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아들
장혜영

 준범은 자신의 눈길이 한동안 그녀의 뒤를 짓궂게 따라다니는 걸 뒤늦게야 의식하고 황급히 길게 풀려나간 시선을 말아 들였다. 점잖지 못하게 식당종업원의 엉덩이나 훔쳐보다니. 내가 언제 이렇게 저질인간이 된 거지.
 스트레스 때문인지 혼자서도 술이 목구멍으로 잘만 넘어갔다. 잠간사이에 술 두 병을 다 비웠다. 사장이 서비스로 소주 한 병과 계란찜 한 접시를 더 올려왔다. 그것마저 다 마셨다.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낚지 볶음 한 접시하고요.”
 여느 날 같으면 소주 한 두 병만 마시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것이지만 그날은 웬일인지 집으로 돌아가기가 싫었다. 그냥 여기서 술을 마시다가 날이 밝으면 출근을 하면 될 것이 아닌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 지도 몰랐다. 술을 몇 병이나 마셨는 지도 몰랐다. 그의 뒤에 들어왔던 손님들도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뜬지 한참 된다. 식탁위에 빈 술병들이 수두룩했다. 눈앞이 흐릿했고 의식이 가물거렸다. 몸도 허공에 뜬 것처럼 흔들거렸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대로 주저앉아 머리를 식탁위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과음하셨나봐. 얘. 선생님을 댁에까지 모셔다드려라.”
 사장님의 말소리가 꿈속에서처럼 아득한 곳에서 들려왔다.
 “난 집이 없습니다. 집도 없고 딱히 갈 곳도 없다고요. 홀아비고 노숙자라고요.”
 아가씨의 부축을 받으며 식당에서 나오면서 준범은 굴러나가는 대로 혀 꼬부랑소리를 해댔다.
 “택시 부를까요? 댁이 어디시죠?”
 “집이 없다니까 그래. 난 갈 곳이 없는 노숙자야. 날 그냥 길거리에 내버려 둬.”
 “선생님. 너무 취하셨어요. 그럼 일단은 저희 셋방에라도 가셔서 잠시 누워 휴식하세요. 정신이 좀 드시면 댁으로 돌아가세요.”
 골목 몇 개를 돌자 아가씨가 기거한다는 자취방이 나타났다.
 새벽이 다된 시간에, 아가씨가 혼자 자취하는 방에 들어가도 되는지? 
 취기 때문에 그런 판단을 깊이 해 볼 정신적 투명함도 없었다. 될 대로 되라는 체념 하나만이 제멋대로 언행을 농락했다. 아내가 없는 곳이면, 정실의 그 이기적이고 냉담한 얼굴과 콘돔이 보이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을 것 같았다.
 준범은 아가씨가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가 그녀가 눕히는 대로 침대위에 털썩 너부러졌다. 눕자마자 잠에 곯아 떨어졌다...
 갑자기 숨이 막히고 복통이 발작하는 바람에 단잠에서 깨어났다. 시큼하고 구릿한 음식물이 위장바닥에서부터 울컥하고 밀고 올라오더니 금방 입 안에 꽉 들어찼다.
 준범은 침대위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왝왝거리며 토할 곳을 두리번두리번 찾았다. 방 안에 토할 수도 없고 해서 터져 나오려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는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몸이 비틀거려 걸음을 제대로 옮길 수가 없었다. 허둥거리다가 벽에 머리를 짓찧으며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속이 불편하신가 봐요. 토하시려고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가씨가 다가와 그의 겨드랑이를 부축해 세운다.
 준범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어서 화장실이나 밖으로 안내해달라고 암시를 보냈다.
 화장실은 실내에 있었다.
 변기에 엎드려 코를 틀어막고 왈칵왈칵 음식물을 토해냈다. 눈물이 찔끔 솟구치고 콧물이 풀럭거렸다.
 아가씨가 가볍게 등을 두드려준다.
 “제가 물을 떠다드릴 테니 양치질을 하세요.”
 아가씨는 쪼르르 달려 나가더니 유리컵에 생수를 담아왔다.
 준범은 컵을 받아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뒤로 젖힌 후 입 안을 헹궈 변기에 뱉어냈다. 눈결에 화장실거울에 비친, 등 뒤에 오도카니 서있는 아가씨의 모습이 비쳤다. 자다가 일어난 모양 속옷만 걸친 그녀의 가슴은 풍만하다 못해 비옥했고 탄력과 봉긋함으로 매력적이었다.
 준범은 저도 모르게 몸을 홱 돌이켰다. 가뜩이나 흐리멍덩하던 머릿속이 홱 뒤집히는 듯 어지러워졌다. 극심한 현기증 발작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준범은 인젠 가슴까지 닿을 정도로 지척에 다가선 싱싱하고 건강한 여체를 보자 가슴이 쿵쾅- 쿵쾅- 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알코올의 준동은 끓어오르는 혈액의 흐름을 더욱더 요동치게 한다.
 “이봐요. 아가씨. 나랑 아기 하나만 낳아줘. 그럼 나 아가씨랑 결혼할 거야. 제발 콘돔 쓰지 말고 나랑 아기 하나만 만들어주라. 제발!”
 터지도록 익은 아가씨의 반나체를 으스러지도록 덥석 껴안았다. 그리고는 그 뜨거운 입술에 격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손은 거침없이 그녀의 속옷을 파고들어 아직 누구의 손길도 닿은 적이 없는 기름진 언덕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선생님…… 선생님……”
 아가씨는 흥분에 겨워 말을 잇지 못한 채 가쁜 숨만 할딱거렸다.
 의외에도 저항 같은 건 없었다. 도리어 아가씨는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준범의 손길이 갈아 번지는 대로 비옥한 옥토를 활짝 열어놓은 채 기름진 속살을 싱싱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기름진 옥토가 부지런한 농부의 손길을 기다렸다는 듯이 깊숙이 갈려 넘어가며 흥분과 감격으로 전신을 파득파득 떨고 있었다.
 준범은 난생처음 콘돔이 없는, 진정한 여자의 속살을 파고들어가는 희열을 맛보았다. 천태만상의 종유석과 청정한 샘물과 천년 묵은 두툼한 이끼와 자오록한 서기와 그윽한 향기가 감도는 그 신비한 동굴의 세계를 황홀한 심경으로 유람했다. 풍악소리가 울리고 새들의 노랫소리가 구성지다. 물방울이 떨어져 청석에 구멍을 뚫는 소리는 청아한 양금소리 같고 실실이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아름다운 칠색무지개를 하늘공중에 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섹스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여자의 속살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쾌락이다.
 이것이야말로……
 준범은 과음한 날이면 이튿날 아침에 더 일찍 기상하는 습관이 있다. 속이 쓰려 새벽 4시면 일어나 꿀물을 타 마신다, 우유를 마신다 하며 법석을 떨곤 했다.  
 잠을 깨 보니 아침 5시 30분이었다. 여느 날보다는 늦은 편이었다.
 옆에 누운 여자가 아내려니 하고 곁눈질도 하지 않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속이 쓰려 꿀물을 타먹으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방 안의 모습이 어쩐지 낯설다.
 여기가 어디지?
 의아한 생각에 눈길을 돌려 침대위에 잠든 여인을 내려다보는 순간 준범은 그만 아연실색했다. 그 여자는 아내가 아니라 고깃집종업원아가씨였던 것이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럼 내가 지난밤 저 아가씨와 한 침대에서 잠을 자기라도 했단 말인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니 홀랑 벗은 알몸뚱이였다.
 이럴 수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거야?
 준범은 부랴부랴, 그러나 잠든 아가씨를 깨울세라 조심조심 옷을 주워 입고 도둑놈처럼 그 집에서 빠져나왔다.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와 보니 다행이도 정실은 누가 들어가도 모르게 단잠에 빠져있었다. 워낙 늦잠이 많아 조반 식사하라고 깨우지만 않으면 점심때까지도 늘어지게 자는 정실이다.
 그날 이후 준범은 아가씨와의 정사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일에 몰두하다 보니 생각할 사이도 없었다. 그냥 술 광기 한번 부린 느낌이었고 꿈을 꾼 것처럼 기억 속에서 흔적조차 없이 말끔히 지워졌다.
 그로부터 시간이 꽤나 흐른 뒤 우연히 야외촬영장에서 돌아와 고깃집에 들렀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그 아가씨는 고향으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결혼을 했는지 그도 아니면 직장을 옮겼는지 보이지 않았다.
 “원래 하던 아가씨는 임신을 해서 얼마 전에 그만두었습니다.”
 사장님은 준범이 묻지도 않는 말을 했다. 준범은 그냥 네 그래요 라는 식으로 건성으로 대답을 했을 뿐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아마 결혼을 했나 보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전혀 뜻하지 않던 일이 준범의 일상을 강타했다.
 그녀가 임신한 아이가 자신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어느 골목에서 아니, 준범에게만 우연이었지 그 아가씨에게는 오랫동안 그를 기다려 왔을 지도 모르는 골목길에서 아가씨와 단둘이 정면으로 마주쳤던 것이다.
 준범은 그냥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지나치려 했었다. 그녀와의 꿈 같았던 지난 일이 기억속에 떠올라 무안했기 때문이었다. 취중의 실수였지만 그녀에게 정신적 충격을 주지는 않았을까 하는 미안함이 앞섰다. 전에는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아가씨의 배는 벌써 임신한 여자라는 걸 육안으로도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불룩했다. 그러나 준범은 그녀의 복중의 태아가 자신의 씨앗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선생님. 전 선생님의 아기를……”
 그녀가 그 말을 했을 때 준범은 충격은 고사하고 그래요 하고 그냥 무심히 지나치려고 했었다. 결혼했으니까 임신할 수밖에. 그건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그는 두 걸음도 채 못가서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뒤늦게야 그녀의 말뜻을 이해했던 것이다.
 선생님의 아기?!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럼 저 여자의 복중태아가 나의 씨앗이란 말인가.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선생님의 아기를 임신했다고요.”
 다소곳이 아미를 숙인 그녀는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목덜미까지 고추물이 들었다.
 아니, 이럴 수가? 남들이 듣기라도 하면……
 준범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자 아가씨의 등을 떠밀어 더욱 어두컴컴한 곳으로 들어갔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전 아내가 있는 유부남입니다. 남들이 들으면……”
 “알고 있어요. 그땐 몰랐는데 나중에야 알았어요. 사장님한테서……”
 “알면서 왜 아기를 낙태하지 않고……
 그녀는 금시 눈물을 흘리며 홀짝홀짝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깨가 세차게 들먹인다.
 “글쎄, 그날 일은 내가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술김에 실수를……아가씨의 인격을 무시하고 순결을 유린한 것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정신적 충격의 손해배상 같은 걸 하라면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기만은 낙태하셔야 합니다.”
 “싫어요. 제 핏줄인데……”
 오열할 때와는 달리, 나약한 모습은 간데 없고 아가씨의 의지는 단호했다.
 “난 아가씨의 이름조차 모릅니다. 나이도 얼만지 모르고요. 이럴 수가……”
 “이름이 뭐가 중요해요. 나이가  뭐가 중요해요. 중요한 건 사랑이죠.”
 “사랑이라고요? 그건 취중에 저지른 실수였지 사랑은 아니잖아요.”
 “선생님한테는 단순한 취중실수일지 몰라도 저한테는 분명한 첫사랑이에요.”
 골목입구에서 두런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준범은 말을 삼키며 급급히 골목을 빠져나왔다.
 날이 갈수록 아가씨의 아니, 미혜의 배는 불러만 갔다. 위자료를 두둑하게 줄 테니 이곳을 떠나가라고 달래도 준범의 집 근처에서 떠날 생각을 안했다. 이러다가 정실의 귀에 추문이 들어가는 날이면 무슨 소동이 일어날 지 모른다. 준범은 하루하루를 불안과 초조속에서 보내야 했다. 친구한테도 감히 속심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할 수 없었다. 결벽증환자처럼 도덕적 결백에 유난히 민감한 그가 듣기만 하면 그들의 우정이 그날로 금이 갈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정도는 준범을 친구로 사귄 이유를 늘 준범의 정직성과 도덕적 결백에 두고 있었다.
 아기를 출산하기 전에 무슨 방법이든 대야 만 했다. 낙태시키고 집 근처에서 멀리 떠나보내야 했다. 그러나 온갖 회유와 설득도 그녀의 출산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준범은 생각다 못해 아버지의 도움을 청하기로 작정했다. 아버지는 불륜의 대가였으며 이런 문제를 처리하는 데는 전문가나 다름없었다. 아버지가 거쳐 간 여자들은 아마 수십 명도 넘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이런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은 적은 없다.
 “걱정 말고 네 할 일이나 해라. 아버지가 알아서 후환이 없도록 깔끔하게 정리해줄 테니까.”
 아버지가 어떤 방법을 동원했는지 준범은 모른다. 다만 아버지가 이 일에 손을 댄 뒤부터 그녀의 성화는 줄어들었고 시끄러운 일도 잠잠해졌다. 고단수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준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달 뒤 아가씨는 자살을 했었다. 그때에야 준범은 아버지가 금전회유, 위협, 공갈하고 깡패들을 시켜 가장집물을 때려 부수고 임산부를 구타한 사실, 강제축출, 가옥 내 유폐 등 온갖 비열하고 불법적인 난폭한 행위들을 총동원하여 결국은 그녀를 자살을 시도하도록 핍박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끝끝내 복종이 아닌 반항을 선택한 것이다.
 미혜는 그렇게 자살을 했지만 그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준범은 양심의 가책은 느꼈지만 증인이 이미 죽은 마당에 스스로 호박을 쓰고 돼지 굴로 들어가는 자멸의 길을 걸어갈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아직도 사람들속에서 아내와 함께 인생을 살아가야 했다. 이제 장례식만 끝나면 모든 비밀은 세월속에 깊숙이 묻혀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오산이었다. 그녀는 죽어서도 준범을 괴롭혔다.
 그때 나타난 것이 미혜의 여동생 강복녀(본명이 무언지는 아직도 생각나지 않는다.)라는 아가씨였다. 준범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어와 자신의 신분을 밝혔고 그가 몸소 찾아와 고인에게 사과를 드리기 전에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시신을 발인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언니와는 다른 그 확실한 의사전달, 냉담하나 단호한 결단, 한 자도 틀림없이 또박또박 말하는 분명한 말투……
 준범은 그녀가 결코 상대하기 쉬운 적수가 아니라는 걸 목소리만 듣고서도 알 수 있었다.
 사흘 만에 준범은 드디어 그녀의 도전에 굴복하고 빈소를 찾았다. 그녀가 경찰서에 신고만 하면 준범은 혐의범의 죄명을 면할 수 없을 것이었기에 패자는 이미 준범으로 낙인찍힌 거나 다름없었다.
 준범은 그때 처음으로 새엄마를 아니, 강복녀를 보았다. 시골에서 올라왔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언행에는 언니와는 달리 시골티가 보이지 않았다. 지적인 세련미와 섬뜩한 독기까지 느껴질 만큼 냉담한 표정이었지만 미모는 눈부시게 출중했다. 몸매도 얼굴도 모델처럼 빼어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거느린 분위기는 상대방을 압도하는 도고한 품위다.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무게감이 있었다.
 “석준범 PD님이시죠?”
 “네. 언니일은 미안하게 됐습니다. 내가 이미 생전에 사과를 드렸습니다만.”
 “사과 한마디로 언니의 가슴에 맺힌 한과 울분을 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은 분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대가는 치러야 하잖아요. 그래야 하느님도 공평하다고 사람들이 믿을 거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경찰에 신고 같은 건 안할 테니까.”
 “고맙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게임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언니를 대신해 제가 도전할 게요. 법조문 같은 권력을 빌지 말아야 공정한 게임이겠지요. 선생님께서도 언니의 전철을 밟게 할 거에요. 그쪽 아버지와 댁의 부인과 온 가족이 패가망신하게 할 거에요.”
 그녀의 두 눈에서 서릿발이 번뜩였다.
 준범은 그녀가 내뿜는 날카로운 독기에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그러나 한낱 시골여자에 불과한 네가 감히 날 어떻게 할 거냐 라는 오기 같은 것이 울컥 치밀었다.
 “당신이 나와 같은 남자라면 혹시 도전을 받아들였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 없던 일로 하죠.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니의 일체장례비용은 내가 부담하겠습니다.”
 “여자라고 만만하게 보시다가 일을 그르친 다음 후회하지 말기를 바라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세요. 전 비겁하게 남이 모르는 사이에 뒤통수를 치고 싶지는 않아요. 정정당당하게 겨루고 싶어요.”
 빈소를 나오는 준범의 등 뒤로 날아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날카로운 비수처럼 잔등에 깊숙이 박혀들었다.
 사람이 화가 나면 무슨 말을 못하랴. 독설, 위협, 공갈……복수를 다짐하는 그녀의 오기가 으스스한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인맥, 학연, 연고도 없는 생소한 서울판에서 시골아가씨가 서울태생인 그와는 게임대상부터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복녀의 도전을 무시하게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녀가 미혜와 자매간이라면서 이름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아버지가 다른가 아니면 어머니가 다른가. 그도 아니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인가.
 어쩌면 그와의 게임에서 완전범죄를 꾀하고 신분을 감추기 위해 본명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인 지도 모른다. 그래 보았자 일개 시골아가씨가 날 어떡할 건데.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른다더니.
 준범은 입가에 쓴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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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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