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연재 "붉은아침"9
제1부 백년빙곡冰谷
장혜영
4장 꿈틀거리는 은파강
2
종수는 어둠이 짙게 내린 장지문 밖을 초조한 시선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작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과연 어렵게 얻은 순사자리와 비옥한 토지와 첩실 곱단이를 버리고 떠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강촌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밤을 넘겨서는 안 되었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꾸물거리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야마토는 어느새 귀신같이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그가 일본의 무조건 투항소식을 접한 지도 벌써 한달이나 지나갔다. 일본이 망했다는 건 그 자신이 망한 거나 다름없었다. 혹시나 싶어 며칠 동안 집에서 돌아가는 형세를 지켜보았으나 만주는 일본의 패망과 함께 공산당 세력권에 잠식될 조짐이 완연해 위험수위가 다른 곳보다 더 높았다. 만주가 공산당 천하가 된다면 빨갱이들은 그부터 잡아 죽일 것이 분명하다. 빨갱이들이 아니더라도 덕구나 또 그의 박해를 받았던 소작농들이나 백성들이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한 달이나 지체한 건 곱단이를 버리고 가기가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데리고 가자니 목표물이 커질까봐 그 또한 두려웠다.
종수는 병아리새끼처럼 전신을 파득거리는 곱단의 알몸을 땀이 흥건한 가슴에 부서지도록 당겨 안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말랑말랑하게 풀린 속살을 재차 돌입하며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밤이 그녀와의 영이별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그녀의 미모를 차지하고 또 차지하도록 끝없는 욕구를 자극했다.
“서방님, 제뚜 가티 델꾸 갑소. 혼자 제뿌리지 말구…….”
두 육신이 하나로 융합되어 녹아 붙는 순간을 영원으로 연장하지 못하는 것이 한인 듯 곱단은 오열했다. 싫다고 눈물만 흘리던 그녀였다. 그러나 벌써 그 일도 까맣게 잊고 종수의 품을 꼼지락꼼지락 파고들어 엿가락처럼 녹아 붙는 단맛에 푹 빠져든 그녀, 인제는 종수의 소원대로 녹여먹고 빨아먹고 핥아먹을 수 있게끔 길들여진 그녀를 버리자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여자란 싫다고 울고불고 하다가도 남자 맛을 보면 금시 온순해지고 도리어 그 쪽에서 더 미치는 특이한 동물이라고 생각했다.
“정 제뿌리고 가뭉 전 서방님 앞에서 죽어버리게스꼬마!”
이것이 정말 그녀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일까? 내가 떠나면 덕구한테로 갈 수도 있을 테니 당연히 기뻐해야 될 그녀가 아닌가.
아무런들 어떠랴. 종수에겐 지금 그런 문제를 갖고 머리를 굴릴 경황이 없었다.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면 차라리 떠나가는 그의 발걸음도 가벼워질 것이다. 그것이 진심이라고 하더라고 무방했다. 아무리 애첩이라고 자신의 생명과 바꾸는 어리석은 짓은 할 수 없다.
어느덧 창 밖에서 첫닭이 홰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더는 지체해서는 안 되었다. 날이 밝으면 천하가 바뀐 걸 알고 덕구가 갑자기 들이닥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종수는 가슴을 파고드는 곱단을 밀어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랴부랴 옷가지를 주어 몸에 걸치고 트렁크를 챙기기 시작했다.
“정말 나르 제뿌리구 가겠음둥?”
곱단은 비단금침 위에 나신으로 올라앉은 채 허둥지둥 서두르는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걱정혀들 마. 기회를 봐서 꼭 데릴러 올 팅께.”
어느새 나타났는지 종수 아내 이씨가 트렁크를 들고 사랑채 섬돌 아래에 대령했다.
“저희들도 데리고 가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요.”
“지배까장 머땜시 이랴. 꼼짝 말고 여그 있어. 내가 데빌러 올 팅께.”
곱단은 옷자락을 부여잡고 아내는 앞길을 막아섰으나 종수는 일일이 뿌리치고 마당으로 나가버렸다.
“산질얼 걸을란도 모럴 긴디 여인네덜이 어떠케 따라간다꼬 그랴.”
종수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와 원망소리를 들으며 허둥지둥 대문을 나섰다. 여인들의 울음소리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볼을 타고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읍내를 조심조심 벗어났다. 사람들에게 발각되면 안 된다. 은파까지만 가면 그곳에서 피난민들 속에 슬쩍 끼어들어 열차를 타고…….
새벽어둠 속에 몸을 은폐하여 은파시내까지는 무사히 도착했다. 그러나 열차에 오르기 전까지는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얼굴을 가리느라 커다란 밀짚모자 하나를 사서 머리에 눌러썼다.
초조함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저녁 편에야 간신히 ㄷ행 열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그제야 그는 비로소 한시름 놓았다. 그 대신 이번엔 집에 두고 온 곱단이와 아내 이 씨가 마음에 걸려 기분이 언짢았다. 더러운 화물차 바닥에 초췌하고 남루한 피난민들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으려니 눈물이 저절로 흘러 나왔다.
뒤늦게야 아버지, 어머니한테 알려서 함께 떠나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혼자만 살겠다고 부모마저 버리고 떠나다니. 그러나 아버지는 지주이고 촌장이긴 하나 그처럼 왜놈의 앞잡이질은 하지 않았으므로 죄가 좀 가벼울 수도 있었다.
어련히 알아서 처신할까봐!
지금 종수는 자기 일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간도지역 역시 벌써 공산당천하로 변해있었다. 소련의 붉은 군대를 따라 들어온 동북항일연군연변분견대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ㄷ역 광장과 거리에는 《중국인민의 영도자 모택동 만세!》, 《중국공산당 만세!》, 《중조인민우의 만세!》, 《중국인민의 벗 스탈린대원수 만세!》, 《항일구국영웅 주보중장군 만세!》, 《전 세계 무산계급은 단결하라!》는 혁명구호가 도처에 내걸렸고 붉은 군대 장병들과 평상복차림에 어깨에 총을 멘 공산당 군대가 활보하고 있었다. 이제 친일주구에 대한 타도는 시간문제일 따름이었다.
다행히도 공산당의 손길이 아직 국경선 경비에까지는 미치지 못한 틈을 타 종수는 회향민들 속에 끼어 화물열차를 타고 두만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그가 비록 베 바지저고리 차림을 했다곤 하나 누구든 그의 얼굴이나 손을 한 번만 자세히 보면 땅 파는 농군이 아니란 걸 금방 눈치 챌 수 있었을 텐데 난리판이라 그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소련군이 진주한 반도 북쪽 땅도 간도지역이나 다를 바 없었다. 정권은 이미 공산당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직 치안은 난장판이어서 공산당의 눈을 피해 얼마든지 빠져 나갈 만 했다. 백성들은 일본인들이 버리고 나간 적산을 차지하고 재물을 차지하기에 눈을 벌겋게 되어 지주와 친일분자 청산에는 아직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38선 경비라는 것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밤의 어둠을 틈타 그냥 도보로 건넜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월남할 수 있었다. 종수는 해방정국의 그 혼란한 틈을 타서 별로 어려움을 겪지 않고도 38선을 넘어 월남에 성공했다.
남쪽 땅에 들어선 그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후 내쉬었다. 남반부는 미 점령군의 천하가 되어있었다. 일제시대의 관료, 일본군 출신, 만주군 출신, 국민당군대 출신, 친일파, 민족주의자들이 도처에서 밀려들어 욱실거렸다. 게다가 지주나 자본가들의 생명재산이 보장되어 있었기에 종수는 이제야 살았구나 싶었다. 이제는 덕구의 보복도 두렵지 않았다. 그가 복수를 위해 남한까지 찾아온다 해도 이제는 덕구와 두려움 없이 대적할 용기가 생겼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내와 곱단이가 그리워졌다. 이렇게 경계가 허술한 줄 알았더라면 데리고 나왔을 걸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되고 말았다.
언제 또 만날 기회가 있겠지!
그는 자신의 믿음을 확신했다.
덕구는 종수가 실종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부랴부랴 읍내로 달려갔다.
그놈을 놓쳐서는 안 된다. 진작 내 손으로 그놈을 잡아 죽였어야 하는데 난세에 어정쩡 지나다보니……. 해방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그는 아직 잘 모르고 있었다. 더구나 시골에는 해방이 되었다고 해서 첫 몇 달간은 별로 달라진 것도 없었다. 모두들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헐레벌떡 종수네 집까지 달려왔지만 사람은 이미 자취를 감춰버린 뒤였다.
“개자슥! 내 손아구서 빠져나가뿌리다니!”
덕구는 너무 분통해 종수가 거처하던 사랑채의 가장집물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던져 박살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옷걸이에 걸린 여자의 옷을 보자 그제야 곱단이의 모습이 기억의 수면에 떠올랐다. 그는 허둥지둥 사랑채며 안채며 주방이며 곳간이며 샅샅이 뒤져보았다. 그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 망할넘이 곱단이까장 끌고 도망간건가?”
덕구는 속에서 불이 펄펄 일고 입술이 쩍쩍 갈라 터졌다. 그는 단솥뚜껑 위에 오른 개미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주먹으로 애꿎은 기둥을 쥐어박다가 자기 가슴을 두드리기도 하고 발로 섬돌을 내지르다가 아파서 발을 붙들고 선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울상을 짓기도 했다.
어디 갔지? 곱단아!∼
뜰 안을 에돌며 이 구석 저 구석에 대고 이름을 불러대기 시작했다.
아무 대답이 없다. 머슴들마저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간 모양 집 안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정원을 에돌아 뒤란으로 들어갔다.
뒤란에는 장독대와 우물이 있었다. 살구나무와 앵두나무가 무성한 뒤란에는 괴괴한 정적이 웅크리고 있어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구원을 청하는 여자의 급박한 목소리가 울 안의 고요한 정적을 깨뜨렸다. 장독대 부근에서 빈 독 안을 기웃거리던 덕구는 화들짝 놀라며 그 자리에 우뚝 심어졌다.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
그 소리는 뒷담벼락 밑에 있는 우물 쪽에서 들려왔다.
덕구는 불길한 예감에 이끌려 담벼락 쪽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삼회장 능라 치마저고리를 입은 마님이 아니, 종수 마누라 이 곰보가 우물 안에 반쯤 상체를 들이밀고 있는 누군가의 허리를 부여안고 구원을 청하고 있었다. 우물 안에 상반신을 들이민 사람 역시 옥색 비단치마를 입은 여인이었다.
“덕군가? 자네 마침 잘 왔네. 곱단일 좀……”
마님은 맥이 진한 모양인지 곱단이가 몸부림치는 대로 덩달아 상체를 휘청거리고 있었다.
덕구는 곱단이라는 말에 처음 한동안 어리둥절해졌다. 마님인 이 곰보가 자살을 시도했다면 몰라도 그녀가 왜 자살한단 말인가? 종수는 도망쳤으니 그녀는 당연히 춤이라도 덩실덩실 춰야 할 텐데 말이다. 무슨 영문인지 아리송하기만 했다.
“뭘 하나? 어서 사람을 구하지 않고.”
마님이 재차 독촉을 해서야 덕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앞으로 달려가 우물가에 배를 붙이고 엎드린 여자의 허리를 두 팔로 덥석 안아서 들어냈다. 틀림없는 곱단이었다.
“마님, 이거 놉소. 날 쫌 죽어베리게 내비레둡소.”
품안에서 바동거리던 곱단은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마님이 아니라 덕구임을 알자 더욱 목청을 높이며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지발 내르 제뿌레둡소. 난 살고 프지 않스꾸마.”
집게처럼 허리를 으스러지게 껴안은 덕구의 손등을 손톱으로 긁어대는 통에 피가 났으나 덕구는 아픔을 참고 팔에 더욱 기운을 넣었다.
“등신맹키로 머땜시 죽겠닥꼬 하노? 종수놈이 도망치비렜는디 지비가 죽얼 이유가 머냐구?”
이 씨는 남편의 이름이 혀끝에 올라 매도당하자 더 이상은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필요 없음을 느낀 듯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세상이 뒤바뀌었으니 그녀는 자신도 이제 더는 마님이 아니라는 걸 직감한 듯싶었다.
기진맥진한 곱단은 덕구의 품에 안긴 채 미역줄기처럼 축 늘어졌다.
“첩실루 들어온 년이 서방님의 버림까지 받아스까니 무신 낯바대기로 살라능검둥!”
“그넘으 버림으 받은기 그라게 실푸더냐? 지뿔 대신.”
“조나 구지나 이전 서방님이 아임꺄. 내한테는 서방님 한분 배끼 없스꼬마. 긴데 그분 아부라 가뿌레스이까 내느 이저느 의지가지 없는 외톨이 신세가 돼째임둥. 그러이까 살아서 머함둥.”
곱단은 우물 옆에 털썩 주저앉아 흑흑 어깨를 들먹였다. 비단 치마저고리를 입고 머리는 가리마를 내어 윤기 나게 빗어 넘긴데다 분결까지 뽀얀 얼굴 모습이 퍽이나 낯설어 보였다. 벌써 풍요로운 생활에 마음이 변해버린 걸까?
“의지 가지 없긴, 내가 있간디.”
덕구는 쭈크리고 앉은 채 곱단의 어깨를 부둥켜 쥐고 세차게 흔들었다. 곱단이에 대한 자신의 진심을 그녀의 어깨를 잡은 팔의 힘으로 전달하고 싶었다. 그런데도 곱단은 야속하게도 고개를 떨어트린 채 그의 시선을 애써 피하고 있었다.
“나느 거기 나츠 치다볼 멘목아브라 없스꼬마.”
“난 그런 건 상관도 안 혀. 곱단이에 대한 내 맘언 예나 지끔이나 빈허디 않았응께. 알었제라.”
“난 일찌가이 서방님께 바틴 몸뚱이꼬마. 그러이까 어케 거기를…….”
“머시냐. 그게 워디 곱단의 잘못인가. 개기 쟆어서 개긴게 앙그고 끌려갱긴디. 잘못이 있다먼 곱단일 지켜주들 못한 나헌테 있제. 앙그라. 나헌티도 잘못은 없당께. 그 즘생보담 못헌 종수란 넘의 죄지라. 내 그넘얼 기언이 찾아내어 내손으로다 없어비리고사 말 팅께 두고봐. 지넘이 도망치먼 어일 도망쳐. 조선팔도 안에 숨어 있겄제. 곱단아, 내가 기언히 느그 가심속에 맺힌 한얼 풀어줄 팅께 걱정하들 마.”
“지발 그라지 맙소. 그분은 이저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서방님이꼬마.”
“서방님언 먼 서방님이라우. 즈그들얼 갈라 놓고 곱단이 인생얼 망체논 웬순디.”
덕구는 눈이 확 뒤집히는 듯한 울분으로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섰다. 곱단이가 이렇게 변할 줄은 정말 몰랐다. 종수라는 이름만 들어도 늑대를 만난 듯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겨우 한 달 사이에 말끝마다 서방님이라고 받들고 있으니 어찌 믿을 수가 있으랴. 벌써 풍요와 사치에 눈이 먼 것일까?
“싸게 싸게 일어나. 어여 이넘으 집서 나가자.”
덕구는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가긴 어디멜 간다는 검까? 난 에기 있어사 되꼬마.”
곱단은 일어나지 않으려고 앉은 채로 버텼다.
“머달라꼬 이넘으 집에 있것다는거제?”
“서방님을 지달려사 하꾸마. 꼭 데릴러 오신다고 약속했스꼬마.”
“미친소리! 죽을 가봐 겁이나 오밤중에 들럭쟁이 맹키로 뺑소니 치비린 자슥이 느그 데릴러온다구. 등신이 아니고사 구사일생으로 빠져나간 강촌마슬로 다시 돌아오들 않을 팅께 꿈 깨고 어여 일나.”
덕구는 무작정 곱단의 두 겨드랑이를 쳐들었다. 그리고는 우격다짐으로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대문 밖으로 나왔다.
“이 팔으 놉소. 아파 죽겠스꾸마.”
덕구는 놓아주기는커녕 더욱더 으스러지게 틀어잡고는 골목길을 내달렸다.
“내 신발, 신발이 벗겨졌슴다.”
곱단은 갑자기 길바닥의 흙먼지 위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과연 그녀의 발에는 갓신 한 짝만 신겨져 있을 뿐이었다. 덕구는 골목으로 달려가 저만큼 뒤에 떨어진 갓신을 주어들고 왔다.
“지발 이러지 맙소. 남들이 보잼둥.”
“보면 머래.”
“거기는 총객이구 난 서바이 있는 유부녀잼둥. 남들이 웃쨈까.”
“씨벌이고 쟆은 대루 씨벌이라제. 난 무섭들 않은겨. 곱단일 강제로 끌고간 건 종수란 넘이야. 난 내 사램얼 찾았얼 뿐인디 머달락고 욕해쌓는단 말인겨.”
“애걔걔, 내가 어째 거기 사람임둥. 거기하고 결혼이라두 했슴까?”
“꼭 결혼혀사 맛이간디. 즈그 사이가 어떻다는 건 강촌마슬 사램덜이 몬타 아는 사실인디. 그런 걱정 말고 어여 일어나랑께.”
덕구는 곱단의 허리를 덥석 껴안아 일으켰다.
연약한 곱단이로서는 그의 황소 같은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이 손으 놉소. 내 발로 걸어가겠슴다. 기런디 지끔 날 델꼬 어디메로 간다는 검둥. 거기 집으로 말임둥.”
“아니, 곱단이네 집으로.”
“우리 집으로요? 비워도둔지 한달이나 되는데. 벌써 허물어졌을거꾸마.”
“허물어졌으면 곤치면 될 거 아닌 겨. 기런거쯤언 나헌틴 식은 죽 먹긴 겨.”
덕구는 헐떡거리며 곱단을 끌고 골목길을 달음박질쳤다.
곱단의 예측대로 그녀의 집은 이미 폐허가 되어있었다. 그러잖아도 워낙 허름했는데 지금은 지붕도 꺼져 내리고 벽체도 허물어졌으며 문짝도 죄다 떨어져 나가 있었다. 부엌과 온돌에는 애들이나 닭, 개짐승들의 배설물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이런 데서 어드렇게?”
분살이 하얗게 올라 예쁘장한 곱단의 얼굴이 구겨졌다. 베저고리치마를 입고 그을린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하고 서있던 옛날 곱단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의 곱단의 모습은 이 허술하고 지저분한 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귀태와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고 있었다.
“괜찮아. 쬐깨 지달려. 싸게 방 안얼 거둘팅께.”
그러거나 말거나 덕구는 마당비를 찾아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 분비물들과 돌멩이들이 문 밖으로 튕겨 나왔고 방 안에서 먼지가 일며 연기처럼 마당으로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한참 쓸고 주어 던지고 물을 뿌리고 하더니 덕구는 온몸에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 밖으로 나왔다. 곱단일 종수에게 빼앗긴 뒤론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던 그는 오래간만에 싱글벙글 웃었다. 곱단이와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듯 기쁜 모양이다. 곱단은 어린애처럼 기뻐하는 덕구를 보자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사실 덕구가 그녀를 미워하고 욕을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강제로 끌려갔다곤 하나 어쨌든 종수의 첩실이 된 그녀는 덕구에게는 배신자 이상의 아무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덕구는 그녀의 과거를 한마디도 추궁하지 않은 채 예나 똑같이 반갑게 대하고 있으니 곱단의 마음이 어찌 감동을 받지 않으랴.
“후회할거꼬마.”
곱단은 덕구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가며 가만히 한숨을 토해냈다.
“난 기언이 후회하들 않을 겨.”
방 안에는 금방 먼지를 털어낸 멍석 한 장이 깔려 있었다.
“난 이미 서방님이 있는 남의 첩년이꼬마. 서방님이 돌아오나 돌아오지 않으나 난 유부녀꼬마. 그분이 날 제뿌린다 해도 다시 새기로는 될 수 없는 과부꼬마. 그래도 후회하지 않겠슴둥?”
두 사람은 방석 위에 마주앉았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밤의 정적 속에서 유난히 쟁쟁했다. 멀리 은파강이 흘러가며 출렁이는 물결소리와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쭈르륵- 철썩! 쭈르륵- 철썩! 하는 소리가 무슨 풍악처럼 은은하게 들려왔다. 비에 썩어서 무너진 천장 위로는 밤하늘의 총총한 별들이 올려다 보였다. 무르익어가는 벌판은 문짝이 떨어져 나간 문 밖의 어둠 속에 아득하게 펼쳐진 채 이따금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와스스 잎사귀들을 스치며 술렁거렸다.
“난 길코 후회하들 않을 겨. 난 곱단이럴 원할 뿐 곱단의 과거는 소양 없어. 그건 곱단의 맘이 펴서 한 일이 앙그간디 지비의 잘못이 아닌 겨.”
“기집은 츰으로 머리를 틀어올려준 사내만을 서방님으로 모시게 돼있스꾸마.”
“글매, 그따위 소린 나헌틴 상관없당께 그랴.”
덕구가 버럭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곱단은 흠칫 놀라며 뒷말을 목구멍으로 꿀떡 삼켜버렸다. 그녀는 어떤 말로도, 세간의 어떠한 이치로도 자신에게로 향한 덕구의 마음을 돌려세울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긴장되기 시작했다. 이제 덕구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원하리라는 예감이 분명한 윤곽을 갖추고 머릿속에 떠오르자 곱단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덕구는 더 이상 오빠처럼 믿음직스러웠던 사람이 아닌 여자를 원하는 하나의 남자로서 다가서고 있었다. 그것을 곱단은 이미 종수에게서 체험하여 알고 있었다. 좀 다른 것이 있다면 종수에게서 느꼈던 남성은 얼음 같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시작되었지만 덕구에게서 느끼는 남성은 불덩이 같은 흥분과 설렘으로 그 시작의 문을 열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곱단은 숨결이 거칠어지고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를 떨어트렸다.
사실 곱단이 종수가 그녀를 버리고 도망친 이 마당에서도 그를 서방님이라고 생각하고 한사코 자신의 운명을 그와 연결시키려 하는 것은 여자의 세상살이 이치가 그렇기 때문에 여자의 본분을 지키려 한 것뿐이었다. 마음속으로 연정을 느끼는 사람은 실은 덕구였다.
그러나 곱단의 마음 한구석에는 자꾸만 덕구에게 미안한 생각이 꿈틀거렸다.
난 워낙 서방님한테 끌려가던 그날, 그가 데리러 오길 기다리지 말고 죽어버렸어야 하는 건데……. 그랬다면 덕구의 진심에도 미안할 것이 없었을 테고 종수에게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녀는 갑자기 설움이 북받쳐 흑흑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덕구를 깨끗하고 순결한 몸으로,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맞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슬프게 했다.
“머땜시 또 우는 거야. 이 지쁜 날에.”
입으로 훅 불어도 끊어질 듯 신경이 팽팽하게 긴장된 채 서서히 끓어오르는 흥분을 간신히 억제하고 있던 덕구는 느닷없는 곱단의 울음에 그만 당황해졌다.
“말혀봐. 머땜시 우냐구? 해이나 내가 어쩔가봐 무서워서 그러는 건 아닌 겨?”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화톳불이 이글거리듯 얼굴이 발개서 거친 숨결을 몰아쉬고 앉아있는 자신의 험상궂은 모습에 곱단이가 질겁한 거라고 스스로 속단하며 안절부절못했다.
“걱정 마. 암 일도 없을 팅께. 오늘밤은 곱단의 털끝 한나또 맨지들 않을 거야. 지발 울음을랑 그쳐!”
그럴수록 곱단은 홍수처럼 터져 나오는 울음을 막을 수가 없어 아예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내가 밲에 나가린? 그랴 내가 나가제.”
덕구는 무안한 나머지 어험 헛기침을 하며 멍석 위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저기요. 증말 거기가 향란 오라비가 맞슴둥?”
곱단이 그의 팔소매를 잡고 울면서 물었다.
“그랴. 몰라서 뜽금없이 물어쌓노?”
덕구는 곱단의 말뜻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라리 종수처럼 입술에 꿀을 바르고 그녀를 말로 구슬리거나 아니면 덕구의 성미에 어울리는 행동으로 황소처럼 우악하게 그녀에게 덮쳐들어 깔아뭉개주었더라면 곱단의 마음도 지금처럼 슬프지는 않았을 것만 같았다. 천한 첩년을 놓고, 한낱 과부를 두고 옛날의 순결하던 처녀를 대하듯 어울리지 않는, 점잖은 척 하는 모습이 도리어 측은해 보였다.
“나 같은 지집연이 무신 값이 있다고. 무신 깨깟한 지집이라고. 드럽고 천한 연이잖슴둥……”
“곱단아, 너 지끔 머락카노? 니가 디럽고 천헌 연이락하이?! 종수란 넘이나 닐 그라게 볼란지. 이 덕구는 그라게 본 적이 함번도 없다 아이가. 닌 은지나 덕구헌티는 한 떨기 꽃소인기라!”
“날 아직도 사람으로 봐 주이 고맙스꼬마.”
곱단은 목이 메어 뒷말을 잇지 못하고 덕구의 품에 사르르 안겼다.
덕구의 전신이 사시나무 떨 듯 화들화들 떨렸다. 심장박동소리가 그녀의 귓가에서 쿵쿵 메아리쳤다. 벌겋게 달아오른 그의 육신은 하나의 이글거리는 불덩이 같았다. 그는 입으로 밭갈이 하는 황소처럼 거친 숨을 헐헐 토해냈다.
그러나 덕구는 가슴을 파고드는 곱단이를 품에서 떼어냈다. 그리고는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곱단아, 쬐깨 더 지달려. 우리 이제 이 집을 곤친 다음 정식으로 이사학꼬 맹물 한 그럭이락도 떠놓고 예를 올린 다음에……”
토방에 쭈크리고 앉아 엽초를 붙여 물고 뻐끔뻐끔 연기를 빨아댔다. 담뱃불이 껌벅거리며 그가 내뿜는 삼단 같은 연기를 비췄다.
곱단이도 밖으로 나왔다. 덕구 옆에 앉으며 그의 어깨에 살포시 고개를 얹었다.
“난 지비를 종수넘 맹키로 값없이 굴고 쟆들 않아서 그랴. 내 맴얼 알겠제?”
“알다마담꺄.”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덕구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일시적 흥분에 떠밀려 서방님한테까지 죄짓게 되었을 테고, 그렇게 되면 그이를 기다릴 명분마저 상실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남편이 있는 유부녀이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이가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향란은 은파강 나루터에서 종철과 갈라진 후 그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러나 한 번 떠나간 님한테서는 종무소식이어서 안타까움만 늘어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녀에게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뜻하지 않던 근심거리 하나가 더 불어났다. 그와 헤어진 지 한 달 뒤부터 극심한 입덧이 시작되더니 몇 달 뒤엔 제법 배가 둥둥 불어나며 태아가 복중에서 태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혼례도 올리지 않은 처녀가 임신을 하자 향란은 동네 사람들의 눈총이 두려워 방구석에 박혀 바깥출입을 금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도 소동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애꿎은 담배만 태우며 한숨을 쉬었고 덕구는 당장 애를 지우라고 닦달했다.
“너 그 뱃 속의 핏덩이가 종철이넘 씨아시 맞제? 싸게 싸게 긁어삐레라. 우리 집 안에 그런 즘생보담도 못헌 지주넘의 종자럴 받을 수 없단 말이야!”
때로는 구슬리기도 하고 때로는 으름장을 놓기도 하고 때로는 손찌검까지 했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평범한 생명이기 전에 그녀와 종철의 사이에서 생겨난 사랑의 결실이었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지우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어서 빨리 종철 씨가 그녀를 찾아와 사면초가의 궁지에서 구해주기 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배는 날이 갈수록 불어났으나 종철은 종무소식이다.
해방이 되자 향란의 마음은 설레기 시작했다. 종철이 그녀를 데리러 올 거라는 믿음에서였다. 허나 해방도 종철과의 상봉의 기쁨을 선사하지 못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종철의 소식은 한 달 동안이나 이리저리 떠돌다가 겨우 도착한 편지 한 장이 고작이었다.
향란 씨! 저는 지금 조국 땅을 향해 떠나는 열차 옆에서 이 글을 씁니다.
지금은 시국이 혼란한 만큼 제가 먼저 나가서 상황을 알아보고 다시 소
식을 알릴 테니 그때까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조국이 우리 지식인
들을 부르고 있으니 향란 씨도 오라지 않아 귀국하여 조국을 위해 애국
충정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종철올림
1945년 8월 30일
잠시만 기다리라 해놓고선 벌써 1년이 다 되도록 무소식이니 어찌 그녀의 마음이 편할 수 있으랴. 점점 분만 날짜가 가까워오면서 향란은 운신하기조차 어려워졌다. 이러다가 정말 그이와 영이별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녀의 피를 말렸다. 게다가 극도로 분노한 오빠 덕구는 혈육의 정마저 외면하고 동생을 집에서 쫓아냈다.
“기언이 그넘의 새끼럴 낳얼락 하먼 울 집서 나가비레라! 느그년의 눈깔에는 공산당이 지주, 부농을 타도허는 현실도 보이들 않냐? 도대체 지주넘의 새끼럴 낳아선 머달라는거냐. 공산당천하럴 뒤집어엎얼 반동새끼럴 킬락 허는 목적이 머시더냐. 울 집에는 너같언 연얼 둘 시 없다. 니가 좋아하는 그넘헌티 찾아가던 니 맘 핀대로 하 거라.”
최후통첩이었다. 무작정 막달 잡은 배를 뒤뚱거리는 그녀의 등을 떠밀어 대문 밖으로 쫓아냈다. 개한테 돌멩이 던지듯 옷가지를 챙긴 보퉁이 하나를 던져주고는 아예 대문을 덜컥 잠가버렸다. 아버지도 방 안에서 한숨만 풀풀 몰아쉴 뿐 혈육을 축출하는 아들의 폭행을 막지는 못했다. 곱단이가 오빠의 다리를 부여잡고 시누이 대신 용서를 빌었으나 호랑이처럼 분노한 덕구를 제지하지는 못했다.
대책 없이 집에서 쫓겨난 그녀는 갑자기 앞길이 막막했다. 그녀 자신도 집에서는 복중태아를 분만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도 비난거리일 테고 또 지금처럼 지주, 부농을 타도하는 혁명의 물결 속에서 종철의 자식을 낳아봤자 저주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그녀의 발길은 저도 모르게 은파강 기슭으로 향해 움직였다. 종철 씨와 마지막으로 사랑을 속삭였던 강기슭의 잔디는 4월이라 아직은 메마른 채 먼지만 뿌옇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유유히 흘러가는 은파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니 저도 모르게 눈동자에 이슬이 뽀얗게 내렸다. 오늘따라 종철 씨가 유난히 그리웠다. 그날 밤처럼 이 강기슭에서 그의 품에 안겨 그리움에 지친 몸을 푹 쉬고 싶었다.
안 돼. 난 그이와 헤어져 살 수 없어. 천애지각이라도 그일 찾아 떠날 거야!
향란은 으스러지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얼굴에 붉은 낙조가 어리며 청동조각상처럼 비장한 표정이 나타났다. 그날 밤으로 향란은 40리 길을 걸어서 은파시내에 도착했다. 종철 씨를 찾아 조선으로 떠나기로 작심했던 것이다.
전쟁의 흔적이 역력한 은파시내의 거리는 어수선했고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정권다툼으로 정세마저 긴장감이 돌았다. 어디를 보아도 지주의 아들인 종철을 용납할 곳은 없어 보일 만큼 도처에 붉은 기와 혁명구호들 뿐이었다. 사회주의 운동을 하겠다던 종철 씨의 신념이 지주, 부농을 때려 부수는 혁명의 물결 속에서 아직도 흔들리지 않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이가 나간다던 조선의 형세는 어떨까? 그곳의 정세도 이곳과 같다면…….
국경으로 가는 ㄷ행 열차는 화적들 때문에 불통이어서 ㅎ시로 돌아서 가야만 했다. 다행히도 맘씨 좋은 역 직원을 만나 그의 부축을 받으며 무개차에 오를 수 있었다. 아직은 4월이라 바람이 어찌나 차가운지 그녀의 온몸은 꽁꽁 얼어들었다. 그녀가 임신부임을 알고 동행자들이 휴대한 음식을 조금씩 갈라주는 걸 먹으며 그녀는 기아와 추위를 의지력 하나로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석탄먼지를 뒤집어 쓴 그녀의 얼굴은 흑인처럼 새카맣게 타 두 눈만 반짝거렸다.
추위 때문인지 열차의 진동 때문인지 복통이 잦아졌다. 복중태아도 지루한 열차여행에 고통스러운 듯 자꾸만 그녀의 배를 발길질 해왔다..
간도 땅에 내리자 연변에는 이미 지주, 부농과 친일파들을 투쟁하는 군중운동이 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그녀는 갈수록 종철의 신변안전이 걱정되었다. 조선이라고 다를 바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투쟁이 구두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악질지주와 친일파는 투쟁 도중 분노한 군중의 손에 맞아죽는 사건도 많아 더구나 초조해졌다. 어디 가서 붙잡히지나 않았는지?
벌써 해방된 지 1년이 가까워 오는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회향민들의 행렬은 아직도 끊이질 않았다.
두만강을 넘어 조국 땅을 딛는 순간 향란은 이곳 역시 종철이 발을 붙일 만한 땅이 한 치도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바보가 아닌 이상, 죽음밖에 없는 이 땅에 머물 리는 없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결국은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이 땅을 떠나 서울의 모교로 돌아갔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향란은 북조선에서 그를 찾기를 포기하고 곧장 서울로 떠나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남행열차에 몸을 싣기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세 번을 시도했으나 세 번 다 실패했다. 나중엔 러시아군인의 도움을 받아 겨우 군용열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유개화물차 안에는 대부분 러시아군인들이었다.
밤중이 되자 그녀는 갑자기 산통이 발작하기 시작했다. 미처 어쩔 사이도 없이 양수가 터져 나오며 분만 전의 주기적 진통이 일어났다. 피할 곳도 피할 사이도 없었다. 러시아군인들이 그녀를 빙 둘러싸더니 뭐라고 러시아말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중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장교가 병사들을 젖히고 그녀 곁으로 다가오더니 담요를 꺼내어 바닥에 깔고 그녀를 안아서 그 위에 옮겨 놓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치마를 쳐들고 속옷을 벗겨 내렸다. 살이 찢기는 아픔 속에서도 향란은 부끄러워 한손으로 속옷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남자의 억센 힘을 당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아이는 낳아야 했다. 조산사도 따로 없고 또 달리는 기차 안이니 자리를 옮길 수도 없는 만큼 군인들의 손을 빌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부끄러움을 잊으려고 두 눈을 꼭 감았다.
장교는 치마 안을 기웃이 들여다보다가는 고개를 쳐들고 그녀를 쳐다보곤 하면서 무슨 구호를 외치듯 허공중에 주먹을 불끈불끈 부르쥐어 보이곤 했다. 그가 주먹을 불끈 부르쥘 때마다 향란은 그 동작에 맞춰 하신에 지그시 힘을 주입하곤 했다. 하신이 찢기는 소리가 분명히 들려왔다.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어도 장교의 환호성이 터져 나오며 더욱더 힘 있게 주먹을 부르쥐었다. 조금만 더 힘을 쓰라고 고무하는 것 같았다. 향란은 입술을 꽉 깨물고 젖 먹던 힘까지 죄다 모아 하신에 이동시켰다.
드디어 으앙- 하는 어린애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향란은 안도의 숨을 후 몰아쉬며 의식을 잃고 말았다. 벌써 열흘 동안이나 하루 한 끼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걸식하는 밥이라 한 끼도 배를 불려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몸은 마른 가랑잎보다도 더 허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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