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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19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15 by 아데라

바람의 아들 15
장혜영


 도로를 따라 남진하는 인민군은 산길을 헤쳐야 하는 국군보다 더 먼저 이동하여 521고지를 선점했다. 그러나 그들은 척후병인 듯 소규모의 부대였다. 중대의 공격에 적의 방선은 저항 한번 변변히 못해보고 금방 무너졌다.
 드디어 박병술은 군인답게 총을 발사해보았고 구겨진 군인의 체면도 만회할 수 있었다. 공격전에서 그는 소대의 선두에서 능선을 향해 돌격했다. 적의 총탄이 귀뿌리를 쌩쌩 스쳤지만 그는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늑대 같이 험악하기만 한 민병기 소대장의 무서운 독전 때문만은 아니었다. 죽은 전우들에게 살아있다는 것이 미안했고 그들의 몫까지 싸워야겠다는 군인의 사명 같은 것도 어렴풋이 있었던 것 같다. 패퇴의 수치감에서 해탈하여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감정 같은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박병술은 분명히 목격했다. 진지를 버리고 도망하는 적군의 등을 향해 발사한 그의 사격에 인민군전사가 금방 풀썩하고 땅바닥에 꼬꾸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박병술이 난생처음으로 죽인 사람이었다. 옹진지구전투에서도 개인적으로 적군을 살상해본적은 없었다. 가슴에서 솟구친 선지피가 초록색 인민군군복을 흥건히 적시는 모습을 보며 박병술은 갑자기 발작하는 구토로 위장 속의 음식물을 왈칵왈칵 토해냈다. 적군은 두 눈을 뜨고 있었는데 흰자위만 번뜩거렸다. 두 다리와 팔은 한동안 푸들푸들 경련했다.
 “이 자식은 사람이 아니라 적군이야. 빨갱이 새끼지. 잘 죽였어. 개새끼, 돼지새끼를!”
 어느새 소대장이 등 뒤로 다가와 박병술의 어깨를 툭 치며 격려한다.
 사람이 아니라 빨갱이 새끼! 사람이 아니라 빨갱이 새끼!
 박병술은 연신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군홧발로 시체의 엉덩짝을 걷어찼다. 그러나 적군의 얼굴은 아무리 내려다 봐도 자신과 꼭 닮은 10대의 앳된 청년이었다. 순박하고 천진하기까지 했다.
 생긴 건 같아도 속은 다르겠지. 속이 빨갱이겠지. 개자식! 개새끼!
 박병술은 저도 모르게 악에 받쳐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다. 다리가 부러진 병사와 창자가 복부 밖으로 길게 흘러나왔던 전우가 생각나며 적개심을 격증시켰다.
 그러나 저녁 무렵에는 대대지휘소로부터 중대더러 현리남쪽 엄수동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대대는 자은리에서도 철수하여 홍천 북방 큰말고개에 방어선을 형성한 연대지휘부와 교신마저 단절된 채 오미재 일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28일 오후에는 현리, 오미재, 서곡리, 부목재를 경유하여 홍천으로 이동하여 연대지휘부와 합류하였다. 관대리 남쪽 38교 방어지점에서 인민군12사단의 공격을 2시간이나 지연시킨 1대대와 2대대는 이미 큰말고개방어전투에 투입되었다.
 28일에는 7연대방어구역인 원창고개와 2연대방어구역인 큰말고개를 향해 잠시 진격이 느슨해졌던 적군의 맹공격이 재개되어 아군의 전세가 불리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인민군은 전차와 SU자주포를 앞세우고 큰말고개를 공격해 왔다. 마침 2연대를 지원 나온 16포병대대의 포사격이 적의 전차와 보병을 분리시키고 57mm대전차포로 전차를 파괴함으로서 적의 공격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 일단 공격을 좌절시키는데 성공했다. 
 큰말고개는 우측방의 화양강이 흐르는 철정리에서 성산리의 작은 말고개에 이르는 남하도로를 차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요충지였다. 동쪽산자락 밑으로는 금방 모내기를 끝낸 푸른 논벌과 강우에 불어나 검푸른 화양강이 보이고 서쪽 고개 밑으로는 큰박골에서 새말에 이르는 좁고 긴 논배미들이 보이는 능선길이다.
 인민군은 반드시 이 고개를 지나야 하는 전략적요충지이기도 했던 만큼 국군의 사수의지도 그만큼 강했다. 적군의 새로운 증강공격에 대비하여 사단사령부에서는 홍천에 금방 도착하여 휴식도 취하지 못한 3대대를 즉시 큰말고개방어선의 남측방 성산리지역에 긴급 투입했다.
 박병술이 소속된 A중대는 대열수습도 못한 채 다시 북방전선으로 이동해야 했다. 비상상황이었던 만큼 연대와 대대의 군용트럭을 동원하여 이동속도를 높였다. 박병술은 오래간만에 연대부에서 제공한 급식을 포식한 뒤라 몰려드는 식곤을 이기지 못해 트럭위에서 끄덕끄덕 졸았다.
 중대가 성산리에 도착한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성산리의 작은 말고개는 점말과 새말을 낀 해발이 그리 높지 않은 산등성이었다. 동쪽기슭으로는 화양강이 에돌아 흐르고 남쪽 개활지에는 성산논벌이 푸른색을 띤다.
 중대는 행장을 풀기 바쁘게 참호구축작업에 착수했다. 여기저기서 잘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야전용 삽날이 돌멩이에 부딪치며 불꽃이 반짝반짝 튕겼다. 적의 공격이 언제 재개될지 모르니 급히 서둘러야 한다.
 “말고개 귀신이 되지 않으려거든 좀 더 깊이 파. 포탄 한발에 무너지지 않도록.”
 민병기 소대장은 힘에 부쳐 잠시 앉아 휴식하는 소대원들의 엉덩짝을 군홧발로 걷어차며 부산스레 참호구축작업을 독려했다.
 “이놈아. 넌 철모는 어떡했어? 갑자기 적탄이 날아오기라도 하면 이마빼기에 구멍이 뻥 뚫리려고 이렇게 너희 집 안방처럼 방심하고 있어.”
 민병기 소대장은 손에 든 채찍으로 박병술의 더부룩한 뒤통수를 철썩 후려쳤다.
 “현리전투에서 잃어버렸습니다.”
 “자식. 대갈통은 잃어버리지 않았어. 자 받아.”
 소대장은 자신의 철모를 훌렁 벗어 박병술에게 건넨다.
 “소대장님은 ……”
 “난 죽지 않아. 총알도 날 피한단 말이야. 괜한 걱정 말고 뒤집어쓰기나 해. 대신 제발 뒈진 꼴은 보이지 마. 구역질이 나니까.”
 부하의 머리에 푹 뒤집어씌워주고는 저쪽으로 성큼성큼 가버린다. 철모가 어찌나 큰지 눈 등까지 푹 내리 덮인다. 땀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런데도 박병술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입만 뻥끗하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악의적이고 거친 욕설과는 전혀 다른,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계곡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에 민병기 소대장의 긴 머리카락이 깃발처럼 펄럭거렸다.
 참호구축작업이 마무리될 때까지도 전방에서는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작업은 밤늦게야 끝났다. 전쟁터답지 않은 밤의 고요와 정적 속에 이름모를 벌레들의 울음소리와 산 아래로 흘러가는 화양강의 물소리만 또렷하다.
 구름 한점 없이 맑은 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박병술은 M1소총을 품속에 껴안은 채 참호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하염없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평화롭고 아늑하기만 한 분위기다. 이 땅에 불과 며칠 전에 전쟁이 발발했고 사람들의 피로 얼룩졌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그리고 이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도 꿈만 같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낯익은 소대원이 아닌 전혀 생소한 얼굴들이다. 죽었다는 건 잠시 곁을 비웠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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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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