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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8.25 장편연재 "붉은아침"11 by 아데라

장편연재 "붉은아침"11
제1부 백년빙곡冰谷

장혜영



                                 

 

                                      
                                         
5장 사랑과 이별




                                            2


 준호와 진옥이네 집은 광복 이전부터 강촌마을에서 살았다.
 두 집 다 지주 한상권의 땅에 명줄을 걸고 살아가는 소작농이었다.
 최복만과 칠성이는 서로 형님, 동생하며 피붙이처럼 가깝게 지냈다. 그러다가 두 집 사이가 멀어지게 된 건 광복이 되던 해 여름에 발생한 뜻밖의 사건 때문이었다. 산에 외양간 재목감 하러 갔던 최복만의 맏아들 덕민이가 부상당한 소련의 붉은 군대 정찰병을 도와준 걸 칠성의 아들 용팔이가 포상금에 군침을 흘리고 주재소에 고발하였던 것이다. 덕민은 한지주의 덕분에 주재소에서 풀려나긴 했으나 유치장에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석방 후 며칠 뒤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는 해방 전이라 막강한 권세를 누리던 한종수의 비호아래 있던 용팔이의 털끝 하나 다칠 수가 없었기에 덕구는 울분을 참고 견뎌야 했다.
 그러나 광복이 되자 덕구는 지주, 부농과 친일파를 숙청할 때 맨 먼저 용팔의 덜미부터 잡아 투쟁대회에 끌고나왔다. 맘씨 좋은 최복만이 “다 지나간 일이니 그만 덮어두자꾸나. 그 사람을 투쟁한다고 죽어버린 덕민이가 살아나기라도 한다냐” 하며 아들을 제지했지만 덕구는 아버지의 권유에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용팔은 포상금 몇 푼 받은 대가로 날마다 덕구의 몽둥이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대회장에서 혼절하곤 했다. 공산당을 일제 경찰에 고해바쳤으니 그는 입이 열 개라도 반동친일분자라는 죄명을 벗어버릴 방도가 없어 그냥 죽여주시오 하고 당할 뿐이었다. 결국 용팔은 그 번 투쟁대회에서 몽둥이질에 다리뼈가 부러져 불구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목숨만은 다행히 건졌다.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군대에서 제대한 덕구는 또다시 용팔이를 투쟁대회로 끌어냈다. 머리에는 반혁명분자라는 커다란 먹 글씨를 쓴 종이고깔을 씌우고 목에는 친일주구를  타도하자라는, 역시 먹 글씨로 혁명구호를 쓴 패목과  철사에 벽돌 세 장을 달아 목에 걸고 마을의 골목골목을 끌고 다니며 조리돌림을 시켰다. 쩌렁쩌렁 울리는 징소리를 들은 동네 사람들이 꾸역꾸역 달려 나와 구경했다. 애들은 용팔이를 향해 돌멩이를 던졌고 어른들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용팔은 문화대혁명의 광기 속에서 지독한 폭압에 견디다 못해 끝끝내 한줌의 흙이 되고 말았다.
 덕구네와 용팔이네의 원한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원한은 그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졌다.
 용팔의 아들 만수는 21살의 나이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지식청년」으로 “노동자, 농민의 재교육”을 받으러 강촌마을로 내려왔다. 그때 덕구의 아들 최영식은 24살의 어린 나이에 강촌 마을 당지부서기라는 중임을 맡고 있었다.
 만수는 반혁명분자의 아들이라는 죄명 때문에 사회적인 억압과 천시 속에서 살다보니 성격도 온순하고 내성적이었다. 그는 꾀를 부리지 않고 말없이 힘든 일을 자진하여 맡았기에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 시절에는 공부는 둘째 치고 일만 잘하면 고시 없이 추천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사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만수를 대학에 추천했다. 그러나 「사원」들의 추천은 지부서기인 최영식에 의해 깔아뭉개지고 말았다. 영식은 자신이 장악한 권세를 이용하여 만수의 이름을 아예 상급당위에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반혁명분자의 자식을 당이 운영하는 대학에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만수가 입당후보자인 수희와 좋아한다는 극비정보를 입수한 최영식은 그녀를 사무실로 조용히 불러들였다.
 “넌 오래잖아 당원이 될 사람이야. 지금이 고험단계란 걸 잊었니? 너까지 자산계급의 썩어빠진 생활방식인 자유연애 때문에 전도를 망칠거니, 세상에는 까닭 없는 사랑이 없다고 했어. 우리 사회에 아직도 계급투쟁이 존재하는 한 계급성을 떠난 순수한 애정이란 있을 수 없어. 당원이 될 너는 마땅히 사랑 이전에 어느 계급의 편에 서야 하는 가부터 결정해야 했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 애정이냐? 당에 대한 충성심이냐?”
 수희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기만 했다. 당에 대한 충성을 포기한다는 건 이 사회의 버림을 받고 이 사회의 적이 됨을 의미한다. 그녀가 감히 어떻게 그 길을 선택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당을 열애”했다. 그러나 수희는 사랑도 버릴 수 없었다. 이미 그녀와 만수 사이에는 애정이 너무 깊이 뿌리를 내렸고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굳세게 얽혀 있었다.
 “전 당을 열애해요. 일편단심 당을 따를 거예요.”
 “그럼 됐어. 당장 내 눈앞에서 그 자식과 절교한다는 편지를 써.”
 “그것만은 차마 못하겠어요. 최 서기, 제발 한 번만 눈감아주세요.”
 “눈감아달라니. 이건 당을 지지하는 가, 배반하는 가 하는 원칙문제인데 나더러 어떻게 눈감아 달라는 거냐고.”
 “전 이미 만수 동무의……”
 “만수의 멀?”
 “애를……애를…….”
 “뭐야! 이런 미련한! 수희 너 똑똑한 앤 줄 알았더니 인제 보니 바보였구나. 그것이 너에게 어떤 후과를 가져다줄지 생각 못하다니.”
 “최 서기, 저……이 수흰…… 최 서기가 요구한다면 내 몸이라도 기꺼이 바치겠으니 만수 동무하고만은 갈라지지 않도록 눈감아주세요. 제발 빌어요.”
 수희는 얼굴이 눈물범벅이 된 채 저고리를 벗고 최영식의 품에 안기려 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날 뭐로 보고 이따위 음탕한 짓거릴 하고 있는 거냐?”
 최영식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탕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난 공산당 간부야. 다시 한 번만 내 앞에서 이런 추태를 보이면 그 땐 정말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만수와의 관계는 당장 끊어. 당성문제를 놓고 더 이상의 흥정은 당을 모독하는 행위라는 걸 똑똑히 알아!”
 최영식은 팔소매에 매달리는 그녀를 뿌리치고 밖으로 나왔다. 사무실 바닥에 쓰러져 흑흑 오열하는 그녀의 울음소리가 한순간 그의 가슴을 쓰리게 자극했지만 최영식은 힘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꾸짖었다. 내 앞에서 그따위 망동을 부리다니! 어림도 없다. 그런 “사탕폭탄, 육탄공격”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난 당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이 아닌가. 강촌마을의 “벼 단위당 수확고”를 전 현에서 1위 수준에 올려 세우기 전에는 결혼도 하지 않으리라 맹세한 사람이니 그만한 유혹에 섣불리 마음이 동해서는 안 된다.
 한편 수희는 엄청난 정신적 고민과 심리적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녀는 사랑도 버릴 수 없었고 당에 대한 충성도 버릴 수 없었다. 사랑을 위해 당과 인민의 버림을 받고 적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당과 인민을 위해 사랑을 배신하고 양심을 저버릴 수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진퇴양난의 깊은 심연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절망 속에서 자살을 선택하고 말았다.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만수는 두 살 연상인 지주의 손녀딸과 결혼하고 말았다. 그나마 그녀는 과부요 왼다리를 살짝살짝 저는 절름발이었다.
 최영식은 그 이듬해 강촌마을의 일등처녀인 미자와 결혼했다. 같은 해에 최영식은 아들 준호를 보았고 만수는 딸 진옥이를 낳았다.
 이 모든 사건들은 준호와 진옥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발생한 비극들이었다.
 준호와 진옥이가 십여 살씩 되었을 때는 중국의 광활한 대륙에 개혁개방의 봄바람이 불어와 처절했던 계급투쟁의 불길도 꺼지고 지주, 자본가를 억압하던 성분차별제도도 폐지된 사회가 도래했다.
 두 사람은 강촌마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란히 은파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강촌마을 사람이 그들 둘뿐이었다. 평일에는 학교기숙사에 있었지만 주말이나 연휴 때면 함께 마을로 돌아왔고 월요일 아침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등교하곤 했다.
 버스나 열차를 타고 읍내까지 오면 삼륜차로 갈아타야 했다. 강촌을 지나가는 버스는 아침, 저녁으로 한두 차례만 왕복운행을 했으므로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삼륜차가 어찌나 흔들리는지 두 사람은 그 안에서 몸을 부딪칠 때가 많았다. 밤늦게 승객이 많을 땐 차내등도 없이 캄캄한 삼륜차 안에는 입추의 여지도 없이 승객이 꽉 박아섰다. 어떤 날에는 삼륜차가 흔들려 제대로 서있을 수조차 없어 진옥은 준호의 무릎에 앉아 그의 품에 안기우기까지 했다. 그럴 때면 피 끓는 젊은 가슴의 준호와 진옥은 달아오르는 흥분으로 심장이 당금 폭발할 것만 같았다. 삼륜차 안은 캄캄하여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데 읍내에서 마신 술에 거나하게 취한 추한들은 이런 틈을 타 용모가 반반한 여자들의 몸을 더듬으며 성추행을 일삼는 재미에 삼륜차에 오르곤 했다. 진옥은 그런 추한들이 두려워 준호의 품에 깊숙이 안겨들었고 준호는 어미닭처럼 그녀를 품 안에 꼭 감싸 안아 보호해 주곤 했다.
 날이 갈수록 그들의 사이는 소꿉친구에서 동기생으로 동기생에서 보호자로 보호자에서 연인으로 발전해 갔다. 학교에 가나 집에 오나 그들 둘은 항상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휴일이나 연휴 때 집에 오면 진옥은 늘 준호를 강변이나 버드나무숲으로 불러내어 산책하곤 했다.
 그런데 손바닥만 한 시골 마을에서 남녀문제만큼 소문이 빠른 건 없다. 연인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한 시간에 은밀한 곳에서 만났지만 얼마 못 가서 마을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곤 했다.
 준호와 진옥의 소문도 마을에 떠돌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그의 아버지 영식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어느 주말, 밤늦게 학교에서 돌아온 준호는 뜻밖에 집 안에 감도는 무겁고도 살벌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긴장해졌다. 그날 준호는 처음으로 진옥과 키스를 하고 퍽이나 흥분한 상태였다. 역시 삼륜차 안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이 승객들로 꽉 차있었고 차체가 흔들릴 때마다 사람들은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엎치락뒤치락했다. 누가 어디를 쓰다듬는지 여자들의 놀란 비명소리도 이따금 들리곤 했다. 준호는 두려움에 품속을 파고드는 진옥을 두 팔로 꼭 감싸 안고 있었다. 무릎 위에 비스듬히 누운 상태인 그녀의 입술은 바로 준호의 입술 앞에 있었다. 그녀의 숨결은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가슴이 떨렸다. 숨결이 거칠어졌다. 갑자기 돌멩이라도 걸린 듯 삼륜차가 왼쪽으로 심하게 기우뚱거렸다. 사람들은 차가 전복되는 줄 알고 일제히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준호와 진옥의 입술은 뜨겁게 포개져있었다. 차체가 균형을 회복하고 차 안의 소란도 안정되었지만 준호는 그 자그마하고 따스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진옥의 입술을 오래도록 입속 깊숙이 빨아들였다. 진옥의 혀가 살그머니 그의 입 속으로 파고들었다. 혀와 혀가…….
 “이놈아, 너 거기 좀 앉아라!”
 느닷없이 떨어지는 추상같은 호령소리에 준호는 흠칫 놀라며 달콤한 추억에서 깨어났다. 그제야 그는 할아버지의 얼굴에 시커먼 노기가 서리서리 얽혀 있음을 발견하고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털썩 무릎을 꿇었다.
 “네 이놈! 그 집안이 우리하고 어떤 사인지 알기나 하고  헤덤비느냐?”
 두서없는 말에 영문을 몰라 준호는 그저 멍하니 충천하는 진노에 꺼멓게 탄 할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인지 전……”
 “왜놈의 개질을 한 반동새끼 집구석이란 걸 모르냐. 그 할아비가 네 큰할아버지를 왜놈경찰에 고발해 순사 놈들에게 맞아죽게 한 앞잡이 놈이란 걸 말이다.”
 그제야 준호는 할아버지의 말뜻을 간파했다. 할아버지께서 과거사를 이야기 할 때 가끔 듣긴 했으나 어린 나이라 과거이야기에 별로 흥취가 없어 벌써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보다도 준호가 놀란 것은 그가 진옥이와 연애한다는 사실은 극비인데 집안 어른들이 어떻게 아셨을까 하는 것이었다.
 “동네방네에 소문이 파다하다. 어떻게 행실을 하고 다녔기에 깨끗한 가문에 먹칠을 하는 거냐.”
 아버지도 저쯤 앉아서 엄하게 한마디 꾸짖었다.
 “저희들이 뭘 어쨌다고 이러시는지 전 모르겠습니다.”
 준호는 모르는 척 하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비밀이 없으면 연애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이 정말 진옥이와 연애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불투명했다. 누구도 사랑한다고 말을 한 적이 없다. 프러포즈 같은 건 더구나 없었다. 그저 오늘 처음으로 한 키스 한 번이 전부였다. 이런 것도 연애라고 할 수 있는가? 강변이나 버드나무숲을 산책하는 것쯤은 그녀가 아닌 다른 어떤 여자하고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
 “너 정말 진옥인지 뭔지 하는 그 계집애랑 아무 일도 없는 거냐?”
 할아버지가 조금은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물었다.
 “네. 같은 학교니까 갈 때 올 때 함께 다닌 일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불을 때지 않은 굴뚝에서 연기가 나겠냐. 솔직히 말해봐라.”
 “정말입니다. 사람들이 오해한거겠지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다. 할아비가 너한테 한 번 속는 셈 믿어보마. 그러나 앞으로는 절대로 만수 녀석의 딸년과 어울려 다녀선 안 된다. 알겠니.”
 “그건 저…… 같이 다니는 것쯤은…….”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데 무슨 대답질이냐. 어서 예 하고 대답하지 못할까?”
 이번엔 아버지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예.”
 대답을 하면서도 준호는 속으로 못내 억울했다. 아무리 할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해도 그렇지, 일리가 없는 데도 무조건 복종하라니 반발심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이거야말로 낡아빠진 봉건의식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 사회가 아직도 유교봉건사상에 깊이 물젖어 있는 만큼 준호 혼자만 그 속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봉건사상을 반대한다는, 공산당원인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지금 그 봉건사상으로 자손을 억압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지고무상의 권위는 따지고 보면 당이 반대하고 있는 바로 그 봉건유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할아버지는 일어나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채찍을 잡았다.
 “오래지 않아 대학에 갈 놈이 세상물정을 그렇게 몰라서야 어디 쓰겠니. 흔해빠진 계집애들을 놔두고 하필이면 우리 가문과 숙적인 만수 놈의 딸애와 어울려 다니다니. 다시 한 번 그 애와 붙어 다니는 걸 내 눈으로 보거나 내 귀에 소문이라도 들어오는 날이면 그때는 종아리가 부러질 줄 알거라.”
 “지금은 성분차별제도도 폐지된 개방시대인데……”
 “닥쳐라! 성분제도는 폐지됐어도 반동은 여전히 반동이야. 공산당이 집권하는 한.”
 아버지의 부릅뜬 두 눈에서 불꽃이 뚝뚝 떨어졌다. 방바닥을 주먹으로 친 아버지의 팔뚝이 푸들푸들 떨렸다. 아버지의 주먹은 단순한 주먹의 의미를 초월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부모님 세대의 원한 때문에 자식들의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가? 이건 너무나 억울하다고 생각했지만 준호는 아버지가 뺨이라도 때릴 것만 같아 불만을 속에다 집어넣고 말았다.
 “엄중경고니까 다시는 만나지 말도록 해라. 두 번째 경고는 없다.”
 아버지는 화가 난 듯 펄쩍 뛰어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건 자식에게 행할 수 있는, 부모의 권한을 넘어서는 완전한 독선적 탄압이다. 아니면 아버지는 부친으로서의 자격이 아니라 자식에게 당 간부로서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어느 쪽이라 해도 아버지의 일방적 결정은 자식으로서도 수납할 수 없는 독선적 횡포였다.
 난 사랑할거야. 진옥아, 난 널 사랑할거야. 네 할아버지가 우리 큰할아버지를 고발하여 죽게 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은 너와 나의 사랑에 아무 상관도 없어. 그건 그분들의 삶이었을 뿐이야. 우리의 삶을 선택할 권리는 우리자신에게 있어.
 치밀어 오르는 일종의 반발심이 도리어 여태껏 애매하던 진옥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확정짓는 구실을 만들었다.
 난 진옥일 만날 거야. 저들은 손자요 아들이요 하는 이유로 나한테서 사랑의 자유까지 박탈할 수는 없어.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그들의 만남은 더욱 잦아졌다. 전에는 대개 진옥이 쪽에서 준호를 불렀지만 이제는 준호도 그녀를 불러내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러나 동네에 와서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들 스스로 고충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소문은 또다시 어느 틈인가로 새어나갔다. 이번에는 양가 부모님들 귀에 동시에 들어가고 말았다.
 덕구와 영식은 준호와 말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을 거라는 판단이 섰던지 아예 진옥이네 집으로 달려갔다.
 “자식 단속 잘해 이놈아! 주제파악 좀 하라고. 감히 뉘 집안의 귀한 자손을 넘봐, 넘보긴!”
 덕구는 다짜고짜 만수의 멱살을 거머잡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개혁개방시대라 계급투쟁시대와는 달라진 마당에서 만수 역시 가만히 당하려고 만은 하지 않았다.
 “남만 탓하지 말구 댁에서도 자식단속 잘하시구려. 나도 그 댁에 딸을 주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어요. 차라리 되놈한테 주면 주었지.”
 “이놈의 자식이 애비 뒤를 이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게 원수 같은가. 망할 놈의 새끼.”
 영식은 영식이 대로 만수의 멱살을 거머잡고 호통을 쳤다.
 “딸년 교육 좀 잘해라 이놈아. 다신 이런 일 없도록 철저히 단속하란 말이야. 방심했다가 나중에 일이 잘못되면 후회하지 말고.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지만 너들 같은 놈들이 활개치고 다닐 때는 아직도 멀었어.”
 부모님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준호와 진옥의 가슴은 미어질 듯 아팠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자식들의 의사는 전혀 무시한 채 당신들의 기분대로 처신하다니?! 너무나 이기적이고 너무나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억울해도 그들은 자식 된 입장이었으니 싸움을 말릴 자격조차 없었다.
 “우리 가문은 당원 가문이야. 네놈 가문은 무슨 가문인데. 반동가문이란 걸 잊지 마.”
 아버지의 호통소리를 들으며 준호는 얼마 전에 써서 당 소조에 바친 입당지원서가 떠올랐다. 당원 집안과 반동 집안! 누구라도 이  딜레마 앞에서 무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많건 적건 선택의 고뇌를 겪어야 하리라.
 싸움은 준호네 집에서 걸었지만 그들의 연애를 반대하는 수위는 진옥이네 쪽이 도리어 더 높았다. 빚을 진 과거 때문에 감히 맞서서 도전은 못했지만 가슴에 품은 한은 더 컸던 모양이다. 만수는 아예 진옥을 학교에서 휴학시켜 버렸다. 진옥은 반에서도 공부를 잘해 준호와 어깨 나란히 1, 2등을 다투는 라이벌이었다.
 “제가 학교를 그만둘 테니 제발 진옥은 휴학시키지 말아주세요.”
 준호가 진옥이 대신 그녀의 부모님을 찾아가 울면서 간청했으나 만수는 한번 굽힌 마음을 펴지 않았다.
 “부모님들의 원한 때문에 자식의 전도를 망치게 할 겁니까……”
 “네 이놈! 내 딸을 내 맘대로 하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끼어드는 거냐.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물러가거라.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말거라.”
 만수의 두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기억 속에는 준호의 부친 때문에 대학추천에서 낙방한 일, 성토대회에서 숨이 끊어진 아버지의 죽음, 사랑하는 여자의 자살 등등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있을 것이다.
 그날 밤, 버드나무숲에서의 만남은 진옥과의 마지막 데이트였다.
 준호는 마을의 자그마한 식당에 들러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어둠이 시커멓게 드리운 밖에서 천둥번개가 치며 소낙비가 억수를 퍼붓고 있었다. 폭풍우까지 불어쳐 강변 버드나무숲은 세차게 몸부림치며 우지끈, 우지끈 허리가 부러졌다.
 진옥은 준호의 품에 안긴 채 엉엉 통곡하고 빗줄기는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우르르, 쾅쾅!
 천둥소리는 천지를 진동시켰고 번쩍거리는 번개는 시퍼런 장검을 부여잡고 하늘을 갈기갈기 갈랐다. 눈물과 원망, 억울함과 절망, 분통과 설움…….
 한두 장의 여름옷은, 비에 젖어 살갗이 드러난 육신을 간신히 가린 몇 장의 옷은 불같이 다가서는 그들의 사이를 막아서기엔 너무나 얇았다. 준호는 추위에 떠는 게 아니라 홍수처럼 쏟아지는 흥분에 전신을 경련했다.
 “준호야, 날 가져. 내가 임신이라도 하면 양가 부모님들께서 양보하실 지도 모르잖아. 어서.”
 진옥은 셔츠를 벗었다. 비에 젖은 그녀의 동그란 어깨는 유난히 윤택 있고 탄력 있어 보였다. 준호는 당황한 눈길로 넋 없이 쳐다만 볼뿐 제지할 힘이 없었다. 브래지어를 벗었다. 자그마하나 통통한 풍선을 불려 놓은 듯 탐스러운 젖가슴이 드러나며 떨어지는 빗방울을 옥구슬처럼 부서뜨렸다. 준호는 경악했다. 심장이 멎고 시간도 주춤하고 비도 그쳤다.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정지된 채 진옥의 백옥 같은 아름다움만 그의 눈앞에서 은빛으로 눈부셨다.
 “안 돼, 이러면 안 돼!”
 준호는 갑자기 늑대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심장은 다시 둥둥 북소리를 울리고 소낙비는 쫘르르, 쫘르르 쏟아지고 천둥이 울고 번개가 번쩍거렸다. 갑자기 세상의 모든 것이 현실로 돌아왔다.
 준호는 가슴에 안겨드는 진옥을 떠밀어냈다. 그리고는 미친놈처럼 허둥지둥 버드나무숲을 도망쳐 나왔다.
 “준호야, 가지 마. 날 버리고 가지 마!”
 진옥은 울부짖으며, 진창 위에 넘어져 뒹굴며 그의 뒤를 쫓아왔다. 가슴은 열린 채로 비바람과 소낙비를 맞았다.
 준호의 두 볼에서도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왜 울어야 하고 왜 도망쳐야 하는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철벅철벅 빗물이 고인 진창을 짓밟아댔다. 한 여자를 앞에 놓고, 사랑을 앞에 놓고 나는 당연히 집념해야 옳았던 것은 아닌가. 혹시 그도 진옥의 존재를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걱정했던 것처럼, 자신의 신념과 전도를 저해하는 장애물로 본 것은 아닌가. 진옥이 그와의 성관계를 미끼로 그에게 평생을 의탁하고 짐이 될까봐 두려웠던 건 아닐까? 그 또한 그녀와의 융합이 부모님에 대한 불효와 불손이 되어 양심을 괴롭히는 독소가 될까봐 무서워 진건 아닐까? 사랑이 어찌 이해타산의 대상으로 전락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나는 그만큼 이기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돌아서고 싶었다. 돌아서서 진흙물 위에서 뒹굴고 흐느끼는 그녀를 얼싸안고 오로지 불같은 연정과 욕망을 따라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를 정말이지 사랑을 위한 희생의 제단에 제물로 바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욕되게 하여 그 대가로 사랑을 획득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헌신이 양가 부모님들에게 무참히 무시당할 때 감수해야 할 그녀의 고통과 아픔이 두려웠다. 이미 세상의 상식적 이치 같은 건 도외시한 어르신네들이 임신 때문에 마음을 돌리실 리는 만무하다. 포상금 몇 푼을 위해 우정을 배신한 사람이고 신념을 위해 무고한 연인을 갈라놓고 죽음에로 내몬 사람이 아닌가.
 진옥아, 사랑한다! 너랑 나랑 마음만 변치 않으면 되는 거야. 그러나 우린 아직 나이가 어리고 공부하는 학생이잖아. 이러면 안 돼. 참자. 참아야만 한다.
 그러나 준호는 그날 밤이 진옥과의 마지막 만남이요 이별이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자신의 그날 밤 행동이 비굴한 도주가 되고 진옥에게 두고두고 양심을 괴롭히는 미안함으로 각인될 줄은 더구나 몰랐다.
 월요일 아침 준호는 홀로 등교했다. 수업시간 내내 그녀의 빈자리에 자꾸만 시선이 끌려가는 걸 억제할 수가 없었다. 수업 중에도 이따금 눈을 마주치고는 미소를 짓던 그녀의 모습이 못 견디게 그리워지면서 빈 공간의 의미가 더구나 커보였다. 읍내 식당에 들어가도 커다란 홀이 텅텅 비어버린 느낌뿐이었다.
 “준호야, 이걸 좀 먹어봐. 맛있어.”
 방그레 웃으며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주던 그녀를 그때는 별로 의식하지 못했으나 지금 그 빈자리가 너무나 커다란 구멍이 뻥 뚫린 기분이다. 운동장에도 그녀는 없었고 현관이나 자그마한 나무숲의 벤치에도 그녀는 없었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져 버린 학교의 어느 구석에도 적막과 빈 공간뿐이었다.
 준호는 어서 빨리 주말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녀의 존재가 없이는 준호의 존재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은 지금 그는 결단을 내릴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진옥아, 기다려. 내 이번 주말엔 너한테 정중하게 프러포즈를 하고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할게!
 그 일주일은 참으로 10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는 마지막  수업이 끝나자마자 택시를 타고 역으로 달려갔다. 늘 진옥이와 둘이서 버스를 타고 역으로 나갔었다. 열차에서도 삼륜차에서도 그녀가 없는 빈자리를 느끼며 준호의 마음은 벌써 강촌으로 달려갔다. 삼륜차가 들썩일 때마다 옆에 바싹 붙어 앉던 그녀, 승객이 많을 때는 개암벌레처럼 꼼지락꼼지락 품속으로 파고들던 그녀……. 한시라도 빨리 만나보고 싶었다. 전번날 밤에 그녀에게 안겨주었던 실망과 고뇌를 오늘밤의 프러포즈로 시원하게 풀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집에 없었다.
 둘만이 아는 신호인 휘파람을 불며 새벽까지 진옥이네 집 울타리 밖을 맴돌았으나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튿날 낮에야 준호는 동네 사람들한테서 진옥의 아버지가 그녀를 멀리 길림에 사는 친척집에 피신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너무 늦었어. 이럴 줄 알았더라면 비가 내리던 그날 밤 진옥의 간청을 들어주었어야 하는 건데.
 후회와 절망이 마음의 하늘에 먹장구름으로 뒤덮였다. 그러나 인젠 주소조차 모르니 진옥에게 편지 한 장 할 수조차 없었다. 안타까움에 입술이 말라들 뿐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아무튼 부모님들이 강촌에 계시니까 어느 때건 오긴 올 거라는 생각이 불안한 마음에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그해 대입고시에 준호는 종합순위 전성 2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북경대학 중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으로 떠난 후로는 휴가철을 제외하고는 집으로 갈 시간이 없었으므로 공부에만 몰두했다. 그해 동계휴가 때 집에 와서야 그는 진옥이가 다시 은파고등학교에 복학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휴가철이 되자 그 집에서는 준호가 집으로 돌아올 것에 대비하여 선손을 써서 딸을 길림으로 피신시켰다. 인제는 정말 그녀와 만날 기회를 영영 상실한거나 아닌가 하는 생각에 준호는 가슴이 쓰렸다.
 개학이 되어 대학으로 돌아간 준호는 진옥이가 집으로 돌아왔을 거라 짐작하고 은파고등학교로 편지를 띄웠다. 그런데 웬일인지 답장이 없었다. 나중에 진옥이와 한반에 다니는 후배한테 전화를 걸어서야 그녀는 아예 길림학교로 전학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배도 상세는 주소는 몰랐다.
 시간이 흐르며 준호는 진옥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가 북경대학에 입학했다는 사실을 알 것이고 주소도 지난 하계휴가로 집에 갔을 때 그 후배한테 전화번호와 함께 알려주었으니 편지 한 장이나 전화 한 통을 넣어 줄 수도 있잖은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녀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소나기가 쏟아지던 그날 밤, 준호가 보여준 비겁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 큰 실망과 상처를 안겨주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의 진심을 그토록 냉정하게 거절하고 도망친 사내를 그녀는 지금쯤 저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배신자라며!
 이듬해 여름방학에 집으로 간 준호는 뜻밖의 소식을 접하고 놀랐다. 진옥이가 대학입시에서 낙방하고 상심하던 끝에 부모의 권유로 결혼했다는 것이었다. 그처럼 공부를 잘하던 진옥이가 대학입시에서 낙방하다니! 그리고 아직은 어린 나이에 결혼이란 또 웬 말인가? 어이없었다. 절망과 비관에서 온 자포자기가 아니고선 이런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다 내 탓이야. 내가 아니었다면 그처럼 공부를 잘하던 그녀가 휴학할 이유도, 복학으로 인해 대입고시에 낙방할 이유도, 다급히 결혼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준호는 며칠이고 자신을 저주했다. 차라리, 차라리 그날 밤 진옥의 간청을 받아들였어야 했어. 끝없는 후회가 그의 마음을 괴롭히며 폐부를 갈기갈기 찢었다.
 얼마 뒤에 그녀가 도박과 주색에 빠진 망나니를 만나 매일이다시피 남편의 주먹과 발길질에 맞아터지며 불행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준호는 그녀가 자학행위로서 사랑의 배신자인 자신에게 반항하고 저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뼈저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진옥은 준호만을 버린 게 아니라 자신을, 자신과 준호의 아름답고 순결한 사랑을 짓밟은 세상 전부를 버렸다. 사실 그녀를 타락과 절망의 수렁에서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준호뿐이었다. 그러나 준호는 그녀의 진심과 사랑을 외면한 것이었다.
 이제 준호는 한 여자의 가슴속에 원망과 저주의 대상으로 남게 되었다. 적어도 진옥의 가슴속에서만은 그는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에 불과했다. 그리고 더구나 가슴 아픈 것은 준호자신이 그녀를 버렸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부모가 버리더라도 준호만은 끝까지 지켜 줬어야 했다.
 지금까지도 준호의 양심 속에서 그녀에 대한 죄책감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다. 시간이 흘러도 그 상처는 치유되지 않은 채 더더욱 깊게 곪아갔다. 어쩌면 그 상처는 진옥의 고통이 이어지는 한 영원히 그의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진옥의 고통이 끝난다 하더라도 그 상처는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끝내고 한국으로 박사 공부하러 떠나기 전에 뜻밖에도 그녀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었다.
 “오빠.”
 목소리는 가늘고 떨렸다. 처량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오빠”라는 호칭도 낯설었다. 그러나 준호는 금방 그 목소리의 임자가 진옥임을 알 수 있었다. 너무나 흥분되어 말이 나가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부탁 하나 해도……”
 그 동안의 길고 긴 그리움을 모두 접어버리며 무식한 시골아낙처럼 입을 열자마자 궁색하게 용건부터 우비적우비적 끄집어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어. 정말 보고 싶었어.”
 “오빠, 저 한국 가는 수속 좀 해주실 수 있죠?”
 뜻밖의 간청에 준호는 한동안 어리둥절해졌다.
 “꼭 부탁해요. 위장결혼이라도 좋아요. 더 이상 남편의 학대에 견디지 못하겠어요.”
 “진옥아, 난 너한테……”
 “제발 부탁해요. 장거리전화라 요금이 많이 나와서 이만 끊을게요. 꼭요!”
 전화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걸려왔고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그녀는 완전히 무식한 촌부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준호는 더구나 가슴이 아팠다. 어쩌면 실연의 상처가 없었더라면 준호보다도 더 밝은 미래가 있었을, 총명과 지혜와 미모를 겸비했던 진옥은 한 발을 비틀하는 바람에 오늘날의 타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게 다 누구 탓인가? 세월 탓인가, 부모 탓인가?
 아니야. 이건 내 탓이야. 난 진옥을 버렸어. 아니 죽였어.
 준호는 그녀의 전화를 받은 날 가슴속의 울분을 삭일 수가 없어 혼자 술을 마시고 대취했다. 누군가에게 진옥을 대신해 가슴속의 울분을 터트리고 복수해주고 싶었다. 그게 자신이라도 좋고 부모라도 좋고 세월이라도 좋다. 대취하여 고함이라도 지르고 몸부림이라도 치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은 한국의 수도 서울바닥에 와서 우연히 만난 유리 씨와 지은이 때문에 또다시 기억 속에 떠오르는 진옥의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허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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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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