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4.03.01 어떤 사람이 소설을 쓸 수 있는가 by 아데라 1

어떤 사람이 소설을 쓸 수 있는가

 

김원일 (소설가)  

 

  

  어떤 사람이 문학을 할 수 있느냐, 문학 하는 데 어떤 성격이랄까, 어떤 환경이 적합한가, 어떤 사람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느냐, 하는 류의 논의에 대해서는 제 경험담과 선배 작가들의 예를 들어 설명할 수는 있지만 다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논의에 100%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며, 문학 자체에 정도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인문과학 분야에 속합니다. 어떤 이들은 문학을 인문학이라고 보기보다는 예술의 한 장르라고들 해석하기도 합니다.


  문학은 아무래도 새롭게 창조해 내는 것, 즉 작가 자신이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독창적으로 무언가를 그려낸다는 창조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예술 분야에 속한다고 보아집니다. 문학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현상도 중요하지만 쓰는 이의 상상력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특히 소설에서는 상상력이 중요하며 그 상상력은 사회성을 밑바탕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시 분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혹은 중국의 {시경(詩經)}을 비롯하여 아주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소설은 의외로 역사가 짧다고 할까요. 산업혁명 이후에야 겨우 본격적으로 문학의 중심 파트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동양에서는 말 그대로 소설(小說)은 작을 소(小)자를 써서 사랑방 따위에서 들을 수 있는 황당 무계하고 재미난 우스개를 꾸며 들려주는 이야기 정도로밖에 취급을 못 받았지요. 마찬가지로 서양에서도 기사의 무용담이라든지 저급한 연애 이야기 따위를, 많이 배우지를 못한 가정부나 부엌일 하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모여 앉아 잡담 삼아서 들려주는 정도로 취급되었습니다.


  어느 건너편 성에 있는 왕자가 건너편 성에 있는 공주를 탈취한다는 식의 해괴한 이야기 정도로밖에 여겨져 오지 않다가, 서구에서는 200여 년 전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농경사회가 무너지고 도시 집중화,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어 산업역군, 노동자화하면서 직업이 분화되었고 많은 도시 문제와 노동 문제 등이 대두되었습니다.

 

   이렇게 사회구조가 복잡해지면서, 80년대의 경우 김지하 시인이 참담한 민중 현실이라든지 분단 현실, 민주화를 갈망하는 시들을 발표했듯이, 인간과 자연의 문제 또는 자연과 신의 문제, 신과 인간의 문제를 본령으로 삼아 서정적으로 노래해오던 시인들이 이런 모순에 눈을 돌리기도 했지요.

 

  하지만 막상 산업 구조가 복잡해지면서 도시화가 크게 진전되고 인간 관계도 복잡해졌습니다. 또 그에 따라 많은 직업들이 생기면서 이런 것들을 시속에 제대로 담아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가령 한 가족 구성원의 이야기를 담아낸다고 합시다. 아버지는 군인이고, 형은 운동권, 대학생인 누이동생도 있고 직장에 나가는 아이도 있다면, 가족적인 문제라든지 가족 개개인이 처해 있는 현실적인 문제 등을 한편의 시 속에 담아내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물론 서사시나 긴 연작 형식으로 담아낼 수는 있겠지만, 원고지 서너 장 정도나 한 페이지 정도의 시 속에 복잡한 사회 현실을 제대로 담아내기는 힘들 겁니다. 그런 것을 담아내기 쉬운 장르가 바로 소설입니다. 소설은 3인칭 전지적 시점이라고 해서, 아버지 문제를 따라가다가 아버지와 형과 싸우는 문제를 따라가다가 가족의 불화 문제, 이혼 문제, 아들의 직장 문제, 여동생의 연애 문제 등 모든 것을 섞어서 담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소설이라는 그릇은 산업 구조 내지 도시화 구조에 가장 알맞은 장르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는 작가가 소설 속에 나오는 많은 등장인물 개개인의 삶을 자기가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작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은 결국 많은 부분을 상상력에 의존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꾸며낸다, 진짜가 아닌 허구이다라고들 하지요. 소설을 픽션(fiction)이라 부르는 이유는 현실에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실제 그 소설 자체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일을 만들어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생생한 그 사회 현실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소설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 자체가, 그 사회를 담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셰익스피어 이후 영국 최대의 작가로 평가받는 찰스 디킨스도 그의 소설 속에서 도시로 인구 집중화가 된 그 당시 영국 사회 현실을 잘 담아냈는데, 그를 통해 보면 소설의 또 하나의 생명력은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는 안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 명작으로 알려진 소설 치고 현실에서 선택받은 자, 부유한 사람들이 재미나게 읽고 그런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좋은 소설이 된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사회에서 소외 받고 배척 당하면서도 정직하게 살아가려 애쓰는데, 사회가 제도적으로 가로막는 데 대한 반발과 불평등한 관계로 말미암아 억눌림을 받는 그런 사람들에 관한 사회나 권력이나 구조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가 좋은 소설로 남았습니다. 즉 그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들추어내는 고발성이 그 소설의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작가의 강한 비판의식이 있어야만이 그 소설이 생명력을 갖고 무게를 지닐 수 있는 겁니다. 명작으로 남은 많은 소설들이 그런 문제를 담고 있고 그것이 바로 소설의 생명력입니다.

 

 소설의 태동 자체가 그렇지 않습니까. 갑작스런 사회 구조의 변경에 따른 인구 이동으로 도시 자체가 팽창하게 되면, 농촌사람들이 직업도 없이 무작정 도시로 올라오지요. 이들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막노동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우선 주거가 없습니다. 아주 도시 변두리로 나가서 천막집이라도 하나 지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배설하는 화장실 문제 같은 것도 해결이 안 됩니다. 수도 문제도 해결이 안 됩니다. 거기에 따른 질병 문제, 건강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물은 멀리서 길어와야 되고 아무 데나 하수구에 버리기 때문에 장구벌레나 독벌레가 여름에 끓게 되고 제3제국 아프리카나 남미나 도시 변두리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쓰레기더미 속에서 산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 변두리에는 학교 시설이 없습니다. 자녀들이 학교에 다닐 수 없습니다. 이런 부류의 어린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힘으로 치러내기에는 벅찬 노동판에 취업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마 전 한국일보에 고종석 씨가 쓴 글을 읽었습니다. {노동의 종말}에서도 논의되었다시피, 20세기는 노동자의 천국이었고, 노동자가 신장한 시대였고 공산주의가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 자본주의 노동문제를 늘 간섭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정권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는 모든 기계가 노동을 대신해 줌으로 인해서 노동자들이야말로 점점 기득권을 잃고 거리에 나앉는 실업자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구조 조정에 의해서 사람 대신 기계가 다 일을 해주니까 사람이 필요 없어진다고 합니다. 대량 실업이 예고되고 21세기의 대변란이 올 때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가 하는 대안으로서 지금 프랑스 같은 데서는 노동자들의 일하는 시간을 하루 6시간, 일주일에 닷새에서 나흘 반으로 단축하는 대신에 직장에서 사람을 내 보내지 않고 더 많은 고용창출을 해야 한다는 논의가 한창이라고 합니다. 일거리가 없어서 밀려나오는 사람들을 정부가 수용해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자원 봉사적인 일거리를 마련해 주기도 합니다. 앞으로 노인문제가 큰 문제가 되는 고령화 시대가 오면 그 노인들을 돌보아 주고 휠체어도 끌어주고 치매에 걸린 사람을 씻어주는 등의 자원봉사 체제가 필요해질 겁니다. 정부에서 그런 사람들을 다 흡수해서 돈을 주고 남아도는 인력을 흡수하지 않으면, 21세기는 새로운 직업의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학설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소설은 복잡한 사회를 담는 그릇

 

  실제 우리 사회가 산업화되면서 우리 눈으로 직접 보았듯이, 사람들은 직업을 얻기 위해서 농촌을 버리고 좀더 잘 살기 위해서 도시로 올라왔지만, 막상 그 사람들이 정착해서 사는 환경 조건이 너무나 좋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소설가들이 처음으로 대사회적인 발언을 시작함으로 인해서 우선 밑바탕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읽히게 되었고, 그것이 하나의 힘이 되어 산업혁명 이후의 소설이 모든 문학 분야에서도 아주 폭발적인 신장을 가져왔고, 문학을 넘어서서 예술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힘을 견지했다고 봅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도 고전을 많이 읽도록 권하지만 고전 목록 가운데서도 50%는 소설입니다. 철학, 사회학, 종교학 분야의 책들이 있는데 왜 소설을 읽도록 권할까요. 소설을 읽어야만 그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이 사회가 어떤 부분에서 잘못되어 있는지에 대해 쉽게 알 수 있고, 자기 각성을 빨리 할 수 있기 때문에, 중고등 학생 시절에 많은 소설을 읽도록 권장한다고 생각됩니다.

 

  누구나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 문학을 하고 싶은 사람은 처음에는 독서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점점 선다형 입시문제로 당락을 결정하는 입시제도가 없어지고 논술식으로 바뀌어, 글을 많이 읽도록 권하고, 스스로 글을 읽은 것을 몇 자로 압축해서 논문 형식으로 정리해 내는 논술고사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프랑스 등의 선진국에서는 시와 소설 등 몇몇 작품을 읽도록 도서목록으로 정해준 다음, 그 작품들을 다 읽은 후 교사와의 대화를 통해 학생의 지적 수준을 인정받아야만 진급을 시킨다고 합니다.

 

  몇 년 전에 텔레비전에서 흥미 있는 프로를 보았습니다. 러사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사는 한국인 3세쯤 되는 교포 부부인데, 남편은 자동차 수리공이고 그 부인은 대학교 교수였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두 사람 사이에 차이가 너무 많았습니다. 남편은 자동차 밑에서 기름때 묻히며 수리나 하고, 부인은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자원하여 지방에 있는 우리 교포 소년들을 위해서 한글 신문을 만들어서 나누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불편이 없다는 거예요. 오페라도 보고, 음악도 듣고, 독서 토론도 하는 등 교양 수준 자체가 같다는 거예요. 살아가는 데 전혀 지장이 없으며 신분 차이가 안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그 사회가 중고등 학교 때 독서를 습관화시켜 주었고, 사회에 나와서도 끊임없이 독서를 해서 지적 수준이 부인보다 높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예는 프랑스에서도 소개되었지요. 여름이면 바캉스를 즐기러 보름 내지는 20일 정도 남쪽 해안으로 떠나곤 하는 두 가정이 있었습니다. 지중해 연안의 니스 근방에서 두 가족들은 만났습니다. 나란히 텐트를 치게 되어 자연스럽게 사귀게 된 두 가족들은, 즐겁게 얘기꽃을 피우고 술을 마시고 하다가 헤어질 때는 내년 이맘 때 여기서 다시 만자자고 약속했답니다. 바캉스 현지에서 사귄 이웃이 된 것이지요. 10년째 같은 무렵이 되면, 늘 서로 전화를 해서 우리는 며칠에 떠나니 그 호텔 부근에서 만나자는 식이었겠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한 가장은 대학교 총장이고, 다른 한 사람은 파리 근교에서 푸줏간을 하는 사람이었답니다. 그 동안에 직업을 물어볼 필요도 없고 문학 이야기든 음악 이야기든 철학 이야기든 대화가 잘 통하니까 그렇게 스스럼없이 사귀었다는 겁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문학 자체가 매우 풍부한 교양을 품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에피소드입니다.

 

  저 자신도 소설가가 되기 이전에는 우선 한 사람의 독자로서 읽기부터 했습니다. 여러분도 중고등학교 때 이광수 소설도 읽고, 김래성 소설도 읽고, 교과서에서 이효석의 단편도 읽었을 겁니다. 읽기부터 시작해서 다들 어느 정도의 독서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법률가가 되고 엔지니어가 되고 어떤 사람은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되지요. 왜 같이 독서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문학가가 되고 다른 사람은 상업을 하고 다른 쪽으로 나가는 걸까요? 여기에서 인생의 한 갈림길이 생기게 됩니다. 우선 누구나 어떤 소설을 읽거나 시를 읽고 나서는 참 잘 썼다, 정말 아주 내 마음의 양식이 될 만한 글이다, 하고 감동을 받겠지요. 이때 일반적인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받는데 비해, 문학의 길로 들어설 사람들은 자신의 삶 한 부분과 일치시키면서 강렬하게 나도 뭔가 이런 걸 써보고 싶다는 욕구를 일으키게 됩니다.

 

  제 경우에는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미술을 해보려고 했는데, 집안이 가난해서 화구 살 돈도 없고 집안의 반대도 심하게 해서 문학 쪽으로 길을 바꾸었습니다. 처음에 저도 독서 수준이 낮아서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읽을 책도 없었고, 중학교 때에는 그 당시 학원사에서 나온 세계명작 동화로 나온 [프란다스의 개] 따위를 읽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 대중소설로 김말봉의 [찔레꽃]이라든지 김래성, 방인근의 소설들을 읽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습니다. 남들은 다들 좋다고 하는데 너무 어려워서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습니다. 거기서 고3 사이에 독서력이 많이 늘었던 것 같아요. 고3 때 제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으면서 굉장히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전후로 해서 '아! 나도 정말 글을 써보고 싶다'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문학하기가 힘들지 않을까 생각되는 사람들의 예를 대충 들어보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사람, 단순한 집중형, 수리에 아주 밝은 사람, 책읽기를 싫어하는 사람,  맞다 틀리다 정답 하나를 요구하는 사람, 고뇌나 절망이나 회의나 이런 쪽을 잘 모르는 사람, 낙천적인 사람, 아주 공부 잘하는 사람 등입니다.

 

  예술 지향적인 사람은 좀 바보스럽거나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머리인데도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많지요. 공부 잘하는 것이 반드시 삶의 바른 길이라고 생각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몽상적이고, 뭔가 한 가지 문제를 두고 쉽게 단순하게 판단하고 재단하고 불편해 하기보다 자꾸 회의하면서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느냐, 왜 꼭 그래야 될까 끊임없이 자꾸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입니다. 외우기를 잘하고 아주 판단력이 능숙하고 잊을 건 빨리 잊어야 하는데 사소한 작은 문제를 가지고 쓸데없이 오래 고뇌하는 사람들입니다. 요컨대 잡념이 많다는 이야기지요. 집중력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나중에 그런 사람들이 문학이나 예술에 성공하는 사례가 참 많은 걸 봅니다.

 

  자동차가 막 발명되었고 사진기가 막 나오고 할 100여 년 전 19세기의 파리는 예술가들의 낙원이었습니다. 예컨대 그림으로 말하면 피카소나 후기인상파의 세잔 등 기라성 같은 화가들이 파리에서 활동할 시기였고, 문학 쪽에서도 보면 푸르스트를 비롯해서 장 콕토, 폴 발레리, 말라르메 등의 시인들, 드뷔시를 비롯해서 많은 음악가들이 모여 활동했습니다.

 

  제가 이를 놓고 자료 조사를 해보니까, 실제로 제가 열거한 사람들은 성격적으로 다 반대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갱, 고호만 보더라도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학력(학벌) 자체가 좋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글은 정서가 자기의 한 부분을 정곡으로 찔러서, 평상시에 갖지 못한 감정의 흔들림을 받게 되지만, 단순한 사람이나 객관적인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령 김소월의 자살을 두고서도, 스물 몇 살에 왜 자살할까 뭣 때문에 자살할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과, 소월의 시가 너무 좋다 그 생가에 가보고 싶다, 그의 시를 외우고 싶다 생각하는 사람과는 다른 것입니다.

 

  어떤 작가들은 도시 문제를 쓰고, 어떤 작가는 농촌 문제를 쓰고, 어떤 작가는 분단 문제를 다루는 등 작가 나름대로 주제가 다르고 성향이 다릅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보아도 누가 좋다는 소설이 있어도 내 마음에는 들지 않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꾸 자기 성향에 맞는 소설을 찾아서 읽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자기 정서와 만나면서 감동을 받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나도 뭔가 쓰고 싶다는 쪽으로 감정이 전이됩니다.  저는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일곱 살에서 열일고여덟으로 봅니다. 그 시기가 제일 중요하다는 건 작가들이나 시인들이나 자기 문학의 칠팔십 퍼센트를 그 시기에 일어났던 일, 보았던 일, 생각했던 일을 가지고 쓴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뇌세포는 주로 두세 살 때는 기억을 하지 못하고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부터 기억을 한다고 합니다만, 중학교, 고등학교까지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제1차로 사물에 대해 인식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를 지나서 사물을 분별하는 시기, 판단력이 생기는 시기입니다.

 

  7세에서 18세의 경험 세계를 들여다보라

 

  제 경험으로 보면 많은 작가들이 20대에 대표작을 쓴 걸 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독서 체험도 많고, 인생 경험도 많이 하고, 또 시간적으로 여유도 많은 50대 60대에 대표작을 쓸 것같이 보이지만, 유명한 작가들을 보면 20대 후반 30대 전반에 자기 대표작을 다 써 버립니다. 까뮈의 이방인은 25세 때에 써진 작품인데, 남자의 경우는 겨우 군대 갔다 온 시기이고 여자는 결혼을 준비할 나이인데 경험은 얼마나 많으며 무얼 알겠습니까. 공부하기도 바쁜데 독서를 하면 얼마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의외에도 그 젊은 나이에 자기 자신의 대표작을 쓴다 이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디에서 끌어오는 걸까요. 7세에서 18세까지의 경험 세계에서 모든 이야기를 끌어내 오는 겁니다.

 

 제가 존경하는 작가인 토마스 만의 경우에도, 노벨상을 받은 [부덴브로크가(家)의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25세에 썼습니다. 토마스 만은 괴테 이후 독일 최대의 소설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만, 그는 내세울 만한 학력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대학도 겨우 청강생으로 다니고, 직장 생활 틈틈이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이지요, 독일 북부에서 살다가 몰락해서 독일 남부로 이주했는데, 이 소설은 이 부덴브로크 집안의 4대에 걸친 이야기를 쓴 겁니다. 토마스 만은 한 가정의 정신적 몰락사인 이 소설을 이십대에 완성했습니다.

 

  4권 분량의 이 소설로 일약 명성을 얻은 다음, 그 후로는 승승장구해서 [마의 산] 등의 대작을 썼습니다만, 그래도 토마스 만 하면 [마의 산]과 더불어 25세에 쓰기 시작해서 27세까지 약 2년간에 걸쳐 쓴 [부덴브로크가(家)의 사람들]을 대표작으로 꼽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의 유년기에서 소년기의 일부에 걸친 생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입니다.

 

  제 경우에도 이 소설은 저의 문학 청년 시절에 읽었습니다만, 지금은 독서를 한다 해도 자료적 필요에 의해서 읽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가령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읽어도, 이렇게 쓰는구나 하고 느낄 뿐, 저의 경우는 결국 10대나 20대에 경험한 걸 씁니다.

 

 독서에도 시기가 있다고 봅니다. 윌리엄 포크너의 노벨상 수상작인 [음향과 분노]도 20대 말에 씌어졌습니다. 포크너는 미국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프랑스에 가서 실존주의자들의 인정을 받아 유명해졌지요.

 포크너는 헤밍웨이와 같은 시기에 활동하던 작가인데, 노벨상은 헤밍웨이보다 훨씬 먼저 받았습니다. 말년에 헤밍웨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묵묵부답이었다고 합니다. 미국 작가 중에서는 누가 잘 쓰냐고 했더니, 버지니아 울프 정도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소설은 의식의 흐름 수법을 쓰는 등 어렵습니다. 일반 독자들은 쉽게 따라갈 수가 없지요. 이 사람의 소설 스타일의 문장과 기법은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도 이 소설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수십 번 통독하면서 윌리엄 포크너의 의식의 문장과 기법과 그것을 완전히 자기 걸로 소화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누구나 다 자기의 7살 때부터 18살 때까지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진주 같은 것도 모래바닥에 휙 던져 뭉개버린 다음 그것을 찾으라고 한다면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기 삶 속에서 그것을 찾아내는 사람이 있고 못 찾아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내는 사람이 바로 성공하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소설 이외에도 모든 예술이 다 그 시기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20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라 할 때 첫번째로 푸르스트를 꼽는데, 그의 소설은 무척 어렵습니다. 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은 20대에 씌어진 것은 아닙니다. 한 40대에 들어갈 때부터 시작해서 그 작품 하나밖에 쓰지 않았지요. 물론 책은 7권짜리 책이지만, 그 첫권은 작가 자신의 유년시절로 돌아가서 시작됩니다. 자기의 고모집이 있던 데로 놀러 가서 식구들과 사귀면서 찾아간 읍내 성당과 꽃밭, 정원과 저녁 식사 정경 등 유년기의 회상부터 들어가서 시작됩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이라든지 [젊은 예술가의 초상]도 작가 자신의 유년학교, 소년학교 시절부터 스토리가 시작됩니다.

 

  자기 삶에 있어서 최초의 어떤 기억이라는 것 자체가 모든 작가들에게는 문학의 원천이라고 봅니다. 김주영 씨만 보더라도 '진보'라는 장터거리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객주]를 썼지요. 장터 얘기를 가지고 조선시대 말 객주라는 대드라머를 형상화해 냈지요. 얼마 전에 중앙일보에 2년간에 걸쳐 연재한 [아라리 난장]이라는 작품도 장꾼들이 떠돌아다니는 이야기입니다. 작가 자신이 장사를 해본 사람도 아닌데, 소년 시절에 장터에서 컸다는 이유 하나가 평생 자기 의식 속에서 계속 그쪽 이야기를 끌어내게 되는 겁니다. 뭐 이것 가지고는 이야기가 없을까, 요즘 장터는 어떨까 등 관심이 자꾸 그쪽에 쏠리게 됩니다. 김주영 씨는 그후로도 군대 생활도 하고 사회생활도 하고 직장생활도 다년간 했습니다만, 그런 얘기는 하나도 쓰지 않고 끊임없이 장터에서 소재를 찾아내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 이야기를 쓰는 것은, 자기가 바로 소년기에 목격한 것이 오래 인상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겁니다.

 

  어느 작가든지 살펴보면 자기의 소년기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는 걸 봅니다. 이문구의 [관촌수필]도 그 좋은 예지요. 여러분도 자기의 그것을 열심히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 그것을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무엇을 끄집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극적이고 다양한 삶을 살았으면 이야깃거리가 더 많겠지만, 조용한 삶을 살았다 해도 굉장한 많은 이야기가 그 속에 있는데 스스로 그것을 잘 들여다보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산에 앉아서 40년 도를 닦고 있는 사람에게, 온갖 세상 경험을 다하고 풍상을 겪은 사람이 올라와서 '어떻게 살면 좋습니까' 하고 묻지 않습니까. 세속의 삶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의 고뇌에 대해서 어려움에 대해서 희망에 대해서, 속세를 떠나 산에서 살아온 사람이 더 많이 알고 있잖아요. 경험만으로 모든 걸 알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자기 삶 속에 들어가서, 숨은 뭔가를 잘 찾아낼 수 있는 혜안을 가진 사람이 시인이나 소설가가 쉽게 될 수 있습니다.

 

  최근 들어 노인들의 치매가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평균수명이 짧았으니까 환갑만 넘겨도 오래 산다고들 했지만, 지금은 보통 70살 넘게 살다 보니 치매 환자들이 굉장히 많지요. 치매 과정은 현재부터 자꾸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치매 노인들은 흔히 어린애처럼 되어 버리곤 하는데, 가장 먼 기억일수록 오래 남는다는 건 신비로운 일입니다.  인간의 뇌세포가 자꾸 현재를 잊어버리지만 어릴 때 기억의 뇌리 속에 깊이 보풀 속에 덮여있는 그것을 개발해 내는 능력과 힘은 무한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잘 개발해 내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야 합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그것을 끄집어내고 있는가. 똑같은 삶을 비슷하게 체험했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못 끄집어내고 어떤 사람은 아주 미세한 기억까지도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은 많은 독서 경험의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문학 교육을 받을 때 세 가지를 열심히 하라고들 하지요. 문학가가 되는 길은 삼다(三多), 즉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것이 첩경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많이 읽어야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체험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입니다. 가령 살인하는 장면을 쓰고 싶은데, 실제로 살인을 해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살인하는 영화라도 봐야 되고 그런 소설이라도 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간접체험이라고 하는데 간접체험을 얻는 것은 독서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넓으며, 다양한 인간성과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 다양한 고민과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곧 독서입니다. 애들을 일일이 체험을 시킬 수 없기 때문에, 독서를 통해 이 넒은 세상을 살아나갈 때 흔들리고 위태롭고 고뇌할 때 바로 세우고 또 나아갈 길을 발견하게 되고, 쓰러지지 않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교양이라는 것은 정서가 흔들리지 않게 바로 잡아줍니다. 요즘 터무니없는 살인극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런 류의 충동을 느꼈을 때 자기 자신을 잡아주는 어떤 정서적인 힘, 즉 도덕관, 인류관 같은 것으로 무장이 되어 있다면 그런 충동은 억제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찌를 때는 자기 속의 정서적인 안정이 다 파괴되어 버린 상태입니다. 그런 것을 바로잡아주는 숨은 힘이 독서인데, 문학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내가 체험할 수 없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독서를 해야 하고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작품에 무게를 지니려면 신과 대화하라


  소설 자체가 상상력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생각하고, 줄거리를 엮어보고 등장인물을 설정해 보고, 끊임없이 써 나가야 합니다. 쓰는 것 자체는 생각 끝에 나옵니다. 제가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첫 시간에 김동리 선생님이 들어오시더니 두 가지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죽음을 생각하라'가 그것입니다. '그 두 가지에 열심히 들어가다 보면 소설을 쓸 수 있는데, 서양의 문학 고전이라는 그 자체가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신의 문제와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 작품의 무게를 가지려면, 신과 인간의 문제와 끊임없이 접근하고 생각해야만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당시 대학에 갓 입학한 열아홉 살 젊은애들을 앉혀놓고 죽음을 생각해 보라니 한참 열심히 피어나는 청년인데 죽음 문제가 어떻게 생각이 나겠습니까. 그러나 그만큼 절망해 보라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죽는다는 그 자체는 엄청난 고뇌가 필요한 것 아닙니까. 거기까지 들어가 봐야 인생을 알 수 있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한번에 써서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사람도 있지만, 습작이라는 자체가 자기 머릿속에는 어떤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더라도 글로 옮기지 않고는 소용이 없지요. 쓰는 과정을 이야기할 때 아주 좋은 글, 문장이 아주 안정된 문장, 오정희 문장이라든지 황석영, 윤흥길, 이문구 씨 등 문장에 정평이 난 사람들의 작품을 베껴써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제를 어떻게 쓰는지 어떤 부분에서 행을 바꾸고 대화체를 어떻게 하는지, 며칠 후 다른 장면으로 넘어갈 때 어떤 식으로 넘어가는지 따위가 그냥 읽을 때는 잘 안 들어오는데 써보면 의외로 잘 들어올 겁니다. 임철우 같은 작가가 처음 작품집을 냈을 때 어떻게 소설 공부를 했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누구누구 작품집을 계속 베꼈습니다. 그랬더니 문장이 붙더라'라고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소설이라는 그 자체가 쓰는 사람을 보면 소재를 잡아 흥분해가지고 열장 쓰고 난 뒤에 글이 안 풀려 접어두고, 다른 소재를 잡아 한 30장 정도 쓰다가 또 안 풀려서 그만두고 하면 절대 안됩니다. 반드시 끝을 보는 게 좋습니다. 끝장면이 중요한데 앞부분만 계속 열심히 쓰다가 던져두고 하다 보면, 영원히 한 편도 못 쓰게 됩니다. 반드시 이것이 실패작이 될 줄을 뻔히 알면서 내가 처음 쓰고 싶을 때 흥분과 열정과 그런 것을 되새겨가면서 일단 실패작이 되더라도 끝을 써보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데서, 체험의 영역을 넓혀가야 됩니다.

 

  체험이라는 것은 반드시 우리 몸으로 하는 체험으로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신적인 체험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독일에서는 굉장히 많은 여행을 거쳐서 인생의 여행,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만남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는 소설을 '교양소설'이라고 합니다. 가령 어떤 병에 걸렸다면 그 병에 대해서 계속 생각을 하는 겁니다. 병력에 대한 책을 읽고 병이 들면 사람이 어?게 될지 생각하는 것도 병의 중요한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체험도 그만큼 중요하다고 봅니다. 체험이 없는 글은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우선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나 쓴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감동을 받았으니까 쓰는 것입니다. 자기가 감동 받지 못한 것을 써가지고 남을 감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거짓 아닙니까. 문학이나 예술은 진실이 바탕이 되어 있지 않으면 반드시 나중에 드러납니다. 특히 문학 같은 것은 시류에 따라서 자기의 체험과 자기 자신의 감동이 실리지 않는 것은 결국 나중에 그 시대에 팔릴지는 모르지만 나중에는 결국 밀려나게 됩니다.

 

  우선 자기 자신이 감동 받으려면 절실한 체험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남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할 수도 있고, 영화를 보고 감동해서 그와 비슷한 것을 쓸 수도 있지만 결국 자기 체험만큼 절실하지는 못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에 남도 읽고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지 나부터 절실하지 않은 채 아무 감동 없이 써가지고 남을 감동시킨다는 것은 천재지요. 우리는 다 누구나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체험이 그만큼 글의 밑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간접 체험의 기회를 많이 가져야 됩니다.

 

   체험 문제와 결부해서 보통 한국문학을 정리할 때 60년대의 경제개발이 박정희에서 시작되어 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농촌 인구가 75% 내지 80%였는데, 그때부터 농촌의 해체가 시작된 걸로 봅니다. 울산에 공단이 들어서고 급격한 이농 현상에 따라 무작정 상경의 대혼란이 시작되면서 박태순의 [이촌동 사람들] 시리즈 같은 소설이 나오지요. 그 당시 떠돌이 노동자의 생활을 그린 [삼포 가는 길] 같은 작품들에서 70년대 초 공업화 과정과 농촌 해체 문제를 소설의 주테마가 되었지요. 이념 대립 속에서 분단 세대들이 유년기 소년기에 분단체험을 했기 때문에 그 소설 속에 끌어들여서 분단문제가 이야기되다가, 90년대 들어와서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고 나서, 여성 소설가들이 대거 등장했고,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사소한 개인의 문제, 개인과 개인의 연애 감정, 우정, 부딪침 등을 다루어 큰 덩어리의 주제가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런 것도 문학이라는 게 시대를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시대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제 입장에서 90년대 이 시대에 맞춰 써보자. 이것은 안될 일입니다. 그것은 젊은 작가들이 감당해야 할 부분이지, 제가 그렇게 쓴다고 해서 체험이 육화될 리 없습니다.

 

  결국 그 시대를 따라가는 것 자체가 문학의 한 패턴이기 때문에, 이런 문학이 좋다 나쁘다 얘기할 성질의 것이 아니고, 그래도 이 시대를 과연 얼마나 정직하고 생생하게 또 작가의 남다른 비판적인 안목으로 그려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터넷 시대, 영상시대이니 만큼 그런 것들이 많이 등장하겠지만, 결국 자기가 사는 시대를 잘 들여다봐야 합니다

 

. 문학도 시대에 따라서 유행처럼 변모합니다.

 

  고전이 왜 오래 살아남느냐, 결국 우리가 도덕과 윤리관, 비판 의식, 사람이 살아 나가야 할 어떤 문학이 갖고 있는 원초적인 것은 성경이나 불경이나 마찬가지로 결국 변하지 않는 인간의 문제가 시대상의 모사 속에서도 구현되어야만 오래 남게 됩니다. 그 시대만 열심히 그려서는 그 시대로 끝나 버리고 맙니다.

 

  실제로 1930년대 미국의 경제공황 시절에 민중문학이 성행했습니다. 영화 대부와 같은 시절에, 유에스에이 시카고와 같은 소설이 많이 나왔습니다만 너무나 격렬했던 민중문학 노동문학 같은 것들은 다 사라지고,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정도만 살아남았죠. 그 소설 속에 시대상 자체만 담은 게 아니고, 인간의 생명력이라든지 하는 본령을 끌어내면서 민중의 아픔을 담아냈기 때문에 살아 남은 것입니다. 아주 유행을 탄 문학들은 쓰러져 버렸습니다.

 

  음악이나 미술은 교사가 없으면 대성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문학은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가르친다고 해서 잘 쓰여지는 게 아니라 책 자체가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학력이라는 것도 필요 없습니다.   3년여 전에 작고한 프랑스의 작가 겸 영화감독 장 쥬네의 경우를 봅시다. [도둑일기]란 소설로 유명한 장 쥬네의 경우에도 아버지도 모른 채 창녀의 몸에서 태어나 별반 학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고아원을 탈출해 부랑아 남색가로 떠돌아 다녔고, 자기 생애의 반 이상을 감옥에서 책을 읽으며 보냈다고 합니다.

 

  출감 후 싸르트르에게 가지고 간 소설이 [도둑일기]라고 합니다. 사르트르는 그 소설을 읽은 후 '성(聖) 장 쥬네론'이라 해서 원래의 소설보다 더 긴 비평을 썼지요. 그래서 일거에 파리 문단을 휩쓸었지요.    그 소설의 첫 대목은 '죄수복은 꽃이다'로 시작되는 시적인 문체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에게 문학 공부는 어떻게 했느냐고 했더니, 감옥에 있으면서 책 좀 읽었다고 털어놓았답니다. 정규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특출한 감성과 재능이 좋은 소설을 쓰게 했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는 으뜸가는 스승은 책입니다. 꼭 문학적인 독서만이 아니라, 역사학이라든지 사회학이라든지 하는 게 필요합니다. 50년대 이전 선배 작가들은 농촌의 에피소드라든지 하는 걸 가지고 썼지요. 하지만 지금의 작가들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회과학 책도 좀 읽어야 되고, 역사학, 정치학 등 다방면의 지식이 토대가 되어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사회로 변했습니다.

 

  결국 작가의 길은 정규적인 교육에 있는 게 아니고, 누구도 도울 수 없는 고독한 작업입니다. 남에게 기댈 수 없고, 자기 자신이 한발 한발 딛어 올라가다 보면 어느 사이에, 문장력이 높아지고 좋은 소설의 입구에 서 있는 걸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독자의 질문에 답하여:


  처음에 글을 쓸 때는 너무 길게 쓸 필요는 없다. 오정희의 소설을 보면 춘천을 배경으로 쓴 건데 '오후 네시의 창 밖을 바라보면 햇살이 산 너머로 비스듬히 기울 때 바라보는 강의 반쯤에는 그늘이 내리고 반쯤은 아직 해가 남아 있다. 그런데 물새가 그늘에서부터 햇볕으로 서서히 날아가는 그 지루하면서도 나만의 시간이 지나면 이제 애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소리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내가 본 것을 기록하기 위해서 내가 잘 다니는 곳에 메모지를 준비해 둔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처럼 늘 한 느낌과 순간을 기록하는 습관을 붙이고, 문장력을 길러야 합니다, 무조건 길게 쓰기보다, 처음에는 짧게 쓰기 시작하는 버릇으로 시작하여 길게 써나가는 식으로 내 표현력과 문장력을 강하게 만들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문학 > 비평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대소설 흐름  (0) 2014.08.02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0) 2014.07.18
문학작품, 어떻게 읽을 것인가  (0) 2014.07.05
소설은 죽었는가  (0) 2014.03.22
Posted by 아데라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