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백년빙곡冰谷
장혜영
5장 사랑과 이별
1
지은의 방 미닫이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지난밤 그녀를 방에다 눕히고 미닫이문을 닫았었는데…… 아마 화장실에 다녀오며 문을 닫지 않고 그냥 들어간 모양이다.
지은은 이불 위에 되는대로 엎드려 자고 있었다. 여름방학이니까 등교할 일도 없을 것이니 진종일 잔다 해도 안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세상과 인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스스로를 향유하고 있는 그녀의 배포가 측은하면서도 익살 궂어 보여 준호는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어제 하루를 즐기기 위하여 오늘을 상실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즐거움은 물질적인 것에 그칠 뿐 그 대가로 엄청난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려야 한다는 인생의 이치를 모르고 있었다.
살그머니 미닫이문을 닫아주고 계단을 내려왔다.
오늘은 대학도서관으로 가서 관련 자료들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계절은 어김없이 순환하여 봄은 어느덧 여름의 문을 노크하고 있었다. 도시를 꽃 바다 속에 잠기게 했던 목련꽃이며 벚꽃이며 진달래꽃이며 개나리꽃들은 어느새 지고 철 따라 녹색의 싱싱한 숲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여름에 접근할수록 기온은 상승할 것이고 녹음 또한 짙어져 도시를 서늘하게 식혀줄 것이다.
방학이라 캠퍼스엔 학생들이 적었다.
준호는 도서관 계단을 올라가다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유리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흠칫 발걸음을 멈췄다. 유리의 모습이 어찌하여 느닷없이 기억 속에 출몰한 것인지 그 원인이 불투명했다. 너무나 평범한 인간적 교제밖에는 아무것도 없건마는 무엇 때문에 그녀의 기억은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을까. 도리어 범상하지 않은 사연이 있었다면 지은이 쪽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녀의 모습은 무심하게 마음의 기슭으로 지나갔다.
그의 손에는 어느 사이엔가 휴대폰이 들려있었다.
누구한테 전화하려고?
의문도 잠시, 손가락은 벌써 머릿속에 각인된 그 친근한 느낌의 아라비아숫자들을 터치하고 있었다.
이래도 되나?
생각은 생각대로 손은 손대로 제각각 움직였다.
귓전에서 뚜웃, 뚜웃, 하는 부드러운 신호음이 울리자 준호도 공연히 마음이 설렜다. 그 신호음이 유리 씨의 스마트폰에 전송되어 벨소리를 울릴 것이고 그러면 그녀는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 대고…….
영화 화면처럼 그녀의 모습이 의식의 스크린에 생생하게 현상되었다.
드디어 통화가 연결되며 신호음이 뚝 그쳤다.
가야금 줄처럼 팽팽하게 조여들던 준호의 신경도 그와 동시에 툭하고 끊어지는 것만 같았다.
“여보세요?”
그 익숙한 목소리! 부드럽고 은근하고 촉촉하고 다정한…….
그러나 준호는 불에라도 데인 듯 흠칫 놀라며 휴대폰을 꺼버렸다. 전화를 할 만한 구실 같은 것을 미리 골라 본 적도 없었다. 설령 그런 구실을 골라놓았다고 해도 가슴이 떨려 그 말을 입 밖에 낼 용기가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정말 그녀를 좋아하는 걸까?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진옥이를 사랑했지만 이렇듯 신비한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소꿉시절부터 한동네에서 살았고 학교도 함께 다녔기 때문인지도 모르나 그녀와의 사이에 미묘한 흥분이나 긴장 같은 건 별로 없었던 걸로 기억된다. 물론 진옥이와 사랑한다는 말 같은 것을 한 적은 없었지만 그들은 분명 서로를 사랑했다.
준호는 다시 계단을 올라가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서적을 대출하여 6층 열람실에 들어갔다. 테이블에 앉아 책을 펼쳤으나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각별한 친절로 대해준 건 단순히 주인으로서 행한 예의에 그치는 것일까? 아니면 아버지를 대신하여 행한 사과에 그치는 것일까? 정말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전혀 없었던 것일까?
자꾸만 그녀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만일 유리 씨도 나에 대해 이성적인 호감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그녀와의 관계를 이 정도에서 멈춰야 하는가 아니면 사랑의 결실에 이르도록 추진시켜야 하는가? 그녀와의 관계를 추진시키는 데는 아버지의 당부를 거스르는 불효와 할아버지의 신념과 어긋나는, 배신의 고민이 전제되었다. 그렇다고 효도와 신념을 위해 사랑을 포기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선택만은 아니었다. 이미 진옥과의 이별이 그 점을 너무나 잘 시사해주고 있었다.
준호는 종일 열람실에 앉아 자료를 뒤적였지만 결국은 유리 씨가 던져오는 기억의 그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도서관에서 물러나오고 말았다.
신림동 어느 포장마차에 들러 소주 한잔을 마시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혹 알코올의 힘이라도 빌면 짓궂게 달라붙는 유리에 대한 집념을 털어버릴 수 있을까 해서 술을 마셨으나 허사였다. 알코올은 도리어 의식의 언덕에 달라붙는 집념에 풀기 있는 접착제처럼 유리 씨를 흡인해 들였다. 집념은 사실 집념 이외의 다른 것을 망각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유리에게만 집념한다면 「6․25 참전자 실록」은 언제 집필하며 리포터는 언제 탈고할 것인가.
날은 아주 어두워졌다. 거리에 듬성듬성 설치된 방범등 불빛은 골목으로 밀려드는 어둠의 홍수를 말끔히 쓸어내지 못한 채 노면에 희미하게 흩어져있었다. 시들어가는 마지막 꽃송이 몇 개가 달린 목련은 그 화려한 아름다움을 잃은 슬픔에 잠겨 어둠 속에 웅크린 채 애수에 울고 있었다.
어둠이 두텁게 깔린 좁은 언덕길이 더는 낯설지 않았다. 한가롭고 적막한 분위기마저 벌써 친근하게 다가왔다. 내가 휴식할 공간으로 이어졌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처럼 낯설던 경물이 친근하게 다가서는데 아버지와 고국의 사이는 왜 좁혀지기 않을까? 여기 한국 땅에는 아버지가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이어지는 어둡고 적막한 언덕길조차 없는가.
평화는 고요함이고 또 그래서 적막일지도 모른다. 오늘 저녁 이 언덕길은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이 길과 이어진 3층 빌라 위엔 평화롭게 잠든 지은이가 있을 것이고……. 그러나 이 길은 전쟁터의 화약 냄새를 물씬 풍기며 아버지가 올라오시고 내려가신 길이기도 했다.
언덕 위의 3층 빌라에는 오로지 준호의 방에만 조명이 꺼져있었다. 무슨 도깨비굴처럼 창문엔 어둠이 두텁게 발려있었지만 준호는 그 방이 정답게 느껴졌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통해 3층에 올라오니 느닷없이 방에서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훌쩍, 훌쩍!
어둠이 출렁거리는 로비에 서서 흐느낌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꼭 마치 요귀나 물귀신의 울음소리 같아서 소름이 오싹 끼쳤다.
어둠 속에서 문득 덜커덕,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은이네 화장실 안에서 낯선 사내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준호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사내도 어둠 속에 서있는 그를 보고 놀란 모양인지 흠칫 몸을 떨더니 허둥지둥 지은의 방으로 기어들어갔다. 벌거벗은 사내의 몸뚱이는 축 늘어진 뱃가죽과 유난히 큰 엉덩이 때문인지 곰처럼 미욱하게 생긴데다 허리까지 구부정한 노인네의 모습이었다. 사내의 손에서 미닫이문이 닫히는 순간 준호는 놀라운 정황을 목격했다. 방 안은 조명이 꺼져있었지만 창문으로 흘러든 외광을 빌어 이불 위에 누워있는, 역시 벌거벗은 나체가 여자의 몸뚱이임을 알아볼 수는 있었다. 둔부의 풍만하면서도 미끈한 윤곽이 뚜렷했다.
60대의 노인네와 20대의 지은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준호는 미닫이문이 닫혔는데도 로비에 우두커니 심어져 있었다.
혹시 지은이가 아닐 수도 있어. 집을 빌려줄 수도 있잖아.
이렇게 자신을 위안하며 지은이에 대한 좋은 인상을 극력 유지하려고 애쓰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자리에 누웠으나 밤새 지은의 방에서 이상한 신음소리와 숨을 헐떡거리는 소리, 쿵덕거리는 소리, 철벅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남녀가 방에 벌거벗고 누워 할 짓이 무엇이겠는가. 준호는 아직 남녀 간의 그런 일을 체험해 보지는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그 소리가 남녀가 성관계를 하는 것임을 직감했다. 갑자기 구토가 발작했다. 그 늙은이의 축 처진 뱃가죽과 커다란 엉덩짝이 떠올랐고 더럽고 퀴퀴하고 쭈글쭈글한 맥 빠진 몸뚱이에 깔려 유린당하고 있을 지은의 백옥 같은 나체가 떠올랐다.
주방에 나가 하수구에 저녁 먹은 걸 죄다 토해버렸다.
아니야, 지은이가 아니야!
준호는 연신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튿날 아침 준호는 로비에서 들려오는, 명랑한 노랫소리에 새벽에야 겨우 청한 늦잠을 깼다.
이제 맘 편해 졌어
누구도 사랑하지 않기로 한거야
항상 상처뿐인데 구속 따윈 필요 없어……
누굴 만나던 어디를 가든지 이젠 내 맘 대로야……
다가라. Hey Boys!
다신 내 삶을 사랑이란 말로 가둬두지 마
창 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찬란한 아침햇빛과 정원의 가로수 위에 앉아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청아한 목소리였다. 뿐만 아니라 그 목소리는 조금도 음탕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전혀 순수한 것이었다.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옷을 걸치고 로비로 나와 보니 속옷차림의 지은이가 가스레인지에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열려 있는 미닫이문 안을 훔쳐보았으나 늙다리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헝클어진 지은의 머리카락과 짓이겨진 이부자리가 지난밤에 있었던 그 더럽고 치사스러운 장면을 새삼스럽게 떠올려줄 따름이었다.
“잘 잤어?”
“지난밤 집에서 잤니?”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속으로 제발 아니라고 대답해주기를 바라면서.
“그럼 집에서 자지 밖에서 자.”
하늘이 꽈르릉 무너지고 땅이 쿵, 허물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에 대한 마지막 믿음과 기대가 마음속에서 붕괴되는 소리를 들으며 준호는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입 안이 소태를 씹은 것처럼 써지며 또다시 구토가 발작했다. 그러나 빈속이라 토할 것도 없었다. 그녀를 마주본다는 것조차 싫어졌다. 아니, 그녀와 함께 이 집에 있다는 사실조차 싫어졌다. 그녀의 방 안에 차고 넘치는 더러운 오물이 벽을 뚫고 스며들어와 준호의 깨끗한 공간을 오염시킬까 두려워졌다.
준호는 세면도 하지 않은 채 부랴부랴 옷을 걸치고 방을 나섰다.
“식사도 안 하고 어딜 가?”
지은이 계단을 따라 내려왔으나 거들떠보지도 않고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어제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그녀의 방탕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필요했던 저 늙다리와 조금도 다를 게 없다는 새삼스런 깨달음에 전율했다. 자신도 그녀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수 없이 밟고 지나간 수많은 남자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그것도 저 늙다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생각이 지은이를 믿었던 스스로에게 분노하게 했다.
준호는 발길이 가는 대로 육신을 실어놓았다. 아무데고 좋으니 되도록 지은이와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지하철을 갈아탔다. 어딘가에 내렸을 때에야 준호는 자신이 유리가 살고 있는 정발산역에 내려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여긴 왜 왔지?
돌아가려고 했으나 발길은 벌써 육교를 넘어 역 광장을 지났고 자연스럽게 호수공원으로 향했다. 유리와 함께 커플자전거를 타고 호수를 드라이브하던 그날의 즐거움이 눈앞에 펼쳐졌다. 유리도 혹시 공원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싶은 엉뚱한 기대감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낯선 얼굴뿐이었다.
발길을 돌려 월파정으로 걸어갔다. 그녀와의 발길이 나란히 찍혔던 곳을 따라 언덕을 올랐다. 그녀의 손이 닿았던 꽃가지들과 월파정 벤치를 가만히 손으로 쓰다듬어보기도 했다. 아직도 그녀의 체취가 그윽하게 묻어 있는 것만 같아 친근하게 느껴졌다.
유리와 술을 마셨던 포장마차로 들어가 아침식사 겸 점심을 먹었다. 술 한 잔을 마시고 정발산공원의 능선으로 올라갔다.
내가 이러고 다닐 시간이 어디 있어. 리포트도 탈고해야 하고 「6․25 참전자 실록」자료정리를 끝내고 금년 내로 집필을 시작해야 하잖아.
이런 생각을 굴리며 정발산을 도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발산기슭을 돌아가기만 하면 유리 씨가 살고 있는 집이 있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그의 의식을 유혹해갔다.
안 되겠어. 자취방에서 나와야지. 그런 음탕한 여자와 이웃하고 살 수는 없어.
준호는 유리에게로만 날아가는 생각을 붙잡아 돌려보려고 애썼다.
도서관으로 가자. 도서관으로 가자. 어서!
그는 유리네 집 쪽으로 도망치는 자신의 의식을 채찍으로 때리며 지하철로 내려갔다.
대학도서관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오후 세 시였다. 열람실에 올라가 책을 손에 들었으나 착잡한 잡념 때문에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난밤 제대로 자지 못했기 때문인지 졸음만 악착같이 밀려들었다. 그는 아예 테이블에 엎드려 느긋하게 잠을 청했다.
“야, 이놈아! 애비가 그 계집앨 만나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거늘 또 그 집으로 찾아가 어슬렁대다니. 할아버지가 알면 네놈의 종아리를 분질러 놓고 말거야!”
꿈속에서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는 아버지를 피해 다니다가 깨어났다.
날은 이미 저물었다. 또 하나의 의미 없는 하루가 방황과 고뇌 속에서 무심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평화가 가져다주는 이 권태와 안일과 게으름, 정말이지 전쟁이 아니고서는 그 깊은 잠에서 깨어날 것 같지가 않았다. 전쟁은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부식을 방지하는 필요악인지도 모른다. 평화가 파도가 없는 고인물이라면 전쟁은 파도가 세찬, 흘러가는 물이 아닐까? 고인 물은 썩고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 법이니 고인물의 고요는 반드시 흐르는 물의 유동으로 바꿔 채워야 한다.
내가 지금 무슨 엉터리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전쟁을 변호하고 있다니. 전쟁을 반대하여 책을 집필하려는 사람이…….
준호는 도서관에서 나왔다. 내일 아침엔 짐을 챙겨가지고 자취방을 나와 기숙사엘 옮겨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셔틀버스에 올랐다. 오늘로써 지은이와의 모든 관계에 종지부를 찍으리라 작심했다. 그녀와의 더 이상의 관계 유지는 무의미한 시간낭비일 따름이며 염세와 퇴폐에 감염될 위험만 커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계단을 올라가노라니 또 흉측한 꼴을 보게 될까봐 미리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오늘따라 그녀의 방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미닫이문도 오래간만에 얌전하게 닫혀 있었다.
웬일이지?
그러한 돌변이 도리어 이상하게 느껴졌다.
준호는 로비를 지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강박적으로 자신을 컴퓨터 앞에 마주 앉혔다. 마우스를 작동하여 「6․25 참전자 실록」파일을 열었다. 그러나 정작 마주앉긴 했으나 머릿속의 사유는 헝클어진 채 가닥을 풀기 어려웠다.
바로 그때 느닷없이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렸다.
“오빠 나야. 속이 답답해서 술 한잔하려고.”
지은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술병과 마른안주가 묵직하게 들려있었다.
그러나 준호는 대답 한마디 하지 않고 외면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은은 구들로 올라와 술상을 차렸다. 두 개의 유리잔에 술을 따라 놓고는 말없이 준호의 팔을 잡아당겼다.
준호는 그녀가 당기는 바람에 몸을 비틀거리며 걸상에서 일어나 장판바닥에 내려앉았다. 지은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으나 준호는 그녀를 얼음조각처럼 냉담한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그러자 덩달아 지은의 얼굴에 피었던 웃음도 말끔히 사라졌다.
“그런 눈길로 쏘아보지 마. 오빠의 그 눈길이 동정이라도 싫고 저주라도 싫고 실망이라도 싫고 불만이라도 싫어.”
지은이가 손에 들었던 술잔을 상 위에 탁 소리 나게 그루박는 바람에 준호의 눈길이 흠칫하고 떨렸다.
“너 고작 이것밖에 안 돼? 정말 실망이다.”
준호는 술잔을 들고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는 빈 잔에 술을 따르려는 지은의 손에서 술병을 와락 잡아채어 스스로 잔에 술을 따랐다.
“그래 난 고작 이것밖에 안 돼.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잖아. 꼭 오빠가 살아가는 방법만 옳다고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건 인권침략이잖아.”
지은이도 한 모금에 술잔을 비우고 스스로 술을 따랐다.
인권침략이라! 그럼 우리 사이에도 전쟁이 있었단 말인가? 침해가 아닌 침략이라는 말로 지은은 준호를 전쟁도발자로 낙인찍고 있다. 어쩌면 나와 진옥의 사이에도 사랑보다는 전쟁이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언제 너한테 내 삶의 방식을 강요했어?”
“눈길이 그걸 설명하잖아. 너 이렇게 살면 안 돼 하고. 도덕적 질타 같은 눈길 말이야.”
“그래. 잘 생각했다. 난 네가 이런 사람인줄 몰랐어. 네가 하는 아르바이트란 게 늙은 색마나 끌어들여 몸뚱이를 파는 거였냐?”
“늙은이뿐이 아니야. 흑인이고 백인이고 돈만 주면 난 가리지 않거든. 오빤 어제 우리가 즐긴 돈이 어디서 온 건지 모르지. 흑인의 돈이란 말이야. 호호호. 그래서 오빠가 날 어쩔 건데. 경찰에 신고라도…….”
“그 입 다물지 못해!”
준호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버럭 언성을 높였다. 치미는 분노를 삭이느라 술잔을 들어 입 안에 털어 넣고 꿀떡 삼켰다.
“먹은 게 올라 오거든!”
지은이도 부드럽기만 하던 아니, 그녀의 눈에는 우유부단해 보이기까지 했을 준호가 갑자기 고함을 지르자 놀란 모양인지 잠시 입을 다물고 말끄러미 상대방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나 그러한 주저감도 잠깐이었을 뿐 그녀는 금방 두려움에서 탈피했다.
“왜 필요악이라는 것도 있잖아.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열대가 있으면 남극이 있고 자유가 있으면 억압이 있고 민주가 있으면 독재가 있고 평화가 있으면 전쟁이 있듯이 말이야. 밤이 어둡고 남극이 춥다고 낮과 열대만 있으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어. 그것처럼 선이 있으면 악이 필요한거야.”
평화가 있으면 전쟁이 있다. 그리고 그 전쟁을 필요악이라고 한다.
준호는 이 충격적인 말에 잠시 망연자실해졌다. 그렇다면 한 나라에 여당과 야당이 있어 민주주의가 체현될 수 있는 것처럼 세계질서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있어 세계적 범위에서의 권력균형이 보장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구소련의 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지면서 자본주의 일변도 양상을 띠며 미국이 세계패권을 행사하려는 오늘날의 국제정세도 필요악이 무너진 결과이기 때문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 필요악은 사회주의일까 자본주의일까? 다만 선은 악의 배경이 존재할 때에만 비로소 존재가 가능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평화를 위한 필요악으로서의 전쟁……. 만일 노루나 토끼를 잡아먹는다는 이유로 포식동물들을 죄다 죽여 버린다면 먹이사슬의 균형은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오빤 아마 버림받은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모를 거야. 노래나 팔고 몸뚱이나 파는 탕녀의 딸인 내 가슴에 서린 설움을 모를 거라고. 할아버지는 엄마를 빨갱이자식이라고 버렸고 엄마는 당신을 유린한 자에 대한 증오를 나에게 화풀이했단 말이야. 난 빨갱이후손이고 아비조차 모르는 서출이고 과부자식이야. 그래서 사회와 가족과 사람들의 소외와 천시와 버림을 받으며 살아왔어. 누구도 나 같은 천한 인생을 동정해 주지 않았어. 쓰레기처럼 외면하고 짓밟고 침을 뱉고. 이 모든 게 왜 내 탓이어야 해. 내가 태어난 게 나 자신의 죄이기라도 한거야.”
지은은 술병 채로 거꾸로 쳐들고 꿀떡꿀떡 마시더니 고개를 떨어뜨리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준호는 갑자기 그녀가 측은해지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이 모든 것이 왜 그녀의 탓인가? 왜 그녀는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 때문에 사회와 가족과 사람들의 버림을 받아야 하는가. 중요한 것은 준호 자신도 방금 그녀를 저주하고 증오하고 내팽개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울지 마, 오빠가 사과할게.”
그가 버린 사람은 진옥이가 마지막이어야 했다. 진옥을 버리고 또 지은의 우정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지은이가 사회적 소외와 천대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어쩌면 그녀의 처지에서 삶을 지탱하기 위해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생활방식은 그것뿐이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녀가 대통령의 딸로 태어났다면, 국회의원이나 대재벌의 딸로 태어났더라면 생존방식 또한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오빠.”
지은은 준호의 품에 몸을 기댔다.
“안아줘.”
준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소담한 장발을 쓰다듬었다. 유리의 상체를 받아 안았을 때의 그 가슴 떨리던 순간이 새삼스럽게 기억의 돛배를 띄웠다. 그러나 지금 순간에도 지은은 그저 동생처럼 느껴질 따름이었다. 진옥은 그래도 동생 같으면서도 이성으로 느껴졌었는데…….
“많은 남자들이 내 몸을 스쳐갔지만 그들은 죄다 돈벌이 수단에 불과했어. 농사꾼의 손에 들린 호미나 낫, 괭이와 같은 돈 버는 도구에 불과했거든. 그들 또한 날 여자나 인간으로 보지 않았어. 돈 주고 산 장난감 정도로 여겼을 뿐이었어. 그래서 그들이 돈값을 톡톡히 하느라고 내 몸을 괴롭힐 때면 난 울면서 그들을 저주하고 증오하고 원망했었어?
준호는 그녀의 너무나 비참한 생활에 할말을 잃고 그저 어깨만 가볍게 다독여주었다.
“나도 한 여자로서 한 남자를 진정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싶어. 그러나 누가 나같이 천하고 지저분한 여자의 사랑을 받아줄 건데. 하룻밤 일회용 장난감으로 굴리고 나면 수염을 뻑 쓸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남자들뿐인데…….”
“네 사랑을 받아줄 남자가 꼭 나타날 거야.”
그 말에는 위로의 뜻만 담겨있을 뿐 어떠한 현실적 근거나 가능성도 없었기에 준호는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오빠, 키스해줘. 남자한테 이렇게 사랑을 느낀 건 오빠가 처음이야. 내 마음과 몸을 오빠에게 고스란히 바치고 싶어. 돈을 위해서가 아니야. 비굴하게 오빠한테 부담과 책임을 지우고 양심에 매달리기 위해서도 아니야. 오로지 사랑을 위해서 날 바치고 싶어. 순결은 짓밟혔어도 내 가슴에 아직 진심은 남아 있어.”
지은은 두 눈을 감고 준호의 입술을 기다렸다. 이슬이 맺힌 눈동자며 오뚝한 콧날이며 발그레한 입술이며 너무나도 진옥을 닮아있었다. 그더러 자신을 가지라고 간청하는 모습까지 흡사하여 준호는 전율했다.
하지만 준호는 그녀의 간청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진옥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옥이보다도 유리가 먼저 기억의 숲에서 걸어 나왔다. 품에 안겨 키스를 원하는 여자가 지은이가 아니고 유리였다면……. 아니다. 유리가 만일 지은이처럼 사랑에 적극적이었다면 준호 역시 지금 지은이를 품에 안고 동생으로 여기는 것처럼 그녀에게서 이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남자에게 무난히 접근하는 지은이와는 달리 준호와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한계를 두고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유리의 그 고집이 어쩌면 그녀의 여성스러움과 매력을 느끼게 했던 계기나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다리다가 지친 지은은 감았던 눈을 뜨더니 실망스런 표정을 짓는다.
“오빠도 지은이가 싫지, 더럽지, 그치?”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난 지은일 동생처럼 생각해. 그만큼 아끼고 사랑한단 말이야.”
“그게 싫다는 말이잖아. 여자로서는 널 받아들일 수 없다 그 뜻이 아니야.”
“지은아. 넌 마음도 예쁘고 얼굴도 예쁜 애야. 그뿐이니, 총명하고 지혜롭고 정이 많은 애지. 그러니 자신을 탕진하기 전에 자신을 사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해. 자중자애하고 존엄을 지킬 줄 알아야지. 난 지은이가 꼭 그런 사람이 될 거라고 믿어. 사랑은 그런 뒤에 만나도 늦지 않을 거야. 어쩌면 난, 네가 보기엔 우유부단하고 너처럼 현실에 반항하는 배포나 기개도 없는, 현실의 노예 같은 난 너의 자유분방하고 기백이 넘치는 성품의 상대가 못될 수도 있어. 자격미달이란 말이지. 오빤 현실에 만족하는, 비전이 없는 무용지물이지만 넌 현실과의 전쟁을 과감히 선포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가진 여자라고.”
“됐어. 오빤 날 비행길 태우고 있지만 실은 날 포기하고 도망치려는 구실을 만들고 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어. 나도 사랑을 구걸하고 싶지는 않아. 우리 사랑타령은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자.”
지은은 준호의 품에서 일어나더니 창문 밑으로 밀어 놓았던 술상을 다시 당겨왔다. 그리고는 두 사람의 잔에 술을 따랐다.
“들어. 나 때문에 부담가질 필요는 없으니까 맘 편히…….”
그녀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며 웃음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그녀가 자신의 불행을 슬퍼만 했다면 오늘날까지 살아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 마시자. 지은인 정말 훌륭한 여자야. 상처의 고통을 부둥켜안고 아픔의 눈물만 흘리지 않고 그 고통을 딛고 일어서서 웃음으로 상처를 치유할 줄 아는 지혜로운 여자니까 말이야. 그만하면 자신을 타락에서 보호하고 아끼는 법도 금방 터득할거라고 오빠는 믿는다. 자, 그런 의미에서 우리 건배하자.”
두 개의 술잔이 허공에서 잘그랑 부딪치며 넘쳐난 술 방울이 물보라처럼 사방으로 튕겼다.
“지은아.”
느닷없이 로비에서 웬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두 사람은 술잔을 허공에 든 채 현관 쪽에 귀를 기울였다.
“누가 널 부른 것 같은데…….”
“날 찾는 사람 아무도 없어. 신경 꺼…….”
“지은아, 얼라, 이 집이 분명 옳거니. 이 가시나가 고마 워딜 갔디야. 지은아, 이 가시나 집에 있는겨? 느그엄니 왔댜.”
엄마?!
두 사람은 동시에 그 말을 받아 외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순간 지은의 얼굴 표정에는 불만의 그늘이 드리우고 준호의 얼굴에는 의혹의 커튼이 길게 드리웠다.
“엄마가 여긴 웬일이야?”
지은은 반가움보다는 짜증 섞인 기색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호도 그녀의 뒤를 따라 로비로 나갔다.
키가 후리후리한 한 여인이 자그마한 보퉁이를 옆구리에 끼고 허리를 굽힌 채 지은의 방문 사이로 방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엄마.”
지은이 부르는 소리에 여인은 흠칫 놀라며 허리를 펴고 돌아섰다. 얼굴에 누런 이끼가 낀 듯 병색이 짙은 40대의 여성인데 머리엔 어느새 흰서리가 내려있었다. 동그스름한 얼굴에서는 옛날의 미모를 엿볼 수 있었지만 병환 때문인지 젊은 나이임에도 어깨와 가슴은 뼈만 앙상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준호는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그녀는 한식경이나 누렇게 뜬 눈으로 낯선 총각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딸에게 물었다.
“얼레, 누구여?”
“옆방 사는 오빠에요. 복도에 우두커니 섰지 말고 어서 방에 들어가.”
지은은 민망한 듯 여인의 손에서 보퉁이를 빼앗아 들고 앞장서서 준호의 방으로 들어갔다.
“요즘은 어띠여? 머 혀느라고 기별 한마디, 전화 한 통, 편지 한 장 없는 겨. 혼자서 멀 존걸 혀묵는디야.”
여인은 찬장이며 냉장고며 닥치는 대로 열어보았다.
“뒤지지 마. 오빠네 주방이야.”
여인은 어느새 냉장고 안에서 샌드위치조각을 꺼내어 입에 넣고 질근질근 씹으며 방 안으로 올라왔다. 땀에 젖은 양말에서 악취가 고약하게 풍겼다. 지은이가 대뜸 양미간을 찌푸리며 불평을 터트리려는 걸 준호가 가만히 옆구리를 질러 제지시켰다.
“엄니는 앓아 죽는 데도 돈 한 푼 안 보내더니 이 가시나는 술상을 벌려놓고 흥청망청 잘들 살아대고 있는 겨.”
여인은 누가 권하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밥상 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이것저것 안주를 집어먹고는 딸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더니 단모금에 쪽, 들이켰다.
“한 달 전에 보냈잖아. 얼마 됐다고 벌써 돈타령이야.”
“몇 푼 부치고 그랴. 그걸 갖고 엄니더러 한 달 살라는 겨. 고생고생 길러 놓았더니 인젠 제멋에 컸다고, 엄니도 모른다구 할 참이여. 몰러 뭘 몰러.”
후룩후룩, 쩝쩝 먹어대기만 할뿐 주변사람들의 눈길은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옆에 앉아있는 준호가 도리어 보기 민망해 시선을 어디에다 둘지 몰랐다.
“엄마가 길러준 게 뭔데 말끝마다 고생했다는 거야.”
지은이는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아니꼬운 표정을 지었다.
“얼레, 낳아 주구 젖 먹이고 하면 길러준 게 아닌 겨.”
“낳아 주기만 해서 뭘 해. 아버지도 모르는데…….”
준호는 연신 말조심하라고 그녀에게 눈짓을 했지만 지은은 못 본 척 자기 할말만 했다. 엄마에 대한 그녀의 원망이 극한에 치달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엄마는 엄마대로 딸의 그런 원망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승인하거나 그 때문에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게 왜 엄니 탓인 겨? 아니 총각, 이 가이나가 말하는 걸 쪼깨 들어보시여유. 너만 애빌 모르냐. 이 엄니도 네 할아빌 보지 못했구먼. 보지도 못한 네 할아비가 의용군에 참가해 인민군노릇을 하다가 월북했다는 이유로 빨갱이 자식으로 사회와 가족들의 천대를 받고 살아 왔는 겨. 오죽하면 여자 홀몸으로 집을 뛰쳐나왔겠는 겨. 그러니 엄닐 원망할게 없구먼. 그리고 엄니도 널 낳고 싶어 낳은 게 아니잖여. 먹고 살기는 해야겠지. 할 수 없이 서울에 와서 노래를 팔고 살았는데 그 망나니 같은 놈이 날 흑흑흑…….”
시장기는 덜었는지 여인은 이따금 소리 내어 흐느끼다간 술을 마시고 안주를 집었다. 입으로는 울고 있지만 눈에는 이슬 한 방울 맺히지 않고 말라 있었다.
“누가 날 낳으랬어. 차라리 그때 뱃속에서 지워버리던지 낳던 참에 돼지우리에 던져버리던지 할 것이지.”
지은은 자꾸만 붙는 불에 키질을 했다.
“이 말하는 꼴을 좀 봐유. 이 가시나가 사람인 겨. 지깐 년도 사람의 목숨이라고, 불쌍하다고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것도 무릅쓰고 몇 달이나 이 뱃속에 설어 아프게 낳아줬더니 한다는 소리가. 에끼, 이 망할 년! 총각은 어디 사귈 가시나가 없어서 이런 년과 다 어울려 술을 마셔유.”
“엄마, 여긴 남의 집이야. 그만 먹고 우리 방으로 가자. 더 이상 지켜보지 못하겠어.”
지은은 무작정 엄마의 겨드랑이를 잡아 일으켜갖고 방에서 나왔다.
준호도 솔직히 만류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 모녀가 살아온 그 고달픈 인생이 그들을 거친 늑대처럼 영악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몸에도 엄마의 그 혼탁한 피가 흐르고 있는 거야. 그래서 엄마처럼 이렇게 지저분하게 살아가고 있잖아.”
지은의 원망이 처절하게 들려왔다. 그것이 어찌 지은의 탓이며 또 그녀 엄마의 탓이랴.
지은의 모습은 웬일인지 못 견디게 진옥의 기억을 재생시켰다. 진옥이도 지은이처럼 그 자신은 아무런 죄도 없으면서 세상의 버림을 받은 불행한 여자였다. 그런 불쌍한 진옥일 보호는 못해줄망정 그마저 그녀를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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