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아들
장혜영

                                     


                                                                   2

 

 8월초까지는 그래도 전세가 인민군에게 유리했지만 중순부터는 전황이 역전되면서 사단은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8월 11일에 인민군 766부대는 포항시가지를 점령하고 안동12사단은 무방비상태의 기계를 점령했지만 빼앗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치열하게 반복되었다. 인민군의 일방적 공격은 우세한 적 병력과 화력에 저지당하고 소모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UN군의 낙동강방어선구축과 제공, 제해권의 상실, 보급선 신장, 예비부대 부족 등의 악재들은 인민군의 전과 확대를 저해하는 근본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사단은 국군수도사단과의 기계지역탈환전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은 뒤 병력손실을 766부대흡수와 2000명 신병으로 충원했으나 12000명 정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폭격 때문에 밤에만 군사행동을 해야 하는 최악의 조건에서도 9월 4일 새벽에는 안강시가지를 점령하고 9월 4일에는 경주를 향해 남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9월에 접어들면서 사단의 진격은 UN군의 낙동강방어선 앞에서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UN군의 병력과 화력은 인민군보다 우세했다. 반대로 인민군은 병참선이 길어진 데다 폭격으로 도로와 교량들이 파괴되어 군수품 보급이 중단되며 식품, 약품, 탄약, 포탄, 무기수송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UN군은 북한지역의 진남포, 길주, 고원, 오로리, 나진, 청진, 신안주, 사리원 등지의 조차장과 원산, 평양의 철도수리공장 그리고 주요교량들과 도로들을 폭파했을 뿐만 아니라 서울과 낙동강전선 사이에 있는 백여 개의 교량과 철도, 도로들을 파괴했던 것이다.
 최전선부대들은 당지에서 자체로 군량을 조달하여 급식을 해결해야 했지만 하루 한 끼의 주먹밥도 차례지기가 힘들어 늘 굶주림에 시달렸다. 게다가 탄약보급이 끊긴 자동총과 소총은 무용지물이 되어 싸움판에서 적이 버린 M1소총을 주어서 사용해야만 했다. 약품은 고사하고 붕대마저 구할 길이 없어서 부상병들은 골짜기의 후미진 곳에 버려진 채 죽을 날만을 기다려야 했다. 그들을 후송할 차량마저 없었던 것이다. 장교가 아니고는 사단야전병원으로 후송하지 않고 그냥 방치해 두는 수밖에 없었다. 장병들은 굶주림과 무더위 속에서 탈진했고 부대의 사기는 일락천장 했지만 전선사령부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공격명령이 하달되었다.
 의용군으로 입대한 남쪽 출신 군인들은 부대를 탈출하는 사건마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단은 포항, 안강 남쪽지역에서 UN군과 대치한 채 소모전을 거듭할 뿐 국면을 타개할 별다른 수가 없었다.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아. 대세가 기운 것 같다고. 안 그래, 박 동무?”
 하층지휘관의 부족으로 소대장에서 중대장으로, 중대장에서 대대장까지 승진한 김성철은 박병술의 어깨를 툭 친다. 박병술은 신병이어서도 그랬지만 남쪽 출신이라 분대장에서 한 계급도 더 승진하지 못했다. 『팔로군』출신인 김성철이와는 비교도 안 될 일이었다. 그런데도 대대장은 자신과 성미도 비슷하고 사내다워 마음이 통하는 박병술에게 각별한 친절을 베풀었다.
 “글쎄요. 부산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쩐지 조짐이 이상해. 속전속결작전이 실패하고 지연전, 대치상태로 들어간다면 손해 보는 건 우리 쪽이지. 우리 후방이 텅텅 비었다는 게 불안하단 말이요. 적들이라고 그걸 모를까. 알기만 하면 그 놈들이 이 허점을 놓칠 리가 없겠지. 만약 미국놈들이 우리 후방을 급습한다면 우리 인민군대는 꼼짝달싹 못하고 모래성처럼 무너질 거요.”
 “설마 그런 끔찍한 일이야 벌어지겠습니까.”
 “전쟁의 승패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거요.”
 그 말에 박병술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인민군이 패전하면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동료의 총에 맞아 죽거나 포로가 되어……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도 대세는 이미 국군에게로 기운 것 같았다. 전세를 만회하기에는 너무나 늦었다는 감도 들었다.
 “아무래도 냄새가 이상하단 말이오. 그렇지?”
 김성철 대대장은 어느 날 기습공격에서 돌아오자 느닷없이 박병술의 옆으로 다가와 슬쩍 한마디를 던진다. 말이 대대장이지 그가 인솔하는 대대원은 겨우 30여 명에 불과했다. 여전히 소대규모이다.
 그는 미군이 투하한 고기통조림 한통을 터트려 박병술에게 넌지시 건넨다. 그의 가슴에는 미군무기인 M1소총이 안겨있었다. 중국에서 입북할 때에는 장개석군에게서 노획한 미제무기를 휴대한 채 들어왔지만 전쟁 전에 소련제무기로 교체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또 탄약 공급이 중단되어 미제무기를 전쟁판에서 주워 쓰고 있는 것이다. 군복수송도 끊어져 군관이나 병사나 할 것 없이 의복들이 남루했다. 부대의 사기와 규율, 무기와 복장 등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변수이기도 하다.
 “무슨 냄새 말입니까?”
 “연대장 이상 군관들이 보이지 않잖소.”
 “글쎄요. 본 지가 한참 된 것 같은데요.”
 “형세가 불리하니까 다들 뺑소니 친 거라고. 뭔가 불길한 낌새를 채고 저들만 줄행랑을 놓은 거지.”   
 “설마요.”
 박병술은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인민군대는 인민을 위한 군대이다. 노동당원과 지휘관은 가장 어려운 곳에 앞장서는 군대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 해방군출신들은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소. 해방군에는 그런 비겁한 자들이 없다고.!”
 해방군이란 백성들이 통칭 『로빠루』라고 부르는, 중국에서 입북한 군인들이다.
 “개새끼들! 군관이라고 호령만 떵떵 치고 거들먹거릴 줄밖에 모르는 그런 유치한 자식들 때문에 인민군의 명예가 팔린다고. 내 눈에 발각만 돼 보라지. 당장 이 총으로 대갈통을 박살내 버릴 거요. 명령에 죽고 사는 게 군대인데.”
 “대대장 동지. 누가 듣기라도 하면……”
 “듣겠으면 들으라지. 이래 죽으면 어떻고 저래 죽으면 어때. 빌어먹을 놈들! 병사들은 죽음 판에 내버리고 저들만 살겠다고 나 몰라라 도망치다니. 비겁한 새끼들!”
 분노로 치를 떨면서도 우리도 살길을 찾아 어서 도망가자는 말은 안했다. 그야말로 사명감에 충직한 진정한 군인이었다. 박병술은 그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 충정심에 적군이고 아군이고 무슨 상관이 있으랴.
 큰말고개전투에서 헤어진 민병기 소대장님이 연상된다. 하나는 국군, 하나는 인민군. 서로 적대진영에 있지만 박병술의 눈에는 두 사람 다 돋보인다. 더구나 박병술은 지금 적군, 아군의 식별에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적군, 아군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냥 국가와 이념 차이일 뿐일까? 그 밖의 다른 의미는 없을까? 같은 민족, 같은 남자, 같은 젊은이, 같은 인간이라는 개념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인지. 양심과 사명감, 정당성과 명분, 생명의식 같은 개념들은 또 무슨 작용을 하는가?
 전투는 갈수록 치열했고 사상자는 날마다 급증했다.
 호랑이 중대장으로 불리던 최 중위가 전날 밤 야간기습전에서 복부에 중상을 입고 대대장의 등에 업혀 진지로 돌아왔다. 싸움에서는 누구보다 용감했지만 불같은 성미 때문에 자주 상급지휘관들과 정면으로 충돌해 승진을 못한 최 중위였다. 그래서 하급인 김성철 소위가 직속상급인 대위로 승진할 때까지도 그냥 중대장의 자리에 죽치고 앉아있던 최 중대장이었다.
 “박 동무. 중대장 동지를 날 밝기 전에 사단야전병원으로 호송하시오. 가는 길에 이 양키놈도 사령부에 압송하고.”
 김성철 대대장은 박병술을 거들떠 보지고 않았다. 대대에 남은 병력은 겨우 15명뿐이었다. 진지에 남는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대장 동지.”
 “아무 말도 말고 가라면 가!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애써 외면하는 대대장의 눈시울에 맑은 이슬이 반짝였다.
 박병술은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너라도 도망쳐. 도망쳐서 살아 남으라고!
 대대장의 얼굴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대대장 동지. 죽지 말고 꼭 살아 남아야 합니다.……”
 손을 꽉 부여잡았으나 목이 메어 말이 더 나가지 않았다. 군례를 붙이고 돌아서려니 쏟아지는 눈물이 앞을 가려 길이 보이지 않았다. 영양실조로 얼굴이 누렇게 뜨고 수염이 텁수룩한 사나이, 먼지와 포연에 그을린, 엷은 가죽만 남은 초췌하고 여윈 모습의 대대장! 그를 죽음의 전쟁터에 내버리고 떠나려니 발걸음이 천근 같이 무거웠다.
 사단사령부는 김성철 대대장의 예측처럼 후방으로 더 옮겨져 있었다. 경상자들에게 후송을 책임 지워 최 중대장을 야전병원으로 보낸 후 박병술은 홀로 미군장교를 압송하여 사단사령부를 찾아 북쪽으로 행군했다. 낮에는 폭격 때문에 산발을 타고 가야 했다.
 미군장교는 그냥 말을 거는데 뭐라고 하는 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파란 눈동자에 노란 머리카락을 가진, 키가 훌쩍 큰 장교가 측은해 보였다. 포로! 군인의 가장 큰 치욕은 포로가 되는 것이다. 차라리 죽기보다 못하다. 남의 나라를 도우러 왔다가 그는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운명에 감지덕지 할른 지 몰라도 눈 앞의 가련한 모습을 보니 그를 위해서도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쪽이 보기 좋을 것 같았다.
 북쪽을 바라고 걷고 또 걸었지만 사단사령부는 종시 나타나지 않았다.
 미군장교를 북행 도중 풀어주고 부대를 탈출하여 은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미군정찰기가 산속에 뿌린 삐라를 보고나서였다.

 인민군 장병들이여!
 당신들은 이미 패망하였다. 김일성괴뢰정권은 멸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 UN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서울탈환전투에 뛰어들었다……

 인천상륙작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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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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