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아들
장혜영
8장 악연
1
석준범은 꼭 열사흘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제주도야외촬영이 예정보다 앞당겨 끝났기에 가능했다. 스케줄대로라면 한 달은 걸렸을 것이다. 어쩐지 촬영기간 내내 집이 걱정되었다. 떠나는 날에도 아내 김정실은 외박 이틀째인데 귀가하지 않아 빈 집에 문만 덜컥 잠그고 나왔었다. 휴대폰은 아예 꺼놓고 있어 연락도 안 되었다. 새엄마와 놀러 다닌다는 게 김정실이 제공한 전부의 이유였다. 외제차 한 대에 완전히 넘어간 것이다.
새엄마 아니, 강복녀라는 여자가 정실에게 바싹 접근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자꾸만 불안해진다. 몸뚱이로 호색한인 아버지를 유혹해 이 집 안에 기어든 것도 심상치 않은데 인젠 아내에게마저 그 음흉한 마수를 뻗치려 하는 걸까?
집 안은 그의 예측대로 텅텅 비어있었다. 우편함에는 언제 수거했는지 우편물들이 꽉 차고 넘쳐나 바닥에까지 지저분하게 널려있었다.
방 안에 들어서자 오랫동안 비워둔 집에서만 나는 고약한 곰팡이 냄새가 가득했다. 오뉴월 염천인데도 창문마다 꽁꽁 걸려 있고 에어컨마저 작동이 꺼져 공기소통이 차단 된 실내는 밀폐된 불가마 속처럼 고열에 달아 있다. 방바닥에 두텁게 내려 앉은 먼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풀썩풀썩 일었고 양말바닥이 금시 새카맣게 되었다. 주방의 싱크대에 설거지를 하지 않고 내버려 둔 그릇들에 파리떼가 윙윙거렸고 살진 바퀴벌레들이 붉은 갑옷을 떨쳐입고 제 세상을 만난 듯이 여유 있게 엉금엉금 기어 다닌다.
도대체 얼마 동안이나 집을 비워두었기에 이 지경이지?
준범이 제주도로 떠나간 뒤로 한 번도 집에 들른 적이 없었던 지도 모를 일이다.
시장기가 들어 뭘 좀 입질하려고 냉장고를 열어 보았으나 그가 집을 떠나갈 때 사 넣어둔 우유와 소시지 그리고 음료 몇 개가 들어있을 뿐이었다. 우유는 이미 유통기한이 지나 먹을 수조차 없었다.
“이 사람이 정말 살자는 건가 말자는 건가. 주부가 이렇게 집 안 일을 외면해도 되냐고!”
준범은 화가 버럭 났다.
휴대폰을 꺼내 정실의 단축번호를 눌렀다. 촬영기간 내내 전화를 걸었지만 정실의 휴대폰은 언제나 꺼져있었다. 오늘이라고 다를 리가 없다. 역시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 샘으로 연결하오니" 하는 기분 나쁜 안내원 아가씨의 음성만 들린다. 이제는 그 소리만 들리면 짜증부터 난다.
준범은 모든 욕구를 포기하고 침실로 들어가 침대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폭탄이 터진 것처럼 먼지가 풀썩 일었다. 코를 틀어막고 일어나 창문커튼을 열어젖히자 커튼에서도 먼지가 풀풀 떨어지며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뽀얗게 형체를 드러냈다.
실내를 돌아다니며 이 방 저 방의 창문들을 죄다 열어놓았다. 에어컨작동만으로는 방안의 밀폐된 공기를 환기하기에는 역부족일 것 같아서였다.
시원한 공기가 흘러들자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막혔던 숨길이 열렸고 답답하던 가슴이 트인다.
모두들 석준범을 일밖에 모르는 일 미치광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건 그를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소처럼 일만 부지런히 했지 성과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야심작을 만들어보려던 드라마도 촬영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후원자 측의 일방적 해약으로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최근에 또 대본 하나를 겨우 골라 촬영에 들어가긴 했지만 그 역시 극본이 마음에 안 든다. 『연적戀敵』이라는 제목의 십 부작 드라마인데 그 내용 또한 불륜을 소재로 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왜 드라마작가들의 머리 속에는 이런 기괴한 사랑이야기들만 꽉 들어차 있는지 모르겠다. 연상여인과의 사랑, 유부남과 처녀의 사랑, 정략결혼……
정도는 드라마의 내용을 듣더니 단마디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포기해!”
그러나 준범은 PD가 아닌가. PD의 직업이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좋은 작품이 차례지기를 기다리다간 청춘이 다 흘러가고 말 것이다. 삼류드라마라도 찍어야 먹고 살 수 있고 회사에서 쫓겨나지 않을 것이다. 누가 노는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고 봉급을 주랴. 자기마음에 드는 작품만을, 예술가의 양심을 가지고 드라마제작을 하는 PD가 몇이나 되는가. 먹고 살기 위해 그저 그렇고 그런, 저속한 시청자들의 구미에나 맞는 삼류드라마를 찍고 있는 게 현실이다.
명예가 밥 먹여 주는가.
예술이 봉급을 주는가.
『인생에는 길이 없다』를 촬영할 때만 하여도 준범은 예술가의 양심을 생각했었고 명예도 의식했었다. 그러나 그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자 준범에게는 금시 먹고 사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극본이 저질적인 대신 탤런트 발탁이나 연기수준에는 각별히 신경을 써 결점 미봉을 시도하고 있었다. 돈을 들여 유명탤런트를 섭외했고(지역방송이라 섭외가 쉽지 않았다.)만족될 때까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촬영을 반복하여 완벽을 추구했다.
단 하나 3회부터 등장하는 가정부는 4회에서 사라지고 대사도 별로 없으므로 신인을 모집할 예정이다. 그런 소문이 어느 경로를 통해 새어나갔는지 벌써 수많은 연예인지망생들이 PD인 그에게 청탁을 넣어오고 있었다. 대개는 사진과 이력서들로 접수되었지만 그중 한 두 명은 서울로 불러올려 직접 최종면담을 할 생각이다. 김하늘이라는 아가씨는 사진에 나타난 인물도 빼어났지만 그의 계좌에 3천만 원이라는 거액의 사례금까지 미리 입금시켜 왔었다. 지방대학을 다니는 대학생이었지만 무용학과라니 몸매도 날씬할 것이고 예술적 감각도 풍부할 것이다. 단역 같은 것은 얼마든지 소화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계좌에 입금된 3천만 원이 어쩐지 꺼림칙하다. 예물수수사건으로 딱지가 붙는 날이면 그의 PD인생은 그날로 종을 치는 것이다. 하지만 단역만 시켜준다면 자연히 연예계에 들어서려던 그녀의 꿈이 이뤄질 것이니 김하늘도 입을 다물 것이 아닌가.
모른 척 그냥 삼켜버릴 것인가. 토해버릴 것인가.
그 삼천만 원 때문에 며칠 밤은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결국 이것은 불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등가교환이라는 생각이 어느 정도 그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런데 김하늘은 나의 계좌번호를 어떻게 알아냈을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시간이 지나 만회가 불가능해지기 전에 아내의 행방을 파악하고 새엄마와 휩쓸려 다니며 무슨 짓을 하는지 내막을 알아낸 다음 제때에 적절한 대책을 취해 광란을 제지해야 한다.
“드라마고 뭐고 일단은 잠시 접어두고 제수 씨 문제나 해결하는 게 좋지 않겠어.”
친구 정도의 권고도 참고해 볼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뿐이었다. 준범으로서는 당장 어떻게 할 묘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전화 통화마저 안 되고. 그렇다고 새엄마를 찾아가 따질 수도 없다. 준범은 새엄마의 얼굴을 마주보는 것조차 싫었다.
이 모든 화근의 불씨는 다름 아닌 새엄마이다. 그녀가 이 집 안에 나타나면서부터 가정의 평온은 깨어졌고 단란하던 부부의 사랑도 식어버렸다. 정실이 그에게 콘돔착용을 강요한 것은 남편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임신이 몸매를 망친다는 두려움 때문에 출산을 방비하기 위한 그녀 나름대로의 방법이었을 따름이었다. 콘돔 말고는 그들 부부의 사랑에 다른 장애물은 없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오늘의 이 불행의 시초는 어쩌면 콘돔 때문이었는 지도 모른다. 콘돔 때문에 그와 아내 사이에는 긴장과 갈등으로 틈이 벌어졌고 콘돔 때문에 아내에게서 만족을 얻지 못한, 적치된 쾌락을 다른 여자에게서 향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콘돔은, 물컹거리는 비닐자루 안에 그들먹이 들어차는 죽은 정액은 그의 성욕을 만족시켜줄 대신 도리어 미친 듯한 수욕을 자극했다. 투명하고 엷은 비닐 막을 넘어서지 못하는 불만과 안타까움은 준범을 완벽한 오르가슴을 향한 욕망에 전율케 했다.
정실에게는 몸매관리가 남편의 기분보다도 더 중요했다. 그녀의 최대의 관심사는 아가씨시절의 몸매를 가능한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이다. 시집을 왔으면, 결혼한 여자면 그녀의 몸매 또한 이미 그녀 혼자 만의 소유는 아니지 않은가. 남편의 것이기도 하고 시댁식구의 일원이기도 한 가족의 공유재산이다.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고 아이를 낳아 어머니가 되는 것은 결혼한 여자의 본분이다. 아버지는 손자를 기다리고 남편은 자식을 기다린다는 걸 그녀가 모를 리 없다. 번연히 알면서도 정실은 다른 사람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신의 사욕만을 챙긴다.
정실의 이런 이기적 행동은 늘 준범의 불만을 자아냈다.
“우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돼. 언제까지 윤락녀와 관계하듯이 콘돔을 사용해야 하냐고?”
준범은 한 두 번만 불평을 토로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남편의 정당한 요구였는데도 아내의 거절로 인해 불평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꼭 아줌마로 만들어야 맘 편하겠어. 난 아줌마가 되는 게 싫어.”
“아줌마가 되는 게 싫으면 결혼하지 말았어야 되는 게 아니야.”
“결혼했다고 꼭 아기를 낳고 아줌마가 돼야 한다는 편견을 버려. 난 자식의 존재보다는 나 자신의 존재에서 의미를 회득하고 싶어. 나 자신을 향유하고 싶다고.”
“그건 이기주의야.”
“자식을 보겠다는 욕심은 아버님이나 당신의 이기주의가 아닌가. 며느리나 아내가 뭐 아이 만드는 도구도 아니고.”
피가 목구멍까지 역류해 그들먹이 차올랐다. 그녀와 더 입씨름을 하다간 주먹이 저절로 실수를 저지를 것 같았다. 무례하고 치사하고 막돼먹은 인간이라는 누명까지 뒤집어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날도 그렇게 홧김에 자다말고 밤중에 집을 뛰쳐나왔었다. 스트레스가 쌓일 때면 늘 찾곤 하던 집 근처의 삼겹살구이 집으로 들어갔다. 자정이 가까워 영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지만 면식이 있는 손님이어선지 주인은 퇴근시간마저 미루고 안으로 받아들였다.
얼굴이 익은 홀 아가씨가 물 컵을 들고 오며 상냥한 표정을 짓는다. 언제 보나 시골티가 다분한, 순박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고향을 물은 적도 이름이나 나이를 물은 적도 없지만 만날 때마다 누이동생 같고 고향의 소꿉시절 친구처럼 폭폭 정이 든다.
“몇 분이세요?”
“혼잡니다.”
“뭘 드릴까요?”
어느 손님에게나 그렇게 대하는지 아니면 준범에게만 각별한 환대를 베푸는 지는 몰라도 아가씨의 태도는 유난히 살갑고 친절하다. 그냥 보아 넘기기에는 부담스러울 만큼 은근하고 풀기 있는 정마저 발려있다. 그러나 저런 모습이 서빙하는 아가씨들의 직업적인 표정이겠지 하고 무심하게 시선을 지나쳤다.
“삼겹살 이인분요.”
휴대폰을 꺼내어 정도에게 전화를 걸며 대답했다. 정도는 밤중이고 새벽이고 전화 한 통이면 곧장 달려 나온다.
“술은요?”
“소주 두 병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정도의 휴대폰은 외출중인지 배터리가 나갔는지 꺼져 있다. 집전화도 불통이다. 그제야 며칠 전에 정도가 사진촬영차 지리산으로 내려가겠다고 말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차라리 잘 됐다. 오늘은 혼자서 마셔 보자.
그렇다고 이미 주문한 음식을 반환할 수도 없었다.
“아기씨도 여기 오시죠. 손님도 없는데 나랑 같이 한 잔 합시다.”
장난기가 발동해 농담 한마디 건넨 것인데 뜻밖에도 아가씨의 반응이 민감하다.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식탁에로 다가와 앉는다. 아직은 도회지의 짠물에 푹 절지 않은 풋풋한 시골맛 그대로다. 청초하고 담백하고 어눌하기까지 한.
“제가 마셔도 돼요?”
“그럼요. 이 잔에 술 한 잔 따라주시렵니까?”
술 따르는 아가씨의 손가락이 시골여자답지 않게 매끈하다. 아직 손끝에 흙을 묻혀 보지 않은 책상물림이라서 그럴 것이다. 지방대나 졸업하고 취직이 어려우니까 상경하여 식당일을 하는 아가씨들을 준범은 많이 보았다. 그래서 각별한 호기심은 없었지만 그냥 심심풀이삼아 대화를 엮어나갔다.
“실례지만 고향은 어디죠?”
“전라도 담양군이에요.”
그리고 보니 그녀의 억양에 전라도 어투가 짙음을 느꼈다.
“대학에서 뭘 전공하셨나요?”
준범이 술병을 쳐들자 아가씨는 권하기도 전에 눈치 빠르게 술잔을 쏙 내민다. 그러나 얼핏 사장 쪽에 눈길을 준다. 사장은 모든 것을 손금 보듯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능청스럽게 외면한 채 시선을 TV브라운관에 주고 있다.
“걱정 말고 술 한 잔만 마셔요. 사장님은 나랑 잘 아는 사이니까요.”
“미술학과요.”
“그래요. 나랑 같은 예술분야네요. 혹시 연예계에도 관심이 있습니까?”
발탁하려거나 연예계에 진출시키려는 의도에서 꺼낸 말은 아니었다. 그냥 하다보니 나간 말이다.
“선생님께서 PD라는 말씀은 들었어요.”
“그래요. 난 말한 생각이 안 나는데”
“사장님한테서 들었어요.”
술 한 잔을 금방 마셨는데 늦은 술손님 세 사람이 식당 안에 들어섰다. 아가씨는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으러 간다. 눈결에 보려니 그녀의 탄력 있는 엉덩이는 제법 빵빵하고 가슴도 단추가 떨어질 듯 탱탱하게 여물었다. 스커트 아래로 쭉 뻗어 내린 두 다리는 그렇게 날씬하지는 못해도 희고 탐스러운 건강미가 비옥하게 흘렀다.
'문학 > 소설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52 (0) | 2010.07.20 |
---|---|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51 (0) | 2010.07.12 |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49 (0) | 2010.06.28 |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48 (0) | 2010.06.22 |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47 (0) | 2010.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