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아들
장혜영
5장 아버지의 실종
1
해를 넘기고 소한에 접어들면서 계절은 추위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벼린다. 그러나 콘크리트구조로 된 도회지의 열기 앞에서는 엄동설한도 맥을 못 추고 한 걸음 주춤한 채 공격 대신 타협을 선택한다. 혹한을 녹이는 천만 시민의 굵은 입김에 도시는 도저히 얼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밤의 냉기에는 잠시 얼어붙었다가도 낮이 되면 처마위에서부터 고드름들이 실실 녹아내린다. 수만 대의 차량들이 내뿜는 배기가스와 식당가와 주택가들에서 배출하는 에어컨들은 계절의 순환에 제동을 걸고 있다.
그래도 겨울은 짓궂게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려는 듯 그늘진 음지나 나뭇가지들에 적설이나 얼음으로 섭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요즘 겨울은 겨울 같지 않다고들 입을 모으지만 아직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 겨울의 추위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혹독할 것이 틀림없다. 난방을 할 만한 연탄 한 덩이 구입할 땡전마저 빠듯한 사람들에게 이 겨울은 저주의 계절이리라.
다행이도 정도에게 이 겨울은 추위를 느끼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분명 산속 암자의 아내에게 이번 소한추위는 혹한일 것이다.
제 구실을 못하는 소한추위였지만 나름대로 주위의 무언가를 변화시킨 것만 같다.
우선 준범의 홈페이지부터 냉기가 느껴진다.
아, 올겨울은 유난히도 춥다!
겨울이 추운 줄을 나는 금년 들어 처음으로 느낀다.
도착메일을 확인한 후 답신메일을 발신했다.
추운 것이 더운 것보다 좋아.
답신의 의미가 발신자인 정도에게도 모호하다. 쉽게 달아오르는 사람의 경망과 실수는 쉽게 냉각되는 사람의 좌절과 경직보다 좋다고? 의기소침, 우유부단, 현상유지, 명철보신 따위는 어디서 발생하는가? 더위에서 아니면 추위에서……
이런 힌트가 파랑의 이름에서 받은 건 아닐까? 파란색의 그 냉담함과 차가움의 매력!
파랑은 벌써 달포 가량이나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녀의 반지하방도 문이 잠겨져 있었다.
“방을 뺀 지 한참 됐어요.”
“다른 곳으로 이사 갔나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집주인아줌마는 수도 없이 오고가는 셋방식구들에게 방세 이외의 개인사정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 없어 보인다.
독거노인을 찾았지만 그 역시 허사였다. 치매증세가 발작한 할머니의 미약한 기억력으로서는 설령 파랑이 행방을 알려주었다고 해도 들은 즉시 까먹어버렸을 것이다.
“밤에만 가끔씩 왔다 간다오. 빨래도 해놓고 밥도 해놓고 똥오줌도 받아내고.”
“마지막으로 왔다간 게 언젭니까?”
“글쎄 언제더라? 늙은 게 인제는 정신이 깜박깜박해서.”
“일주일 정도 됐나요?”
“아마 그렇게 됐을 거요.”
“어제도 다녀갔습니까?”
“아마 그랬을 거요.”
부질없는 시간낭비였다. 할머니는 도리어 그더러 파랑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냐며 반문한다.
풍경사진에 흥취를 잃은 걸까? 아니면 겨울추위 때문에 산행이 불편하여 잠시 쉬는 걸까?
사실 겨울풍경은 나름대로 절묘한 풍미가 있다. 작년부터 정도도 여름풍경보다 겨울풍경에 더욱 매료되었다. 올겨울에도 아내가 집에 있었더라면 벌써 서너 곳 다녀왔을 것이다. 눈 덮인 산야, 얼어붙은 냇물, 황홀한 은빛 설경……
그녀가 카메라촬영에 완전히 흥미를 잃어버린 것 같지는 않다. 이사 갈 때 냉장고, TV, 선풍기, 침대 등 다른 세간은 다 두고 갔지만 사진첩과 액자들은 한 점도 남기지 않고 죄다 옮겨갔다고 한다. 게다가 주인의 말에 의하면 전세도 빼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돌아올 지도 모른다.
정도는 비록 인젠 파랑이 떠나간 방이지만 처음으로 그녀의 체취가 스며 있는 공간을 목격할 수 있었다. 창으로 흘러들어온 햇빛 한 점이 노랗게 묻어 있는 실내는 포근하면서도 아늑하다.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렌다.
가전제품들은 죄다 소형이고 게다가 중고품들이었지만 파랑의 손길이 닿았다는 생각에서인지 정겹고 오붓하게 느껴진다. 소박하고 간소한 세간을 미루어봐선 그녀의 생활이 몹시 곤궁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파랑은 조금도 가난의 구질구질한 때물에 쪼들린 흔적마저 없이 부티까지 났었다. 너무도 평범한, 아무 장식도 없는 목조구조의 싱글 침대에서는 아직도 쑥 냄새 같은 풋풋하고 싱그러운 향기가 풍기는 듯 했다. 주인의 눈길만 없었다면 정도는 그 침대위에 누워보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다.
혹시 파랑이 결혼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결혼에 관한 한마디 말도 없었다. 결혼을 앞둔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그런 들뜬 표정도 엿볼 수 없었다. 즐거움 한 조각, 놀라움 한 조각 없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담담한 표정뿐이었다.
파랑의 느닷없는 실종은 아내 윤정의 가출로 인해 활기가 증발된 정도의 일상을 더더욱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때로는 내 삶이 내 자신의 존재가치로 의미가 있었던 게 아니라 윤정이나 파랑과 같은 여자들에 의해서만 간신히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었던 걸까 하는 비참한 좌절감도 없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도 그의 붕괴된 정서를 궁지에서 구출해 주지는 못했다. 삶의 의미는 나 자신의 존재 만으로가 아니라 타인과의 인연 속에서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아내 이윤정의 소식두절은 정도의 존재를 그 이별의 순간만큼이나 야금야금 좀먹고 있었다. 그의 육신을, 그의 의욕을, 그의 의식을, 그의 일상을 심장 깊숙이까지 좀먹어 들어왔다. 이제는 마지막 보루인 자존심의 성벽마저 귀퉁이가 허물어지며 붕괴될 위기에 처해있다.
자존심이고 뭐고 죄다 팽개치고 윤정이가 있는 용천사로 달려 올라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불당 앞까지 갔다가는 부처님을 향해 불공을 드리는 윤정의 진지한 모습을 보고는 용기를 잃고 조용히 발길을 돌리곤 했었다. 아내의 신변에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옹위하고 있었고 그 자리는 성역의 장소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삼계三界가 다 허망합니다.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인생은 중생에게 하나의 무덤이나 다름없습니다. 부처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지요. 누구나 자신 속의 불심만 발견하면 부처님이 됩니다.”
스님의 제도는 아내의 가슴에 지독한 불심을 심어준 게 틀림없다.
사리자여, 있는 것은 없는 것과 다르지 않고
없는 것은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있는 것은 곧 없는 것, 없는 것은 곧 있는 것이다
……
괴로움이 모이고 없어지는 길도 없다
지혜도 없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없고 얻어진 것도 없다.
『반야심경』의 구성진 독경소리가 조용한 산사의 얼어붙은 계곡을 훈훈하게 녹인다.
남편이 사찰로 찾아와도 윤정에게는 「없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고 남편이 곁에 없다고 해도 그녀에게는「있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한낮 마음의 조화일 뿐 그 실체는 없다. 마음의 작용을 실체로 보는 것이 곧 허상이요 인생이다. 아내가 반드시 내 곁에 있는 실체로 인정하려는 것은 허상일 뿐이다. 아내는 내 곁에 없어도 있다. 다시 말해 윤정은 실체는 없고 내 마음 속에만 있는 것이다. 내 마음 속에 없으면 24시간 곁에 있어도 없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윤정은 집을 떠나 멀리 산사에 있어도 마음 속엔 늘 남편과 딸애가 있을 수도 있다. 불교는 심오한 척 하면서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현실을 도피하여 공상세계에서 방황하도록 강요한다. 이런 식으로 불교를 이해온 정도에게는 윤정의 선택이 반갑지만은 않다. 사실 그는 무작정 법당으로 들어가 불공을 드리는 아내를 잡아끌고 산을 내려오고 싶었다.
이건 다 기만극이야. 부처님이 어디 있어.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현실뿐이란 말이야. 현실 외엔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어. 당신과 나 미미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어. 불법? 부처님? 그건 다 마음이, 어리석은 믿음이 조작해낸 허상이야. 생명 없고 실체 없는 문자일 뿐이고 나무나 돌덩이일 뿐이야.
그러나 윤정의 믿음은 이미 남편인 정도에게서 떠나 부처님에게로 옮겨 갔다는 것을 부인 할 수 없을 때 자신의 설득과 권유를 뿌리치는 윤정의 앞에서 여지없이 구겨질 체면과 자존이 너무나 비참할 거라는 우려가 정도의 무모한 강박을 제지했다. 믿음은 그야말로 무서운 불치병이다. 믿음은 허상을 실체위에 군림하게 하며 실체를 죽음에로 내몰기도 한다. 참된 인생에 대한 정도의 확고한 믿음 하나만 보아도 여동생 미경에게는 자유를 억압하는 구속 이외의 어떠한 의미도 없었지만 그에게는 거의 종교적인 신앙에 가까운 것이다. 미경의 인생관, 가치관에 따라 그 믿음을 전향한다고 지금 윤정의 집념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다행이도 미경은 한동안 잠잠하다.
마음을 바로 잡은 것일까? 진남이와의 불륜관계를 정리하고 아내로서의, 유부녀로서의 정직한 삶을 살기로 작심한 걸까.
아무튼 주변사람들에게 숨 돌릴 기회라도 주어 고맙다.
친구 준범은 날이 갈수록 말수가 적어진다. 거의 벙어리 노릇을 한다. 게다가 전에 없던 불량한 주사酒邪까지 늘었다. 술만 들어가면 훌쩍훌쩍 운다. 술이 깨면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 침묵만 지킨다. 그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어떤 중대한 사건이 벌어진 것 같은 분위기인데도 속심을 털어놓지 않고 혼자서 끙끙 않고 있다.
정도는 친구가 스스로 자신의 번뇌와 고충을 털어놓을 때까지 인내성 있게 기다려줄 뿐 다른 도리가 없다. 여태까지도 그랬었다. 누구도 상대방의 사생활을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우정이라는 것이 부담이어서는 안 된다. 친구가 입을 열지 않는다는 건 그에게 아직도 번뇌를 혼자서 감당해낼 만한 인내의 여유가 있다는 것을 입증할 따름이다. 물론 친구의 아픔을 지켜보기만 하는 정도의 마음도 괴로웠지만 그로서는 별 뾰족한 수가 없다. 정도자신도 괴로움을 앓는 환자였지만 그런 번뇌를 털어놓아 친구의 괴로움을 가중시킬 만큼 지독하지 못했다.
시간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특효약이라지 않는가. 그 시간은 윤정에게는 부처님의 영험일 것이고 준범에게는 야심작의 성공일 것이다.
사람은 울면서 성장한다. 번뇌와 괴로움은 성장을 촉진하는 유일한 영양제이기도 하다. 다만 그것은 몸에는 유익하지만 입에는 쓸 뿐이다.
인생의 이 모든 방황들은 정상적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유일한 행적인가? 다른 길은 없을까? 다른 선택은 불가능한가?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그 다른 길이, 선택이 막다른 골목이기 때문인가?
어머니 양진옥여사는 여느 날보다 늦게 나타났다. 요즘 밤에는 집으로 귀가했다가 아침이면 미미를 보살피러 아들집으로 오곤 했다.
그런데 보통 때는 균형과 절도가 있던 양진옥의 걸음걸이가 오늘따라 어쩐지 헝클어져 눈에 띌 만큼 허둥지둥한다. 늘 어머니의 정보正步만을 보아왔던 정도는 맥이 풀린 시골아낙의 털썩거리는 조잡한 걸음걸이를 대하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갈마들었다. 어머니의 정보를 그토록 흐트러지게 할 수 있었던 사건은 틀림없이 충격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 집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정도야. 이 일을 어쩌면 좋냐?”
양진옥은 전에 없이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전전긍긍하며 눈에 눈물까지 글썽인다. 여태껏 아들 앞에서 이렇게 품위를 떨어트리는, 구겨지고 당황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언제나 완벽한 절제미와 세련미, 교양미만을 과시하던 분이었다.
“무슨 일인지 어서 말씀해보세요.”
어머니의 안절부절은 정도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평상심마저 자극하여 당혹의 문을 노크하게 한다.
“아버지께서……”
“네! 아버님이 왜요?”
정도는 구두를 신다말고 허리를 폈다. 어머니의 표정에 등불이 꺼져있다.
“아버지께서 실종되셨어.”
'문학 > 소설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38 (0) | 2010.04.05 |
---|---|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37 (0) | 2010.03.29 |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35 (0) | 2010.03.15 |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34 (0) | 2010.03.08 |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33 (0) | 2010.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