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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4.12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39 by 아데라 1

바람의 아들 39
장혜영

 윤도율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로 가는 척하고 반대 편 문 쪽으로 걸어갔다. 마음은 조급했지만, 경찰이 달려와 덜미를 잡는 것 같았지만 애써 태연하고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느릿느릿 움직였다. 좌석에서 문까지 이르는, 5~6m도 채 안 되는 거리가 백리, 천리가 되는 것처럼 아득하게 멀어 보인다.
 열차 연결 칸으로 나오자 그는 서둘러 승강문을 열어보았다. 다행이도 수동개폐식 문이어서 쉽게 열린다. 찬바람이 확 안겨들며 윤도율은 상체가 뒤로 휘청거렸다. 열차승무원이 나타나기 전에 재빠르게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휙휙 스쳐가는 전봇대며 나무들이며 숲들이며 정신을 아찔하게 했다. 두려움도 없지 않았다. 경찰은 각일각 그를 향해 거리를 좁혀오고 있다.
 주저해서는 안 된다. 망설일 시간이 없다.
 도율은 두 눈을 꺽 감았다. 숨을 죽이고 마지막 계단으로 성큼 내려섰다. 열차를 맞받아 달려오는 거센 바람에 당금이라도 휭- 날아갈 것만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도율은 용기를 내서 열차 아래로 풍덩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폭풍에 날려 풍선처럼 허공중에 붕-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비상은 잠시였을 뿐이고 눈 깜짝 할 사이에 그의 육신은 강한 충격을 받으며 땅바닥에 쿵- 하고 나떨어졌다. 그대로 관성의 작용으로 몇 바퀴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어느 웅덩이에 가 처박혔다.
 그때 의식을 잃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정신을 차렸을 무렵이었다. 전신이 욱신욱신 쑤시고 어깨며 허리며 허벅지에서 극심한 통증이 발작했다.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고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다. 산악 지대의 늦가을 추위는 한겨울 추위 못지 않게 살을 엔다.
 도율은 자신이 어딘가에 누워 있음을 느꼈다. 무언가에 의해 전신이 심하게 들썩들썩 뒤흔들리고 있었다. 텅-텅-텅- 하는 경운기소리가 깊은 어둠이 흐르는 산 속의 고요한 정적을 깨트리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되어 경운기에 누워 있지?
 도율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육신의 모진 고통 때문에 또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단조로운 경운기소리도 둘리지 않았고 덜컹덜컹 구르지도 않았다. 자신은 그냥 시골의 비포장도로 옆에 되는대로 버려져 있었다. 농부는 거의 죽어가는 생면부지의 사람이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한 걸음, 한 걸음 산 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래종아리와 등허리가 무엇에 다쳤는지 피에 흠뻑 젖어 축축했다. 뼈가 긁히는 통증이 극심했지만 이동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날이 밝기 전에 행인들의 눈길을 피해 도로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꼬박 하룻밤을 걷고 난 그는 깊은 산중에서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번엔 그냥 배를 땅바닥에 붙이고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다. 한참을 기어가니 저만큼 앞에 감자밭이 나타났다.
 윤도율은 마른 감자덩굴이 군데군데 쌓인 비탈진 밭고랑을 타고 포복전진을 계속했다. 11월 초순인데도 산간지대라 강원도시골은 새벽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한겨 울추위를 방불케 한다. 낮에 내린 부슬비가 새벽추위에 밭고랑에 엷은 얼음으로 얼어붙어 그의 배 밑에서 바삭바삭 부서졌다. 칼날 같은 얼음조각들이 터지고 째진 상처를 아프게 찌르며 살을 저며 내는 통증을 유발했다.
 그렇게 기고 기다가 끝내는 과다한 출혈과 탈진으로 또다시 실신하고 말았다. 그때는 이미 날이 다 밝아 산골해가 떠오르려고 계곡에 붉은 빛 물결이 그들먹이 차오르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엄마. 이것 봐. 눈을 움직여. 정신을 차렸나봐. 이것 좀 보라고. 눈까풀이 움직이잖아.”
 꿈 속에서처럼 멀리서 들려오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맨 처음 의식에 입수되었다.
 “이 가시나 좀 봐라. 어미더러 뭘 보라는 거냐. 눈깔이 보여야지. 소경 어밀 놓고 지랄발광하고 자빠졌네!”
 소녀의 앳된 음성 뒤에는 나이 지긋한 중년 여인의 거친 목소리가 이어진다.
 소경 엄마와 딸! 무슨 동화도 아니고 꿈도 아니고.
 천근 같이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떠보니 도율의 곁에는 두 여인이 나란히 앉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꿈은 아닌 듯싶다. 열예닐곱 돼 보이는 소녀의 머루알 같이 까만 눈동자는 별처럼 초롱초롱했다. 잘 익은 능금처럼 발그레한 홍조가 묻은 두 볼은 아직도 젖살이 올라 보송보송하다. 소박하고 순진하고 종달새처럼 명랑해 보이는 소녀의 앳된 동안童顔에는 어울리지 않는 우려와 걱정이 짙은 그늘로 덮여 있다. 몸에 걸친 치마저고리는 비록 남루했지만 청초한 젊음은 새벽이슬을 듬뿍 머금은 꽃망울처럼 풋풋하고 싱싱하고 말쑥했다.
 대신 소녀의 옆에 앉은 중년 여인은 얼굴이 앙상하고 여위어 초췌한데다 실명 된 두 눈까지 움푹 꺼지고 곯아빠져 빈궁과 병마의 고통스런 흔적이 역력한 시골 아낙의 궁상 그대로다.
 머리맡에는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더운 물대야와 수건이 놓여 있고 소녀의 손에는 하얀 빛깔의 미음이 담긴 숟가락이 들려 있다.
 “내가 어떻게 여길?”
 “집 뒤의 감자밭에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걸 순희 저 가시나가 발견했다네. 미친년처럼 새벽에 오줌 싸러 바라나갔다가……”
 “엄마.”
 “왜. 어미가 틀린 말을 했냐. 조금만 늦게 발견했어도 총각은 피를 다 흘리고 죽었을 거네. 딸년이 새벽오줌싸개라서 그 덕분에……”
 “엄마!”
 “그래 알았다. 보지 못하는 것만 해도 서러운데 벙어리까지 되라고 하니. 에끼, 이 모진 년아! 그래 입 다물 마. 네 년이 다 알아서 해봐라. 어미 말이라면 그냥 초불을 켜고 달려드는 늑대 같은 연인 줄 누가 모를까봐.” 
 “여기가 어딥니까?”
 “강원도 산골 동네에요. 싸리골이라고. 여긴 우리 집밖에 없어요.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요.”
 “없기는 왜 없냐. 아래 동네에도 세 집이나 살잖니. 가끔 놀라도 다니는데.”
 “엄마.”
 보지 않아도 모녀는 이 산중에서 이렇게 종일 티격태격 다투는 재미에 사는 모양이다.
 윤도율은 저도 모르게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순박한 모녀가 너무 아름답게 보였다. 불청객의 사연도 묻지 않고, 도둑놈인지, 살인범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그냥 환자로만 여기고 살뜰히 보살펴주는 시골 여인들의 마음이 너무 순진하다. 어쩌면 그들에겐 도회지 사람 구경조차 하기 힘든 이 시골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조건 하나로도 기뻐할는 지 모른다. 인간이라는 조건 하나로 친근해질 수 있는 넓고 부드러운 흉금!
 “나 때문에 댁에 연루될까봐 두렵지 않습니까? 난 경찰에 쫓겨 여기까지 도피해 온 사람인데요. 폐가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여기를 떠나겠습니다.”
 웬일인지 그들에게는 속이고 싶지 않았다. 그들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 몸으로 어딜 간다고 그러세요. 가시더라도 몸이나 완쾌되신 다음에……”
 “그래요. 젊은이. 우리 딸년이 시키는 대로 하라니까. 이 년은 벌써 제 아비가 애지중지 아끼며 숨겨두었던 오소리기름과 이렇게 다친 상처에 좋다는 약초를 죄다 뒤져냈다오. 그저 새벽오줌이나 쌀 줄 아는 계집앤가 했더니……”
 “엄마.”
 “그래 알았다. 입 다물 마. 지아비가 죽었으니 인젠 내가 허릴 좀 펼까 했더니 또 조막덩이만한 딸년 구박에 어미가 죽는다, 죽어! 미친년이 지어밀 소경이라고 깔보며 제 맘대로 쥐고 주물자고 한다네.”
 중년 여인의 입에서는 점점 더 거친 험담이 쏟아져 나왔고 얼굴도 험상궂게 일그러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순희는 이미 엄마의 그런 횡설수설에 습관이 된 듯 대수로워 하지 않는다.
 도율은 문득 앞뜰의 빨랫줄에 걸린 자신의 학생복에 시선이 갔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몸에 낯선 농부의 한복바지저고리가 입혀져 있음을 발견했다. 갑자기 얼굴이 활딱 붉어졌다. 소녀가 자신의 알몸을 죄다 보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얼굴을 들기조차 민망해졌다. 괜히 가슴까지 설렌다. 그 역시 피가 펄펄 끓는, 20대의 총각이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어머니 앞에서도 알몸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그런 심정을 눈치 챈 듯 순희도 수줍게 고개를 떨어트리며 두 볼이 발그레 홍조를 띤다.
 하루 두 번, 매일 아침 저녁으로 상처를 소독하고 순희아버지가 손수 약초를 캐어 제조했다는 한약을 갈아붙여야 했다. 어깨, 머리 그리고 다리상처는 그런대로 괜찮았으나 사타구니와 엉덩이상처는 꼭 팬티를 벗어야 치료가 가능했다. 소경인 어머니가 할 수도 없고 운신이 어려운 환자자신이 처치하기도 어려운 노릇이라 하는 수 없이 순희 앞에 옷을 벗고 누워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사내의 치부를 드러내 놓은 채 누워있으려니 부끄럽고 쑥스럽고 민망할 뿐만 아니라 자꾸만 추한 생리현상이 발작해 수치감으로 몸 둘 바를 몰랐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그러나 순희는 제법 의젓한 어른답게, 숙련된 간호사처럼 꼼꼼히, 자상하게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랐다. 피고름이 엉겨 붙은 붕대를 풀어낼 때는 고통을 참느라 식은땀을 흘리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악무는 도율을 바라보며 눈물까지 흘렸다. 붕대와 소독수를 구입하려고 순희는 몇 차례나 산을 내려갔다와야 했다. 그래도 그녀의 얼굴에는 한번도 짜증내는 기색이 없이 늘 밝은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상처는 순희의 정성 때문인지 윤도율의 의지 때문인지 재빨리 호전되었다. 3일 만에는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일주일 만에는 걸음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열흘이 되는 날에는 순희를 도와 마당에서 장작을 쪼개줄 만큼 상처가 완쾌되었다. 가끔 순희를 따라 산에 약초 캐러나 땔나무하러 다니기도 했다. 그냥 집구석에 박혀 밥만 축낼 수는 없었다. 약초 캐기는 이 겨울에 순희네 집의 유일한 부업수입이었다. 강릉이나 춘천시장에 내다 팔면 그 수입이 짭짤했다.
 산악지대라고 한겨울 내내 혹한만 군림하는 것은 아니다. 바람이 자고 한낮의 햇볕이 내리쬐는 날이면 사면이 병풍 같은 산줄기들에 둘러막힌 양지쪽은 제법 봄날 같이 포근할 때도 있다. 눈 한점 없는 마른 풀밭위에 누워있노라면 하늘에서는 따스한 햇볕이 내리비치고 땅에서는 풀 온기가 융단처럼 폭신하고 따스하여 봄날의 나른한 권태마저 느낄 수 있다.
 그날도 산줄기를 하얗게 덮은 적설이 스르르 녹아내리며 반짝반짝 햇빛을 반사하는 포근한 날씨였다. 땔나무하러 나서는 순희를 따라 윤도율은 등에 지게를 짊어졌다. 순희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막지 않았다.
 마른 나뭇가지들을 주워 모아 단을 묶었다. 순희는 두 단을 묶어 머리에 이고 도율은 지게 위에 평소보다 많은 세 단을 얹었다. 순희보다는 더 지고 싶었다.
 “안 돼요. 아직 지게 지는 요령이 없어서”
 순희가 나뭇짐을 덜어내려고 했으나 도율은 오늘 만큼은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환자라고 해도 9척 사내가 아닌가. 요령은 없어도 힘은 있다.
 고집을 부리며 지게를 지고 일어섰다. 무게중심을 잡지 못해 비틀거렸지만 간신히 몸을 가누고 비탈을 조심조심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직 상처도 완쾌되지 않으셨는데. 무리하시다가……”
 순희의 걱정이 끝나기도 전에 율도율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나뭇짐에 상체가 쏠리며 몸의 균형을 잃고 그만 비탈에서 넘어졌다. 나뭇짐을 진채로 비탈에서 데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선생님!”
 순희는 깜짝 놀라 머리에 인 나뭇단을 내던지고는 다람쥐처럼 날렵하게 비탈을 달려 내려왔다. 내려와서는 나뭇짐을 뒤로 번지고 지게 밑에 깔렸던 도율을 부축해 세웠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어요? 그러게 제가 뭐랬어요. 안 된다는데도……”
 마침 도율이 굴러 내려온 곳은 마른 풀 덩굴이 두텁게 깔려 있는 양지쪽이었다. 아늑한 웅덩이 속에 마른 풀 덩굴이 융단처럼 깔렸는데 노란 햇빛은 금싸라기처럼 쏟아져 내려 투명하고도 따스했다.
 순희의 품에 안겨 있는 도율은 이상한 흥분을 느끼며 가슴에서 북소리가 둥둥 울린다. 무사함을 확인한 뒤에야 순희도 수줍음을 머금으며 도율을 무릎위에서 살그머니 내려놓는다.
 “순희 씨.”
 도율은 알 수 없는 욕망의 힘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순희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붉게 달아오른 남자의 시선을 외면한 채 목까지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의 잘 발육된 풍만한 가슴이 눈에 띌 만큼 거창하게 오르내렸다.
 “순희 씨.”
 웬일인지 목소리마저 거친 숨결에 토막토막 잘라진다. 전신이 촉한을 만난 사람처럼 화들화들 경련이 발작했다. 둥둥 심장은 거센 북소리를 울리고 툭툭 혈관은 터질 듯이 피가 출렁인다. 윤도율은 자신이 무형의 그러나 확실한 윤곽을 가진 하나의 폭풍 같은 욕망에 지배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 어떤 거세찬 파도가 그의 이성을 매몰시키며 감정의 물결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독수리처럼, 호랑이처럼 아니, 늑대처럼 순희의 자그마하나 터지게 익은 몸매를 와락 덮쳤다. 피가 펄펄 용솟음쳤다.
 순희는 거절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순간을 고대한 듯, 도율의 거친 스킨십에 자신의 순결을 말없이 내맡겼다.
 “이래도 됩니까? 이래도 되는지 난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짐승이라고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몰라요. 선생님께서 아시겠죠.”
 구애도 허락도 없었다. 그냥 격렬한 충동하나만으로도 음양결합은 가능했다. 사실 태초의 음양결합에는 자연의 섭리만  있었을 뿐 인간이 만들어 낸 그런 거창한 의미들은 없었을 것이다. 동물이 후대를 이으려는 목적에서 성결합을 했을까. 그것은 그냥 본능이었을 것이고 자연의 섭리였을 뿐이다. 모든 의미는 인간이 조작해 낸 것에 불과하다.
 흥분과 본능과 성욕 앞에서 엷은 옷 몇 견지는 아무런 방비 기능도 없었다. 그것은 그냥 모자 같은 것이었다. 시간이 되면, 기회가 되면, 이유가 되면 금방 벗겨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절차는 저절로 진행되는 것이었다. 보이지는 않아도.
 그처럼 거창한,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한 융합이 거의 싱거울 만큼 간단하게, 순식간에, 무난하게 마무리 되였을 때 남은 것은 피로와 땀방울뿐이었다.
 순희는 돌아앉아 자그마한 어깨를 들먹이며 자꾸만 홀짝거린다.
“순희 씨. 미안해.”
 대답 대신 흐느낌소리만 높아진다. 미안이라는 말이 과연 무엇을 설명할 수 있으며 무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단지 교양이 만들어 낸 하나의 값싼 사치품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눈물만 흘린다. 순희는 모든 의사표현을 눈물과 흐느낌으로 대체하는 것일까. 알 수가 없다. 그 의미를 읽어내는 독심술讀心術을 갖지 못한 정도는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인젠 어떡할 건데?”
 “몰라요.”
 순결을 바친, 순결을 빼앗긴 여자는 그에 해당한 대가지불을 요구할 권리가 있을 텐데 순희는 그런 이치마저 모르는 듯싶다. 그러나 몰라요 라는 말은 미안하다는 말보다는 퍽 진실하다.
 그것은 윤도율의 인생에서 이성과의 첫경험이었다. 원만하고 익숙하고 완벽한 결과보다는 어딘가 부족하고 서툴고 두루뭉술한 과정이긴 했지만 도율의 남성을 일깨워주고 세련과 성숙을 완성시켜준 귀중한 시간이었다. 오늘의 시간은 도율의 인생에서 영원할, 하나의 의미 있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도율이 순희와의 융합에서 느낀 건 이런 거창한 의미의 기록은 아니었다. 다만 그 순간은 남자의 완성을 위한, 확인을 위한 도율의 육적지향의 결과였을 따름이었다. 아니, 그런 의식적인 정리조차도 없었다. 그냥 강력하게 도율의 육신을 지나간 감각의 향연이었고 파도였던 지도 모른다. 순희와의 육적접촉에서 이미 중매를 통해 윤 씨 가문의 물망에 오른 양진옥의 존재 같은 건 윤곽조차도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양진옥은 정상적인 일상의 궤도에서는 형상을 드러내는 존재였다. 그러나 궤도를 벗어나서 양진옥의 존재는 없었다. 바로 그 자리에 순희가 있었다.
 순희네 집에서의 도피생활은 박정희독재정권의 정치범대거석방선언이 발표된 그날까지 지속되었다. 트랜지스터라디오는 세상의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유일한 통신도구였다. 그 역시 순희가 그를 위해 읍내에 내려가서 구입해 온 것이었다.
 윤도율은 시국의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상경을 단행했고 대학원과정도 무난히 마치고 사법계에 진출하여 화려하게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윤도율은 상경 후 출세를 거듭했고 양진옥과 결혼하면서 순희의 존재 같은 건 까맣게 망각했다.
 그런데 운명은 언제나 인간을 당혹에 빠뜨리는 심술궂은 데가 있다. 기억 속에서 망각했던 채순희가 또다시 윤도율의 일상에 파문을 일으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부장판사직에서 정년퇴임하고 변호사사무실을 차린 윤도율에게 어느 날 느닷없이 채순희의 존재가 낡고 퇴색한 과거를 싸안고 나타났던 것이다.
 남편을 살해한 잔인무도한 살인범!
 그것이 운도율이 접수한 변호안건이었다. 피고인이 채순희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춘천지방법원에 출두했던 첫날 그가 구치소에서 면담한 피고인은 오래전에 망각했던 첫사랑, 채순희였다.
 그녀가 왜 남편을 살해했을까?
 주정뱅이고 시정잡배인 망나니! 채순희는 그런 남편의 난폭한 학대와 폭행에 견디다 못해 살인을 했던 것이다. 채순희가 그런 인간이하의 망나니한테 시집간 이유가 무엇인가? 누구 때문인가. 처녀로 임신을 하고 출산까지 한 여자! 그녀의 운명은 불행하게 마련이다.
 채순희의 살인동기의 근원적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그때는 이미 늦었었다. 윤도율은 자신이 수십 년 동안 쌓은 모든 사법적 경험을 총동원하여 그녀의 감형을 주장했지만 형벌감량에 실패했다. 채순희는 최종판결에서 20년 징역에 떨어졌다.
 그 형벌은 당연히 채순희가 아닌 윤도율이 감당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옥살이를 하게 된 건 윤도율이 아니라 채순희였다.
 윤도율은 법정에서 교도소로 압송되는 채순희를 묵묵히 바라볼 뿐 할 말이 없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법 앞에서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이실직고할 용기는 없었다.
 윤도율이 채순희가 살던 강원도 산골의 오지로 내려오게 된 결단도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다. 그렇게라도 그녀에게 진 채무를 상환하고 싶었다. 비겁하고 비굴하고 유치하더라도 이런 자학과 영광의 미래를 포기하는 참회도 기실 순희가 그의 존엄과 결백을 지켜주기 위해 지불한 헌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하찮은 희생일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생매장하고도 도율에게 어떠한 대가지불을 강요하지 않았다. 도율의 신변에 위험이 다가가자 서슴지 않고 자신의 남편마저 살해했다. 윤도율이 순희한테 남긴 건 자식 하나뿐이었지만 그마저 아버지에게 돌려주었다. 부서진 안경과 피 묻은 마스크가 순희에게 첫사랑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그녀는 장승을 깎고 돌탑을 쌓으면서 도율의 행운과 평안을 기도했다.
 윤도율이 채순희에게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빈궁한 생활에 보탬이 될 동전 한 푼 보내준 적이 없었다. 아니, 윤도율은 출세와 영광과 행복 속에서 산간초옥에 묻혀버린 채순희의 존재를 기억 속에서 완전히 망각해 버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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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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