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죽었는가

카를로스 푸엔테스 / 김태중 옮김


 "역사가 소설의 의미를 고갈시킨다면, 시간과 더불어 소설을 잉태시켰던 긴장된 순간들은 점점 빛을 잃어가고 소설은 읽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1.
    

     1954년 처음으로 글을 발표할 때부터 “소설은 죽었다”란 불쾌한 말들을 끊임없이 들어왔다. 이러한 예언이나 비문(碑文)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나, 이러한 선언들은 단지 입문하는 소설가를 고무시켰을 뿐이었다. 나와 같은 동시대의 작가들에게 주어졌던 그 이유는 첫째로 소설은 이제는 더 이상 소설의 근원처럼 새로움을 전달하는 기능을 갖지 못 한다는 것이었다. 소설이 얘기했던 것은 -우리에게 주어졌던 것은- 오늘날엔 영화, 텔레비전, 신문 그리고 역사, 심리, 정치, 경제소식 등을 통해서 더욱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옛 영역은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세계에 의해 병합되고 말았다. 세계에 대한 상상력은 이미 소설가의 것이 아니다. 열정과 호기심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 세기 반 전 만해도 군중들이 디킨즈의 소설 『골동품 창고』의 최신판을 구하러 부두에 모여들었었다. 요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 T.V. 연속극인 《달라스》의 악한, J.R.에게 누가 총을 쏘았는지를 알고 싶어 안달이 난다. 국내에서는 《단지 마리아였을 뿐》, 《부자도 눈물을 흘린다》 혹은 루이스 라파엘 산체스의 말대로 “마리 셀라와 호르헤 보스칸의 인기도에 따라 휘청거리는 나라”일 뿐인 것이다.

     조오지 오웰은 정보체계가 모든 것 위에 폭군으로 군림할 것이라 예견했다. 좀 더 날카롭게 올더스 헉슬리는 이러한 전횡적 정보체계가 무한 정보망에 대한 끝없는 욕구를 통해 다가올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원하든 원치 않든 정보시대는 활자 없이 다가 설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구텐베르크의 시대는 막을 내린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유형지」의 전체주의적 악몽처럼, 문자 그대로 피범벅이 된 문자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문자가 아니고 문자가 매개하는 것 - 보드리야르가 의미의 내파(內破, implosión)와 함께 정보의 폭발(explosión)이라 부른 것들에 대한 보상으로서 끊임없는 유희를 제시하기 위해 피 대신 네온 가스의 기포를 사용하는 문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정보 그 자체의 증식은 힘들이지 않고 편히 최적 상태의 정보를 입수케 한다. 정보는 우리가 찾을 필요 없이 스스로 다가들며 더욱이나 산출할 필요조차도 없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들이 우리 시대의 쓰고자 하는 욕구를 좌절시키지는 못 하였다. 단 한번도 정보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으며, 제대로 정보교환도 하지 못했으며, 즉각적인 관계 망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골방에 혼자 처박힌 채 불완전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으며, 오히려 역설적으로 정보의 단식상태는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했다.

     가족에 대한 추억들 중에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금세기 초에 매달 베라크루스 항구에서 프랑스발 소포를 정확하면서도 초조하게 기다리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다. 이 소포를 통해 토마스 하디, 폴 부르제, 아나톨 프랑스의 최근 소설과 더불어 최신 정보와 유럽의 도해(圖解) 잡지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문학적 취향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고 단지 그의 매월 성마른 환상 뒤에 존재하였던 알고자 하는 욕망과 노력 그리고 강요되었던 단절에 대해서 말하고 싶을 뿐이다. 할아버지는 옛 식민시대에 형성된 문명의 중심지였던 원거리의 유럽과 식민지란 주변문명사이의 정보소통을 위해 노력을 해야만 했다. 이점을 이해하며 인정한다. 하로초(역주: 멕시코 베라크루스 주(州)나 사람의 별칭)의 따가운 햇살을 피해 밀짚모자를 쓰고 부둣가에서 지팡이를 집고서 나의 어린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는 듯한 소식을 기다리는 할아버지 모습이 항상 남아있는데, 그때 이들을 사로잡았던 열정을 나로서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엔 베라크루스의 농장들까지도 위성 안테나가 즐비하다. 이로 인해 가장 못 사는 촌부까지도 전 세계 텔레비전 방송국의 80여 개의 채널과 대처수상에서부터 치치올리나에 이르는 여성스타에 이르는 선택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이 자리에서 이러한 현상이 베라크루스의 사탕수수 재배인에게 끼치는 선과 악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싶진 않지만 종종 그들은 T.V.수상기는 있지만 식수는 없는 경우도 있다.

     짧게나마 정보의 편이성, 풍요함에 비해 삶의 빈곤함과, 결합된 유럽 공동체 부자 나라들 간의 무지를 비교하고 싶은데, 예를 들면 영국인들은 프랑스에 일어나는 문화적 행위들을 무시하고 있으며 프랑스인들은 스페인 문화를 무시하는 반면에 스페인들은 스칸디나비아 문화를 역시 무시하고 있으며 이들 스칸디나비아인들 아마도 이미 언급한 포르노 배우 출신의 국회의원의 활동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이태리 문명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정보, 데이터, 토픽 그리고 폭력, 즐거움, 테러, 휴가의 테러 혹은 테러의 휴가에 대한 이미지들은 있다. 그러나 상상력은 거의 없다. 구조 없는 일시적인 데이터와 이미지들이 대량으로 반복되며 계속 이어 진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경험이 지식으로 변모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상상력이란 말인가? 또한 이러한 변환은 시간, 정지, 욕망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즉 “신과 포르피리오 디아스 대통령이 전지전능할 때”이었던 1909년, 베라크루스 항구의 선창가에서 손을 잡고 있는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멈춰진 시간과 욕망들처럼 말이다.

     레나토 레둑(Renato Leduc)이 재미있게 분류한 혁명 전의 우리의 과거는 다행스럽게도 모든 사람에게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문화가 항상 존재해 왔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작가들은 작가로서 그리고 또한 작가이기 위해서 언제나 고립되고 불완전하고 소외되었던 프루스트, 대중으로부터 연극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곧 버림을 받았던 플로베르와 제임스, 고립된 생활로 파멸한 포우 그리고 광고와 돈의 세력에 대해 즐겁게 대항했던 발자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간을 구별해주는 두 가지의 변별적 특징이 있다. 첫째는 계몽된 서구의 환상이었던 환멸적인 전체주의이다. 그 환상이란 끊임없이 문명이 승리하리란 꿈과 인류의 끝없는 완벽성 그리고 진보를 향한 제어할 수 없는 행진이었다. 아우슈비츠와 룰락은 이러한 환상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누렘베르크, 스와스티카(역주: 나치의 문장),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집단 수용소 등과 같은 근대적 폭정의 가장 명백한 기호를 좀 더 미묘하게 만들기도 했다. 포스트모던적 사고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폭정은 정보와 권력의 연맹이라고 주장해왔다. 다시 한 번 보드리야르를 인용하면, 타자의 존재 이유를 강조하면서도, 대답 없는 일회적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으로 발신자와 수신자를 동일시하면서 집단적 유통이 설정되는 양자의 허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수많은 사건들에 음으로 양으로 직면해 있는 나와 동시대의 작가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떤 작가에게는 그 사건들이 사회 속의 작가라는 조건의 속성이 되는데 반해, 다른 작가들은 우리 시대의 특수한 폭력 앞에 위험스럽게 노출되어 있어, 문제가 "소설은 죽었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동되었다는데 있다. 어떠한 모든 경우에도 말할 수 있다고 하지만, 언제나 말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많다.

     그러면 정보매체가 말하지 못 하는 것은 소설가의 몫이란 말인가? 이것이 내가 선호한 반대 공식은 아니다. 확실히 내의 관심을 자극하는 것은 현대 정보체제에 대한 멸시나 증오가 아니라, 그 활용 방법에 대한 걱정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며 특히 느슨하고 정착적인 시간에 사는 작가들은 더욱 그러한데, 행복한 정보는 우리 작가들을 거부하지만 소설의 글쓰기와 책읽기는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문학이 설령 자신의 실패를 인지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비역사화하고 비사회화하는 과정에 반대할 수 있을까? 비록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정보와 권력의 순환적이고 가상적인 폭정에 맞서 예외적인 것을 퍼뜨리기 위해 서사적(narrativa) 커뮤니케이션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도한다는 것은 가치가 있는 것일까? 더 양질의 그리고 더 자유로운 정보 수단과 더불어, 문학이 사회에 의해 창조되고 수행되는 문화현실이 사회에 봉사하고 그 반대가 되지 않는 제도들의 구조를 결정하는 점증적이고 민주적이며 비판적인 사회화 과정의 질서에 기여할 수 있을까? 시간. 시간과 욕망. 정보를 경험으로 그리고 경험을 지식으로 변환하기 위한 멈춤. 탐욕, 권력의 일상적 남용, 망각, 경멸 등이 야기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시간. 상상력을 위한 시간. 삶과 죽음을 위한 시간. 마리아 삼브라노(Maria Zambrano)(역주: 스페인의 철학자)는 우리에게 말한다, 안티고나(Antigona)는 홀로 있다고. 죽음을 살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삶을 종식시키기 위한 시간 역시 필요하다.

     설령 단 한대의 텔레비전 수상기도, 단 하나의 신문도, 단 한사람의 역사가나 경제학자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소설가는 쓰여지지 않은 영역에 대처하면서 계속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영역은 일상적 정보의 풍요나 절제를 넘어서는 것이며 또한 이미 쓰여진 영역보다 훨씬 더 무한하기 때문이다. 트리스트람 샌디(Tristram Shandy)는 이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의 문제는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삶을 담기 위해 살아온 것보다 십배 이상 더 빨리 쓰는 것이었으며 살고 있는 것보다는 백배 이상 더 빨리 쓰는 것이었다. 이렇게 노예처럼 글을 썼으며 삶을 멈췄다. 그러나 현대의 어떠한 시민이라도 잘 알고 있는 것은 정보와 정치의 일상적 담론에서 침묵의 소리가 떠도는 말이나 그릇된 말보다 무한히 많다는 것이다.

 

     2.


     이상의 논의로 이 글의 두 번째 논점이며 50년대에 우리에게 던져졌던 질문에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멕시코와 중남미에서, 어느 선까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질문은 3가지의 단순한 답을 요구하는 불필요한 3가지 분리형태로 행해졌는데, 이것들은 소설의 고유한 잠재성을 파괴하는 권위적인 장애물로 군림해 왔다.

 

    1. 환상 그리고 상상력까지 반대하는 리얼리즘
    2. 세계주의를 반대하는 민족주의
    3. 형식주의, 예술지상주의 그리고 무책임한 모든 문학형식을 반대하는 참여주의


     편한 대로 이리저리 결합된 허구적 분리 그리고 알리바이와 정치적 검은 술수. 이러한 것들은 일종의 마키아벨리즘이며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4반세기가 흐른 오늘날엔 다른 것들과 함께 이러한 것들은 사라지고 말았다. 다시 이러한 것들을 재고해보는 일도 가치가 있는 일인데, 이는 문학적 위생을 위해서도 물론이거니와 한번도 그것들을 극복하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데에 대한 일종의 주술적 행위로서도 그러하다.

     그래서 1954년 단편집 『가면의 날들』(Los días enmascarados)을 발표한 후 쓰여진 몇몇의 텍스트를 돌이켜 보면서 이러한 형식들을 환기시키려 한다. 필자의 첫 작품인 단편집은 앞서 지적한 협박에 잠재한 여러 이유로 인해 비판받았다. 즉 현실적이 아니고 환상적이었기에 그러했고 국가에 등을 돌린 세계주의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무책임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정치적 참여를 수행하지 않았고 더욱이나 냉전의 양측과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비꼬았기 때문이었다. 이쪽, 저쪽에 아무런 조건 없이 속하지 않는 것은 바로 죄였다.

     그러나 필자의 두 번째 작품이며 첫 번째 소설인 『가장 투명한 지역』(La región más transparente)은 똑같이 반대적 이유로 비판받았다.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생생하며 폭력적이란 이유로 말이다. 국가를 말하지만 단지 헐뜯기 위하여 한다는 것이다. 작품의 정치적, 검증적 그리고 비판적인 참여에 대해서는 차마 반혁명적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비생산적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훗날 내 친구가 된 중남미의 한 좌익 정치인은 필자가 멕시코 혁명을 비판함으로서 양키에게 무기를 제공하였으며 대륙의 혁명적 열기를 식혔다고 썼다.

     자문해 본다. 하느님 맙소사! 진리는 어디에? 지극히 개인적이며 직접적인 소견이지만, 필자의 두려움은 양극화되고 역설적인 이런 식의 과도한 요구사항들이 어느 한 젊은 작가를 파멸시킬 수도 있고 시켜왔다는데 있다. 객관적 세계뿐만 아니라 개성과 집단의식까지 포함하는 더 넓은 세계가 환상, 꿈, 헛소리에 대한 공포와 현실적 규범을 이탈했다는 죄의식 때문에, 상상력도 현실도 없는 얄팍한 기록 문서에 의해 얼마나 많이 우리 사회에서 희생되어 왔는가? “국가를 비판하는 행위는 낙관주의의 한 형태이다”는 월레 소잉카(Wole Soyinka)의 건전한 충고는 망각한 채, 민족주의는 일련의 국경일이며 문자(역주: 문학)의 발 아래에는 단 한 송이의 꽃도 없이 동상의 발 밑에만 화환을 바치는 날이라고 수없이 믿어오지 않았던가? 침묵은 단지 패배주의자의 것이며 그래서 비판은 사랑처럼 집안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았던가? 선의의 승리로 이해된 정치적 참여가 과연 몇 번이나 있었단 말인가? 볼리비아 광부의 억압을 고발하는 한 편의 소설이 그들을 해방시키고 전 세계의 광부를 해방시키는데 충분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소설은 광부나 문학을 구하지는 못했다. 광부는 정치적 행동에 의해서 구해지며, 문학은 도시의 요구를 예술적 요구에 결합시킬 때 구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요구 중 가장 우스꽝스런 질문은, 한때 멕시코에서도 열렬히 환영받은 바 있는 스탈린주의자였던 불란서의 한 비평가가 행한 “왜 카프카는 화형되어야만 하는가?”이다. 그 당시에 카프카는 “반 사실주의”와 동의어였으며, 한 국내 정치가는 카프카가 멕시코인이었더라면 풍속작가이었을 것이라고까지 했다. 오늘날, 카프카가 20세기의 가장 사실적인 작가이며 가장 왕성한 상상력과 참여의식 그리고 진리로 우리시대의 사진 없는 여권처럼 보편화된 폭력을 묘사하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20세기의 법, 도덕, 정치, 혼란, 고독과 악몽, 이 모든 것이 프란츠 카프카의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소설 속에 있다. 그러면서도 또한 희망도 담겨있다. 그러나 비극적 경고도 담겨있다. 하지만 우리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유럽, 세계는 그것을 알고 있다. 50년대의 융통성 없는 규범론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때로는 좋든 싫든 지쳐버린 박애라는 규범을 상속받았다.

     사실주의자의 요구는 소설이란 현실의 충실한 반영이 되어야만 했으며 이로써 책과는 관계없이 그 자체로 충분하여야 했다. 진보주의자들은 예술이란 사회, 정치, 사상의 진보와 물질적 발전과 함께 전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문학은 발견(anagnorisis), 감성, 미래에 관한 환상 그리고 역사의 행복한 약속 등으로 차려진 만찬의 후식이어야만 했다. 19세기의 소설가들은 이렇게 잘 짜여진 프로그램을 파괴시켰다. 누구보다도 도스토예프스키를 들 수 있겠다. 그러나 행복과 미래의 함수관계는 별로 신통치도 않았고 진보와 역사의 동일화 작업이 20세기에 국가간의 구별도 없이 무차별하게 파괴되자, 지난날의 강요 사항들은 3가지의 새로운 요구사항으로 대체되었다.

     첫째, 폭력으로 중첩된 폭력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소설을 억압시키려 했으며 전체주의적 목적의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다. 둘째, 경박성의 극단적인 반대로는 라이트 밀즈가 말하는 “즐거운 로봇” 즉 죽을 때까지 웃고 즐길 자세가 되어 있는 소비 사회의 즐거운 로봇을 부양하는 유희 기능을 소설에 부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허무주의적인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감히 소설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그 속엔 텅 빈 거울만이, 즉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주체는 빈 공간이었다. 베케트의 한 인물이 말한다. “나는 존재하지 않지만 행위는 명백하다” 일찍이 바슐라르 가스통은 문학은 문학이 아니고 다른 것이라는 철학, 정치, 사회적인 강요를 간파해 냈다.

     이러한 강요는 곧 정보매체의 강요와 유사하게 나타나, 문학이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정보로 전환되기를 요구하고 있다. 왜 이러한 강요가 있는 것일까? 바슐라르는 이러한 강요를 문학에 대한 경의(敬意)의 표시로 보았다. 과학, 철학, 정치, 윤리와 정보는 근원적이며 심층적인 의미에서 언어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문학은 예술이다. 그러나 과학, 철학, 정치, 정보가 가능해 지는 장소인 말하는 존재의 근원에 위치한 기능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에서 바슐라르는 문학은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는 끈질긴 요구의 원인을 보았으며, 이것이야말로 문학이 현실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던 마르크스는 “물질생산의 발전과 예술생산의 발전 사이에 존재하는 불균형관계”를 말했다. 그러나 “한 작품이 어떤 사회 형태의 단순한 반영으로서 시간을 초월하고 역사가의 이해에 이바지한다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미학적 기쁨을 제공할 수 있는가?”라는 그 스스로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요즘에 체코의 철학자 카렐 코직은 각각의 예술 작품은 “분리될 수 없는 통일체 내에 이중의 특성을 지닌다”는 말로 질문에 답하려 했다. 예술 작품은 현실의 표현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고 불가분하게 작품의 앞이나 옆도 아닌 바로 작품 자체 내에서 현실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은 현실에 전에는 없던 무엇인가를 덧붙인다. 그리고 그렇게 현실을 다시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현실은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으며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객관적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개인적이며 집단적인 주관적 현실은 아니다. 그런 이유로 난 문학의 제3의 차원인 '집단적 주관성'(subjetividad colectiva)을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잘 인지될 수는 없지만 가장 동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주관성이 우리의 집단성 즉 우리의 문화를 구체화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은 창살사이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볼 수 있는 감옥이다. 반대로 예술의 자유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는 데에 있다. 작가와 예술가는 알지 못한다. 단지 상상할 뿐이다. 그들의 모험은 무시하는 것을 말하는데 있다. 상상력은 문학과 예술에 있어 안다는 것의 이름이다. 실제 자료만을 쌓는 자는 세르반테스나 카프카처럼 '보이지 않지만 나무, 기계, 몸처럼 실제적인 현실'을 보여주지 못한다. 소설은 세상을 보여주거나 드러내지 않고 세상에 무엇인가를 더해준다. 세상에 대한 언어적 부가물을 창조한다. 그리고 시간의 영혼을 항상 반영하지만 이와 동일하지는 않다. 역사가 소설의 의미를 고갈시킨다면, 시간과 더불어 소설을 잉태시켰던 긴장된 순간들은 점점 빛을 잃어가고 소설은 읽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단테를 기벨린당(黨)과 교황당간의 정치적 투쟁으로 축소해버린다면, 몇몇 사가들을 제외하고서는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를 그와 아버지와의 관계, 유태교 문제나 애인관계 등 단순히 컨텍스트적으로 이해하려 했을 때에도 카프카의 문학을 즉 그가 반영한 것이 아니고 덧붙인 것으로서의 문학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정보화 과정은 소설의 목소리에 부정적, 긍정적인 양면을 다 지니고 있다. 리얼리즘과 환상주의간의 인위적 경계를 무너뜨리고 소설을 국경 너머 저 멀리 상상과 언어의 공동의 땅으로 내몰아, 소설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소설의 새로운 지형도를 그려냈다. 교황당도 기벨린당도 아닌 소설 나라의 시민들이 예고된 소설의 죽음에 저항해 가장 빛나는 시대를 건설한 것이다. 영어권의 윌리엄 스타이런, 조앙 디디언, 토니 모리슨, 나딘 고디머, 네이폴, 살만 루쉬디 그리고 줄리안 반즈. 스페인어권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후안 고이티솔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페르난도 델 파소 그리고 훌리안 리오스. 유럽의 이탈로 칼비노, 밀란 쿤데라, 귄터 그라스, 토마스 베른하르트, 기오르기 콘라드. 아프리카의 나기브 마푸즈, 소날라 이브라힘, 치누아 아체베, 브레이튼 브레이튼바흐. 아시아의 코보 아베, 아니타 데사이, 베이 다오 등이 그들이다.

     이들을 통해 소설은 영원히 잠재적이며 비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즉 가능성과 절박함으로서의 소설, 현실을 창조하는 소설이 된 것이다. 현실과의 투쟁은 시학적으로 극복되었다. 『백년간의 고독』, 『돈 훌리안 백작의 복권』은 보이는 현실을 받아들여, 쓰여지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현실을 구성했다. 소설의 공동의 땅에는 50년대의 이분법적 갈등구조도 해결된다. 예를 들면 그 어느 누구도 가르시아 마르케스나 쿤데라를 그들의 국적 때문에 읽는 것이 아니고 언어의 소통가능성과 뛰어난 상상력 때문에 읽는 것이다. 현대소설의 보편성은 두 가지를 상실함으로서 더욱 가열되었다.

     하나는 특정 계급과 특정 지역 -유럽의 계몽된 중산 계급- 의 정의였던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개념의 상실이다. 데이비드 흄이 “우리의 이성의 능력과 취향과 감성은 동일하며 변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비코는 역사의 다양함과 문화 다원주의를 들고 그에게 정면으로 도전했다. 다인종적이고 다문화적인 오늘날의 세계는 18세기에 그들만의 보편성이었던 유럽인의 이성과 계몽계급을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유럽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아메리카인들, 모두에게 다원적 보편성으로 만든 개별화된 세계이다.

     두 번째 상실은 바로 이것에서 비롯된다. 헤르데르(Herder)가 역사적 삶은 유럽에서만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대도시문화나 동질의 문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는 구체적일 때만 보편적이 되며, 중심이 없이 우리 모두가 주변인이 될 때 실제적으로 보편적인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멕시코나 아르헨티나에서, 나이지리아나 인도에서 민족주의적 소설가에게 문학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민족적 정체성과 표면적인 연대기를 강요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50년의 멕시코의 한 비평가는 프루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몸을 파는 일(역주: 프루스트의 로마식 철자 Proust와 창녀를 뜻하는 prostituta가 서로 비슷한 점을 이용해 신조어 proustituirse를 만들었음)이라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보르헤스, 레예스(역주: Alfonso Reyes, 1889-1959 멕시코 출신의 중남미문학계의 거장), 레사마리마(역주: 쿠바 시인), 파스, 코르타사르를 포괄하는 세대는 가장 보편적일 때만 민족적일 수 있다는 레예스의 말에 따라 우리를 가르쳐 왔다. 또한 레예스는 멕시코 문학은 멕시코가 아닌 문학이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상상력과 언어를 제외하고 작가는 무엇을 국가에게 제공할 수 있단 말인가? 국가는 상상력이나 언어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20세기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 작가가 사라졌을 때 국가는 말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말을 잃어버렸을 때 상상력은 사라져 버렸다. 말을 억압했던 정치적 구실들은 이성과 정통성 그리고 효율성을 상실한 “음향과 분노” 속에서 결국 자신들을 억압해가며 끝장났었다. 나치즘의 독일, 소련 그리고 군사정권하의 아르헨티나가 그 좋은 예이다. 그밖에도 우리의 잔인한 20세기는 수많은 예들로 넘친다. 다음 세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공산주의의 종말이 불의한 사회를 종식시키지도, 제도와 문화를 그리고 정치적 민주주의를 화합시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50년대의 또 다른 문제였던 정치적 참여와 작가의 무책임성간의 첨예한 대립도 역시 잠재소설이란 새로운 목소리에 굴복하였다. 남아프리카의 나딘 고디머, 검은 아프리카의 아체베나 헝가리의 기오르기 콘라드를 생각해보면, 한 소설가가 첨예한 정치적 투쟁에 참여할 때, 그의 정치적 참여가 언어와 상상력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문학적으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러나 정치적 투쟁이 없다고 해서 한 작품의 정치적 사회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문학적 가치가 클수록, 밀란 쿤데라가 정의한데로, 소설은 인간의 수족을 묶고 벙어리로 만들어 기존 이데올로기의 해법에 따라 처리하지 않고, 인간을 항상 탐구해야 하는 대상으로 재 정의하는 폭넓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소설이 미학적, 사회적 기능과 일치하는 점은 보이지 않는 것, 말하지 않은 것, 소외된 것, 쫓기는 것들을 발견할 때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아니고, 공적 가치와 계속되는 정치적 논리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상승으로서의 진보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는 '예외적인 발견'에 있을 수도 있다. 반대가 아니라 예외적인 것이다. 고전시대와 아직도 진보적 근대성의 규범이 되었던 권력에 대한 역사적 정통성과 작가와의 연합은 이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돈키호테가 승리를 거둔 것이다. 단 하나의 목소리와 독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상상력은 실재로 존재하며 언어는 복합적이다. 트로이에서 더블린에 걸친 긴 여행에서 율리시즈는 승리를 거두었다. 일상세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알려지지 않은 세계는 일상적이다. 오딧세이는 멕시코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항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파노아메리카의 문학, 만차의 문학(역주: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 델 라 만차』에서 유래한 말로 세르반떼스의 문학 전통을 계승하는 문학), 잡(雜)소설, 혼합픽션은 얄팍한 리얼리즘, 선전식 민족주의, 독단적인 참여문학이란 장애물을 극복해야만 한다. 보르헤스, 아스투리아스, 룰포, 오네티 이후 중남미문학은 리얼리즘과 그의 코드를 극복해 왔다. 각자의 글쓰기를 통해 표현되는 다른 역사를 창조해 왔다. 또한 동시에 상처받은 공동체를 재창조하기 위한 계획도 수립해 왔다. 근대세계는 이러한 상처를 공유하고 있다. 소설 『허물벗기』(Cambio de piel)은 이 상처받은 공동체에서 태어났다. 이 소설을 언급하는 이유는 나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중남미 소설과 연관을 짓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투명한 지역』도 『미완의 크리스토발』(Cristóbal Nonato)도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반도시적 언어, 『팔방놀이』(Rayuela)를 생각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

     중남미 작가는 문학의 본질적 역할을 말하고 있다. 언어는 희망의 뿌리이다. 언어를 배반하는 일은 우리 존재의 가장 긴 그림자이다. 언어의 창조로서 아메리카의 유토피아는 광산과 장원에서 자리를 잡았으며 그곳에서 다시 헐벗은 계곡으로 빈민촌으로 잃어버린 도시로 옮겨갔다. 밀림에서 판자촌으로, 광산에서 움막으로 유럽의 언어, 원주민의 언어, 흑인의 언어, 물라토의 언어, 메스티소의 언어 등 수많은 언어들이 흘러갔다. 중남미 소설은 이러한 언어가 풍습과 망각과 침묵에서 빠져나와 혼탁하고 바로크적이며 갈등적이면서도 종합적이고 다문화적인 언어 형태를 수용할 수 있는 역동적인 은유로 변해주기를 요구하고 있다. 중남미문학 전통이 되어버린 이러한 요구는 신발가게의 쇼윈도우 앞에서 기웃거릴 때, 미장원에 들어설 때, 이름 모를 야생 엉겅퀴를 노래할 때, 애인과 밀회를 가는 도중에 그만 산 후안 거리의 교통체증으로 초조해진 루이스 라파엘 산체스가 어쩔 수 없이 F.M.라디오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연속극과 열대의 리듬에 매달리게 될 때의 파블로 네루다의 『지상의 집』(Residencia en la tierra)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문명과 픽션을 잇는 소설의 관계는 아르투로 아수엘라, 구스타보 사인스와 호세 아구스틴처럼 구체적이며 직접적인 존재에서, 엑토르 리베르테야, 세사르 아이라처럼 너무도 사실같은 부재에서, 비오이 카사레스처럼 형이상학적이지만 구체적인 것에서, 루이사 발렌수엘라나 오스발도 소리아노처럼 치명적인 것에서, 엑토르 아길라르처럼 상처받은 자에게서, 앙헬레스 마스트레타처럼 우아함에서, 세베로 사르두이처럼 환희와 탐닉 속에서, 훌리오 코르타사르처럼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점에서, 알프레도 브리세 에체니케(Alfredo Bryce Echenique)의 책명, "마르틴 로마냐의 과장된 삶"에서 보여주는 창조적 아이러니에서 유래한다. 삶을 소설화할 때 브리세는 삶이 원치 않을지도 모를 그 무엇을 추가하며 과장한다. 그의 삶에는 넘쳐흐를지라도 과장, 거짓, 진실, 잠재성이 없이는 빈곤해지는 언어적 상상력이란 부가물을 추가한다. 소설은 과장한다. 덧붙이고 펼치고 늘여 지속토록 한다. 언어가 일상생활을 되찾는 영웅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모범적으로 소설을 쓰는 루이스 라파엘 산체스는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란 공동체적 존재의 유일한 가능성으로 상상력과 소설적 언어의 공유를 들고있다. 그의 사소한 것에 대한 열정은 부족적 열정이다. 『다니엘 산토스라는 이름의 중요성』(La import!!ancia de llamarse Daniel Santos)에서 산체스는 그를 부인하고 우리를 부인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다. 루이스 라파엘처럼 대중적이며 상업적인 문화를 언어적 욕망과 썩어 문드러지는 언어(verbo erosionador) 즉 언어의 부식작용(腐植), 다시 말해서 사랑을 꿈꾸는 언어(verbo-eros-soñador)로 통합시킨다면, 이 문화도 우리에게 해롭지 않다. 리얼리즘, 민족주의, 현실참여문제는 다른 어떤 지역에서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멕시코와 중남미에서 호된 시련을 겪었다. 결국 시학적 불모성으로 판가름 난 독단론에 근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환멸도 곧 겪었기 때문이다. 단 하나만의 현실이나 민족주의 그리고 정치논리는 소설을 불가능하게 한다. 소설은 국가, 언론매체, 정당들 (혹은 이들 셋의 이념주의자들)에 의해서가 아니고, 50년대에 (오늘날에 있어서도) 이들 각자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추구하려 했던 국가적 문화로 이루어진 선택적이며 비판적이고 상상력과 시학적 관점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3가지의 독단론이 줄어들긴 했지만 아직도 우리들의 삶을 죄고 있다. 룰포, 보르헤스, 코르타사르의 복잡한 현실은 졸라식의 자연주의엔 들어 먹히지 않았다. 국가 정체성 확립의 문제로 특히 상처받은 칠레와 아르헨티나란 두 나라의 작가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호세 도노소, 후안 호세 사에르, 마르틴 카파로스의 국가에는 민족주의식 좁은 개념이 들어설 자리조차 없다. 원주민, 흑인, 유럽인, 스페인인, 유태인, 아랍인, 지중해, 혼혈인, 물라토들로 구성된 우리의 거대한 문화에 똑같이 탐욕적이고 지배적이며 폭력적인 미국과 소련이란 살인자 집단의 배타적인 2개의 이데올로기는 들어설 여지가 없다. 과테말라, 칠레, 헝가리, 폴란드, 니카라과, 체코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은 미국과 소련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멕시코의 1968년 사건은 객관적 제도권과 이러한 제도권에 수용되지 않는 다양한 방향으로 끓어오르는 불만족스러운 주관과의 거리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50년대부터 많은 작가들은 관료화되고 기념비적인 국가의 담론을 공식행사로 파묻힌 국가에 대한 상상력의 담론으로 바꾸려고 하였다. 멕시코 혁명의 예언자적 대발견, 끊임없이 갈등하는 기억들과 다양한 기호로 이루어진 일상의 삶, 꿈과 악몽이 반복되는 잠재적 계획, 반권위주의적 계획 그리고 모든 역사가 함께 공존하는 나라에 대한, 특히 내 나라처럼 거대한 복합문화를 지닌 국가에 대한 담론을 추구해왔다. 보편적인 행복을 추구하는데 실패한 근대성(modernidad)은 몇몇에게 행복을 보장해 주기 위해, 그러나 적어도 거의 모든 이의 입을 막기 위해 결국 권위주의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요구에 대한 비판적 글쓰기의 결과로 『아르테미오 크루스의 죽음』 (La muerte de Artemio Cruz)이 잉태되었다. 한 국가는 권력보다 훨씬 크다. 즉 진정한 국가가 이루고 유지하는 문화가 훨씬 큰 것이다. 아메리카에 유고나 구 소련식의 분열이 없는 이유는 국가적 차이가 공식적인 민족국가를 넘어 민중의 부단한 노력으로 문화를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사야 벌린이 지적한데로 모든 민족주의는 한 사회에 부과된 상처이다. 이런 점에서 중남미 소설은 상처와 그 흉터의 담론이다. 게다가 우리의 감상적인 조국은 보르헤스가 지적한 대로이다. 나의 조국은 기타의 박동소리요, 검은 눈동자를 지닌 소녀와의 약속이며, 초저녁의 버드나무 기도소리이다. 이런 말이 남겨주는 감상적 상처는 우리의 시골 촌부들의 가슴을 후려내는 외과의사, 호세 에밀리오 파체코의 시 「고상한 배반」(Alta traición)에 의해 곧 치료된다.

 


    나의 조국을 사랑하지 않소. 그의 추상적인 광채는 붙잡을 수가 없소이다.
    그러나 (불쾌하게 들릴지라도) 내 목숨을 바치리라.
    조국의 10개의 장소를 위해, 어떤 사람을 위해,
    항구를 위해, 소나무 숲을 위해, 요새를 위해,
    버려지고, 회색 빛의 괴물 같은 어떤 도시를 위해,
    역사상의 인물들을 위해,
    산을 위해,
    (그리고 3 내지 4개의 강을 위해).

 

 

    3.


    리얼리즘? 돈키호테가 살과 뼈를 가진 사람들보다 더 현실적이지 않나요? 환상이라고요? 먼저 상상하고 원치 않는 현실이 있단 말이오? 참여예술이라고요? 읽고 바라보는 대상에 참여하지 않는 예술이 있기나 한단 말이오? 순수예술이요? 매일 샛노란 새로운 뉴스는 아니다 할지라도 배제와 망각, 욕망과 회상의 색으로 물들지 않은 예술이 있나요? 현실의 경험을 어떤 특수 형식으로 해석하는가 하는 문제에 답하는 소설의 형식과 내용을 분리할 수 있을까? 모든 소설의 역사는 역사와의 상응이라기보다는 역사를 환기하는 것이 아닐까? 상상의 현실, 한 나라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담론, 일차적 역사를 가능케 하는 이차적 역사를 언어로 창조하는 소설의 임무는 첫째, 다양한 테크닉 개발, 둘째, 열림을 향한 의지, 셋째, 창조와 전통에 대한 의식에 있다.

     첫 번째로 테크닉 개발이다. 『몽유병자』와 『베르질리우스의 죽음』과 같은 소설은 카프카를 화형시키려했던 대중의 합창 앞에 선 우리들에게 일찍이 어떤 기준을 마련해 주었으며 또한 프루스트에 빠져들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 주었다. 헤르만 브로흐(Herman Broch)는 자신의 소설에 서사양식, 수필, 철학, 사회학, 정치와 시를 삽입시켜 등장인물의 가능성을 넓혀 독특한 개성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으로 변화시켰다. 전통적인 리얼리즘양식의 소설을 종식시켜, 환멸적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는 단순한 무(無)로부터 소설을 구출하여 시간의 전달자인 역사적인 다리로 전환시켰다. 브로흐는 카프카가 발견하고 베케트가 확인한 자아의 빈 공간을 메웠다.

     이론적인 면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미하일 바흐찐보다 새로운 양상의 소설을 더 잘 정의할 수 없다. 즉각적인 정보와 세계경제의 통합 그리고 넘치는 통계수치와 표피적인 지식으로 건설된 갈등적 언어들의 시대에서 소설도 역시 이런 언어들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설은 이러한 이질적인 언어들을 한곳으로 불러모으는 경기장이 되어야 한다. 소설은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언어의 만남의 장소이며, 다른 방법으로는 관계 맺을 수 없는 서로 다른 역사적 시간과 문명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필자가 『우리의 땅』(Terra Nostra)을 집필할 수 있었던 판단기준이었다.

     두 번째로는 열림의 의지이다. 문학은 미래와 과거에 열려있어야만 바슐라르의 "말하는 존재의 근원"과 부단한 접촉을 가질 수 있다. 미래를 향한 열림. 물론 소설은 항상 미래를 주시하고 있다.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형식은 『오디세이』에서 『돈키호테』와 『롤리타』에 이르기까지 서술체의 속성이었다. 바흐찐과 오르테가는 서사시와의 차별을 강조했다: 서사시는 종결된 세계를 다루는데 반해 소설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를 다룬다. 소설은 창조되는 과정에 있는 세계를 대변하는 목소리이다. 이러한 소설의 역동적인 개념은 소설 고유의 특성인 장르의 비완전성이다. 아무도 마지막 말을 뱉지 않은 말의 싸움터인 것이다. 역사는 끝나지 않았으며 정의의 왕국은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 소설은 존재가 아니고 과정이다. 난 항상 소설을 개인의 삶과 사람들의 역사와의 교차로로 보아왔다. 『아르테미오 크루스의 죽음』과 『늙은 그링고』(Gringo viejo)는 어느 목소리도, 인물도, 시간도 진리를 독점하거나 담론을 선점하는 경우가 없는 교차로의 미학을 실현하고자 한 작품이다.

     『우리의 땅』, 『먼 가족』(Una familia lejana), 『캠페인』(La campaña) 등 필자의 다른 작품들은 세 번째 제안인 전통과 창조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소설이 완전히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은 과거를 향해 열려있다는 것과 동일하다. 죽어버린 과거 위에 활기찬 미래는 없다. 과거는 살만 루쉬디를 처형하기 위해 율사가 불러들인 엄격하고 신성해서 만질 수 없는 전통이 아니다. 이와는 모든 것이 반대다. 전통과 과거는 현재의 시학적 상상력으로 다루어질 때만 실제적인 것이다. 엘리어트는 「전통과 개인의 재능」에서 현재가 과거에 의해 좌우되듯이 과거는 현재에 의해 변형된다고 상상했다. 이는 바로 문학은 기존의 사건이 아니며 대리석에 후세를 위해 영원히 새겨진 사건들의 기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문학은 과거와 현재가 상호간섭을 통해 끊임없이 변형되는 지속적인 사건인 것이다. 단 하나의 문학작품도 역사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영원히 결정된 적은 없다. 또한 그리된다면 읽혀질 수 없을 것이다. 작품을 창조하는데 필요한 그 어떠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수탉이 울었다, 주전자가 끓었다, 나의 아버지는 폭군이다, 나의 어머니는 경박하다, 내 조국은 분단되어있다, 매주 일요일에 교회에 가기가 싫다. 파리가 날았다 등- 중요한 점은 읽힐 수 있는 사건으로서의 작품의 지속성이다. 다시 말하자면 무엇을 선택하는가에 있다. 소설의 지속성은 한스 로베르토 야우스가 말한 대로 수용성에 달려있다. 또한 수용성은 영향력을 행사해 작품을 동적으로 지배하는 해석에 달려있다. 언어적 상상력으로 미래와 과거를 향해 동시적으로 여는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이 얘기하고 다른 방법으로는 얘기 못하는 것이란 무엇일까? 이것이야말로 로렌스 스턴과 이탈로 칼비노, 데니스 디디로와 밀란 쿤데라, 미겔 데 세르반테스와 후안 고이티솔로가 완벽하게 인지하고 있던 것이다. 즉 소설은 쓰여지기를 바라는 언어적 탐구인 것이다. 이 언어적 탐구는 양적이고 계측적이며 알려지고 보이는 현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고 덧없고 알려지지 않았으며 혼란스럽고 소외되어 있으며 때로는 비관용적이며 속임수를 쓰며 충직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것이다.

     루쉬디를 회교도 율법을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처단하는 것은 소설의 주제가 즉각적인 통신세계(다양한 언어의 격투장)에서 우리와 타자간의 갈등이었던 『악마의 시』의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다. 소설에서 두 명의 힌두인이-그들 중 한사람은 봄베이의 영화 스튜디오에서 상영했던 영화 속의 코끼리 신 가면을 쓰고 있다- 비행중인 제트비행기에서 “파괴된 미로”같은 보르헤스의 “알레프”의 시선으로 본 도시, 런던의 수중으로 떨어진다. 루쉬디의 인물들은 곧 현재사의 가장 보편적인 한 사건을 수행한다. 동양과 남반구의 굶주린 도시로부터 서양과 북반구의 기름진 도시로의 대량이민이란 사건을 말이다. 이렇게 모든 현대 사회의 심장을 통째로 삼기고 있는 은밀하지만 명백한 굶주림을 고발하고 있다.

     루쉬디는 신화, 제의, 욕망, 밑바닥의 삶, 시와 저속한 시, 연극과 웃고 울리는 연속극으로 이루어진 갈등적인 문화의 가방과 함께 이민자들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쌍방간의 필요성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가방은 동시에 종교의 신성함과 독단론 그리고 꿈과 악몽을 담고 있다. 이는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타자와의 만남에서 파생되는 필연적인 비판적이며 상상적이고 유머스럽기까지한 과정의 일부인 것이다. 한 개인이 가져오는 과거의 문명과의 만남에서 우리 자신들의 미래가 결정되리라. 이것은 말해져야 하며 소설이 말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말하고 있는 서술양식의 언어가 지니고 있는 광대하며 갈등적이고 관대한 개념의 소설이 말하고 있다.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과거와의 관계는 근본적이다.

     필자가 인용한 모든 작가들은 쓰여지기를 바라는 것을 쓰지만 아방가르드에서 행했던 것처럼 단순히 새로운 것만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옳고, 종교적으로 수용할 수 있고, 민족적으로 영광스러우며, 감정적으로 편안한 것들, 이 모든 현실적인 것을 포함한다. 그렇다. 다시 한번 돈키호테는 승리를 거둔 것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소설은 가능성의 보편성을 선언한 것이다. 우리 시대의 잠재적이며 갈등적인 문학은 쓰여지지 않았고 읽혀지지 않은 세계를 말하려 한다. 그러나 보르헤스가 잘 이해했던 것처럼 과거의 걸작들은 미래의 한 부분인 것이다. 항상 처음으로 읽히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돈키호테』나 『트리스트람 샌디』는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비록 과거에 쓰여졌지만 현재에 읽히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똑같이 신소설도 과거가 가장 새로운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픽션들』)에서 한 텍스트를 새로 읽는 일은 첫 번째 독자와 다음 독자간에 일어난 모든 일과 함께 텍스트를 새로 쓰는 일이라고 보르헤스는 말했다.

     문학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에 몰입토록 한다. 소설 없는 시간은 있었다. 그러나 시간 없는 소설은 단 한번도 존재치 않았다. 보르헤스는 무한의 시간을 「두 갈래 오솔길이 있는 정원」에서 “확산, 수렴 그리고 평행하는 시간”으로 다루고 있다. 이것들은 타자의 시간이다. 윌리엄 포크너의 간청을 무시했기에 타자가 되어버린 시간이다. “모든 것이 현재야, 이해하겠니? 어제는 내일 끝날 것이며 내일은 만년 전에 시작했지.” 이것들은 개인의 의식 속에서 전통과 창조를 동일하게 받아들이고 유지하는 시간이다. “세기의 무게를 떨쳐버리지 않고서는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어요”라고 버지니아 울프는 『파도』에 적고 있다. 소설 『파도』는 새로운 창조를 고무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전통은 없으며 전통에 자리하지 않고 발전할 수 있는 창조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다 죽었다고 간주했던 장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던 잠재적이고 비판적이며 잡식성의 소설의 교차점은 글쓰기행위 시간과 독서행위 시간의 혼합에 있다. 글쓰기의 시간은 유한하다. 그러나 독서의 시간은 무한하다. 그래서 책의 의미는 우리의 뒷전에 있지 않다. 책의 얼굴은 앞에서 우리를 보고 있다. 피에르 메나르처럼 우리 각자는 돈키호테의 작가이다. 각각의 독자는 유한 행위이지만 잠재적인 글쓰기를 무한 행위이지만 언제나 현재적인 독서로 각자의 소설을 쓰는 것이다. 소설은 답을 구하기보다는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적 질문이다. 동시에 소설은 질문의 예술이며 예술의 질문이다. 인간은 소설 예술보다 더 포괄적이고 창조적이며 외적, 내적이며 객관적이며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면서 집단적인 비판의 도구를 알지 못한다.

     이렇듯 소설은 먼저 자기 자신을 비판하기 때문에 세상을 비판할 자격을 얻는 예술이다. 그리고 가장 저속하고 구태의연하고 상식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비판한다. 언어는 모든 사람의 것이거나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영원한 질문, 소설은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답은 취약한 독서에서 구할 수밖에 없으리라. 폭넓지만 다른 답과 쉽게 동화되고 대립되는 취약한 답에서 말이다. 자유는 영원히 도달할지도 모를 자유에 대한 탐구이며, 그 탐구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소설에 대한 탐구, 이차역사에 대한 탐구, 다른 언어에 대한 탐구 그리고 상상력에 기초한 지식에 대한 탐구는 결국 독자와 독서에 대한 탐구이다. 이는 벌을 받지 않는 해악이라고 독자를 창조하는 소설을 존경하는 앙드레 지드는 말했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더 좋아하도록 가르쳐 주는 사랑의 행위이다. 그리고 또한 자기 자신과 황홀한 대화를 나누도록 가르쳐 주는 이기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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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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