 인화지에 묻어 이 상자 속에 들어간 것 같다. 해마다 봄이면 봄소식으로 Y시의 전경이 뉴스로 보이곤 한다. 어린 동생들 때문에 서울을 뜰 수 없는 어머니를 대신해 여자는 방학 때마다 Y시로 내려온다. Y시로 내려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여자는 줄곧 멀미에 시달렸다. 누렇게 뜬 얼굴로 Y시의 터미널 공중화장실에서 얼굴을 씻었다. 가게에 도착하면 가게 유리창 너머로 작업대 위에서 꽃을 만들고 있는 아버지의 굽은 등이 보인다. 풀이 말라 얼룩진 아버지의 바짓가랑이에는 꽃이파리가 한 장 붙어있다. 아버지가 출판사를 그만두자 어머니는 부업거리라며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왔다. 보따리 안에서 헝겊으로 만든 꽃이파리들이 방안 가득 쏟아졌다. 숙제를 마치고 나면 여자는 동생들과 둘러앉아 헝겊으로 꽃을 만든다. 철사에 꼬인 꽃봉오리가 서로 잘 붙도록 손끝으로 여러 번 만져준다. 손가락에는 본드가 자꾸 달라붙는다. 말라붙은 본드는 잘 떨어지지 않았다. 섣불리 떼어내다가는 속살까지 같이 묻어나왔다. 막내는 엉덩이에 꽃잎으로 붙인 채 뛰어다녀 꽃잎으로 마루까지 묻어나와 날아다닌다. 밤늦게 며칠 돌아오지 않았던 아버지가 돌아왔다. 시큼한 냄새가 나는 아버지의 바지는 흙이 묻고 구겨져있다. 헝겊 꽃잎에서 떨어진 실밥이 아버지가 누운 아랫목에도 날아가 붙었다. 제 밥벌이는 제가 해야지. 어머니는 꾀를 부리는 여자네들을 다그쳤다. 곁눈질만 하던 아버지도 어느새 끼어들었다. 어머니는 꽃공장을 부지런히 드나들며 공장 돌아가는 것을 눈치로 익혔다. 그리고는 조그만 가게를 Y시에 열었다. 아버지가 그곳으로 내려갔다. 새벽이 되면 어머니는 천 시장으로 염료 시장으로 달려가곤 한다. 여자는 어머니가 겉옷에 묻혀온 찬 기운에 선뜻해져 잠에서 깨어난다. 마당 한구석, 수챗구멍 위에 만들어 올린 선반에는 원색 물감이 든 작은 병들이 나란히 놓여있다. 수챗구멍과 함께 어머니와 여자의 손톱 새에는 항상 불그레한 염료가 배었다. 희석과 배합에 따라 여러 색깔의 꽃이 되었다. 물들인 천에 꽃 모양의 틀을 놓고 꽃잎을 찍어내고 그 꽃잎에 한 장 한 장 열을 가하면 입체감 있는 꽃잎으로 살아났다. 밤늦게까지 형광등 아래에서 철사에 헝겊 잎을 꿰어 꽃을 만든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본드가 잔뜩 말라붙은 손을 뜨거운 물이 든 대야에 담그고 본드가 불기를 기다린다. 작은 대야 속에 담긴 손 여섯 개가 물장난을 친다. Y시에 내려와 여자는 아버지를 도와 꽃을 만들거나 청소를 하거나 꽃을 납품한 곳에서 수금을 하기도 한다.

사진 여기저기에 쪽자 조각들이 달라붙어있다. 입으로 불어보고 사진을 흔들어본다. 쪽자 조각에 풀 기운이 남아있었는지 잘 떨어지지 않는다. 아버지 어깨쯤에 여전히 쪽자 하나가 달라붙어있다. 여자는 손에 침을 묻혀 손톱 끝으로 조심스럽게 긁는다. 쪽자가 조금씩 떼어지면서 덜렁 아버지의 어깨까지 묻어나온다. 아버지의 어깨에 조그만 구멍이 뚫린다. 여자는 사진을 들고 구멍을 들여다본다.

그래도 이 제과점이 이 시에서 제일로 알아주는 데다.

아버지는 신문지 여백에 파란 풍차라는 제과점의 약도를 그리다 말고 여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여자는 여백을 넘어 빽빽하게 찍힌 활자로 넘어가는 낯선 길보다 볼펜을 쥔 아버지의 손을 내려다본다. 길고 하얀 손등 위로 힘줄이 퍼렇게 돋아있다. 손가락 끝은 본드가 말라붙어 각질처럼 허옇게 벗겨지고 있다. 파란 풍차. 문을 열자 작은 종소리가 가볍게 퉁긴다. 후텁지근한 실내공기 속에 달착지근한 과자 냄새가 여자의 코를 헤집는다. 아, 그 학생. 아버지가 여러 번 전화했었어요. 단정한 서울 말씨의 주인여자가 걱정스러운 듯 묻는다. 길을 잃었다고 미처 얘기할 수가 없다. 진열대 안에 켜놓은 촉수 높은 형광등 불빛이 검게 사그라진다. 여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주저앉는다. 주위의 탁자에 앉아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림자처럼 부옇게 일어나 여자의 주위로 모여든다. 어마! 저 얼굴 좀 봐! 누군가 지르는 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린다. 여자는 주방 한구석 밀가루 부대와 계란판이 수북이 쌓인 작은 방에서 눈을 뜬다. 눈을 떴을 때 여자의 얼굴을 여러 사람이 들여다보고 있다. 사람들 어깨너머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진열대로 옮겨지는 삼단 케이크가 불쑥 들어온다. 주방 한편에서 케이크들은 여러 가지 색깔의 크림으로 조금씩 화려해지고 있다. 그 치장이 너무 화려해서 여자는 자신이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주위에서 사투리처럼 웅성거렸던 것이 그것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마지막 단장으로 여자네 집에서 만든 헝겊꽃이 케이크 위에 꽂힌다. 괜찮아요? 얼마나 놀랐는지. 여자는 주인여자가 건네주는 몇 장의 지폐를 꽃값으로 받아 주머니 안쪽에 접어 넣는다. 벌써 날은 어두워져있다. 올려다보니 커다란 간판을 가득 차지한 풍차가 파란 네온빛을 뿜으며 돌아가고 있다.

여자는 수첩을 펼쳐 그 사이에 사진을 끼워 넣는다. 편지 끝에 아버지는 가족 모두가 같이 꽃구경을 하자고 썼다.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여자는 방학 때마다 Y시로 내려갔지만 정작 벚꽃이 흐드러진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쪽자 상자 안에서도 20급 중고딕의 ‘탐’자는 찾을 수 없다. 내일 새로 인화를 해야 할 것 같다. 빈 자리에 연필로 동그라미 표시를 해두고 다른 글자부터 붙여 나간다. 부,록,혼,수,품,싸,게,사,는,곳,12,가,게. 여자는 한 어절 쉬고 끝으로 ‘방’자를 소리 낸다. ‘방’자는 한 칸을 건너뛰고 붙여져 있다. 분식점 사내의 기역자로 꺾어지는 걸음걸이가 생각난다. 풀 묻은 여자의 손끝은 어느새 먼지가 묻어 검게 변해있다. 약도를 붙이고 그 밑에 교통편으로 버스 번호까지 붙이고 나서 여자는 잠깐 허리를 편다. 취재를 마치고 들어왔는지 미스 정이 전화통을 붙들고 앉아 통화를 하고 있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복도를 나가다가 문득 미스 정의 책상을 보니 미스터 박이 보던 ‘환상의 매직 아니’1권이 놓여있다. ‘환상의 매직 아이’라는 책은 사무실 안의 사람들 사이를 옮겨 다니고 있는 모양이다. 펼쳐진 책 한 면 가득 모래알 같은 작은 점들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여자는 책을 들어 얼굴에 바짝 들이댄다. 순간 모래알들이 부옇게 멀어진다. 눈을 이렇게 사팔처럼 해봐. 이건 초보자용이라고. 미스 정은 통화를 하다 말고 수화기를 손바닥으로 막은 채 여자에게 사팔눈을 해보이며 웃는다. 여자는 미스 정을 따라 눈의 초점을 달리 해보지만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역시 검은 모래알뿐이다. 금세 눈이 충혈된다. 보여? 미스 정이 수화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여자에게로 다가온다. 글쎄. 여자는 책을 멀리했다가 눈 바로 앞까지 밀어온다. 검은 모래알들이 다시 부옇게 멀어지면서 중간중간 잘린 선들이 보이는 것도 같다. 눈의 착시를 이용한 것 같애. 그렇게 눈에 힘을 주지 말고 힘을 빼. 멀리 봐. 가깝게 있지만 아주 먼 곳을 보듯이 미스 정의 말이 늘어진 테이프처럼 웅얼거린다. 미로 같다. 여자는 군데군데 부비트랩이 설치된 미로의 막다른 골목 앞에 서있다.

여자는 Y시의 낯선 거리를 되짚어 가게로 되돌아온다. 상점들의 불빛이 점점 밝아지고 거리의 사람들이 몸을 움츠리고 재게 걷는다. 눈발일까. 축축한 것이 띄엄띄엄 여자의 얼굴과 목덜미로 날아든다. 아버지는 함석으로 만든 문덮개 하나를 막 들어 가게 진열창에 끼우려는 참이다. 문덮개가 바람을 안고 가냘프게 떨린다. 길이 낯설제? 그제야 여자는 약도가 그려진 신문지 조각을 떠올린다. 오버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지만 주머니 안은 허전하다. 여자는 가게 앞에 세워둔 아버지의 짐자전거 옆에 서서 아버지가 마지막 문덮개를 끼우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사람이 간신히 몸을 굽혀 드나들 수 있는 작은 문이 생긴다. 작은 쪽문을 열고 몸을 굽혀 안으로 들어가면서 아버지는 혼잣말처럼 웅얼거린다. 너희는 날 닮지 마라. 진눈깨비는 빗발로 굵어져 내린다. 함석 문 저 뒤에서 멍든 것 같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넘어온다. 이곳은 눈이 안 온 지 8년도 넘었다드라. 여자는 오버 깃을 세우며 몸을 도사린다.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머릿속으로 한 가닥 음률이 떠오른다. 남쪽 따뜻하다고 누가 그랬을까. 슬리퍼를 끄는 아버지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안으로 멀어지며 여자의 머리 위 서울꽃집이라고 쓰인 가게 간판의 불이 꺼진다. 불이 꺼진 가게 안에서 아버지는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다. 러닝셔츠 차림으로 가까스로 팔을 땅에 가져가면 아버지의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여자는 방문 틈으로 아버지를 엿본다. 세엣. 아버지의 구령소리를 떨리는 팔과 같이 끝이 흐늘어진다. 네에에에. 네 개째 팔을 굽히는 찰나 아버지는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는다. 언제부터 아버지는 팔굽혀펴기를 시작한 것일까? 새벽마다 아버지는 여자 몰래 일어나 불 꺼진 가게 안에서 팔굽혀펴기를 한다. 보여? 미스 정이 책 가까이에 얼굴을 들이민다. 어? 보인다. 검은 모래밭이 두개 층으로 나눠진다. 모래밭 같은 중간에 선들이 모이며 볼록하게 어떤 형상이 도드라진다. 여자는 낮게 중얼거린다. 별이야.

아직도 그는 퇴근하지 않고 있다. 여자는 일방시 창문 너머로 은행 안을 들여다본다. 형광등 불빛에 거리보다 훨씬 밝은 은행 안은 전라로 드러난다. 그는 자기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보고 있다. 밖이 어두워 반사된 빛으로 일방시 창문에는 은행 안이 고스란히 거울처럼 비춰질 것이다. 그럼 그는 창에 비친 자기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일까. 미스 정을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와 여자는 은행 비상구 옆에 서있다. 아홉시 반이 넘어서야 마지막으로 은행을 나오며, 그가 은행 문을 닫는다. 여자는 남자의 뒤를 쫓아간다.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성큼성큼 앞서간다. 신호등을 건너 대로로 나오면서 남자와 여자는 인파에 휩싸인다. 오가는 사람들에 몸이 채이면서 여자의 작은 몸은 자꾸 뒤로 처진다. 사람들 사이로 저만큼 보이던 그의 푸른색 양복을 단박에 놓쳐 버린다. 여자는 그제야 그가 키가 작다는 것을 실감한다. 낯익은 그의 뒤통수는 사람들에게 가려 보이지 않는다. 허둥지둥 사람들 사이를 헤집는다. K제화 쇼윈도 앞에 그가 서있다. 쇼윈도의 화려한 불빛에 정작 그의 앞모습은 짙은 그늘이 져있다. 밥이나 먹고 헤어지자. 남자는 휙 돌아선다. 여자는 얼른 뛰어가 남자의 손을 잡는다. 남자의 큰 걸음에 하이힐을 신은 여자는 거의 끌려가듯 한다. 핸드백이 자꾸 어깨에서 미끄러진다.

넌 왜 이렇게 손이 거치냐?

남자는 괜히 퉁명스레 한마디 던진다. 남자는 여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번번이 잊는다. 여자는 더욱더 남자의 손을 꼭 쥔다. 남자의 발걸음 폭은 더욱 커진다. 남자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여자는 발이 아프다. 남자는 밥 한 끼 때우는 것도 그냥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다. 음식점이 즐비한 골목을 누비다가 갔던 길을 되돌아와 지하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간다. 좌석이 꽉 차있다. 종업원이 다가와 지하부터 3층까지 모두 같은 곳이니 1층이나 그 위로 올라가보라고 한다. 지하 한구석에 나선형의 계단이 위층으로 통해있다. 남자는 그냥 문밖으로 나온다.

여자는 남자의 뒤를 따라 해장국집으로 들어가면서 버릇처럼 손가락을 만지작거린다. 살갗이 벗겨진 손가락 끝이 까칠까칠하다. 사진과 컷이 위주인 잡지사라서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3M이라는 스프레이 풀은 손에 묻으면 비누로도 잘 안 지워진다. 물에 불려도 잘 씻겨지지 않아 여자는 퇴근 무렵 아세톤을 묻혀 닦아낸다. 여자의 손은 군데군데 매니큐어까지 같이 지워져 있다. 여자는 벌써 팔 년째 잡지사 미술부에서 잡지 레이아웃을 하고 대지작업을 한다. 일이 능숙해질 때도 됐는데 아직도 책상 가장자리와 핸드백에 풀이 튈 때가 많다. 남자는 후루룩, 해장국을 먹는다. 여자는 선지와 천엽을 숟가락으로 그릇 한편에 치워가며 마치 쪽자 작업을 하듯이 밥알만을 건져 입으로 가져간다. 남자는 뚝배기에 얼굴을 거의 들이밀고 허겁지겁 밥을 먹는다. 고춧가루가 말라붙은 식탁 모서리를 손끝으로 긁으며 여자는 남자의 정수리를 쳐다본다. 남자는 벌써 사 년째 대리 대기발령을 받고 있다. 남자는 여자와 처음 만난 삼년 전부터 입버릇처럼 올해도 발령이 나지 않으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해왔다.

허름한 여관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 옆에 여자는 서있다. 먼저 올라간 남자의 목소리가 계단 밑으로 들려온다. 안 들어오구 뭐해? 언제까지 서있을 거야? 잠을 자다 깬 주인여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남자와 여자를 앞서 방을 안내해준다. 여자는 신발을 신은 채 현관에 서서 텅 빈 운동장 같은 방을 훑어본다. 방 한구석에 놓인 더블침대가 방안에 놓인 가구의 전부다. 침대 위에 갈린 침대보 위에 서너 개의 담배자국이 뚫려있다. 현관에 선 여자를 뒤로하고 남자는 화장실에 들어가 물을 힘껏 틀어놓은 채 양치질을 한다. 물이 튀기면서 웃옷이 물에 젖는다. 화장실 앞에 걸린 거울 속으로 남자의 옆얼굴이 반쯤 비친다. 치약을 잔뜩 묻혀 입안 가득 거품을 물고 칫솔질을 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억눌린 듯한 여자의 웃음소리가 옆방에서 새어나온다. 여자는 침대 모서리에 앉는다. 낡은 스프링이 출렁거린다. 화장실에서 나와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침대에 쓰러지듯 눕는다. 방 한쪽에 그가 풀어놓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집어 의자에 걸쳐놓으며 여자는 불을 끈다. 스웨터를 벗고 치마를 막 벗어 접으려는데 엉덩이 부분에서 무언가 반짝거린다. 작은 종잇조각이다. 여자는 가로등이 켜진 창가에 치마를 들어올리고 자세히 들여다본다. 흐릿한 불빛에 반짝이는 그것은 오후에 한참 동안 찾던 ‘탐’자다. 치마를 쥔 채 여자는 침대 모서리에 주저앉는다. 순간 점심시간에 미끄럼틀 음지에서 발견한 작은 풀이 떠오른다.

점심을 먹고 놀이터 벤치에 앉아 여자와 미스 정은 해바라기를 한다. 벤치 몇 미터 앞에서 웃자란 사내아이 서넛이 길거리 농구를 하고 있다. 미스 정은 지난번 토요일 갔던 청평댐 근처의 향어횟집 이야기를 한다. 여자는 그날 입었던 치마를 아직도 입고 있다. 생각지도 않았던 여행이어서 더 좋았을까? 미스 정의 눈은 멀리 가 있다. 그때 아이 하나가 던진 공이 여자의 발밑을 지나 미끄럼대 밑으로 굴러간다. 아이가 여자에게 소리친다. 공 좀 던져주세요. 여자는 미끄럼대 밑으로 몸을 숙이고 들어가 공을 꺼내 아이를 향해 힘껏 던진다. 치마가 펄렁거린다. 여자가 던진 공은 여자의 바로 앞에 떨어진다. 아이들이 낄낄거린다.

여자는 아직도 치마를 쥔 채 침대 모서리에 앉아있다. 혹시 가평의 논두렁에서 앵초꽃씨 하나가 내 치마에 묻어와 그곳에 떨어진 것일까. 여자는 남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연다. 당신은 믿을 수 있어요? 남자는 모로 누워 여자의 얼굴을 빤히 놀려다보며 묻는다.

무슨?

여자는 여전히 치마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린다.

풀. <끝>

'문학 > 소설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표본실의 청개구리/염상섭  (0) 2014.12.07
존재는 눈물 흘린다-공지영  (0) 2014.05.31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0) 2014.05.18
한설야/과도기  (0) 2014.04.24
신경숙/빈집  (0) 2014.01.18
Posted by 아데라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