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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14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82 by 아데라

바람의 아들
장혜영


 
                                           
                                                                          2

 

 오후부터는 가는 진눈깨비가 날릴거라던 날씨정보가 실감나게 하늘은 아침부터 흐리터분하다. 축축한 수분을 잔뜩 머금은 공기는 낮게 드리운 채 지면을 압박하고 있다.
 이런 날이면 정도는 보통 아침출근을 늦게 한다. 그러나 며칠 내로 사진집교정을 끝내어 출판사에 교부해야 했기에 일찍 집을 나섰다.
 골목을 나와 81번버스종점 부근에 이른 그는 무심결에 약국 앞에 서서 23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파랑을 발견했다. 출산을 한 달  앞둔 그녀의 배는 헐렁한 코트를 걸쳤지만 가리지 못했다. 운신이 불편한데 어깨에 무거운 카메라백까지 걸친 걸로 보아 야외촬영을 떠나려고 나선 것 같다. 주간지 관광코너 사진기자인 그녀는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까지도 산전휴가를 마다하고 사업에만 열중이다. 정도가 그만 휴식하라고 권고했지만 아직 출산일까지는 한 달이나 남았다면서 고집을 부리고 있다.
 “파랑 씨.”
 정도는 버스에 막 승차하려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 몸으로 어딜 가시려고 나선겁니까? 날씨도 흐리터분한데……”
 “네. 선생님. 북한산에 좀 다녀오려고요.”
 파랑은 한 발을 가까스로 버스승강대에 올려 놓으면서 정도를 돌아 본다.
 정도는 일단 그녀의 어깨를 잡아 버스에서 내리게 했다.
 “북한산엔 뭐하려고요? 동네에서 다니는 것도 걱정되는데 산행까지 하려고요!”
 “주간지에 기고할 사진 몇 장을 찍으려고요. 봄을 알리고 싶어요. 「북한산의 진달래」라는 사진을 찍어 독자들에게 봄을 선물하고 싶어요.”
 파랑은 출발하려는 버스 쪽에 자꾸만 시선을 준다.
 “그런 일이라면 제가 대신해도 되지 않습니까. 걱정 말고 집에 계세요.”
 “성의는 고맙습니다만 이번 만큼은 제 손으로 찍고 싶어요.”
 “북한산엔 진달래가 많지도 않은데……”
 “그래도 찾아보면 있을 거예요. 아저씨. 잠시만요. 저도 탈거예요.”
 버스가 문을 닫으려고 하자 파랑은 운전기사를 향해 손을 젓는다.
 “아니, 그냥 출발하세요. 저희들은 타지 않을 겁니다.”
 정도는 파랑의 앞을 막아서며 주춤거리는 운전기사에게 그냥 떠나라고 손짓했다.
 “왜 그러세요. 저 버스를 떠나 보내면 또 5분을 기다려야 하는데요.”
 “굳이 오늘이여야 합니까? 오후에는 진눈깨비가 내린다는 굳은 날에.”
 “꽃은 때가 있고 철을 놓치면 아름다움 역시 의미를 상실하는거잖아요.”
 “정 가시려면 제가 모시고 가죠. 제 차로. 버스는 복잡한데다 갈아타야 하는 불편함까지 있잖습니까.”
 “23번을 타면 직접 우이동까지 가는데……”
 “글쎄 버스는 안 됩니다.”
 “사진관은요?”
 “하루쯤 문 닫는다고 망하겠습니까. 요즘은 손님도 얼마 없습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집에 얼른 가서 차를 끌고 나올 테니까요.”
 정도는 급히 오던 길로 돌아섰다. 거의 달음박질쳤다.
 “어디 가지 말고 꼭 여기서 기다려야 합니다.”
 가다가 다시 돌아서서 재삼 당부했다.
 다행이도 차를 몰고 올 때까지 그녀는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무거운 몸을 운신하여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불편을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자신의 몸이지만 다 커버린 복중태아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승인하든 말든 그 복중태아의 아버지는 정도이다. 그래서 정도와 함께 가는 것이 뱃속아기를 위해서도 가장 좋은 선택일 것이다. 두 사람은 다 태아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영아의 존재는 한 순간도 그들의 의식 속에서 사라진 적이 없었다. 부풀어 가는 꿈이기도 했고 눈 덩이 굴리듯 커만 가는 불안이기도 했다. 복중태아가 불행일지 행복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두 사람에게는 귀중한 존재였다.  
 “어디로 가실겁니까?”
 파랑을 부축하여 앞좌석에 승차시킨 후 돌아와 운전대에 앉으며 정도는 넌지시 물었다. 북한산이라고 말은 한마디지만 도봉, 우이, 수유, 구기, 송추 등 관광지와 등산코스가 한두 곳이 아니었다.
 “가까운 정릉으로 가요.”
 “정수폭포부근에 벚꽃은 볼만하지만 진달래는 본 기억이 없는데요.”
 “일선사 쪽으로 썩 올라가노라면 있을거예요.”
 “일선사까지나요. 그 가파른 산비탈을 어떻게 올라간다고. 몸이 성한 사람도 한 시간이 넘어 걸릴 텐데요. 보현봉까지 거의 다 올라가야 하잖습니까.”
 “그러니까요. 보현봉 근처 바위산 어디 쯤에 있던 걸로 기억해요. 진달래는 바위산에 많거든요.”
 “그 몸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파랑은 대답이 없다.
 정도는 한번도 그녀의 고집을 꺾어 본적이 없는지라 방법은 목적지에 도착해서 강구하기로 하고 우선 차를 출발시켰다. 친구 준범이까지 자살로 내몬 여자이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녀가 고집을 부리거나 지독한 집착을 보일 때는 섬뜩 하는 마음이 저도 모르게 지난 기억을 불러들이곤 했다. 친구의 원수를 갚기는커녕 죄를 감춰주고 상전처럼 모시고 다니는 자신이 가끔 미워지기도 했지만 파랑에 대한 호감이 그의 온 마음을 정복하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손발을 꽁꽁 묶여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날씨가 음산해서인지 아직 이른 봄꽃추위 때문인지 정릉공원에는 관광객들이 희소했다. 배낭등산객들의 모습이 간혹 보일 뿐 공원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매표소에 입장권을 끊으러 가며 정도는 파랑과 타협을 시도했다.
 “청수폭포에서 기다리세요. 사진은 제가 올라가서 찍어올 테니까. 혹 저의 촬영수준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겠죠.”
 “믿지 못해서가 아니에요. 선생님은 프로작가시고 또 제 스승이잖아요. 그냥 이번 사진만은 제 손으로 찍고 싶어서요.”
 마지막 타협가능성마저 무산되고 말았다. 파랑은 마음만 먹으면 실행에 옮기는 강인한 여자였다.
 공원 입구에 들어서자 파랑은 초입부터 걷기가 힘들어 하면서도 기어이 앞장을 선다.
 청수폭포는 상류에서 녹아 내린 얼음과 눈석임물이 합세해 유량이 더 커져 자그마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물줄기가 바위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좁은 계곡을 들썽하게 흔들었다. 정릉계곡을 타고 오르는 냇물 가에는 벌써 벚꽃들이 희끗희끗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한 달도 못되어 계곡 전체가 벚꽃 바다로 출렁이고 꽃향기가 진동할 것이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갈까요?”
 한 번 더 그녀를 주저앉히려고 유도해 보았지만 파랑은 벌써 그의 의도를 눈치 챈 듯 아예 다리쉼마저 거절한 채 혼자서 기우뚱기우뚱 비탈길을 오른다.
 “여자가 무슨 고집이……”
 못마땅하게 여겨져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으나 다행이도 폭포소리가 말소리를 닁큼 삼켜버린다.
 겨우 청수천까지 올라오자 파랑은 온몸이 땀투성이가 된 채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인젠 정도가 옆에서 부축해주지 않으면 한걸음을 옮기기도 힘겨워 했다. 그런데도 파랑은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런 속도로 움직이면 일선사는 고사하고 삼봉사. 영추사까지 가는데도 두 시간은 걸릴 겁니다. 길에서 시간을 다 허비하고 사진은 언제 찍는거죠. 진달래도 보이지 않고.”
 “두 시간이 아니라 네 시간이 걸려도 사진을 찍을 시간은 충분해요. 전 벌써 진달래를 보았거든요.”
 “그게 몇 가지나 된다고……”
 “조금만 더 올라가면 보일 거예요. 북한산의 진달래를 보기가 아니, 봄을 만나기가 그렇게 쉽기만 하겠어요. 이렇게 힘들게 찾아가서 만나야 의미도 그만큼 깊을 거잖아요. 더구나 우리 아기는 처음 보는 진달래고 봄이잖아요.”
 그녀의 얼굴에 엷은 홍조와 함께 행복의 미소가 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보기 드물게 밝은 표정이어서 그녀의 희망과 기대를 헐어내고 싶지 않았다.
 백 미터도 못가 휴식을 거듭하면서 장장 네 시간이나 소모하고서야 일선사 뒤 능선에 겨우 등반할 수 있었다. 보현봉으로 오르는 령 길은 가파르고도 험준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업을게요.”
 파랑도 더 이상 걸을 맥이 없었던지 사양하지 않았다. 홀몸으로도 오르기 힘든 령 길을 임신부까지 업고서 오르려니 여간만 힘들지 않았다. 삽시에 온몸이 땀에 흠씬 젖어 물자루가 되었다.
 “저길 보세요. 저기 바위산에 진달래가 있잖아요. 제법 큰 숲을 이루고 있네요.”
 불현듯 등에 업힌 파랑이 어린애처럼 환성까지 지른다.
 그러나 그녀가 가리킨 바위산 쪽을 바라보던 정도는 저도 모르게 울상을 짓고 말았다. 그곳으로 가려면 길도 없는, 가시덤불을 헤쳐야 했고 게다가 깊은 골짜기를 건너고 바위산을 톺아 올라야만 했던 것이다.
 “인젠 정말 안 되겠습니다. 파랑 씬 여기서 망원렌즈로 촬영하세요. 근경촬영은 저한테 맡기시고요.”
 “안돼요. 여기까지 힘겹게 왔다가 코앞에서 주저앉을 수는 없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 혼자서라도 갈 수 있으니까요.”
 파랑은 먼저 일어나 깊은 골짜기로 이어진, 경사가 가파른 깊은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정도는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두 대의 카메라와 삼각대, 여러 개의 렌즈를 담은 배낭만 해도 엄청나게 무거웠다.
 “제 등에 업히세요.”
 “괜찮다니까요……”
 “업히라니까 그러시네요.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전 책임지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화내시는거죠? 지독한 여자 만났다고. 여자란 게 왜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않냐고요.”
 “그래요. 화났습니다. 그러니 성을 내기 전에 순순히 업혀요.”
 “무거우실 텐데……”
 “지금까지도 업고 올라오지 않았습니까.”
 숲 속에 들어섰다. 가파른데다 썩은 나뭇잎들이 깔린 지층이 습기까지 축축해 무척이나 미끄러웠다. 천신만고를 하여 계곡을 넘었지만 이번엔 또 커다란 암석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간신히 톺아 오르던 중 그만 이끼에 발이 미끄러지며 아래로 쭈르륵 떨어져 내려갔다. 
 “앗!”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어느 순간엔가 잔등에서 뿌려나간 파랑이 비탈 아래로 저만큼 굴러 떨어졌다.
 “파랑 씨!”
 황망하게 소리 지르며 정도는 엉덩이로 줄줄 미끄럼질해 내려갔다.
 파랑은 집채 만한 암석 밑에 굴러 떨어진 채 배를 부여안고 연신 신음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이로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양미간을 찌푸린 모습이 통증이 극심한 모양이다.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아니, 괜찮아요. 복부가 암석 귀퉁이에 부딪쳤나 봐요. 좀 있으면 괜찮을거예요. 어서 올라가요. 인젠 다 왔잖아요. 카메라는요?
 “지금 카메라가 중요합니까. 이러다가 낙태라도……”
 불길한 말이라 허리를 뭉텅 잘라 목구멍으로 꿀떡 삼켜버리고 말았다.
 다시 암반 위를 톺아 오르기 시작했다. 아픔을 참느라고 그러는지 파랑은 줄곧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몸이 성한 정도도 손이며 다리며가 긁혀 피가 흘렀다. 파랑은 아마 그보다 더 혹독하게 상해 있을 것이 틀림없다.
 무정한 진달래는 묘하게도 바위산 꼭대기의 자그마한 공지에 소담한 숲을 이룬 채 빨갛게 피어 있었다. 주위의 암반 밑에는 아직도 적설과 어둠이 두텁게 깔려 그곳으로부터 서늘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는데도 굴하지 않고 황홀한 자태를 한껏 자랑하고 있다.
“얼마나 아름다워요. 북한산 암반 위에 핀 진달래……앗!”
 말을 하다말고 파랑은 또다시 배를 움켜쥐더니 바위 위에 주저앉아 허리를 꼬부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심하게 다치신 게 아닙니까?”
 “조금만 참으면 괜찮을거예요. 조금만……먼저 사진을 찍으세요.”
 이번에는 퍽이나 오랜 시간 몸을 옹송그린 채 일어나지 못한다. 한참 뒤에야 일어서긴 했지만 허리는 여전히 곧게 펴지 못하고 구부정한 채로다.
 제발 무슨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할 텐데.
 정도는 말은 못하고 속으로 빌었다. 웬일인지 마음이 불안해진다.
 기상예보의 정확성을 확인이라도 하는 듯 진눈깨비가 펄펄 날리기 시작했다. 벌써 오후시간이 된 것이다. 이런 흐리터분한 날씨가 카메라촬영에는 더 없이 좋은 찬스이지만 정도는 그 보다는 산을 내려갈 근심이 태산 같았다. 진눈깨비까지 날리면 길이 더 미끄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파랑은 허리를 구부정한 채 사진을 박기에 여념이 없다. 그 모습이 천진난만해 보이기까지 한다. 누가 동심에 빠진 저 여자가 한 사람을 죽음에로 몰아넣었다고 상상이나 하랴. 정도가 보기에 그녀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고 진달래도 그녀의 미모에는 무색하여 고개를 떨어트리는 것 같았다.
 “그만 찍고 하산합시다. 진눈깨비가 점점 더 많이 내리는군요.”
 “조금만 더요. 눈이 내리는데, 눈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난 진달래! 얼마나 멋지고 낭만적인 순간이에요. 하늘이 절 도와주는 거예요. 이런 운치 가득한 순간을 만나려고 해도 만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파랑은 자신이 휴대한 필름 네 개를 다 사용하고도 모자라 정도의 필름까지 두 개를 더 가져갔다. 때로는 각도를 바꾸고 때로는 렌즈를 바꾸고 때로는 셔터와 조리개조절을 바꾸며 찍고 또 찍는다. 슬로셔터촬영으로 눈발의 동감을 충분히 나타내려고 애썼다. 눈발의 동감과 진달래꽃송이의 색감과 꽃대와 바위들 그리고 이끼의 질감, 원근감, 심도, 노출……이런 촬영기법들을 인제는 정도가 가르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적용해 나간다.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총명하기까지 한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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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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