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아들
장혜영



 뒤쪽에서도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파랑은 어느새 준비해 온 돗자리를 땅바닥에 깔더니 석불을 향해 공손히 예배를 드린다. 임신한 무거운 몸을 운신하기가 힘들어 보여 정도는 말렸지만 세 번은 하고 나서야 자리에 앉는다. 그녀가 언제부터 이처럼 불문에 관심을 가졌는지는 모르나 전에는 한번도 그녀의 입에서 불교에 관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주위의 신도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을 칭념하며 연신 손을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려 땅바닥에 부복한다. 정도가 무심결에 고개를 들고 보니 석불상 밑의 연단으로 비구니 한 분이 올라오고 있었다. 먼 거리여서, 게다가 앞의 사람들이 시야를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정도는 득도 승이 아내 이윤정임을 첫눈에 알아 보았다. 병원에 왔었을 때나 청석위에서 좌선하던 때 보았던 모습과는 달리 얼굴에 살도 오르고 핏기도 도는 듯 싶다. 그러나 옛날 집에 있을 때의 얼굴과는 어딘가 달라 낯설어 보이기까지 한다.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고승들에게서 만이 볼 수 있는 평온과 모든 번뇌를 털어 버린 초연한 분위기가 그녀의 주위를 안개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얼굴에는 탐욕도 유혹도 아닌, 사랑도 증오도 아닌 무심한 미소가 잔잔하게 흐른다. 좌중을 둘러 보던 그녀의 눈길이 정도가 앉아 있는 뜰 구석을 스쳐갔지만 다행이 멈추지는 않고 물 흐르듯 그냥 굴러갔다. 그 시선은 어떠한 인연에도 집착하지 않는 초연함이 가득했다.
 “여러 보살님들께서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육성도 마이크를 통해서인지 귀에 설다.
 “방금 제가 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길이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다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시겠지요. 그러나 길의 진정한 의미는 갔다가 돌아오기 위한 데 있습니다. 갔다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은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생의 길은 한번 가면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돌아올 수 있는 것처럼 인연을 만드는 것이 곧 인생길입니다. 길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시작은 탄생이고 끝은 죽음이겠죠. 길은 땅위에만 있습니다. 길을 걷기 위해서는 발을 대지위에 붙여야 합니다. 걸어가고 달려가야 합니다. 엎어지고 넘어지고 뒹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빨리 가려는 욕망은 앞사람을 초월하게 하며 그 결과 사고가 발생합니다. 더 빨리 가려면 보다 넓고 평탄한 새로운 길을 닦아야 합니다. 이렇게 길을 가노라면 지치고 탈진하고 늙고 병들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길은 끝나게 될 것이고 죽음에로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길에 대한 집착만 버리면, 길을 떠나면 시작도 끝도 없어집니다. 길이 가지고 있는 방향, 노선, 교통규칙 같은 규제도 없어집니다. 땅에서 발을 떼면, 길을 향한 집착, 집념, 애착, 미련, 인연을 끊어버리면 하늘로 훨훨 날아오르게 됩니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은 길이 아닙니다. 인연은 길을 만드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원래 마음에는 길이라는 것이 따로 없습니다. 시작도 끝도 방향도 노선도 규칙도 없습니다. 탄생과 죽음도 없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듣고 계시는 불법도 사람이 걸어 다니는 길과 같은 맥락에서의 하나의 길입니다. 세상에는 길이란 없고 우리가 길이라고 생각하는 건 허상일 뿐이라는 이치를 설법하는 부처님의 가르침도 일종의 길이기 때문에 그런 연유로 깨달음을 얻은 후엔 필요 없게 됩니다. 불법 역시 한 갈래의 길에 불과하고 그래서 길이 아니었음을 아는 것이 곧 깨달음입니다. 세상에는 길이란 없고 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마음은 시작도 끝도 노선도 없습니다. 순환선도 아니고 왕복노선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평선이거나 평행선은 더구나 아닙니다. 땅에서 발을 떼세요. 대지에서 발을 떼는 방법을 아시려면 부처님의 설법을 배우세요. 세상엔 길이란 없습니다. 그건 오로지 한 가닥의 허망한 욕망의 지향선일 뿐이며 그 종점은 죽음이라는 정류장입니다. 우리는 왜 죽어야 합니까? 길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길은 우리를 죽음에로 인도하는 지옥의 터널입니다. 마음은 곧 길입니다. 마음은 길이 없는 길입니다. 마음의 길이 없다 함은 시작과 끝이 없고 방향과 노선과 규칙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갈 곳도 돌아 올 곳도 없습니다. 마음의 길이 아닌 이 길은 청정한 불심이고 그 종점은 진리입니다.”
 길도 없고 불법도 없고 부처도 없다니?!
 길은 오로지 허망한 욕망의 지향선이고 그 종점은 죽음이라니? 길이 없다면 인생의 열차는 무슨 궤도를 타고 삶을 운송한단 말인가.
 들을수록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마음의 길은 없다면서 또 있다고 한다. 길을 버리기 위해 길을 찾으라고 한다. 한 갈래의 길에 불과한 불법을 배우라고 권고하지 않는가.
 시작과 끝이 없고 방향과 노선과 규칙이 없다면 그게 무슨 길인가. 그건 길이 아니다.
 그러나 들을수록, 비록 일목요연하지는 않지만 그 스케일의 거창하고 의미의 포괄 영역이 광대하며 의미심장하다는 느낌은 든다. 그 의미의 체적을 확실히 알 수는 없어도 윤곽은 어렴풋이 잡혔다.
 길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 아내의 득도였던가? 시작도 끝도 없고 방향과 노선과 규칙도 없는 길을 찾으려고 절로 들어온 것인가.
 그런데 아내의 설법보다 더 이상한 건 파랑이 그녀의 어떤 불법에 매혹되었는지 하는 의문이었다.
 “난 듣고도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깨달음이 모호함이라면 무지의 미궁에 더 깊이 빠져 든 것이나 무엇이 다릅니까.”
 “맞아요. 깨달음은 차라리 무지라고 하는 편이 너무 마음에 드네요. 길이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깨달음마저 망각하는 무지의 극치! 그것이야말로 없음에 대한 아니, 유의 무에 대한 진정한 터득이 아니겠어요. 이해한다는 것도 사실은 공空이고요.”
 두 사람은 산사 아래의 냇물에서 식사를 하며 방금 전의 불법강론에 대해 각자의 소견을 교환했다.
 “진리란 점이나 선 또는 면이 아니라 다면체이고 입체여서 어느 길을 통해서도 진리의 포구에 도달하여 닻을 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길 자체마저 부정한다면 진리에 도달하는 마지막 교량마저 해체해 버리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길의 질서체계인 교통규칙, 노선마저 없는, 쉽게 말해 사회윤리와 법률마저 배제된 마음의 골목을 통해서 과연 진리의 정상에 등반할 수 있을까 의심됩니다.”
 정도는 설법자가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마저도 망각했다. 길이 없다면 아버지와 박병술노인은 어떻게 인생의 열차를 운행해 왔으며 그와 파랑은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는가. 윤정은 또 어떻게 산사로 도피해 왔겠는가. 길이 없으면 도망조차도 칠 수 없을 것이다.
 “진리란 교량이나 도로 같은 것에 이어진 저쪽 즉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우리 자체 속에, 다시 말하면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잖아요.”
 “그럼 우린 어리석게도 자신속의 진리를 외면하고 밖에서만 찾으라는 겁니까?”
 윤정의 설법이 진리가 본래부터 마음속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남편이나 딸애에게서 찾으려고 길을 닦고 교량을 가설하며 어리석은 헛고생을 했다는 말로 들려 불쾌했다.
 “그건 진리를 마음속에 감금하고 그 영역을 축소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진리의 객관성을 배제시켜 주관화하려는 시도고요.”
 절밥을 마다하고 행찬을 준비해 온건 술을 마시기 위해서였다. 산에서 하는 식사에서 술은 각별한 맛을 돋운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도 않고 흥만 돋울 뿐이다. 그녀가 준비해 온 새우찜과 치킨은 맥주안주 치고는 일품이었다. 일회용컵에 맥주를 따르는 사이에 파랑은 새우껍질을 벗겨서는 따낸 속살을 정도에게 건넨다.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와 새들의 노랫소리, 아직은 음지에 쌓인 얼음과 적설 속에서도 발그레하게 미소 짓는 진달래꽃송이들은 한껏 술맛을 감미롭게 한다. 술 한 잔과 꽃 한 송이와 흐르는 냇물 만 있다면 세상엔 진리 같은 건 없어도, 길 같은 건 없어도 살 재미가 다분할 것 같았다.
 “금방 진리는 다면체라고 하셨잖아요. 그렇다면 진리에는 객관적인 측면도 있고 주관적인 측면도 있을 거잖아요. 주관적인 측면이라 함은 진리의 다면체 중 어느 한 면이 아니겠어요. 상대적으로 타자적 자아의 시점에서는 주관이 객관이 될 수도 있고요. 다시 말하면 주관은 주관뿐이 아닌 객관이기도 하다는 거죠.”
 어쩌면 파랑은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를 탐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많은 말을 주고받고 여러 가지 화제를 들추었지만 정도는 시원한 결론을 얻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에도 스님의 설법은 계속되었지만 그들은 산사를 떠나 서울로 내려왔다. 아무리 깨달았다고는 하나 그 중심 포인트는 하나뿐이고 그래서 오후의 설법은 오전 설법의 반복일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도 두 번 들으면 길이 되고 신선도를 잃고 시들해진다. 왜냐하면 반복이란 곧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째부터는 깨달음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상식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진리의 또 다른 모습인지도 모른다. 다면체일 뿐만 아니라 중첩구조까지 가지고 있는, 벗기면 또 새로운 껍질이 드러나는 양파처럼 말이다. 결국 끝까지 벗겨 들어가도 껍질일 뿐 속에는 아무런 다른 것도 없을 것이다. 신비도 오묘함도 의미심장함도. 흔적들의 단순한 중첩일 뿐. 그러나 그 중첩들은 가려진 모습과 일정한 간격에 의해 신비로운 정체처럼 보이고.
 진리란 그저 그런 것이고 아내의 말처럼 허상인지도 모른다.
 차로 이동하는데도 임산부인 파랑은 몹시 피로해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위로 올라가 맥을 버리고 드러눕는다.
 정도는 커피를 만들어갖고 그녀의 침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정말 의미 있는 하루였어요. 선생님은요?”
 “미궁에서 길을 잃은 그런 착잡한 기분입니다.”
 파랑이 무슨 연유로 갑자기 절로 향한 발걸음이 잦아지고 있을까?
 그것이 준범이를 모해한 다음부터가 아닐까.
 복중에서 자라는 언니의 소원을 의식하고서부터가 아닐까. 그녀는 지금 죽음과 새 생명의 잉태를 모두 경험하고 있다. 새 생명이 자라고 있는 자궁에서부터 태어날 음부까지의 간격도 길이라면 길일 것이고 준범이가 죽음으로 향해가던 그 마지막 밤의 시간들도 길이라면 길일 것이다. 그 때문에 파랑이 길에 그처럼 천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삶의 확실한 이유와 근사한 명분을 찾고 싶을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윤정의 깨달음에서 발견한 것이 틀림없다.
 띠리리룽-띤띠-띤따-
 휴대폰음악소리가 울렸다.
 정도는 파랑의 휴식에 방해될까봐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며 다급히 거실로 나왔다.
 “네 윤정도입니다.”
 “형. 나 살려줘. 나 지금 죽는단 말이에요. 제발 좀 살……”
 목에서 담이 끓는 소리가 가늘게 수화기속에서 울리더니 그만 툭 끊어져 버린다. 수화기를 손에서 떨어트린 듯 그래서 흔들거리며 탁자다리에 부딪치는 듯 텅텅 소리가 들렸다. 가끔 우-웩! 우-웩! 토하는 소리도 들렸다.
 광혁이다.
 “이 봐.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죽는다니. 말 좀 해 봐.”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미경이 그를 배신하고 진남이와 함께 도주한 뒤로 광혁은 하루하루를 술로 울분을 달래 왔었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곧 올거라고 주위에서 위안을 했지만 윤미경은 그림자 하나 얼씬하지 않았다.
 “그년이 날 버린 거야. 날 배신하고 영영 뺑소니친 거라고. 오긴 개좆을 와! 씹새끼와 붙어서 어디서 잘 살고 있을 텐데. 씨발년! 사지를 발기발기 찢어 죽일 년!”
 처음에는 온갖 악담을 다 퍼붓더니 날이 갈수록 탈진하는 듯 광란의 도가 약해지더니 요즘은 아예 입을 다물고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미친 듯이 포효하던 사람이 갑자기 목석처럼 굳어져 버리니 도리어 더 불안하고 무서웠다. 완전히 절망한 그가 언제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언제나 유령처럼 감돌았다. 그런데 그 불길한 사건이 오늘 드디어 발생한 것 같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곧 그리로 갈 테니.”
 정도는 전화를 끊고 파랑의 방으로 들어갔다.
 “잠간 다녀올 곳이 있어 나가 봐야겠습니다. 누워서 휴식하세요.”
 “무슨 나쁜 일이 생긴건 아니죠? 전화 받는 음성이 급촉하시던데.”
 “아니 아무 일도 아닙니다.”
 태연한 듯 느긋한 걸음으로 빠져 나왔으나 문을 나서자마자 골목에 세워둔 차에 올라 부랴부랴 시동을 걸었다.
 제발 죽지 말아야 하는데. 미경에게도 누가 미칠 것이고. 우리 집안에까지 오욕을……
 광혁이는 침대아래의 방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탁자위에는 술병들과 독극물이 든 약병이 지저분하게 뒹굴고 있었다.
 급히 달려가 방바닥에 틀어박고 있는 그의 머리를 쳐들고 보니 벌써 혀가 빼 물려 있고 입가에 거품이 부걱부걱 괴어 오른다. 눈도 약간 뒤집힌 상태였다.
 “이게 무슨 짓이야! 사내 녀석이 못나게!”
 급박한 상황이라 정도는 무작정 광혁을 등에 업었다.
 아무데고 가까운 병원에 차를 대고 안으로 들어갔다. 간호사들과 의사들이 달려 나와 환자를 옹위하여 응급실로 옮긴 다음에야 정도는 다리맥이 풀려 대기실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찌나 황급히 서둘렀던지 잔등이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숨이나 돌리려고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타들어가는 목을 축였다.
 “짜식! 죽으면 안돼. 살아야 돼. 음독자살이 뭐야. 가문의 명예가 팔리게.”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응급실안은 조용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런 동정이 없다.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광혁이가 측은한 생각이 든다. 남편을 배신하고 도망친 여동생 미경이 미워진다. 자신과 미미를 버리고 절로 도피한 윤정도 미워진다.
 다 도망 가라. 도망 갈 것들은 다 도망 가라고. 그런다고 죽겠다는 놈은 또 뭐냐. 그것들이 보란 듯이 더 꿋꿋하게 살아야지. 백 살, 천 살까지라도.
 그러나 광혁에게는 꿋꿋하게 살아갈 힘이 없다. 자기 몸도 운신하지 못하는 가련한 처지가 아닌가. 그에게는 파랑처럼 불의를 징벌할 맥조차 없다.
 잠이 소르르 왔다. 정도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눈을 감았다. 한쪽에서 사람이 죽는다, 산다 하는 마당에서도 졸음이 밀려든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한심했다. 그러나 졸음은 달콤한 사탕처럼 그를 유혹한다.
 “가족 되십니까?”
 누군가 느닷없이 부르는 소리에 정도는 풋잠에서 깨어났다. 키가 훤칠하게 큰 의사가 가운을 입고 그의 앞에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네. 어떻게 됐습니까?”
 “생명은 건졌습니다. 적시에 병원에 후송한 덕분이지요. 지금은 수면제주사를 맞고 잠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식구들이 평소 잘 보살펴드렸어야죠. 음독자살을 시도할 때까지 방임하다니요. 워낙 신체장애자인데.”
 의사는 못마땅한 눈길을 찔 흘기고는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
 무슨 일이 발생했던가 싶게 주위는 평온했다. 한 사람이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상은 조금도 변함없이 권태롭고 단조로운 반복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광혁은 손등에 링거주사바늘을 꽂은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눈가에는 아직도 눈물자국이 말라붙은 채로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의 얼굴표정이 그처럼 평온할 수가 없었다. 마치도 부처님 얼굴처럼 근심걱정과 울분이 모두 사라지고 평화만 은은하게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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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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