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고독

이 작품은 계간 "문학시대"82~83호에
분재되었던 소설입니다.

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연재 23
 
 
 
윤미는 자신의 피를 세탁하려는 앙리부인의 음모에 결사항전하고 나는 내 혈관속의 피를 갈아 치우려고 시도하는 마르셀교수와 공범자가 되려고 한다. 내 몸속에 흐르는, 내 것이 아닌 온갖 흔적들을 털어버리고 싶다. 그런데 윤미는 그 낡고 부패한 피 한 방울이라도 유실될세라 두려워 전전긍긍하고 있다. 윤미는 자신의 피가 자기만의 개체성을 가능케 하는 원천이라 생각하고 나는 내 몸속의 피가 나의 개체성을 방해하는 훼방꾼쯤으로 저주하고 있다.

“전 드뇌브의 파란 피가 제 혈관 속을 오염시킬까봐 무서워요. 그렇게 되면 앙리부인처럼 프랑스사람이 아닌 프랑스사람이 되고 말 거잖아요. 뿌리가 잘린 나무가 되겠죠. 정체성을 잃고 잡탕이 되겠죠.”
 
“무엇 때문에 인간은 과거라는 흔적의 복제품이 되어야 합니까. 흔적들의 쓰레기통이 되어야 합니까. 왜 나는 나여서는 안 됩니까. 왜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생소한 남이여야 합니까. 왜 윤미 씨는 동자스님이어야 하고 대공스님이어야 하고 나는 아빠, 엄마여야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여야 하고 또 누구누구여야 하는가 말이죠? 술이 없습니까? 갑자기 술 생각이 나는군요.”
 
“위스키가 있어요.”
 
“존재라는 게 별겁니까. 흔적들과 낙서들의 중첩에 불과한 거죠 라고 윤미 씨는 대답하고 싶으시겠죠. 낙서들이 모여 하나의 존재를 형성하고 흩어져서는 다른 하나의 존재를 형성하고…… 그렇다면 인간의 생명이라는 건 흔적들과 낙서들의 이합집산의 운동 또는 교체과정의 한 토막에 불과할 따름입니까!”
 
나는 내가 무슨 철학가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조작해낸 낙서라는 말이 어쩌면 프로이드의 무의식이나 라캉의 욕망이나 데리다의 디컨스트럭션이나 들뢰즈－가타리의 리좀이론처럼 하나의 철학적 범주로 둔갑하여 세계와 인간의 신비를 설명할 수 있기라도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엑스터시의 약효가 아직도 몸속에 잔존한 듯 나는 이상한 욕구 같은 것이 육신의 깊숙한 골짜기 어느 구석인가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러한 욕망은 신사다워야겠다는 나의 의지의 방선에 무시로 위협적인 도발을 가해오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무언가 나는 지금 자신의 존재에 대한 혼돈 속에 빠져 방황하고 있다. 이대로 방치해두면 그 속에서 나는 자멸하고 말지도 모르는 최악의 위기상황이다.

나는 나를 괴롭히는 나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결국은 스스로 회귀했으며 흔적들의 절대적 지배권에 굴복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무력하게 순종하는 나조차도 진정한 나는 아닌 것 같다. 그 속에는 아버지도 있고 어머니도 있고 할아버지도 있고 할머니도 있고 (이렇게 하나하나, 일일이 열거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은정도 있고 윤미도 있다. 어디 그뿐인가. 단군도 있고 해모수도 있고 만년, 백만 년을 거슬러 올라가 유인원도 있고 단세포미생물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저 하나의 거대하고도 자그마한 흔적의 저장고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흔적을 흔적에 이어주는 연결고리, 전도체傳道体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무언가 있어도 엄중한 문제가 있다. 데카르트나 라캉, 데리다나 들뢰즈－가타리가 이 문제를 너무나 단순하게 생각한 건 아닐까.
 
“술이 독해요.”
 
위스키 술병의 브랜드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독하다는 충고보다는 일반 사람들은 맛보기 힘든 고급명주라는 사실에 신경이 쓰였다. 윤미의 혈액을 세탁하려는, 그녀에게서 모든 과거의 흔적을 지워버리려는 앙리부인의 음모가 그 속에도 숨어있었다.

술기운이 거나해지자 윤미와 나 사이에서 간혹 얼씬거리던 은정과 정 교수의 모습도 점차 윤곽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설치한 철조망도 사라지고 그 위에 넓고 평탄한 고속도로가 활짝 펼쳐진다.

잠시일망정 과거의 흔적을 잊게 해주는, 마법사의 신비한 마술도구인 알코올!!!

그러나 나는 의지 (이 의지는 나의 것인가?) 하나로, 달리려고 몸부림치는 감성의 (현재의, 이런 내가 진정한 나일지도 모른다.) 열차에 단단히 제동을 걸고 있었다. 나에게 제동을 거는 내가 진정한 나일 수도 있다. 나와 나의 전쟁! 이 열차의 운전기사는 나르시시즘적인 나라고 해도 좋다. 성진이지 아버지가 아니다. 마법사의 마술도구인 알코올은 더구나 아니다. 아버지는 나를 운전대에서 끌어내리려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권력쟁탈을 벌이는 이 치열한 전쟁이 도대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비단 아버지뿐이 아니다. 그밖에도 나는 나를 위해 수많은, 강대한 적수들인 나와 싸워야만 한다. 나를 위해 나랑 이 전쟁을 치러줄 나는 도대체 어떤 나인가?
 
“어때요. 괜찮아요? 힘드시면 그만 마시세요.”
 
“아니, 괜찮습니다. 제 아무리 독해보았자 술이겠지요. 사람이 술을 이기지 술이 사람을 이기겠습니까. 그나저나 오늘은 잊지 말고 그림을 가져가야 할 텐데.”
 
“잠시 침대에 누워 휴식하세요.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지셨어요.”
 
그녀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홍당무라는 한국말이 이슬을 머금은 듯 싱싱하다. 그 한마디로도 윤미가 명실상부한 코리언이라는 걸 입증하게엔 충분할 것 같았다.
 
“아버지를 닮아서 이렇습니다. 한잔만 마셔도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지지요.”
 
“부친께서도 주량이 크셨나 봐요?”
 
“크다마다요. 과음할 땐 소주 10병까지도 거뜬하게 비웠답니다. 얼굴이 벌겋다 못해 시커멓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시군요. 그럼 성진 씨도……”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 아닙니까. 싸리 그루에서 싸리 나고 콩 그루에서 콩 난다고……”
 
말을 하다보니 지금까지 마신 술이 내가 마신게 아니라 아버지가 마신 거라는 걸 비로소 깨닫고 나는 흠칫 놀랐다.

“아…… 아니, 아닙니다. 전 아버질 닮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폭음하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제 방식대로 살아갈 겁니다.”
 
“아빠를 닮았다는 게 뭐 나쁜 말인가요. 아들은 아빠를 닮고 딸은 엄마를 닮는 게 정상적인 현상이잖아요. 닮지 않았다면 도리어 이상하겠지요.”
 
“윤미 씨.”
 
나는 반론을 펴려고 했지만 호명만 해놓고는 정작 명분이 궁해져 뒷말에 기다란 생략부호만을 달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정상적인 것을 비정상으로 본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상이라는 말은 단순한 복사와 반복을 의미하기도 한다. 흔적의 복사와 낙서의 반복 그것을 정상이라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비정상이고 싶다는 말이 떠올랐지만 경솔하게 입밖에 내뱉지는 않았다.

이 순간 나는 뭔가를 깨달은 것 같기도 하고 모든 의문에서 초탈한 것 같기도 했다.
 
모든 것은 너무나 일목요연하다. 다만 우리가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인생도 존재도 사랑도……
 
내 몸은 내 몸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림자들의 전쟁에 하나의 보루로 제공되고 있을 뿐이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협정이 조인되면 나는 죽을 것이다. 그때에야 나는 비로소 참된 내가 될 것이고……
 
띠리리룽-띠리-띠리룽-
 
휴대폰이 울린다.

“여보세요.”
 
“오빠. 나 은정이야. 금방 엄마랑 같이 파리국제공항에 도착했어.”
 
“파리국제공항에?!”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또 하나의 흔적이, 금방 낙서되기 시작한 나와 윤미와의 흔적을 지우려 하고 있다. 그런데 그 흔적은 윤미에 의해 가려졌던 흔적이다.

그 앞에서 나에게 차례진 몫은 선택이기 전에 망연자실함뿐이다.

나는 나이면서도 내가 아니며 또한 나이기 때문일까.
 
나라는 존재는 한낱 흔적과 낙서들의 심술궂은 게임일 뿐이다. 그림자들의 졸렬한 중첩!
 
나는 내가 아닌 나를 바라볼 뿐 이 게임에서 아무런 선택권도 결정권도 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