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아들
장혜영
대대와 대치했던 국군 8사단 16연대는 인민군의 맹공에 저항도 별로 못해보고 급급히 21연대의 방어지역인 옥달봉쪽으로 퇴각했다. 21연대, 10연대는 사단의 공격을 저지시켰지만 16연대진지는 힘없이 돌파되어 국군의 방어에 불리한 구멍이 뚫리게 되었다.
“동무들은 처음 전투에 참가했는데 참 잘 싸웠습니다. 특히 박병술분대장 동무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으로 용감하게 소대의 선두에서 적진을 향해 돌격함으로써 분대원 동무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김성철 소대장의 칭찬에 박병술은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난감한 기분이었다. 어느 쪽이 아군인가? 박병술에게는 이 문제조차도 명확하지 못한 상태이다. 인민군대에 몸을 담고 있는 건 결코 인민군에 귀순했거나 전향했거나 그들의 이념을 받아들여서가 아니었다. 그냥 살아남기 위하여 잠시 몸을 의탁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런 의탁에는 인민군대가 최종승리자가 되었을 경우에 얻게 되는 확실한 생명보장의 유혹 같은 것도 없지는 않았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확실한 선택은 없었다.
싱겁게 눈먼 총질만 한바탕 난사하고 끝나버린 하루 동안의 전투. 사상자 한 명 없이 얻어진 승리였다. 승리란 정말 이렇게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연대의 선두부대인 1대대에서는 적군과의 화력전에서 사상자가 생기기도 했다.
“내일은 더 큰 전투가 예상되는 만큼 동무들은 모두 잠을 푹 자두어야겠습니다.”
지휘관의 명령대로 잠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는다. 정말 이대로 인민군이 안동을 『해방』하고 포항을 점령하고 부산까지 일사천리로 밀고 내려간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 인민군에 그냥 남아 있어야 되는가.
밤은 고요와 정적 속에 깊어갔다. 전쟁터의 밤은 더 고요하고 어둠도 더욱 짙어 보인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가까운 어딘가에서 풀벌레소리까지 구성지게 들린다. 내수천이 흘러가는 여울물소리가 마치도 피아노소리 같다. 공기 중에는 아직도 매캐한 화약 냄새가 떠돌았지만 하늘에는 뭇별들이 다투어 반짝인다.
어둠을 타서 국군진지로 도망칠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박병술을 긴장시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들 깊은 잠에 곯아 떨어져 있다. 여기서 적진과의 거리는 불과 500m도 되나마나하다.
그런데 아군이 인민군복을 입은 나를 용서해줄까. 원해서든 강박이든 노동당에까지 가입한 줄을 알면 절대로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결국 우군의 총에 맞아죽지 않더라도 인민군의 공격에 부산까지 밀려가 그들의 손에 잡혀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될 것이다. 변절자로.
이제 나는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운명이 되었단 말인가.
이념이란 무엇이고 사상이란 또 무엇인가. 반동이란 무엇이고 빨갱이란 또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사람은 두 진영으로 갈리어 서로를 죽여야 하는가. 화목하게 서로 어울리며 살 수는 없는가. 두 진영 중 어느 쪽에도 줄서지 않을 수는 없는가.
이튿날에는 새벽에 공격이 시작되었다.
사단주력은 국군 21연대 방어선에 투입되고 기타 소부대들은 좌우 측방 공격으로 협공하게 함으로서 적군을 포위하여 일망타진을 시도했다. T-34탱크의 공격 앞에서 대전차화기인 3,5로켓포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인민군공격부대는 이날은 뜻하지 않던 미공군기의 국군에 대한 공중지원으로 무차별 폭격까지 무릅써야 했지만 공격을 멈추지는 않았다.
박병술은 폭격을 피해 웅덩이를 엄폐물로 잠시 엎드려 있는 동안에도 포화의 공포감보다는 미군의 참전으로 인한 전세의 반전이 우려되었다. 그로서는 솔직히 인민군의 승리가 더 유리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미군의 참전으로 만에 하나라도 국군이 열세에서 우세로 반전한다면……
그건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때가 되면 인민군에서 탈출하여 국군에 넘어가기도 늦은 시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인민군의 참패는 곧바로 박병술의 죽음과 이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미공군기의 폭격에 인민군의 공격이 좌절되고 퇴각하고 패전하고……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양심이고 이념이고 사명감이고 죄다 버리지 않았는가. 중도에서 생존욕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동무들. 돌격 앞으로! 양코배기의 비행기에 겁먹지 말라. 인민군대의 앞길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나를 따라 앞으로!”
박병술은 웅덩이 안에서 벌떡 뛰어 일어났다. 엄폐호를 뛰어나와 맹호처럼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가슴에서 자동총이 세차게 진동했다.
따따땅- 따따땅- 따따따따당-
요란한 연발사격소리와 함께 총신은 금방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적탄이 귓전을 휙- 휙- 스쳐지나갔으나, 폭격기에서 투하된 폭탄이 주변에서 거대한 폭음을 내며 폭발했지만 박병술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앞으로만 내달렸다. 그는 자신의 몸뚱이가 허공중에 둥둥 뜨는 듯한 착각 속에 빠져들었다. 폭음도 총성도 고함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감도 두려움 같은 것도 느끼지 못했다. 시간은 그의 앞에서 멈춰 섰고 공간은 그의 앞에서 의미를 상실했다. 귀에 들리는 건 오로지 자신의 외침소리뿐이었다.
“돌격! 돌격!”
빗발치듯 날아오는 총탄도 그를 피해갔다.
진작 이렇게 죽을 각오를 했더라면 비굴하게 노동당에 가입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오명을 남기며 의용군에 입대하지도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내가 노동당에 입당하고 의용군모집에 응한 이유는 그것뿐이 아니다. 그들이 선전하는 공화국의 정책이 노농대중을 위한 것이고 인민군대의 사명이 지주, 자본가정권을 때려부수고 『인민이 주인 된 나라』를 건설한다는 데 공감된 바도 없지 않았다.
토지는 밭갈이 하는 농민들에게!
주권은 노동자, 농민들에게!
인민 모두가 잘 사는 지상낙원의 나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어느 구호도 마음을 움직이기에 손색이 없는 충격적인 것들이다. 동경과 공감은 결국 참여에로 이어진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의도가 있은 것은 아니었다. 적들을 피해 산속에서 배회하다보니……
복금이도 그의 인생전환에 어떤 역할을 했다면 했을 것이다. 복금이와 갈라져서도 가끔은 그녀 생각을 했었다. 꿈에서도 종종 만났다. 늑대처럼 성질 한 번 사납던 민병기 소대장님도 잊혀지지는 않는다.
8월 1일 새벽. 국군의 10연대와 21연대방선은 인민군의 공격에 무너지며 안동시기지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날이 밝을 무렵 철수하던 국군은 시가지 남쪽 안동교를 폭파하고 광음동쪽으로 퇴각했다. 교량폭파로 미처 낙동강을 도하하지 못한 부대는 인민군의 추격을 피해 여울을 타고 도하하느라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한편 인민군의 포위망을 뚫고 뒤늦게야 퇴각한 16연대는 부대 성원 대부분이 신병들로 구성된 지라 혼란상태에 빠져들어 지휘체계마저 마비된 채 낙동강 북안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지휘체계가 상실된 연대는 아수라장속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는 참패를 당하고서야 가까스로 200여 명의 잔존병력만 낙동강을 도하해 사단주력과 합세했다.
낙동강북안포위전에서 박병술이 속한 소대는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공중폭격으로 침체되었던 공격을 선두돌격으로 국면을 반전시키는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수많은 국군장병들을 살상, 포로하기도 했다.
박병술은 파괴된 안동교 교각부근에서 겁에 질려 갈팡질팡하는 적군을 한 번에 십여 명이나 생포했다.
일부는 살려달라고 강변자갈바닥에 무릎을 꿇고 넙죽넙죽 절을 하면서 애걸했다.
“장관나리. 제발 목수만 살려주십쇼. 집에 앓는 엄니가 계신디.”
“전 자원병이 아니라 징병으로다 끌려 나왔어유. 아직 총 한 방 쏴 보들 못혔구먼이라유. 불쌍한 농사꾼이여유. 집에 돌려보내주면 농사나 지을 거구만유.”
“목숨만 살려주면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하겠습니다.”
박병술은 군인의 체통마저 구기는 그들의 비굴한 몰골이 도리어 가증스러웠다. 개처럼 구걸한 목숨을 유지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당장 자동총을 휘둘러 죄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민병기 소대장님이 지금 이 꼬락서니를 보았다면 모르긴 해도 즉결처분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자신도 이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그들은 무기력하게 투항은 했어도,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군인의 자존심을 버리긴 했어도 조국을 배반하거나 신념을 배신하지는 않았다. 노동당에 가입하지도 않았고 인민군대에 입대하여 동료의 가슴에 총부리를 돌려대지도 않았다. 목숨을 지탱하기 위해 그들이 어느 정도까지 비굴해질 수 있는지는 몰라도, 박병술의 전철을 다시 밟을 지는 몰라도 적어도 아직까지는 국군복장을 입고 있다.
얼핏 보아도 그들의 대부분이 전쟁의 참혹함을 겪어보지 못한 신병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 중 소위계급장을 단 장교는 박병술을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길로 매섭게 쏘아볼 뿐 잔명 같은 걸 보존하려고 굽실거리지 않았다. 국군장교는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은 듯 군복바지가랭이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야, 이 새끼야! 이 악질 반동새끼 같은 놈! 누굴 감히 노려보는 거야?”
뒤늦게 달려온 김성철 소대장이 국군장교의 이마를 향해 군홧발을 날렸다. 퍽! 소리와 함께 장교는 뒤로 벌렁 넘어졌지만 다시 상체를 일으키며 소대장의 얼굴을 향해 가래침을 퉤 내뱉었다.
“악질 빨갱이새끼!”
국군장교의 이마에는 커다란 군화자국이 찍혀 있었다. 김성철 소대장의 볼에서는 끈적끈적한 액체가 껌처럼 질질 늘어났다.
“이 종간나새끼가! 자기 죄를 회개할 대신 반항을 해. 확 그냥 갈겨버리고 말까부다!”
김성철 소대장은 분통을 참지 못하고 무작정 장교를 군홧발로 짓밟아댔다. 그런데도 장교는 이를 악문 채 신음소리 한마디 안 낸다.
“네놈들과 끝까지 싸우지 못하고 잡힌 게 한이다. 저 어리석은 놈들 때문에……”
장교는 강변 여기저기에 널려 목숨을 구걸하기에 여념 없는 신병들을 원망어린 눈길로 둘러보았다. 그들의 무질서를 막기에는 장교로서도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박병술은 저도 모르게 민병기 소대장님이 생각났다. 마음속으로 장교의 강인한 군인정신에 존경심이 생겼다.
개보다 못한 목숨을 구걸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장교의 군인정신이 감동을 준다.
나는 왜 이 장교처럼 하지 못했을까. 그까짓 목숨이 몇 푼이나 된다고.
“이승만 반동정부를 위해, 지주 자본가들을 위해 개처럼 목숨을 바치느니 차라리 떳떳하게 인민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총부리를 돌리라우. 보라우. 당신들 앞에 서 있는 이 인민군대분대장동무도 원래는 당신들처럼 남반부인민이었소. 그러나 당신들처럼 괴뢰군이 되어 인민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지 않고 인민군대에 입대하여 공화국을 위해 싸우고 있지 않슴메.”
김성철 소대장은 갑자기 박병술의 어깨를 툭 친다.
박병술은 몸 둘 바를 몰라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장교의 시선과 마주칠까 봐 두려웠다.
“내가 보기엔 그 사람도 네놈들의 악선전에 넘어간 것이지 진심으로 빨갱이가 된 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국민이라면 누구나 조국에 대한 애국심이 있을 것이고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신념이 있다는 걸 너희들은 알 리가 없지. 언젠가는 저 사람도……”
“이 악질 반동새끼야! 종간나새끼야! 네놈을 당장 죽여 버릴 테다!”
김성철 소대장은 광분하여 길길이 날뛰며 마구 악담을 퍼부었다. 총개머리로 사정없이 장교의 머리며 어깨를 난타했다.
“그만하십시오. 그러다가 죽겠습니다.”
박병술이 다급히 소대장을 제지했다.
“뒈지면 말라지. 반동새끼! 어차피 죽여 버려할 놈인데 차라리 여기서 총살해치워!”
“인민군대는 포로를 우대하지 않습니까.”
“이놈은 악질반동새끼니까 연대지휘부에 압송해도 적들의 비밀을 토설하지 않을 것이오. 쓸모가 없으니까 죽여 버리자는 거요.”
“안 됩니다.”
박병술은 단호하게 소대장을 막아 나섰다. 자신도 왜 견결한 태도를 보였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쩐지 국군장교를 구해주고 싶었다.
“왜, 분대장 동무래 남반부사람이라고 갑자기 동정심이 생기라도 한거요?”
“그런 게 아니라 군대에는 포로정책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제네바협정이……”
“전쟁판에서는 상황에 따라 즉결처분할 수도 있단 말이요.”
“이 국군장교는 대항하다가 잡힌 것도 아니고 무저항 상태에서 포로가 된겁니다.”
“그렇다고 투항한건 아니잖소. 아직도 자신의 죄를 승인하지 않고 악질적으로 나오는 걸 박 동무도 보고 있지 않소. 다른 포로들과는 완전히 다른……”
“그건 장교니까 아무래도……”
“짜식! 오늘은 분대장 동무의 덕이 많은 줄 알아. 이제부터라도 고분고분 묻는 대로 비밀을 털어놓으면 관대하게 봐줄 테니 어서 일어나. 이놈을 연대부로 끌고 가.”
“나한테서 국군의 군사비밀을 알아내려고? 꿈도 꾸지 마라. 죽으면 죽었지 군사비밀은 털어놓지 않을 것이다.”
“이 새끼가 정말 뒈지려고 환장을 했나!”
김성철 소대장이 다시 덮쳐드는 걸 몸으로 막으며 박병술은 국군장교를 빼돌려 뒤에 서있는 전사에게 맡겼다.
“얼른 연대부로 호송하시오.”
나머지 국군병사들은 대충 신원조사를 하고 노동자, 농민의 출신성분이 확인되는 대로 그 자리에서 자유를 주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인민에게 죄짓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화국은 노동자, 농민이 잘 살 수 있는 지상낙원을 마련해줄 테니 자기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하며……”
문화부중대장이 포로들을 모아놓고 훈시하는 동안 박병술은 연대부로 압송하느라 군용트럭에 오르고 있는 국군장교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국군은 절대로 패하지 않습니다. 미군은 우리 대한민국을 돕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반드시 승리하고 빨갱이들은 멸망할 것입니다.”
군화발길에 엉덩이를 차이면서도, 총개머리에 어깨를 가격당하면서도 국군장교는 인민군후송병들을 향해 선동을 그치지 않고 있었다.
저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도 않은가?
살고 싶으면 고분고분 순종해야 된다는 상식도 모르는가. 떠도는 풍문에 의하면 대전전투에서 참패한 미제 24사단장인, 백전백승의 장군이라던 딘 소장도 포로가 되어 고분고분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압송되었다고 한다. 딘 장군도 죽음은 두려워한다. 무적사단의 명예를 위해 자결이나 반항을 하지 않았고 살아남기 위해 비굴한 순종을 택했다.
국군장교는 국군의 승리를 그처럼 확신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가 말한 미군의 참전이 될 수도 있지만 저변에 깔린 의미는 자기들이 하는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며 조국의 영토를 지키는 정당방위라는 것이 틀림없었다. 신심에 찬 그 표정은 박병술의 때 묻은 양심을 거울처럼 비추는 것 같아 그를 쳐다보기조차 부끄러웠다.
그냥 살아남는다는 것과 정의를 위해선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박병술은 승자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심정은 패자나 다름없었다.
사단사령부로부터 저녁에 특별히 내려 보낸 축배는 영광을 칭송하는 달콤함보다는 치욕의 고배처럼 쓰디썼다.
안동해방전투의 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한 12사단은 영예롭게도 최고사령부로부터 「안동12사단」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비록 근위사단의 영예보다는 한 등급 아래였지만 전쟁초기 인제, 춘천지역에서 부진했던 전과에 비하면 설욕의 계기가 아닐 수 없었다.
부대의 사기는 전쟁 개시 후로는 처음으로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그러나 그 명예를 얻기 위해 지불한 대가도 만만치 않았다. 사단의 출혈은 엄청난 것이었다. 상처는 치명 적이었다. 미군폭격기의 공습으로 인해 보급이 원활하지 못해 군수품조달이 항상 부족했고 군량미조달이 끊겨 전투원들은 늘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다. 당지 인민정부에서 군량을 조달하여 그때그때 해결했지만 그 역시 전투원들의 배를 불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탄약 부족, 포탄 부족, 전차, 자주포, 트럭들의 휘발유 공급 부족까지 겹쳐 부대의 전투력과 기동력은 나날이 쇠진해갔다. 충원 부족으로 사상자 자리도 메우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도래했다.
게다가 낮에는 미 공군의 폭격 때문에 군사작전을 할 수 없고 밤에만 행동해야만 했다.
박병술은 날마다 날아드는 우군부대의 첩보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보이지 않는 깊은 내장에서부터 병이 드는 인민군대의 불리한 전황을 직감하며 불안과 초조에 휩싸였다.
어딘가, 무언가가 잘못되는 것만 같은 불길한 조짐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그게 무엇이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느낌이, 분위기가 그랬다. 느낌이나 분위기라는 건 과학적 수치나 검증된 담보는 없지만 때로는 과학의 정밀성보다도 더 정확도가 높은 확실함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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