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아들
장혜영


 “잘했어. 짜식!”
 민병기 소대장은 땅바닥에 너부러진 적군의 등에 총창을 푹 꽂았다가 슬쩍 비틀어 빼며 칭찬한다. 뜨거운 피가 분수처럼 쫙 뿜겨져 올라와 두 사람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비린내가 확 풍겼다. 민병기 소대장은 입안에 튕겨 들어간 핏방울을 퉤퉤 땅바닥에 뱉어냈고 박병술은 한참이나 허리를 구부리고 마른 구토를 했다.
 “자, 인젠 뛰는 거야. 죽기내기로. 병서에는 도망가는 것도 군사계략 중의 하나라고 했으니까 군인은 싸울 줄도 알고  도망갈 줄도 알아야 해. 36계 줄행랑이라는 말 들어 봤지?”
 “네.”
 “뒈지면 안돼. 알았지. 등신 같은 놈아.”
 가시덤불에 얼굴이 할퀴어 피가 흘렀고 나무그루터기가 군화 밑창을 뚫고 들어와 발바닥을 따끔따끔 찔렀지만 그런 걸 아랑곳 할 경황이 없었다. 오로지 남쪽방향을 향해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달렸다. 엎어지고 뒹굴고 했지만 달음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살아야 해. 똥 무더기위에 굴러도 살아야 한다고 이놈아!”
 “그런데 소대원들은 다들 어디 갔습니까? 소대장님과 저만 달랑 남았으니 말입니다.”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통에 말마디들은 토막토막 동강났다.
 “뒈질 놈은 뒈졌을 거고 살 놈은 살았을 테지. 지금은 남을 생각할 때가 아니야. 우리부터 살고 봐야지. 살아야 저놈들과 또 싸울 거잖아.”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지금처럼 집착해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전쟁 첫날 현리에서의 포격과 철수 때에도 삶에 대한 집착보다는 공포와 두려움이 더 컸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박병술은 삶에 대한 미칠 듯한 미련에 휩싸여 있었다. 진지를 버린 군인, 패주병, 군인의 사명감을 망각했다는 생각 같은 건 아예 느끼지 못했다. 삶의 의욕은 그의 의식과 행위의 모든 과정을 지배하는 신비한 위력과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다. 그냥 본능 그 자체뿐이었다. 살아남는다는 것보다 더 큰 의미와 진리가 있으랴 싶은 자기변명 같은 것도 없었다.
 갑자기 주위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박병술이네가 입을 다물었을 때는 이미 상대방이 그들의 인기척을 포착한 뒤였다.
 “서라! 도망치면 쏜다. 꼼짝 말아!”
 등 뒤에서 몇몇 군인이 강한 이북말씨로 외치며 뒤쫓아 왔다.
 “쏠 테면 쏴라. 누가 무서워 할줄 아느냐. 개새끼들아!”
 민병기 소대장은 죽음을 눈앞에 둔 위기상황이라기보다는 전쟁유희에 심취한 어린에 같다. 달리면서도 연신 적군과 신나게 설전을 벌인다.
 “악질 반동새끼들! 어디 죽어봐라!”
 따따따- 따따따-
 기관단총연발사격소리가 귀청을 찢는 순간 민병기 소대장은 박병술의 등을 콱 떠밀며 땅바닥에 엎드렸다. 마침 그들 앞에는 가파른 비탈이 막아섰다. 무작정 비탈 아래로 몸을 내던져 데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총탄이 연이어 그들이 굴러 내려간 뒤편 땅바닥에 푹푹 박혀들었고 더러는 바위에 맞으며 새파란 불꽃을 튕긴다.  
 “난 죽지 않아. 총알이 날 피한단 말이야.”
 민병기 소대장은 지어 너털웃음까지 껄껄 웃어댄다.
 그렇게 뒹굴다가, 소대장의 너털웃음소리를 듣다가 박병술은 갑자기 육신이 허공중에 번쩍 떠오름을 느꼈다. 어딘가로 높이 떠올랐고 그 다음은 급속하게 아래로 추락했다.
 “이놈아. 어딜 가? 거긴 낭떠러지란 말이야. 저 바보, 등신 같은 자식! 뒈지지 말라는데 끝내……”
 민병기 소대장의 목소리는 점점 귓전에서 멀어졌고 드디어는 들리지 않았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박병술은 거대한 충격을 느끼며 의식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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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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