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소개

장혜영 소설가의 출간 작품

단편소설: 화엄사의 종소리 외 60여 편
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외 10여 편
장편소설: 살아남은 전설(전 2권)
              희망탑
              바람의 아들
              여자의 문(전2권)
              무지개그림자
              붉은아침(전2권)
              카이네 기생
학술저서: 한국을 해부한다(대학교재)
              한국의 고대사를 해부한다
              한국전통문화의 허울을 벗기다 


붉은아침 1
장혜영

작가의 말

 황홀한 로맨스를 쓰고 싶었다.
 그런데 사랑을 시들게 하는 퇴역한 과거의 그림자가 유령처럼 이야기의 스토커가 되었다. 결국 백년 세혐世嫌의 연착된 산통은 사랑의 양수가 터지며 여기 밀레니엄 황금신화를 분만시켰다. 늙은 관념의 지독한 관성으로 성역화된 이데올로기의 폐허에서 마술처럼 피어난 사랑, 시대적 통한과 폭압의 유린을 딛고 풀대처럼 일어선 사랑은 그래서 파란만장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광기는 정의라는 도용된 아이디로 로그인하여 인권능멸을 정당화 하는데 인과의 형틀에 결박된 사랑은 세기적 윤리와 세습적 로고스의 지뢰밭에서 예고된 파멸의 해묵은 비극을 패러디할 따름이다. 사랑은 이데올로기의 권력에 분절된 가치경계의 압축을 푸는 알집이다. 오로지 사랑만이 굴절된 역사의 오류를 복원하고 세월의 빙하를 녹일 수 있는 관용의 태양이다.
 정연의 밀항선을 타고 도탄의 강을 건너야 하며 육화된 정한의 성전聖戰이 발육기의 현존을 상식의 무덤에 생매장하는 욕망의 도살장에서 스스로를 구원해야 하는 애정행력의 통절한 울림이 서사의 행간마다 비장한 풍운의 파도로 출렁이게 했다. 이제 이 책의 출간으로 독자들과 더불어 민족의 수난사를 회간回看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감에 미리부터 가슴이 설렌다.
 성취는 상실의 식객이다. 그리고 글쓰기는 폐쇄된 세연世緣의 성문 밖에서 고독의 풍진을 감수홰야 하는 무모함이다. 방치된 책임과 의리의 제물이 된 희생양-가족에게 미안하다.


제1부 백년빙곡冰谷


1장 안개 내린 서울


  
                                                              
                                                             1
 


 준호는 아침 일찍 관악산 서쪽 기슭에 자리 잡은 대학원기숙사를 나섰다.
 4월에 접어들면서 성급한 계절은 수억 년을 윤회, 반복하여 인제는 익숙해진 붓질로 서둘러 산과 들에 황홀한 봄의 화폭을 그려낸다.
 꽃비처럼 쏟아지는 햇빛은 금가루 같고 그윽한 꽃향기는 동토를 뚫고 소생하는, 생명이 꿈틀거리는 계곡을 진동한다. 관악에서 번져 내려온 춘색은 능선과 캠퍼스를 온통 꽃 바다로 물들이며 출렁거린다. 무너질 듯 흐드러진 자줏빛 개나리꽃은 소담스럽고 노란 산수유는 수줍은 소녀처럼 화사하고 반쯤 피어난 보라색 라일락향기는 행인을 취하게 한다. 가지가 부러질 듯 탐스러운 목련꽃과 벚꽃은 키 낮은 연분홍 진달래와 절묘한 색상조화를 이루며 울긋불긋 화려하다.
 계절은 참으로 위대한 화가라는 감탄을 하며 준호는 통학셔틀버스에 승차했다. 캠퍼스를 빠져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으로 가야 했다. 지하철역으로 이어진 거리 변에도 봄빛은 완연했다. 시민들의 얼굴표정도 한결 밝아진 듯했다.
 강릉에 계시는 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온 것은 지난밤이었다. 특별한 사정 때문에 강릉체류가 1년간 더 연장될 조짐이니 준호더러 쓰기 편한 당신의 사글세방으로 옮기라는 당부 전화였다. 그 사글세방은 아버지가 강릉으로 구직 차 옮긴 후 비어 있은 지가 벌써 두 달 가량이나 되었다. 방을 비워둔 채로 달마다 불필요한 지출인 30만원이라는 월세가 꼬박꼬박 빠져나갔다. 그러나 보증금 5백만 원에 목이 매여 방을 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마침 준호 또한 다음달부터나 「6.25 참전자 실록」집필에 착수할 예정이어서 아늑한 독숙처가 필요하던 차라 비좁고 복잡한 대학원 미혼자 기숙사에 숙박하느니 이 기회에 아예 이사할 참이었다. 이삿짐이라야 서적 몇 박스와 옷가지를 챙긴 여행용 지퍼백 두 개가 전부인지라 사람 먼저 택배로 우송시켰다.
 아버지가 반년 정도 그 집에 계셨지만  준호는 부친이 강릉으로 떠난 두 달 전까지도 그림자 한 번 비친 적이 없었다. 웬일인지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아니, 솔직히 싫었다. 아버지만 보면 무슨 조건반사처럼 진옥의 모습이 기억의 수면 위에 떠올랐고 진옥의 모습은 또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원망하고 저주하도록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충격이 되었기 때문이다.
 진옥을 생각하자 준호의 가슴엔 저도 모르게 어둠이 밀려들었다. 아직까지도 완치되지 않은 마음속 깊은 상처의 통증이 일기 시작했다.
 셔틀버스에서 내려 전철 2호선 순환선으로 갈아탔다. 거기서 목적지까지는 세 역이였다.
 신대방역에서 내린 준호는 행인들에게 길을 물어 아버지가 알려준 신림 동남쪽 고갯길을 타고 작은 언덕에 올랐다. 봄을 맞은 시민들의 옷차림이 길가의 꽃들과 조화를 이루어 눈이 부신 거리는 명랑했다. 즐비한 가게들과 슈퍼, 약국들과 음식점들을 지나 한참 올라가니 언덕 위에 붉은 벽돌건물의 3층 빌라 한 채가 나타났다.
 미리 전화 연락을 받은 주인아줌마가 방 키를 갖고 대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영식 씨 아드님이시죠? 오늘 이사하신다는 분.”
 40대의 중년 부인은 빌라 몇 채를 세놓는 대부답게 몸집은 비록 비만하고 용모도 수수했지만 전체적인 격이나 분위기에서 상대를 압도하는 기품이 은은하게 발산되어 언행에 신경을 쓰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네. 최준호라고 합니다.”
 “S대에서 박사공부를 하신다면서요? 부친께서 자랑을 얼마나 하시던지.”
 준호는 얼굴을 붉혔다.
 아버지는 아들의 신분을, 긍지보다는 자신을 향한 주위 사람들의 무시를 해소시키고 경외감을 환기시키기 위한 도구처럼 남용한다는 생각이 그를 불쾌하게 했다. 아니라면 아무런 관계도 없는, 세를 주고받는 단순한 경제적 거래관계 이상의 연분도 친분도 없는 주인아줌마에게까지 필요 이상의 신상을 제공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 긍지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옥이 때문에 겪어야 했던, 그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여준 이기심은 자식 사랑이라는 부모의 명분을 초월한 것이었다. 모르긴 해도 아버지는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아들의 신분을 들먹이면서 방패나 호신부로 휘두르실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그것은 아들에 대한 무시일 수도 있었다.
 그러자 준호는 또다시 아버지가 싫어졌다. 정말이지 더 이상은, 그것이 설령 진옥이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부친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천륜을 어기는 불손한 자식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는 불경한 마음을 도저히 가라앉힐 길이 없었다. 이미 불만은 그러지 않아도 허술하던 마음의 방파제를 넘어 저주의 늪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건축한 지 오랜 집이어서 계단도 좁고 가파르고 방도 작아요. 그러나 3층 방은 전망도 탁 트이고 광선도 충족하여 공부하는 분들에겐 도리어 편리할 거예요.”
 준호의 바로 눈앞에서는 청바지에 팽팽하게 감싸인 부인의 살진 엉덩이가 금방이라도 땅바닥에 떨어질 듯이 위태롭게 좌우로 씰룩거렸다. 준호는 보기가 민망하여 걸음을 멈추고 부인과의 사이를 두면서 네네 하고 외마디 응대만 했다.
 1층과 2층에는 좌우에 하나씩 누런빛을 발산하는 청동 장식 문이 위엄을 거느린 채 굳게 닫혀 있었다. 모르긴 해도 저 안에는 외부와의 철저한 차단을 필수로 했던 만큼의 귀중한 무엇이 숨겨져 있으리라. 청동문의 격리로도 모자라 방 안에는 또 금괴며 서랍이며 농에 숱한 자물쇠들이 잠겨 있을 것이고…… 인간은 이렇듯 자신과 타인과의 사이에 견고한 벽을 쌓지 않으면 방심하고 살아갈 수 없는 이기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3층으로 올라가니 현관 대신 퍽이나 넓은 로비공간이 나타났다. 1, 2층 청동문과는 달리 맞은편과 오른손 편에 각각 하나씩의, 허술해 보이는 네 쌍의 미닫이문이 달려 있다.
 “왼쪽 방은 한동안 비어 있었는데 한 달 전에 사람이 들었어요. 아버님께서 사용하시던 방은 여기 오른쪽이에요.”
 부인은 키로 자물통을 열고는 뿌연 먼지가 오른 장지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봉해둔 채 비어 있던 방이라선지 시큼한 곰팡이 냄새가 물씬 풍겨 나왔다. 안은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부인이 문지방에 부착된 버튼을 누르자 조명이 들어왔다. 그제야 오랫동안 공간을 잠식했던 어둠이 밀려나가며 싱크대와 간이찬장이 설치된 주방의 윤곽이 드러났다. 더 구석 쪽의 알루미늄 쪽문 유리창엔 「화장실」이라고 쓴 검은 붓글씨가 보였다. 아버지의 글씨일 것이라 생각하니 속이 꿈틀했다. 이 방 안의 구석구석에 묻어 있을 아버지의 흔적이 왠지 부담스러워졌다. 그리고 그 생각은 자연히 진옥의 눈물 젖은 얼굴을 떠올려 주었다.
 준호는 문지방에서 물러서 로비로 나왔다.
 저도 모르게 왼편 미닫이 방에 눈길이 쏠렸다. 이제부터 이웃이 될 사람이 살고 있을 방이라는 이유만큼 유혹의 부피도 팽창했다. 반쯤 열린 미닫이 사이로 보이는, 방 안에 들어찬 어둠이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까 1, 2층에서 보았던, 밖의 세상에 불신과 경계와 적의를 가진 철제문들과는 달리 막힘없는 개방을 통해 외계와의 영합을 지향하는 주인의 의지를 그 열린 문에서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자신 만의,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귀중하고 신비한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그 점이 우선은 준호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그러나 다시금 자세히 살펴볼수록 사람이 사는 방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어떤 무형의 공포와 신비가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느낌이 들어 준호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물론 아무런 확증이 없는 예감에 불과했지만 그 느낌은 왠지 불안하고 으스스했다.
 “저 방엔 어떤 분이 사십니까?”
 자신이 살 방보다는 옆방이 더 궁금했다. 방이야 집필과 숙박, 취사만 가능하면 그만이 아닌가. 그러나 이웃을 잘못 만나면 그거야 말로 골칫거리였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차츰 장지문틈으로 방 안의 집기들이 그 윤곽을 어슴프레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준호는 저도 모르게 한걸음 더 문 쪽으로 다가서며 방 안을 기웃거렸다. 그것이 결례인 줄 알면서도 손목을 당기는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첫눈에 보이는 것은 맞은편 벽 전체를 차지한 방대한 서가였다. 두터운 커튼을 드리운 왼쪽 창문으로 간신히 흘러든 외광 아래 서가가 무너질 정도로 빈틈없이 꽂혀 있는 장서가 그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던 우려를 조금은 가셔주었다.
 “걱정 마세요. 독신 여대생이 자취하고 있으니까요. 어서 안으로 들어와 보세요.”
 부인이 로비를 기웃이 내다보며 말을 던져왔다.
 독신 여대생이라?!
 여대생이 대학기숙사엔 안 가고 왜 자취생활을 하고 있는 거죠 하는 물음이 혀끝까지 나온 걸 목구멍으로 삼켜버렸다. 그것은 그 여대생의 사생활이었기 때문이다. 남이야 아파트 한 채를 세내어 산다 해도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미닫이문 앞에서 물러설 때 슬쩍 보인 것은 온돌바닥에 펴진 대로 있는 이부자리와 그 위에 나뒹구는 삼각팬티와 브래지어 그리고 확실히 보지는 못했지만 남녀의 나체사진 같은 것도 있는 듯싶었다. 로비 서쪽 구석에는 그녀가 사용하는 주방인 듯 싱크대와 찬장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설거지도 하지 않은 구질구질한 식기들이 산더미처럼 수북이 쌓여 있었다.
 무척이나 게으른 여잔가 봐!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몸을 돌리다가 허공에 낮게 맨 빨랫줄에 이마가 걸렸다. 빨랫줄에는 여자의 청바지며 스커트며 지어는 팬티와 브래지어까지 걸려 있었다. 준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며 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여자의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로비의 분위기는 미묘했다. 여대생이라니 신변의 위험같은 건 없을 거라는 생각에 안도하면서 부인을 따라 오래지 않아 자신의 공간이 될 오른쪽 방으로 들어갔다.
 주방 쪽 왼편에 또 하나의 미닫이가 있었는데 그 문을 통해야 살림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꼼꼼한 아버지는 그 방문에까지 자물쇠를 잠가 놓았다. 아버지는 자신만의 공간을 다른 사람에게 침해받지 않도록 확실히 선을 긋고 방어하셨다. 그런데 나는…… 옆집의 여대생은…… 진옥은…… 그것이 이 세상을 실속 있고 실수 없이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일 수도 있지 않는가. 하지만 아버지는 그 때문에 항상 긴장해야 하고 그래서 힘드실 것이다.
 미닫이문을 여는 순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새로운 젊은 주인을 환영이라도 하듯 방 안에 꽉 들어차 있던 한 무더기의 햇빛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눈을 부시게 했다. 아버지가 방 안에 가두어 놓은 것은 뜻밖에도 햇빛이었다.
 그러나 햇빛도 갇혀 있으면 빛을 잃는다는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아버님께서 부탁해서 도배를 새로 했어요.”
 부인의 설명을 들으며 방 안에 올라갔다.  하얀 벽지의 싱싱함과 싱그러운 갓풀 냄새가 감도는 실내는 자그마하나 아담하여 하나의 오아시스 같았다. 언제나 빈틈없는 완벽함을 보여줌으로서 자식 앞에 부모의 소신과 위엄을 고수하려는 아버지의 고집은 숨이 막혔지만 방 안의 분위기는 마음에 들었다. 거친 성미와는 달리 뭘 챙기고 꾸미는 데서는 놀랄 만큼 치밀함을 보여주는 아버지였다.
 거리로 향한 창문으로 삼단 같은 광선이 출렁출렁 흘러들었고 전망 또한 탁 트여, 봄꽃이 만발한 그림 같은 바깥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늑함이 좋았다.
 “어때요, 마음에 드시죠?”
 “네.”
 “그럼 공부 잘하시고 좋은 글 많이 쓰세요. 무슨 문제가 있으면 저한테 곧바로 전화 주세요. 금방 달려와 해결해 드릴 테니까요.”
 부인은 전화번호를 교환하고는 집을 나갔다.
 택배로 우송한 물건은 점심시간 전에 도착했다. TV나 냉장고 같은 건 아버지가 쓰시던 것이 있으므로 장만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릇들은 새것으로 사고 싶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집필 착수를 위해 컴퓨터도 한 대 장만해야 했다.
 오후에는 그릇상가에 들러 간단한 식기들과 주방용기들을 구입했고 용산전자상가에 나가 중고 컴퓨터 한 대를 구입해왔다.
 모든 일을 끝마쳤을 때는 멀리 서쪽 하늘 위로 붉은 저녁노을이 부챗살처럼 비껴 있었다. 피를 토해 놓은 듯한 석양에 물든 언덕 위의 동네 놀이터 정원수들은 붉다 못해 핏물이 일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언덕 위에 서서 경사면에 총총하게 들어앉은 소박한 주민지역과 멀리 즐비하게 늘어선 아파트들과 거리들을 누비며 끝없이 흐르는 차량의 물결을 보노라니 벌써 1년이나 흘러간 서울에서의 생활이 이제야 의미 있는 결실을 보게 되는구나 싶으며 감개무량해졌다. 박사학위도 중요했지만 그보다도 근 5년 동안이나 자료수집과 연구를 해온 「6. 25 참전자 실록」이 이제 한 사람만 더 만나보면 집필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한종수! 지금까지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아직도 살아 있다니 이게 웬일인가?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그는 정말 사람이 아니고 귀신일까?
 이틀 뒤 저녁에 그분을 만나 뵙기로 약속했다.
 또다시 진옥의 모습이 마음의 황폐한 들에 회오리바람처럼 일어섰다.
 진옥아. 왜 지금 이 순간 네가 더 그리워지는지 모르겠어. 넌 내 곁을 떠나갔지만 내 마음속에는 네가 항상 살아 있으니 오빤 어쩌면 좋으냐?
 준호는  담배 한 가치를 붙여 물었다. 그리고는 진옥의 추억에 침몰되려는 사유의 방향을 교정했다. 도시의 풍경을 이윽히 내려다보며 거리의 행인들을 시체로 만들고 서울 시내를 피바다로 만들었던 전쟁의 흔적을 찾아보려 했으나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화려한 건물들과 번화한 거리들과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에 말끔히 가셔져 있었다.
 그러나!
 준호는 그러나 라고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뿜어낸 담배연기가 시야를 가리며 6. 25 당시 서울 땅을 폐허로 만들었던 포연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전쟁의 핏자국은 환락과 평화만이 충만한 이 도시의 어딘 가에 분명 남아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저기 행복한 웃음을 짓고 거리를 거니는 연인들의 가슴 깊은 어딘가에도 분명 전쟁의 후유증이 시커먼 피멍으로 박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 흔적은 화려한 문명에 의해 가려져 있을 뿐이다. 진옥의 가슴에도 그런 피멍이 있었다.
 갑자기 배가 출출해졌다.
 준호는 언덕을 내려와 거리로 나갔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시장과  식당가가  있었다.
 뒷골목의 어느 조용한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불결한 비닐 막으로 영업 영역을 확보한 포장마차 안에는 낡고 때오른 장의자와 페인트칠이 흉하게 벗겨진 식탁 몇 개가 질서 없이 놓여있었다 시중을 드는  홀 아줌마도, 몇 안 되는 손님들도 포장마차처럼 구질구질했다. 준호는 요즘 지갑이 얇아 포장마차를 즐겨 찾았다. 아버지가 부모의 입장에서 경제적 지원을 자원했지만 완곡하게 거절했다. 가끔 중국어 개인지도나 번역원고료를 받아 용돈을 스스로 조달했으나 늘 쪼들려 돈 근심에 부대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이 원치 않게 아버지의 경제지원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했다.
 오징어볶음 한 접시에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낮에 많이 걸은 탓인지 술 한 잔을 마시니 식곤과 피로가 일시에 덮치며 전신이 나른해졌다. 오늘부터 준호는 비록 허술하고 작긴 하지만 공유가 아닌, 그에게만 속한 공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 속에서 인젠 마음 놓고 그가 다년간 몸소 대륙을 누비며 당사자들을 취재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준비해온 「6. 25 참전자 실록」의 마지막 자료정리와 집필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번 집필 작업은 준호의 27년 생애를 총 결산하는 의미 있는 계기가 될 지도 몰랐다. 그 작업을 직접 전쟁의 현장에 와서 진행할 수 있다는 것도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인젠 어서 빨리 한종수를 만나고 싶다. 할아버지 최덕구와 한종수! 그 두 사람은 그의 이번 저서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기본 줄거리이므로 쌍방의 상세한 자료파악이 필수조건이다.
 이번에 한종수를 찾는 데는 그의 지도교수인 남상민의 도움이 컸다. 그는 교수이자 평론가이고 시인이자 소설가였다. 또 현대사에 대해서도 박식한 지식을 갖고 았었기에 많은 전쟁참여자들은 알고 있었다. 그가 동우회, 친목회, 재향군인단체에 줄을 달아 어렵게 한종수를 찾아주었다.
 준호는 뜻밖에도 한종수가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처음에 그가 찾으려 했던 사람은 한종수가 아니라 그의 동생 종철이와 종학이었다. 왜냐하면 할아버지 최덕구의 회상에 의하면 한종수는 6. 25때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인민의 심판》을 받고 처단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종철이와 종학은 도리어 미국으로 이민을 가 찾을 길이 없었고 그 대신 생각지도 않던 한종수가 살아 있다는 믿기 어려운 정보를 우연히 입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한종수가 살아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할아버지 최덕구도 한종수가 살아있다는 준호의 전화를 받고는 완강히 불신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어. 내 눈으로 그놈이 죽는 걸 확인했단 말이야!”
 “그렇지만 분명 한종수란 이름입니다.”
 “같은 이름의 다른 사람일 수도 있잖느냐.”
 “만주 땅 강촌마을에서 살았었고 지주 한상권의 맏아들이라는데요.”
 “그럼 죽었던 놈이 다시 살아나기라도 했단 말이니? 귀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한종수가 살아있을 수 있단 말이냐.”
 할아버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종수의 생존사실을 강력하게 부인했다. 자신의 부인이 살아있는 한종수의 존재를 다시 죽음에로 회귀시킬 수 있기라도 하듯이. 한종수의 생존은 할아버지의 인생을 원점으로 회귀시키는 거대한 충격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얼레, 그녁이 머신디 날 경찰에 신고헌디유. 몰러 멀 몰러. 신고헐티문 혀 보시그랴 잉. 어여 혀봐유. 시방 신고혀라니껴. 내가 사램으 죽였대유 도둑질을 했디야. 무서울꺼이 없구먼유.”
 느닷없이 구석 쪽에서 술 취한 아가씨의 혀 꼬부라진 충청도사투리가 왁자하니 들려왔다.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날씬하고 옷차림까지도 세련되어 보이는 데 언동은 시정잡배처럼 거칠었다.
 “아가씨가 죄를 지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요. 빈번히 외상술만 마시고 몸 빼려고 하니까 그러잖아요.”
 마담은 귀찮은 듯 언성을 높였다.
 아가씨는 얼마나 마셨는지 서 있기도 힘이 든 듯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몸을 휘청거렸다.
 “얼라, 아짐씨두. 있을 꺼 가트문 왜 안 드려유. 없응께 그러는구먼유. 머시냐, 거시기 내 몸뚱아리라도 다 뒤져보셔유.”
 아가씨는 재킷까지 벗어들고 허공중에 휭휭 휘둘러댔다.
 마담과 홀 아줌마는 얼굴이라도 맞을까봐 두 팔을 내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이어 취객이 핸드백을 카운터 위에 뒤집어엎자 안에서 손거울이며 화장품이며 생리대며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아짐씨, 긍께 그녁이 갖고 싶은 거이 있으문 맘 대루 골라 가져유. 킬킬킬.”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카운터에 머리를 떨어트리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녀가 입은 하얀 스커트와 그 밑으로 뻗은 두 다리는 학의 종아리처럼 미끈한 균형미를 과시하고 있었다.
 “대학생이 이게 무슨 꼴이람. 술 마신 것도 모자라 주사까지 부리고. 또 신분증이나 맡기고 가세요. 나중에 음식값을 갚으면 돌려드릴 테니까. 그러나 이번이 마지막인 줄 알아요. 다음에 또 이러면 정말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대학생이라?!
 준호는 더욱 호기심이 동해 아예 술잔을 내려놓고 그쪽에 시선을 던졌다.
 언젠가 진옥이도 한 번 저 여대생처럼 만취한 적이 있었다. 먹은 걸 죄다 요리접시에 토하고 식당의 콘크리트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아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미친년이야, 미친년!”
 주위 사람들은 일제히 그녀를 매도했다.
 “살기 싫어. 죽고 싶어. 탐욕으로 썪고 병든 이 세상이 싫어!”
 그때 토해내던 진옥의 원망과 저주가 지금도 준호의 귓전에 쟁쟁하다.
 “얼레, 아짐씨, 멀 몰러. 대학생은 술 마시면 안 된닥카는 법이라도 있는 겨? 가져 갈래면 다라두 가져 가유. 이 휴대폰도, 저고리도, 어여유. 이깐 것들 없다구 이 비둘기가 죽을 줄 알어유.”
 아가씨는 그것들을 죄다 카운터에 내버린 채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준호는 이유도 없이 그녀의 그런 지지리도 못난 타락상이 멋지게 보였다. 현금계산에만 눈이 어두운 냉혹한 인간 세상에, 야유와 조소로 맞서는 초연한 초탈의 의지를 과시하는 모습이어서 돋보이는 걸까? 정말이지 준호도 가끔 마음이 울적할 때면 저 여대생처럼 세상에 심통을 부리고 괜히 시비를 걸고 싶었으나 몇 푼 안 되는 신분 때문에 억제하곤 했다. 진옥과 갈라졌을 때도 가슴속에 꿈틀거리는 울분을 (그것이 왜 자책감이나 후회가 아니고 울분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삭일 길이 없었다. 태산처럼 적치된 울분을 삭히느라 아흐레 낮과 밤을 대학기숙사에 박혀 수도승처럼 지내야 했다.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는 건 술 뿐이었다.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나면 거리 한복판에 나가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고 누군가의 멱살을 움켜잡고 시비라도 걸고 싶었지만 북경대학 중문학과 출신 대학원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꾹 참곤 했다. 대학생이라는 신분에 구차스레 구애받지 않고 인간이라는 조건 하나만으로 세상의 모든 질서에 당당하게 반항하는 아가씨의 모습이 그런 연유 때문에 다시 보이는 듯했다. 사람이 자신이 갇혀 있는 신분의 울타리 속에서 해탈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 스스로를 구속하는 멍에를 벗어던지고 자신에게서 자신을 해방시켜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꺼야. 어쩌면 그와 진옥인 해탈을 위한 혁명가인 저 아가씨에 비하면 무능한 질서의 포로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질서의 올가미를 목에 걸고 숨 막히는 질식 속에서 온갖 구속에 생명을 약탈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질서가 평화라면 전쟁은 기존질서에 대한 도전과 파괴가 아닐까? 저 아가씨는 자신을 얽매고 있는 질서에 전쟁을 선포하고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회를 향한 그녀의 불신과 저항은 다름 아닌 그녀가 도발한 전쟁이다. 진옥이가 세상에 던졌던 도전장처럼. 그러나 진옥은 그 전쟁에서 패배했다. 어쩌면 준호의 지원이 있었더라면 승리했을지도 모르나 준호는 비겁하게도 세상 앞에 무릎을 꿇어 진옥의 믿음을 배반했다.
 준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사변이 아니, 상상이 너무나 현실을 초탈하여 비약하고 있다는 느낌에서가 아니었다. 그 상상의 추상적 영역이 너무나 극한적이면서도 그만큼이나 현실과 밀착하고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아가씨는 세상을 증오하고 있다. 진옥처럼. 평화를 위해 전쟁을 도발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이밖에 다른 표현은 찾을 수 없는 것인가?) 전쟁의 후유증은 그 전쟁을 보지도 못한, 알려고도 하지 않는 후손들을 전쟁광으로 몰아넣고 있다……
 더는 구리터분한 공간 속에 하나의 어리석은 의문부호로 남고 싶지 않았다. 여대생이 던지고 간 원폭에 의해 포장마차 안은 이미 불바다가 되고 말았다.
 결산을 하고 도망치듯 부랴부랴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제는 이 평화로운 도시의 구석구석에서 전쟁의 흔적들이, 붉은 피멍들이 하나하나 그 윤곽을 드러내며 정체를 노출하기 시작했다. 저기 저 행인의 웃음소리는 어찌하여 입이 찢어질 듯 광란적이며 저기 저 여인의 얼굴에 시커멓게 드리운 우울과 수심은 어찌하여 병이 든 듯 초췌한가. 뚱뚱한 사나이는 어디로 저렇게 다급하게 걸어가고 있으며 아가씨의 옷차림은 어찌하여 필요 이상의 사치와 화려함으로 눈이 부실까? 그들은 한결같이 기존의 무언가를 향해 도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야말로 온몸이 육탄이 되어 현실과 이어진 이 거리에 투신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몇 잔 술에 취하기라도 한 건가?
 방금 전 미련 없이 소지품들을 버리고 포장마차를 나간 아가씨가 생각났다. 나도 그 아가씨처럼 거리 한복판에서……
 안 돼.
 촛불처럼 가물거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맥이 풀리려는 다리에 힘을 공급했다.
 집으로 가야지, 내 집으로.
 금시 온몸이 훈훈해졌다.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아직은 낯설지만 오로지 그가 오기만을 기다려주는 공간! 나는 왜 공간을 확대하고 싶지 않을까? 왜 그만한 공간에 이처럼 만족하는 걸까? 공간의 팽창을 위해 전쟁이라도 불사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 아닌가.
 밋밋한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는 그의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술 취한 아가씨가 짓밟고 지나간 그의 마음속의 질서는 이미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졌다. 사람은 술 한 잔에 무너질 때, 망가질 때 정말이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게 되고 그래서 행복을 느끼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두들 술을 찾는 건 아닐까? 망각하는 것으로나마 세상을 지워보려고.
 불현듯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소리에 고개를 쳐들었다. 용용차 한 대가 그의 뒤에 납작 엎드린 채 언덕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한낱 쇠붙이에 불과한 기계마저도 길을 점유하려는 탐욕으로 강열한 헤드라이트불빛을 내쏘며 사람의 기를 꺾는다.
 옆으로 비켜섰다. 결코 양보가 아니었다. 질서에 따른, 강박에 의한 순종이었다. 사람이 기계에게 길을 비켜야 하는 세상이니 어쩔 수 없었다.
 날은 아주 어두워졌다. 그처럼 화사하던 봄빛도 어둠 속에 자취를 감추었다. 듬성듬성 설치된 방범등 불빛은 골목으로 밀려드는 어둠의 홍수를 말끔히 쓸어내지 못한 채 비굴하게 타협하며 어스름한 길가에 너부러져 헐떡였다.
 3층 빌라에는 오로지 준호의 방에만 불이 꺼져 있었다. 무슨 도깨비불처럼 창문엔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그는 그 방이 어느새 정답게 느껴진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간신히 올라 3층에 이르니 뜻밖에도 여대생이 자취한다는 방 안에서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흐흑-흑! 흐흑-흑!
 짙은 어둠이 깔린 로비에서의 여자의 울음소리는 무슨 구미호의 괴성처럼 들려 소름이 오싹 돋았다. 어둠과 곡성은 어둠과 정적 못지않게 공포를 만들어 내기에는 충분한 원료임이 분명하다.
 미닫이문은 낮에 볼 때보다 더 열려 있었다. 전등은 켜져 있지 않았지만 창문을 가렸던 커튼을 열었는지 밖에서 흘러드는 외광에 방 안의 윤곽이 어렴풋이 드러나 보였다. 완전한 어둠이 아닌 그 희미함은 여자의 곡성만이 아닌 또 하나의 정체불명의 존재를 잉태하고 있었다.
 여자의 나체!
 준호가 발걸음을 멈추고 우뚝 멈춰선 것은 분명 둔부의 풍만하면서도 미끈한 윤곽이 뚜렷한 여자의 나신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가슴속엔 또 언제부터 숲이 있었으며 여인의 나체는 또 무슨 조화로 바람이 되어 그 숲을 와스스 설레게 하는지 준호도 몰랐다. 그 모습은 옷을 한 견지씩 벗어버리고 그의 앞에 알몸으로 다가서던 진옥의 나신을 느닷없이 상기시켜 주었다. 그때도 그의 가슴속엔 지금처럼 숲이 나타났었고 진옥의 나체는 서늘한 바람이 되어 그 숲을 설레게 했다.
 틀림없이 방탕한 여자야! 몸 파는 창녀인지도 몰라.
 번개같이 머리 속을 스치는 생각이 준호를 불쾌하게 했다. 괜히 이사한 건 아닌가 싶어 기분이 찜찜했다.
 혹시 아버지가 꾸민?
 아니야. 아버지가 이곳을 떠난 건 두 달도 넘고 이 여자는 이사 온지 한 달밖에 안 된다지 않은가.
 준호는 여자의 나신에 풀기 있게 접착된 눈길을 황급히 철회하여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전등을 켜자 아늑하고 단란한 방이 소박한 모습을 드러냈다.
 한잠 푹 자야지.
 잠시나마 알코올에 잠식되었던 자신의 이성을 되찾을 필요를 느꼈다.  
 피로가 몰려들어 몸을 씻을 생각도 포기하고 이불 속에 드러누웠다. 아버지의 체취가 물씬 풍겼다. 어렸을 때 아니, 여덟 살이 될 때까지도 준호를 품에 껴안고 자던 아버지라 그 체취가 너무나 익숙했다. 흙냄새, 땀 냄새, 담배 냄새, 술 냄새가 뒤엉킨 구수하면서도 시큼하고 매큼하면서도 약간 퀴퀴하기까지 한 냄새, 어렸을 때는 결코 거부감 같은 것은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냄새가 역겹다. 아니, 그 냄새가 싫어진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이불을 둘둘 말아 방구석에 밀어놓고는 지퍼백 안에서 가지고 온 담요를 꺼내 덮었다.
 자식이 아버지를 싫어하다니. 이건 천륜을 어기는 불경한 행위야. 그러나 싫은 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
 또다시 의문은 피곤을 등에 실은 채 벽 하나를 사이 두고 옆방에 누운 여자에게로 기신기신  기어갔다. 그러나 결국 호기심은 무거운 졸음에 깔려 무너지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변이 마려워 깨어난 준호는 화장실에 가려고 주방으로 나왔다가 느닷없이 문지방에 불쑥 나타난 웬 아가씨를 보고 깜짝 놀랐다. 머리카락은 자던 모습 그대로 헝클어지고 화장하지 않은 맨 얼굴이었지만 보기 드문 자연미를 가진 아가씨는 다름 아닌 지난밤 포장마차에서 보았던 그 충청도 아가씨였다.
 “새로 이사 오셨어요? 그러잖아도 혼자라서 적적했는데……”
 지난밤과는 달리, 충청도 방언이 아닌 표준말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네……”
 준호는 미처 대응수위를 조절하지 못해 엉거주춤 대답했다. 지금 앞에 서 있는 소박하고 순진하고 청신하고 깔끔한 이미지와는 달리 지난밤 포장마차에서 주사를 부리던 행위며 밤새 울던 일이며 나신이며 하는 모든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의식의 하늘을 구름처럼 흘러가며 그녀를 호의로 대하는 데 그늘을 던져주었다. 게다가 지금도 그녀는 낯선 남자 앞에서 달랑 속옷 한 벌만을 걸치고도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다.
 아, 그러나 너무나도 진옥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다.
 “제 이름은 전지은이예요. 모두들 비둘기라고 불러요. H여대 종교학과 학생이에요. 오빠는요?”
 “최준홉니다.”
 그녀의 몸에서 시선을 외면한 채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비둘기라는 그 별명도 꾀꼬리라는 진옥의 별명과 닮았다. 스스럼없이 오빠라고 호칭하는 것도 낯설지 않다.
 “오빠, 우리 언제 이웃이 된 걸 축하해 파티 한 번 열어요.”
 지은은 돌아서더니 깡충깡충 뛰어 로비로 건너갔다.
 “전 학교 가야 되니까 나중에 또 봐요.”
 옷을 갈아입으려는 모양 미닫이를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는 그녀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제 맘 편해졌어
           누구도 사랑하지 않기로 한 거야
           항상 상처뿐인데 구속 따윈 필요 없어……
           누굴 만나던 어디를 가든지 이젠 내 맘대로야……
           다가라, HEY BOYS!
           다신 내 삶을 사랑이라는 말로 가둬두지 마

 “오빤 엄정화 노래 좋아해요?”
 준호는 대답은 비웠지만 솔직히 지은이의 노랫소리가 더 듣기 좋았고 그 청순함도 엄정화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고 스스로도 놀랐다. 완벽함은 그 빈틈없는 완미함 때문에 사람을 긴장시키고 질리게 하는 면이 있지만 서투름은 사람을 편하게 하는 부드러움의 미가 있다. 그는 지금 지은일 지은이가 아닌 진옥이로 착각하고 있었다.
 잠시 뒤 준호가 가스렌지에 라면을 끓이고 있는데 로비로 향한 주방문이 벌컥 열렸다. 나들이 옷차림을 한 비둘기는 아까와는 달리 세련되면서도 단아하고 지적인 분위기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그녀는 마치도 변신의 마술사 같았다.
 “오빤 정말 멋져요.”
 한마디 남기고는 비둘기처럼 포르르 날아 층계를 내려갔다.
 “신비한 여자야. 진옥이 같으면서도 진옥이와는 풍기는 맛이 완전히 달라.”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점차 머리를 쳐들었다.
 대학생이 왜 기숙사에 들지 않고 자취방을 얻어 살까?
 왜 지난밤에는 대취하여 주사를 부렸을까?
 무슨 연유로 야밤삼경에 오열했을까? 그리고는 아침에는 금방 웃고 노래 부르고?
 끈질긴 호기심이 끝없는 의문의 바다에 빠져들며 준호는 전율했다.
 이건 아주 나쁜 습성이야. 강력반 수사관도 아니고. 여자면 여자, 대학생이면 대학생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그만일 거 아냐. 그리고 난 지금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야. 진옥이도 지은이도 그리고 아버지도 난 잊어야 돼. 한시라도 빨리 한종수를 만나보고 「6. 25 참전자 실록」 집필에 착수해야 돼. 피의 역사를 내 손으로……
 그래 한종수를 빨리 만나야 해.
 그는 어떻게 죽었다가 살아났을까?
 사람일까, 귀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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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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