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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01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5 by 아데라

바람의 아들
장혜영


 현상된 필름을 들고 암실에서 나오자 어느 사이엔가 여동생 미경이가 와 있다. 잔뜩 울상이 된 꼬락서니를 보니 또 남편과 한바탕 접전을 벌인 모양이다. 자리에 누운 채 운신을 못하는 미경의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은 온종일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을 추적, 확인하는 것뿐이다. 방년 25세의 젊은 여자답지 않게 미경의 얼굴에는 수심과 애수로 초췌하고 구겨져있다. 언제나 미경의 눈 등은 울어서 팅팅 부어있었다. 측은하고 동정심도 없지 않아 들었다.
 
그러나 그게 다 누구 탓인가. 미경이 자신이 자초하고 스스로 불러들인 화요 불행이 아닌가.

 정도는 한참이나 미경을 쏘아보다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넌 일하러 나온 거니, 놀러 나온 거니? 지금이 몇 신지 알아?”
 
벽시계의 시침은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싫으면 아예 그만두던지.”
 
필름을 건조캐비닛에 부착시키는 정도의 손등에 굵은 핏줄이 꿈틀거렸다.
 
“미미이모부가 잡고 놓아주지 않는 걸 어떡해.”
 
소파에 고개를 숙이고 앉은 미경은 벌써 울먹거리고 있었다.
 
“온밤 발가벗겨놓고 자지도 못하게 괴롭혔단 말이야. 흑흑!”]
 어느 새 미경은 쏟아지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는 듯 손등으로 흐르는 액체를 이리저리 훔친다. 광혁의 그런 변태성욕자적인 폭행이 어제, 오늘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미경을 발가벗겨놓고 온몸을 쓰다듬고 구타하고 개처럼 방바닥에서 벌벌 기도록 강요한다는 사실은 이미 동네가 다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이다. 미경이 중국집 배달 최진남이와 붙어 다닌다는 풍문을 듣고부터 발작한 악습이었다. 처남으로서 매제의 악습을 탓하기 전에 여동생의 외도와 불륜을 탓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괜히 그랬겠냐. 네가 또 진남이를 만났던 거겠지. 그 멍청하고 어수룩하고 고집스러운 배달아저씨를 말이야. 만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는데도……”
 
“오빠. 나도 사람이고 여자야. 이제 겨우 25살밖에 안된 청춘이란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다 비난해도 오빠만은 동생의 불행을 이해해줘야 되는 거 아냐.”
 
고개를 번쩍 쳐들며 오열과 한탄을 토해내는 미경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범벅이었다. 나도 사람이고 여자야 하는 호소가 처절하게 정도의 가슴을 울렸다. 하체불구가 된 남편! 남편이라뿐이지 명색만 좋을 뿐 생과부가 되어 부부쾌락을 희생당한 여동생의 처지가 측은했다. ]
 하지만 그런들 어떡하랴. 미경은 이미 결혼한 유부녀고 아내로서 지켜야 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몸이 아닌가. 원망할 무언가가 있다면 그 저주로운 교통사고일 뿐이고 기구한 운명일 뿐 스스로의 양심과 도덕적 규제에서 탈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정도가 늘 인생의 좌우명으로 여기는 참된 삶, 바른 삶이다. 여성이 누려야 할 당연한 쾌락을 상실하고 그래서 남편을 배반하고 사랑을 배신하는 명분이 될 수는 없다.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해두지만 그따위 논조를 이유로 네가 윤 씨 가문의 깨끗한 명예에 먹칠을 하면 안 된다. 아버지가 아시면 널 용서하지 않으실 거니까. 넌 아내로서의 삶에 충실해야지 배신자가 되어서는 안돼. 인생은 쾌락이 전부가 아니야. 그보다 많은 의미에서는 희생이고 인내이고 책임인 거야. 인생의 가치는 바로 거기에 있지. 불륜이라는 걸 알면서 그 길을 고집하는 건 너 자신의 가치를 훼멸하는 어리석은 행위야……”
 
손님이 들어오는 바람에 그들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사실 미경은 오빠의 장황한 설교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한두 번만 들은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이치나 도리를 몰라서 실수하는 게 아니다. 감정은 도리나 이치 같은 것보다 더 몸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네거티브가 와성되자 정도는 돋보기를 들고 현상효과를 살펴보았다. 온도는 적절한 듯 현상부족이나 과다현상은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신문지 위에 네거티브를 올려놓고 면밀히 관찰했다. 그런데 정상, 비정상을 떠나서 음화현상만을 통해서도 화면에 포착된 피사체들의 촬영기법들이 전혀 무시된 현상들임을 보아낼 수 있었다. 구도도 혼란하고 초점도 불확실했다. 그러나 필름을 인화하기 전에는 사진의 진면모를 확인할 수 없다. 우선 밀착인화를 하여 노출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그런데 또 하나 이상한 것은 필름에는 인물사진은 전혀 없고 죄다 풍경사진뿐이라는 사실이다. 사진 속에서 파랑의 미모를 대할 수 있을 거라던 기대가 허물어지며 약간은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실망의 공간을 대신하여 다른 하나의 호기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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