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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9.27 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연재 19 by 아데라

이 작품은 계간 "문학시대"82~83호에
분재되었던 소설입니다.

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연재 19

 


 
 
 
“늦은 시간인데 그만 숙사로 돌아가 쉬세요.”
 
“커피 한잔만 마시고 가면 안 될까?”
 
본격적으로 흥정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내가 널 사경에서 구해주었으니 그 은혜에 결초보은을 해야 할게 아니냐는 노골적인 청탁임을 그녀가 어찌 모르랴.

설마 거기까지……
 
두려웠지만 그쪽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의식의 물줄기를 비틀었다. 사실 그동안 한두 번만 시도한 것이 아니었다. 기회만 있으면 드뇌브는 윤미를 품안에 넣고 침대위에 굴리려고 했었다. 그때마다 윤미는 때로는 달래기도 하고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며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곤 했었다. 언젠가는 그에게 당하고야 말 처지였지만 그 한번이 영원으로 이어지고 그 영원이 그녀의 피를 오염시키고 정체성을 파괴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지난번에는 취중의 용기를 빌어 불륜의 오명도 무릅쓰고 성진과의 유대를 유도했었다. 그러나 그마저 드뇌브의 간섭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다시 또 성진 씨와 만날 수 있을지도 막연한 상황이다.
 
“피곤해요. 혼자 있고 싶어요.”
 
“딱 한잔만 마시고 갈 겁니다.”
 
방 키까지 휴대하고 있는 드뇌브를 강제로 쫓아낼 수도 없었다.

성진 씨! 동자스님! 전 어떡하면 좋아요?
 
윤미는 바야흐로 닥쳐오는 폭풍우를 예감하며 공포에 전율했다. 오늘로서 혈관 속을 흐르는 피는 더럽혀지고 마는구나 싶어 절망감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인당동자스님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그나마 추억 속에서일망정 사모할 수 있게 했던 순결을 잃으면……
 
아니나 다를까 방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드뇌브는 등 뒤로부터 덮쳐들며 그녀의 허리를 덥석 껴안았다.

“왜 이러세요?”
 
“사랑합니다. 어차피 결혼할 거 아닙니까. 결혼하면 줄리아 씨는 내 아내가 될 거고요.”
 
“결혼한 다음에 그러기로 약속했잖아요.”
 
이미 사내의 불타오르는 정욕을 막을 수 없다는 예감은 그녀를 절망하게 했고 대책 없이 허둥지둥하게 만들었다. 화롯불 같은 숨결에 귓불이 델 지경이었다. 어느새 거친 손아귀가 윤미의 젖가슴을 후비적후비적 파고들었다.
 
숨이 끊어지는 듯 했다. 드뇌브는 아예 그녀를 번쩍 안아들더니 침대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이러면 안돼요. 오늘은 안돼요.”
 
평소 수다스럽던 드뇌브는 흥분에 목구멍이 다 멘 듯 말 한마디 없다. 황소처럼 씩씩거리며 침대로 다가가더니 그녀를 시트위에 털렁 내던진다. 그리고는 화들화들 떨리는 손으로 저고리며 셔츠를 훌렁훌렁 벗어던진다. 가슴팍의 수북한 털이 드러나는 순간 윤미는 이제는 꼼짝 없이 당했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아찔해났다. 그러나 그 순간 기적적이게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인당동자스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목탁소리도 들려왔고 염불소리도 들려왔다. 그리고 멀리 의식의 기슭에 성진의 모습도 보인다.
 
이렇게 당해서는 안돼. 어떻게 해서라도……

“드뇌브 씨. 우리 이대로 하지 말고 술이라도 한잔 더 마신 다음 무드 있게 즐겨요. 긴 밤에 서두를 것도 없잖아요.”
 
“정말 허락하는 겁니까?”
 
“허락할 테니까 서두르지 말아요. 천천히……”
 
“좋습니다. 그럼 술부터 마십시다.”
 
그녀는 그 틈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셔츠를 여며 터진 가슴을 가리고 찬장 안에서 위스키 한 병을 꺼내들고 식탁으로 다가갔다. 이제 그녀에게는 드뇌브를 술에 녹초가 되게 하는 마지막 수단밖에 없었다. 수욕만족이 한시 급한 그는 시간을 당기기 위해 주는 대로 술을 받아 마실 것이 틀림없다.

 

 

 

 
 
 
 
6
 
 

 

 

나는 일요일만 되면 늦잠 자는 버릇이 있다. 이불속에 꾹 틀어박혀 점심때가 되어도 배가 고프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자다가 깨고 깨었다가 자고……

그러나 그렇게 늦도록 뜨끈한 이불속에 박혀있노라면 하나의 욕망이 내 육신을 괴롭혀 오기 마련이다. 꿈인지 환각인지 종잡을 수 없는 무의식은 지저분하게 여자들의 치마꼬리를 잡고 이리저리 끌려 다녔고 손은 저도 모르게 신체의 어느 부위인가를 더듬고 있다. 자애라고 해야 할지 자학이라고 해야 할지 한바탕 음욕과의 전쟁을 벌이곤 한다.
 
번마다 의지는 욕구의 공격에 수세에 몰려 굴복하고 치사한 자위행위를 하도록 육신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나는 육체의 밑바닥 어딘가에서 불물처럼 이글거리는 성욕을 축출하려고 오디오를 튼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이다. 돌발적인 흥분을 냉각시키고 마음의 평온을 복구할 때면 듣곤 하는 명곡이다. 죽음과 절망과 불우한 운명에 대한 공포, 비애, 체념이 그 비장한 멜로디에서 무시무시하게 흘러나온다. 불안하고 초조한 음색의 호른연주, 거칠고 어두우면서도 우울하기까지 한 G현의 바이올린연주는 풍선처럼 잔뜩 부풀어 오른 육신을 움츠러들게 하기엔 충분한 냉기가 서려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치열한 전쟁에서 이기는 쪽은 언제나 의지가 아닌 욕구였다. 결국 나는 찬 서리가 내리는, 공포의 폭풍우가 몰아치는 침통한 음악소리 속에서도 숯불처럼 꺼지지 않는 끈질긴 성욕에 풀무질을 하며 자위행위를 즐기기에 이른다. 쾌감을 느끼는 순간에 떠오르는 모습은 강원도 오지의 어느 민박에서 있었던 은정과의 광란의 정사였다. 기억 속의 그녀의 나신은 인제는 윤곽마저 희미했지만 아직도 내 수욕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녀는 내 품안에서 나신을 비틀며 신음소리를 연발했다.

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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