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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4.23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40 by 아데라 2


바람의 아들
장혜영


                                                                 

                                                                         3




 미경은 셔터를 올리고 사진관 안에 들어섰다.
 오늘은 오빠가 설악산야외촬영을 나갔기에 여느 날보다 조금 일찍 출근했다. 그러나 솔직히 오빠의 부재 때문에 이른 출근을 했다는 건 남편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미경은 이 사진관에 애착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병상에 드러눕게 되자 수입원이 끊겼고 그래서 남편 대신 소비 돈이라도 벌려고 나섰을 뿐이었다.
 정말이지 날아 길수록 심해지는 남편의 변태가 지긋지긋해났다. 알몸을 더듬는 그 손길, 가슴과 허벅지에 끈적끈적한 점액을 흘리며 개처럼 핥고 지나가는 혓바닥, 갯벌에서 서식하는 개불처럼 축 늘어진 죽은 성기가 사타구니에서 기분 나쁘게 뭉그적거리는 느낌…… 남편의 그런 변태적 행위에서 느낄 수 있는 건 성욕의 만족이나 쾌락이 아니라 수치심뿐이었다. 그것은 쾌락이기 전에 혹독한 고문이었고 사랑이기 전에 성 학대였다.
 그러나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오빠의 설교처럼 인생이란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을 위해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 양심, 정조, 정직, 법…… 그 수많은 단어들은 나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인연 속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이처럼 많은 규제와 속박의 쇠고랑에 꽁꽁 결박당할 수밖에 없다면 미경이라고 그런 속박에서 자유로운 존재이겠는가.
 그것이 인간이 불가피하게 짊어진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빠에게 불륜현장이 발각된 그날 이후로 다시는 진남이를 만나지 않았다. 전화가 와도 메시지가 와도 응대하지 않았다. 출근길이나 퇴근길을 가로 막아도 팔소매를 잡는 그를 뿌리쳤다.

 이 바보야!
 너 정말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생과부로 평생을 살 수 있어?
 청춘은 한번 가면 끝이야.

 날마다 이런 메시지들이 휴대폰액정화면을 꽉 채운다. 사진관에 출근하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길 맞은편 중국집의 붉은 간판이다. 그 앞에 세워진 낡은 오토바이도 무심히 눈길을 지나치게 되지 않는다.
 카운터에 서있노라면 배달 다니는 진남의 오토바이소리가 귀청을 따갑게 울린다. 머리에 붉은 헬멧을 쓰고 검은 선글라스를 건 진남은 한손에 철가방을 들고는 쏜 살 같이 삼거리와 주변 골목들을 누비고 다닌다. 이태원이고 한남동이고 그가 안 다니는 곳은 거의 없다.
 실내청소를 끝내자 마당을 쓸려고 밖으로 나와 보니 문득 거리 맞은 편의 중국집에서 철가방을 들고 나오는 진남이와 눈이 딱 마주쳤다. 진남은 벙긋 웃으며 장갑을 벗더니 이쪽을 향해 손을 들어 하트를 그려 보인다. 아마 오늘 하루 사진관에 오빠가 없는 줄만 알았다면 진남은 진작 한달음에 길을 건너 달려 왔을 것이다.
 미경은 불에라도 데인 듯 시선을 피했다. 얼른 허리를 굽히고 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오토바이가 거리 복판에서 커다랗게 타원형을 그리더니 무단 횡단하여 사진관 앞에 와서 뚝 멈춘다. 갑자기 나타난 오토바이에 아슬아슬하게 접촉사고를 피면하느라 식은땀을 흘린 버스기사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욕설을 퍼부었으나 진남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오늘은 일찍 출근했는데……저녁에 나 좀 보자.”
 “안돼요.”
 “공자님은 안에 없나 보네.”
 입만 벌리면 정당함이요 정직이요 참됨이요 윤리요 법이요 양심이요 하는 거창한 단어들을 총동원하여 다른 사람을 훈계하려드는 윤정도를 최진남은 공자님이라고 비꼬아 불렀다.
 미경은 마당을 쓸다 말고 말 없이 사진관으로 들어가 버렸다.
 진남이도 급한 배달인지 더 이상 붙들고 늘어지지 않고 그냥 이태원으로 이어진 언덕길을 달렸다. 통-통-통-하는 요란한 엔진소리와 배기관에서 뿜기는 검은 연기가 삽시에 거리를 부산하게 들었다 놓는다.
 오토바이소리 하나만으로도 미경은 허전한 마음의 공간이 얼마만큼은 채워지는 안도감을 느낀다. 힘찬 엔진소리는 야생말처럼 기백이 넘치던 진남의 약동적인 알몸을 연상시켰고 검게 토해내는 배기가스는 황소처럼 거칠기만 하던 그의 숨결을 느끼게 했다. 수많은 차량들 속을 요리조리 비집고 서커스를 하는 듯 민첩한 오토바이 운전묘기는 그녀의 나신위에서 온갖 체위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던 신기한 섹스묘기를 떠올려준다.
 한 번만이라도 더!
 때로는 걷잡을 수 없이 용솟음치는 욕정에 떠밀려 문을 박차고 진남에게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에 전율하기도 했었다. 세상 모든 속박을, 오빠가 말하는 그 지긋지긋하고 고리타분하고 죄수를 다스리는 교도소규칙 같은 무거운 인생의 도리라는 멍에를 활활 벗어버리고 욕망의 호소에 타협하고도 싶었다. 그러나 미경의 목덜미를 짓누르는 그 멍에는 너무나 견고하고 무거운 것이어서 그녀의 힘으로는 벗어 내칠 수가 없었다.
 정도는 설악산으로 떠나며 사진관 당부보다는 진남이와 만나지 말라는 당부만 거듭했다. 벌써 진남이와 만나지 않은 지 달포도 넘었는데도 오빠는 동생의 결단을 믿지 못하겠는 모양이다.
 새로 온 메시지도착을 알리는 신호음이 삑삑 울렸다. 확인하나마나 진남이 보낸 것이리라.   
 미경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미경아.  난 더 못 참겠어. 당장 너희 집으로 달려가서 그 식물인간을 죽여 버리고 싶어. 널 그 식물인간의 학대에서 구해주고 싶다고……
 
 미경은 화약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과격한 표현에 깜짝 놀랐다. 그녀가 지내 본 진남은 살인도 서슴지 않을, 불 같은 성미의 소유자였다. 그 몸 전체가 유조차여서 일단 붙이 붙으면 끄기는 힘들었다. 미경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할 인격자다.
 불상사가 일어나기 전에 제지해야 한다.

 그러시면 안돼요. 진남 씨도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발신하자마자 금시 답신이 왔다.
 
 난 죽는 게 겁나지 않아. 미경이가 없이 살아서 뭐해. 아무 의미도 없어. 제밀할! 어차피 못살 바엔 그놈 작살내고 나 죽고 끝장낼 판이지!
 
 절대 그러시면 안돼요. 그건 범죄행위에요. 그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죄가 있으면 저한테 있을 뿐이에요. 절 죽여요. 제발!
 
 나 지금 그리로 갈 테니까 기다려.

 어딜 온다고 그래요. 오빠가 있는데……
 
 오늘은 도저히 일손이 잡히지 않아. 미경을 만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 나더러 무슨 일을 저지르게 하지 않으려면 날 한 번만 만나줘.

 오빠가 있다니까요. 나중에요.

 까짓 공자님이 있겠으면 있고. 난 인젠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지금 간다!
 
 오지 말라는 메시지를 몇 번이나 재 발신을 했지만 더 이상 답신이 없다. 곧장 사진관으로 달려오고 있는 모양이다.
 어쩐담. 문을 닫아걸고 피신할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에 진남의 오토바이가 어느새 사진관 문 앞에 들이닥쳤다. 헬멧과 장갑을 벗어 오토바이손잡이에 걸어 놓고는 주저 없이 성큼성큼 사진관 안으로 진입한다. 잔뜩 굳어진 얼굴표정에는 오빠와 최후담판이라도 하려는 비장한 각오가 무겁게 흐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요.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미경은 안절부절못하며 진남의 등을 밖으로 떠밀었다. 그러나 진남은 바위처럼 우뚝 버티고 선 채 끄떡하지 않는다. 마치도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산다는 태백산의 주목처럼 거연하다.
 “오빠가 어디 있어? 나오라고 해. 나 좀 보자고.”
 “제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그만 나가요.”
 “지하실에 있겠지. 안 나오면 내가 직접 들어갈 거라고 알려.”
 “오빠 안 계세요. 설악산에 갔어요.”
 “정말이야. 설악산엔 무슨 일로?”
 “사진촬영하려고요.”
 “동생을 곁에서 지켜야지 내버려두면 되나. 공자님께서 인간쓰레기인 진남이가 들이닥칠 걸 예상하지 못했나보지. 빌어먹을!”
 진남은 공연히 씨근벌떡거리며 잔뜩 긴장되었던 신경을 멋쩍게 풀어낸다. 스스로 종이봉지커피를 터트려 컵에 털어 넣더니 정수기에서 더운물을 받는다. 금방 가느다란 수증기가 은실처럼 가물가물 피어오른다.
 “커피만 마시고 어서 나가요.”
 “남들의 시선이 그렇게 두려워. 우리가 무슨 죄라도 짓고 있나. 도둑질을 했나 살인을 공모하나 로비를 하나. 난 무서울 게 하나도 없다.”
 “이건 불륜이잖아요. 유부녀가 외간남자와……”
 “사진관에 손님이 들어왔는데 안 될 게 뭔데? 키스하고 강간하는 것도 아니잖아. 걱정 마. 앉아서 말 몇 마디만 할 테니까. 말하는 데야 죄가 없겠지.”
 진남은 커피 잔을 들고 아예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느긋한 품이 오늘은 타협을 보기 전에는 자리를 뜨지 않을 잡도리다.
 “우리 담판 좀 해보자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이대로 두루뭉술하게 끝낼 수는 없잖아.”
 “난 이미 정리했어요.”
 “정리하다니 뭘?”
 “진남 씨랑 난……아무래도……안 될 일이잖아요.”
 “안 되긴 뭐가 안 된다는 거야. 그 녀석과 이혼하거나 우리 둘이 야반도주하거나 아니면 지금처럼 비밀관계를 유지하거나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데. 도대체 뭐가 안 된다는 건지.”
 “이혼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고 야반도주는 배신행위여서 선택불가능하고 비밀관계유지는 불륜이어서 안 되잖아요.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말도 있잖아요. 우리 이쯤에서 정리해요. 뒷수습이 안 되는 최악의 경우까지 가지 말고.”
 미경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문밖으로 쏠렸다.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불쑥 들어올까 봐 속이 조마조마했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은 늘 불안하다. 오빠가 갑자기 산행을 취소하고 돌아올 것 같기도 하고 남편이 확인전화를 걸어올 것 같기도 했다.
 “최악의 경우는 앞으로가 아니라 진작 미경에게서 벌어진 거야. 남편이 살아있다뿐이지 남자구실도 못하는 걸 신랑이라고 청춘을 속절없이 눈물 속에 보내야 하는 상황이 최악의 경우가 아니면 어떤 것이 최악의 경운데? 미경인 정말 공자님이 횡설수설하는 그따위 쓸데없는 말들 때문에 청춘을 썩여버릴 거야. 사는 게 뭣 땜에 사는데. 행복을 위해서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겠어. 그런 것들을 위해 돈도 필요하고 남편도 필요하고 자식도 필요한 거 아니야. 남자구실을 못하는 남편, 자식 하나 없는 결혼, 섹스 없는 부부 그런 가정이, 사랑이, 부부가 무슨 소용이 있어. 그건 와해되고 부서지고 깨뜨려져야 돼. 행복을 구할 수 있는, 쾌락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가정을 꾸려야지.”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모양이다. 거칠기만 하던, 입만 열면 쌍스러운 말에 악담뿐이던 그의 어투가 이렇듯 수준급이고 질서정연하다니. 놀랍기까지 했다. 그와 더불어 인생을 화두로 진지한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진남은 그냥 남자로서만 존재의미가 있다고 여겨왔었다. 그런 진남이 지금 아주 성숙되고 진지한 자세로 인생문제를 화제에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반드시 배우고 유식한 사람만 논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인생을 살고 그 현장 속의 주인공이라면 누구든 나름대로 자신만의 탁견을 가지고 있을 법도 하다. 적어도 인생담론의 소유권이 오빠 같은 사람들의 특허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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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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