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연재 "붉은아침" 6
제1부 백년빙곡冰谷

장혜영



                                 

 

                                      3장 뜨거운 호수
                                                                                                                               


                                                 1

 


 진옥은 절망의 눈물을 흘리며 멀어져갔다. 낭떠러지를 향해서 허위허위 멀어져 가고 있었다.
 “오빠, 날 구해줘!”
 처절한 호소가 계곡을 뒹굴며 피투성이가 된다.
 “기다려. 내가 구해줄게.”
 준호는 진옥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누군가 그의 옷자락을 꽉 부여잡았다. 아버지였다.  그 순간 진옥의 모습이 금시 한 유리로 변한다.
 “유리 씨!”
 부르다가 깨어났다.
 꿈이었다.
 방 안은 텅 비고 등허리에 땀이 질펀하게 배었다. 늦잠을 잔 모양 어느덧 햇빛이 방 안에 가득 널렸다.
 화장실에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던 그는 방 한가운데에  차려놓은 조반상을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멈췄다.
 누가 차린 조반상이지? 혹시 아버지가?
 밥보자기를 열어보았다. 상 위에는 정말이지 오래간만에 보는 된장찌개와 고춧물이 발그레하게 든 배추김치와 멸치 젖, 게장이 먹음직스럽게 오붓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입 안에서 군침이 스르르 돈다.
 수저 옆에 쪽지 한 장이 놓여 있기에 집어서 펼쳐 보았다.

 오빠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한 그릇의 구수한 된장찌개나 한 포기의 상큼한 김치가 되어 오빠의 고달픈 인생에 한 다발의 즐거운 선물이 되고 싶어요. 이 세상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척박한 인정의 마지막 꽃잎이 되고 싶어요.

                                                                  오빠의 지은이가

 웬일인지 콧등이 시큰해졌다.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아름다웠다. 고상함보다는 소박한 모습이 대견했다. 아직은 낯설음도 채 가시지 않았는데 스스럼없이 마음을 열고 오빠라고 불러주는 친절함이 가슴을 훈훈하게 했다. 내가 먹어야 할 이 된장찌개와 김치들이 어찌 단순한 음식물에 불과하랴. 그것은 지은이의 마음이고 정성이었다.
 띠리리루룽- 띠리리루룽-
 휴대폰 벨소리가 느긋하게 그를 불렀다.
 “여보세요.”
 준호는 화장실 문을 열며 휴대폰을 귓전에 가져갔다.
 “준호 씨, 저 유리에요.”
 “아, 네. 유리 씨. 안녕하세요.”
 유리가 앞에 서 있기라도 하듯 준호는 부랴부랴 화장실에서 나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공연히 가슴이 설렜다.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
 “저녁에요. 시간은 있습니다만.”
 “저녁에 저희 집으로 오시겠어요. 제가 할아버지께 잘 여쭈었으니까 취재를 다시 시도해 보세요.”
 “네.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이따 저녁에 뵙겠습니다. 들어가세요.”
 허물어졌던 희망이 다시 부활했다는 생각에 준호는 흥분되었다. 약속을 잊지 않고 지켜 준 유리가 고마웠다. 그녀의 약속이행으로 유리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도 그의 마음을 공중에 붕, 들뜨게 했다.
 그녀를 만난 게 불과 며칠 전인데 1년이나 10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와 다방에서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꿈처럼 남아 있다. 그것이 꿈이 아니기를 이번 재회를 통해 확인하고 싶어졌다. 중이 염불에는 흥미 없고 잿밥에만 신경 쓴다더니, 내가 지금 그 모양이다 싶었다. 취재보다는 유리에게 신경이 쏠리니 말이다. 준호는 히죽 웃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직은 진옥의 모습이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가슴의 언덕에 유리의 모습은 벌써 하나의 씨앗으로 파종되고 있는 건 아닌지?
 준호는 오랜만에 푸짐한 조반상에 마주앉아 지은의 구김살 없는 정성을 맛보기 시작했다. 진옥이와 유리 그리고 지은이는 무슨 삼각함수처럼 그를 그녀들의 울타리에 몰아넣고 공차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준호가 그녀들이 차는 공이라면 그가 들어갈 골문은 과연 어딘가? 그녀들은 준호를 가운데 놓고 전쟁을 벌였고 그는 그 전쟁의 희생물이 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그 자신이 그들 세 여자를 놓고 고전이라도 벌린 걸까?
 생각할수록 우스워서 혼자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서 연신 지은의 기다림과 정성을 입 안에 넣고 질근질근 씹어댔다. 구수하고 얼큰하고 담백하고 시큼하고……
 일산 신도시로 가는 길은 낯설지가 않았다. 계곡이며 평야며 나무들이며 마을들이며…… 인제는 친근하게 다가섰다. 그리고 그 길은 더 이상 멀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한종수 노인을 취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이 아니면 유리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이번 길에 획득하게 될 그 두 가지 가능성은 준호에게 행운이었다.
 “어서 오세요.”
 아침이슬을 마시고 금방 피어난 꽃송이처럼 수줍고 화사한 그녀의 모습은 여전했다. 제 아무리 예쁜 꽃도 그녀 앞에서는 무색하여 꽃잎을 접을 거라는 엉뚱한 생각을 건지며 준호는 답례했다. 인젠 초면이 아닌데도 유리의 몸가짐이 조신하여 준호를 긴장시켰다.
 “왔는가?”
 서울 말씨이긴 하지만 나이 들어서 배운 탓인지 아직도 억양에 진하게 묻어 있는 전라도 방언 리듬이 살아 있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전번과는 달리 노인의 표정에는 얼음이 녹아있었다. 그러나 경계심은 여전한 듯 미소까지는 내걸지 않았다. 준호는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그분이 자신의 취재에 응하기만 하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는 노인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할아버님, 안녕하십니까?”
 “앉게.”
 유리도 기쁜 얼굴로 인삼차 두 잔을 만들어 왔다. 실내에서도 흐트러짐이 없는, 양복치마저고리를 입은 깔끔한 정장 차림에서도 구김 없고 반듯한 그녀의 성품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는 찻잔을 받는 준호에게 가볍게 눈짓을 보냈다. 잘되시길 바라요. 그 눈길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눈길은 달빛처럼 은은하여 준호의 가슴에 은가루처럼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그는 우선 가방 안에서 휴대용녹음기를 꺼내어 탁자 위에 놓고 작동시켰다. 그리고 필기할 수첩과 볼펜도 꺼냈다.
 “내가 자네한테 6.25 전쟁담을 들려주기 전에 먼저 한 가지 물어 볼 말이 있네. 그에 대한 자네의 확답을 받아야 얘길 시작하겠네.”
 노인은 약간 긴장한 기색을 보이며 조건을 제시했다.
 “말씀하십시오.”
 “자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책에 낼 수 있다고 대답하게. 문장을 수정할 수는 있지만 내용은 고치지 않겠다고 말일세.”
 준호는 한종수가 던져오는 뜻밖의 카드에 난감해졌다. 그렇게 되면 중립적, 객관적 입장에서 6.25를 재해석한다던 그의 당초 계획은 물거품이 될 것이며 할아버지 최덕구의 입장에 서서 6.25를 서술하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된다. 그것은 한 극단에서 다른 한 극단에로 경도되는, 똑같은 편견의 오유를 범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취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거짓 확답을 줄 수도 없었다. 그 거짓 확답이 나중에 책이 출판된 다음 진술 당사자인 한종수의 불만을 야기 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
 “전 한국전쟁을 남북 어느 쪽의 공식적 견해에도 편향되지 않는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한 입장에서, 학술적인 접근을 시도하려 합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대로 기록한다면 객관성을 상실할 거 아닙니까.”
 “그럼 내 말을 들을 거 없이 자네 할애비 말을 듣고 쓰게나.”
 “그 역시 똑같은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전쟁 쌍방 체험자들의 이야기를 골고루 취재하여 될수록 공정하고 객관적인 글을 쓰려고 하기에…….”
 “내 말대로 쓰지 않으려면 그만 두게. 우리 손녀를 대필시켜서 회상기를 쓸 생각이니, 유리야, 손님 바래드려라…….”
 한종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넓은 실내복이 타일을 박은 거실바닥을 쓸었다. 은백색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유난히 눈부셨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도라. 어림도 없는 소리야. 그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세대는 그것이 가능할지 모르나 그 속에서 가족과 전우를 잃은 사람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 가슴속에 한이 남았는데 어찌…….”
 노인은 중얼거리면서 방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거실에는 준호 혼자만 남았다.
 “할아버지가 하시자는 대로 하실 걸 그랬어요.”
 그림처럼 나타난 유리가 얼굴에 걱정스러운 그늘을 지었다. 그녀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자 준호는 갑자기 내가 양보했을 수도 있었는데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이건 양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의 양보가 학자로서의 그의 공정성을 실추시키고 어용문인이나 고용문인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할아버지의 대변인이 되기 싫었던 것처럼 유리의 할아버지를 대변하는 고용문인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튼 준호는 자신의 할아버지 최덕구나 유리의 할아버지 한종수는 그 시대만이 낳을 수 있는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25전쟁은 그들 전쟁참여자들의 세대가 이 땅에 생존하는 한 공정한 해석이나 이해가 어려울 것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다음날 다시 오셔야지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할아버지의 고집을 아는 듯 유리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준호는 하는 수 없이 탁자 위에 벌려 놓았던 취재도구들을 가방에 넣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번번이 헛걸음 걷게 하여 정말 미안해요.”
 유리가 대문 밖에까지 따라 나오며 연신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노인의 가슴에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그러시겠습니까? 참, 전번에 유리 씨의 대접을 받았는데 오늘은 제가 커피 한 잔 대접해도 될까요?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준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서였다.
 “아니, 저희 집을 찾아오신 손님인데 당연히 제가 모셔야죠.”
 “저한테도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어머, 제 성의가 도리어 선생님께 불편을 드렸나 봐요.”
 두 사람은 웃었다. 땅거미가 깃들기 시작한 거리는 퇴근 차량들로 더욱 붐볐다. 무더위는 해가 떨어졌는데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짓궂게 거리에서 서성거렸다.
 “저 선생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어느 커피숍으로 들어가 주문한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유리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서 집필하신다는 그 책 말씀인데요. 제 짧은 소견에는…… 집필도 어려우실 것 같고 또 한국에서는 출간도 어려울 것 같아서요…….”
 유리는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릴까봐 걱정되는지 자꾸만 말꼬리를 사렸다.
 “개의치 않으니 걱정 말고 말씀해 보세요. 그래서요?”
 “그 책은 나중에 집필하시고 먼저 출간 가능한 글을 쓰시는 게 어떠실까 싶어서요?”
 “그게 어떤 글이지요?”
 “제 선배님이 F출판사의 편집부장으로 계시는데요. 언젠가 저더러 공산체제를 비판하거나 탈북자상황을 소재로 한 글들이 잘 팔린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기에 선생님께서도 혹시 그런 글을 쓰시면 출간도 가능하고 인세수입도 생기지 않을까 해서요…….”
 순간 준호의 입으로 이동하던 커피 잔이 허공에 멈췄다.
 “저더러 중국을 비난하는 글을 쓰라는 말씀입니까?”
 “아니 꼭 쓰시라는 건 아니고요, 혹시…….”
 유리는 준호의 굳어진 표정을 보자 실언을 깨달은 듯 안절부절 못했다. 얼굴이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
 “그 말씀은 저 자신의 과거에 침을 뱉고 매도하라는 뜻과 같습니다. 물론 저도 저 자신의 과거나 제가 몸담고 살았던 환경이 완벽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어쩌면 유리 씨 할아버지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불완전하고 부정했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전 자신의 보금자리에 침을 뱉는 그런 의리 없는 인간으로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유리 씨는 자신이 살고 있던 집이 허름하고 비좁다고 그곳을 향해 침을 뱉을 수 있나요? 혹시 중국에서 유리 씨에게 혜택을 준다면 한국을 비난하는 글을 쓸 수 있겠습니까?”
 준호는 약간 흥분했다. 유리의 비난은 그가 살았던 사회와 그 사회의 피조물인 준호에게까지 미치는 것만 같아 기분이 불쾌했다.
 “사과드려요. 제가 경솔했어요. 그처럼 민감한 문제를 아무 생각 없이 말한 저의 경망함을 용서해주세요.”
 두 사람 사이에 전개되던 화제가 갑자기 동강났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부러진 화제는 다시 이어지지 못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밖으로 나와서야 유리가 먼저 침묵을 열었다.
 “아직도 기분이 풀리지 않으셨어요?”
 “아닙니다.”
 “우리 기분도 전환할 겸 호수공원으로 놀러가요. 거긴 공기도 시원하고 광장도 탁 트여 기분이 금시 좋아질 거예요.”
 친절한 호의를 거절할 수가 없어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커다란 광장을 지나고 스테인리스 원통 아홉 개를 쌓아 만든 조형물을 에돌아 육교를 건넜다. 광장과 잔디와 조각품들과 나무들이 맑은 호수와 잘 어울리는 호수공원에는 많은 시민들이 휴식의 한 때를 즐기고 있었다. 여유 있게 산책하는 사람, 자전거드라이브를 즐기는 사람, 연을 날리는 사람……. 준호는 금방 환락의 분위기에 휩싸여 기분이 좋아졌다.
 “자전거 타실 줄 아시죠?”
 “네.”
 “우리 자전거를 타고 호수를 한 바퀴 돌아요.”
 자전거 대여점에 가서 요금 6000원을 지급하고 2인용 자전거 한 대를 대여했다.
 자전거는 푸른 호수를 옆에 끼고 평탄한 전용도로를 따라 씽씽 달렸다.
 “우리 여기서 잠간 쉬어 가요.”
 유리의 안내를 받으며 부안교를 건너 월파정 언덕을 타고 올라갔다. 2층 정자 위에 올라서자 주변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다시 생각해보니 유리 씨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동족상잔을 글로 다루는 작업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겠지요. 어쩌면 그 어려운 작업을 시작하려는 제가 어리석은 놈인지도 모르지요.”
 준호는 땀 흐르는 이마를 손수건으로 훔치며 벤치에 앉았다.
 “제가 알기로는 동물세계에도 동족상잔은 있다고 해요. 무당벌레는 자기 형제를 잡아먹고 노랑잠자리도 동족상잔을 한다고 해요. 그러나 그들의 동족상잔은 단순히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자연섭리에 따른 것이에요. 인간처럼 이념이나 이데올로기 때문에 동족끼리 집단적으로 집단적으로 싸우지는 않지요.”
 유리는 정자 아래 호숫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하얀 목련꽃과 노란 개나리꽃을 내려다보며 화제를 담담하게 이어나갔다. 부안교 위의 돌난간에 기대어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 쌍의 연인 모습이 너무나 평화로워 보였다.
 인간세상을 동물세계와 비교하면서 인간의 추악함을 알려고 시도하는 유리의 시도가 대견스럽다.
 “이족간의 살육이던 동족간의 살육이던 중요한 건 동물의 살육은 탐욕이 아니라 본능과 섭리에 따른 것인데 반해 인간의 전쟁은 탐욕에 의한 것이고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자기들이 동물을 잡아먹는 행위에 대해서는 도덕적 합리화와 정당성을 주장하면서도 동물이 인간을 해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도덕적으로 비난하고 저주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적인 논리적 모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랑이나 치타 같은 맹수들은 배설물을 배출하는 식으로 자기들만의 영역을 구축하지만 서로 잘 공존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토, 노예, 재부를 위해 상호간의 영역을 범할 뿐만 아니라 이념이나 사상 때문에도 침략이나 전쟁을  서슴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화제 속에 깊숙이 빠져들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유리에게는 특이한 점이 있었는데 일단 어떤 담론에 빠져들기만 하면 얌전한 여자로부터 자신의 견해와 생각을 당당하게 표현할 줄 아는, 지적인 여자로 돌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호수공원에서 나와 육교부근의 포장마차로 옮겨 꼬치구이에다 맥주를 마시며 밤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허용한 생존영역은 워낙 에덴동산뿐이었잖아요.”
 유리가 준호의 유리컵에 맥주를 따르며 전혀 엉뚱한 곳으로 화제를 몰고 갔다. 그녀는 언제나 원초적인 사유를 즐기는 것 같다. 유리컵 속에서 붉은 맥주는 흰 포말을 부글부글 토해내고 있었다.
 “그곳도 결코 인간들만의 생존공간은 아니었어요. 동물과 공유했던 거 아닙니까.”
 “그러나 하느님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 특권을 부여했어요. 동물의 이름을 짓게 하고 그들 무리를 관리하는 특권 말이에요.”
 유리는 맥주 컵을 입가에 가져가며 말했다.
 “그렇지만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죄인이 아닙니까. 쫓겨난 뒤의 인간에게는 어떠한 특권도 없었습니다. 출산의 고통, 죽음의 고통뿐이었지요. 그런데도 인간의 탐욕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탐욕이란 필요 이상의 욕심이 아니겠습니까.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배를 불릴 수 있는 먹을거리가 얼마든지 있는데도 금과를 훔쳐 먹었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시작된, 역사적인 첫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유리는 준호의 말뜻을 음미하면서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인간의 탐욕은 자의가 아닌, 사탄에 의한 유혹에서 유도된 거잖아요. 그러나 인간은 그 탐욕을 통해 즉 범죄를 통해 수치심이란 무언가를 알게 되었고 윤리적 판단능력과 사물에 대한 식별능력을 획득했어요. 그러니까 하느님은 윤리적 판단능력이나 사물에 대한 식별능력이 없는 인간을 무죄의 인간으로 보았던 거예요. 다시 말해 인간의 죄는 탐욕이었다는 거죠.”
 “그 밖에도 또 있습니다. 성적욕구까지 유발된 거지요. 인간의 탐욕과 범죄가 사탄의 유혹에 의해 유발되었다는 사실에서 이념도 일종의 유혹일 수 있다는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금과를 훔쳐 먹은 것은 하느님 보기엔 죄이지만 아담과 이브의 입장에서는 죄가 아닌 일종의 혁명이었을 수도 있잖아요. 사탄이 제시한 혁명노선의 기치를 들고 하느님의 체제에 반항한 거죠. 사탄은 금과의 소유권이 특권자의 독점물이 되어서는 안 되며 인간도 공유해야 한다는, 인류역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평등이념을 제시한 셈이지요.”
 유리는 잠시 반쯤 빈 컵 안의 붉은 색깔의 맥주를 조용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이념은 소유와 분배에 대한, 그 때문에 유발된 권위의 배분에 대한 주장과 견해의 체계라고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이 문제를 둘러싸고 인간은 벌써 에덴동산 시절부터 하느님과 이념적 갈등을 시작한 거잖아요. 권위의 평등, 소유의 평등에 대한 이념을 제시한 건 사탄이지만 그 실천은 인간이 한 거구요.”
 “바로 그렇습니다. 사탄은 첫 혁명이론가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첫 실천가였습니다. 하느님은 법관이었다고나 할까요. 평등사상은 바로 권위의 일방적 소유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소유와 분배의 권리는 언제나 지배자에게 있었습니다. 가인과 아벨 두 형제의 동족상잔도 결국은 권위의 독점에 대한 불만과 도전이었지요. 불평등에 대한 가인의 불만은 동생 아벨의 죽음을 초래했던 겁니다. 그들 형제의 싸움은 ‘양 새끼나 그 기름’ 그리고 ‘땅의 소산’이라는 성경적 의미를 초월하여  독재적 권력에 의해 양분된, 불평등과 평등을 지향하는 두 개의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벌어진 치열한 이념의 전쟁이었습니다.”
 준호는 술 재간이 별로 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화제가 흥미진진해지면서 저도 모르게 술맛도 달콤해졌다. 어느새 다섯 병째 비웠지만 도무지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유리의 단아하고 반듯한 자세도 처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눈앞에 그린 듯이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도 한 폭의 동양화 초상 같았다.
 “아벨은 처음으로 죽은 인간이잖아요. 죽음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린 징벌이라는데 죽음과 삶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유리창」하나의 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정지용 시인은 「유리창」으로 죽음의 세계를 들여다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가 본 저승세계는 「차고 슬프고」 「새카만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승세계도 결코 저승세계보다 더 따스하거나 밝은 곳은 아니었지요. 성에가 끼고 눈물이 고이는 곳이었을 뿐입니다. 이승에서의 보석은 별것이 아니라 인간의 눈물 즉 슬픔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죽음과 삶의 사이에는 유리 한 장의 차이밖에 없다고 보고 있는 거죠. 그 유리창은 물리적으로는 가까스로 차단되어 있지만 심적 시야에서는 두 세계의 교감이 가능한 그런 차이죠.”
 “죽는다는 건 단지 그런 의미들일 뿐일까요? 그런 미미한 차이뿐이라면 구태여 이념의 전쟁 같은 것으로 서로를 죽여야 할 이유가 뭐죠? 할아버지는 증조부님과 증조모님 그리고 할머니 등 가족 분들이 돌아가신데 대해 아직도 잊지 못하고 복수를 벼르고 있잖아요. 정말이지 정지용 시인의 경우처럼 죽음과 삶 사이에는 유리창처럼 서로 육체적인 접촉을 할 수 없어도 정신적인 교감도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군요.”
 “어쩌면 복수도 이념처럼 일종의 탐욕인지 모르죠. 그렇다면 복수심 역시 죄가 될 테고요.”
 “하지만 복수마저 없다면 당한 쪽은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공평함을 강제로 행하려는 그것이 바로 탐욕이 아닐까요? 공평은 탐욕을 변호하기 위한 구실인지도 모르고요. 사실 공평을 이유로 발생한 혁명이나 전쟁이 얼마나 많습니까.”
 포장마차에 그들 둘밖에 없고 주인아줌마가 손님들이 떠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어느새 새벽 세 시가 다 된 늦은 시간이었다. 전개할 만한 담론은 아직 많았지만 상황도 상황인 만큼 자리를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앞에 보이는 산이 바로 정발산공원이에요. 언제 시간이 있으면…….”
 육교계단을 내려가며 앞을 막아선 산을 가리키든 유리는 갑자기 발을 접질린 듯 몸의 균형을 잃고 상체를 앞으로 기우뚱거렸다.
 한걸음 앞섰던 준호는 본능적으로 아래로 쓰러지려는 그녀의 상체를 두 팔로 받아 안았다. 두 사람의 얼굴이 지척에서 마주치며 눈길이 만나는 순간 준호는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탄력 있는 살결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미안해요.”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느라 그녀는 애써 준호의 시선을 외면했다.
 “괜찮습니까? 어디 다친 데라도…….”
 “괜찮아요. 어머, 벌써 새벽 세 시가 넘었네요! 그런데 어쩌죠? 지금 이 시간엔 지하철도 끊기고 버스도 없을 텐데, 아무래도 택시를 타고 가셔야겠어요.”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괜히 횡설수설했다.
 “오늘 즐거웠어요.”
 “저도요.”
 “할아버지 마음이 돌아서시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준호는 택시에 몸을 싣고서야 비로소 취기가 오름을 느낄 수가 있었다. 사양했지만 한사코 운전기사에게 요금을 질러주고는 손을 젓는 유리의 모습이 두 개, 세 개로 중첩되어 보였다. 때로는 진옥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지은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택시가 출발하자 준호는 백미러 안에서 조그마하게 멀어져가는 유리의 모습을 놓칠세라 애써 추적했다. 하얀 스커트가 유난히 눈부셨다.
 “유리 씨!”
 그는 속으로 가만히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그 짧은 신체접촉이 이토록 가슴 깊숙이 인상을 남길 줄은 몰랐다. 그 접촉은 유리와의 사이를 더 가깝게 해주었다. 이것도 필요 이상의 욕망일까? 이것도 탐욕이라면 하느님은 나를 죄인으로 치부할 것이다.
 “진옥아!”
 그런데 왜 진옥의 이름이 유리의 이름 속을 파고드는 거지?

 한종수는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린 채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맥을 버리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한종수는 오늘따라 노쇠하고 피로해 보였다. 자칭 ‘세월의 불바다를 헤쳐 온 불굴의 용사’도 지금 이 순간엔 기력을 잃은 한 사람의 보통 노인에 불과했다.
 TV스크린에서는 19세 관람불가 심야영화가 한창 방송중이었다. 기름진 유방을 드로낸 여배우와 가슴에 털이 북슬북슬한 남자 배우가 한창 섹스를 즐기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저런 야한 영화를 보시다니? 79세의 고령이신 분이! 어쩌면 다른 프로를 시청하시다가 그만 잠이 깜박 드신 사이에 프로그램이 바뀐 건지도 모른다.
 가정부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 잠이 들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벽시계는 새벽 3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유리는 할아버지를 깨울세라 육신의 음향을 끄고 소리 없이 2층의 침실로 올라갔다. 그러나 잠드신 줄로 알았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숙인 채 던져오는 말에 그녀는 흠칫 놀라며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어딜 갔다가 새벽에야 들어오는 거니?”
 “네, 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아니, 한 번도 거짓말을 해 본 적이 없는 유리는 당황했다.
 “저…… 친구들과 만났었어요.”
 굳이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불투명했다. 준호 씨와 만났다는 사실 때문인가? 아니면 낯선 남자와 둘이서 새벽까지 같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인가. 그도 아니면 할아버지께서 싫어하시는 손님과 함께 했다는……
 아무튼 그녀는 사실대로 고할 용기가 없었다.
 “친구들과 만났다고?”
 할아버지는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유리는 계단에서 내려와 거실 소파에로 가서 앉았다. 괜히 무슨 죄라도 지은 기분이었다.
 “내가 바본 줄 아냐. 바른 대로 말해 봐. 너 낮에 왔던 그 사람과 여태껏 같이 있은 거지?”
 할아버지의 눈길엔 평소의 인자함과 부드러움이 사라지고 그 대신 위엄이 번뜩였다. 유리는 그 눈길을 애써 외면했다. 손녀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해야 돼! 무슨 죄라도 지은 것처럼. 떳떳하지 못할 게 뭔데.
 이렇게 마음속으로 자꾸만 위축되는 자신을 복구할 만한 이유를 달아 보았으나 허사였다.
 “녀석과 새벽까지 뭘 했어?”
 할아버지는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꼬치꼬치 캐고 들었다.
 내가 준호 씨와 뭘 했는가? 그녀 자신도 아리송하다. 함께 차를 마셨고 2인용 자전거를 탔고 월파정에서 인간세계와 동물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셨을 뿐이다. 그 과정에 할아버지의 심기를 불편하게 괴롭히는 사건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그녀와 준호 사이에 지난밤 특별한 사건이라도 있었다면 육교계단을 내려올 때 그녀가 발목을 삐어 비틀거리다가 그의 품에 안겼던 일뿐이다. 유리는 난생처음 남자의 품에 안겨보았다. 자신의 몸이 이글거리는 용광로 속에 떨어져 녹아버리는 줄 알았다. 전신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그러나 그 역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은 두 사람의 의지나 자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유리는 할아버지한테 떳떳하지 못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웬일인지 할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쳐들 수 없었다. 말마디도 자꾸만 꼬이며 목구멍에 걸렸다.
 “뭐 하긴요. 그냥……”
 “그 녀석이 너한테 불손한 짓거리를 한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좋은 사람이에요.”
 느닷없이 튀어나온 준호에  대한 칭찬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콩 심은 데서 콩 나고 팥 심은 데서 팥 난다고 덕구 손자라면 그 녀석도 좋을  리가 없어. 유리 넌 그 녀석이 누구의 후손인지 알기나 하냐? 바로 네 할미와 고조할아버지를 죽인 원수 놈의 손자란 말이다.”
 할아버지의 얼굴에 웃음기가 증발하며 금시 분노가 이글거렸다.
 “할머니와 고조할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이 그분의 할아버지이지 준호 씬 아니잖아요. 할아버지 때문에 손자까지 나쁘다는 법이 어디 있어요.”
 유리는 할아버지 편이 아닌 준호의 편을 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어지간히 놀랐다. 내가 혹시 그 사람의 존재를 남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
 “모르는 소리다. 피는 속일 수 없는 거야. 그 할아비의 그 손자니라. 그러니 앞으로는 절대 그 녀석을 우리 집에 불러들이거나 밖에서 만나서는 안 된다. 알겠냐.”
 유리는 다소곳이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 대답을 비웠다.
 “왜 대답이 없냐? 그놈은 빨갱이 집안의 후손이란 말이야. 그러니 우리와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적인 게야.”
 이념 때문에 적아 두 편으로 나뉘어져 싸우는 인간이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세대의 그러한 삶의 방식이 후세에게 강요되는 것도 싫었다. 그녀가 설령 준호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호감 하나면 충분할 것이다. 우정이 왜 체제와 이념의 구속과 지배를 받아야 하는가. 이념과 신념을 넘어 평화와 화합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초탈의 힘은 인간의 사랑인지도 모른다. 사랑까지 이념과 신념의 포로가 된다면 인간은 정말이지 인류의 진정한 평화에 대한 마지막 한 가닥의 희망마저 잃게 될 것이다.
 유리는 이런 생각들을 사유의 우물에서 퍼내고 있었지만 그 생각을 할아버지께 말씀드릴 수는 없었다. 자신의 말로 말미암아 손녀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과 그분께서 살아오신 피 묻은 인생의 과거가 부정되는 불경을 저지르고 싶지 않아서였다. 할아버지의 인생은 그분 나름대로 사람들의 경의를 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이기도 했다.
 “네가 시원하게 대답을 하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 녀석하고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심상치 않은 일’이란 말이 새삼스럽게 육교계단에서 준호 씨의 품에 안겼던 그 순간을 머릿속에 떠올려 주었다. 그게 정말 심상치 않은 일이었을까?
 어머, 내가 왜 이러지!
 기억 속에 떠오르는 준호의 모습을 보자 유리는 금세 얼굴이 익어들며 당황했다.
 솔직히 그녀가 준호더러 오늘 일산으로 오라고 전화연락을 한 건 그의 취재를 돕고 싶어서 뿐만은 아니었다. 전번 날의 그와의 만남이 며칠 내내 그녀의 인상 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어른거렸다. 준호 씨가 보여준 논리 정연한 주장들과 지적인 매력들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한 번 더 만나보고 싶었다. 그런데 새벽까지 이어진 그와의 대화와 데이트는 그녀의 마음속에 준호에 대한 인상을 더 깊숙이 뿌리를 내리게 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물론 그러한 호감을 아직 사랑이라고 단언하기엔 이를 것이다. 그러나 준호에 대한 유리의 감정은 이미 우정의 한계를 넘어 사랑의 저쪽 울타리를 기웃거리고 있음도 부정할 수가 없게 되었다.
 “네가 정 대답을 하지 않으면 이 할아비도 별 수 없다. 널 네 애비, 어미가 있는 엘레이로 보낼 수밖에.”
 유리는 할아버지가 던지는 뜻밖의 카드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쳐들었다.
 “할아버지.”
 “왜, 그건 싫으냐? 당초에 아범과 어미한테서 널 내 곁에 남겨둔 내가 잘못이지. 대한민국 국민도 아니고 게다가 할미와 고조할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손자와 좋아한다면 아범과 어미가 이 할아빌 뭐라고 하겠냐.”
 유리의 부친은 재작년에 엘레이 주재 한국영사관 외교관으로 발령받고 떠나갔다. 어머니도 부친을 따라 동행했다. 그때 유리도 부모를 따라 엘레이로 가게 되었지만 할아버지는 혼자 외롭다며 손녀를 자신 곁에 떼어두었다. 유리도 할아버지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늘 고독과 외로움을 앓으시는 할아버지는 당신의 모든 사랑을 고스란히 손녀딸 유리에게 쏟아 부으셨다. 그래서 유리는 부모님께서 집에 함께 계실 때도 할아버지를 더 따랐다.
 그런데 지금 할아버지는 그토록 사랑하던 손녀를 곁에서 떠나보내려 하신다.
 “할아버지 곁에 있고 싶냐, 그 녀석과 어울리고 싶냐 양자택일을 해라. 그 녀석을 택한다면 할아빈 당장 널 엘레이로 보내버릴 테다. 차라리 혼자 고독 속에 살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널 늑대 밥이 되게 할 수는 없어.”
 “할아버지, 늑대라니요? 너무 심한 말씀을……”
 “심하긴 뭐가 심하냐. 늑대보다도 못한 놈들이 바로 빨갱이 놈들이야!”
 그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그녀 사이의 대화는 영원히 합의점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자신이 겪었던 수난의 경륜에서 초탈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 역시 오늘의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유리는 평화와 사랑의 길로, 할아버지는 적대와 원한의 길로 말이다. 할아버지와 같으신 분들이 계시는 한 평화적 통일은 결코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저 피곤해요. 할아버지도 쉬세요.”
 “아무튼 이 할아비 말을 잘 생각해 보거라. 그리고 할아비 회상기는 언제부터 시작할 거냐?”
 “나중에요.”
 유리는 갑자기 몰려드는 졸음 때문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걸음으로 간신히 2층 계단을 올라갔다.
 침실에 들어가기 바쁘게 침대 위에 쓰러졌다.
 할아버지께서는 당신의 회상기를 써달라고 저렇게 독촉이시다. 나는 할아버지를 대신해 ‘빨갱이’들을 저주 비난하고……. 언제 가야 인간의 이념전쟁은 끝이 날 것인가? 인젠 진저리가 난다. 인간이라는 조건 하나로 인류사회가 평화를 도모할 수는 없을까? 인간은 정말이지 그토록 미개한 걸까? 정말이지 아직도 하느님께 죄를 지은 범죄자들의 무리에 지나지 않을까?
 그녀는 어슴푸레한 수면의 터널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다. 어찌하여 준호 씨의 할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와 원수사이란 말인가? 그 때문에 금방 싹이 트기 시작한 준호와의 우정에 장벽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울적해졌다.
 어느덧 졸음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일망무제한 꿈의 바다로 유도해 갔다. 꿈의 바다 위에는 돛배 한 척이 떠있는데 배 안엔 준호가 타고 있었다. 준호는 웃으며 해안에 서 있는 그녀를 향해 손을 저었다.
 유리는 그 돛배에로 다가가려고 했으나 해풍에 갈기를 일구며 치솟는 거센 파도가 앞길을 가로막아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준호 씨- 준호 씨-
유리 씨- 유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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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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