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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27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53 by 아데라


 바람의 아들

 장혜영


 그래도 미라의 마음속엔 석재수가 가엽다는 동정심 같은 건 꼬물만큼도 없었다. 그에게 23년  간이나 고스란히 간직해 온 처녀의 순결을 짓밟히는 순간 미라는 석 사장이 늑대와 같은 짐승으로 여겨졌다. 돈이면 순결은 물론이고 귀신까지 부릴 수 있다고 믿는 이따위 짐승들에게 실패의 쓴맛을 느끼게 하고 싶은 강력한 충동을 받았었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인생의 이치를 깨닫게 하고 싶었다. 당신이 저지른 악행은 반드시 그만한 대가지불을 강요당하게 된다는 세상의 섭리를 가르쳐주고 싶었다.
 “전 먼저 일어나야겠어요. 약속이 있어서요.”
 미라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있고 싶지 않았다. 석재수는 오늘 이 순간부터 죽은 사람이다. 그와의 게임은 끝났다. 죽은 사람과의 상대는 더 이상의 의미가 없다.
 인제는 김정실에게로 공격의 예봉을 돌려야 한다. 정실이까지 쓰러트리면 준범이만 남게 될 것이다. 그가 아무리 지능이 발달한 지성인이라고 해도 혼자서는 미라의 공격을 저지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정실은 벌써 사흘째 도박판에 붙어 있다. 미라가 그녀를 유혹하여 끌어다 넣은 것이었다. 외제차 한 대에 김정실은 새엄마에게 절대적 신임과 복종을 나타냈다. 그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믿었고 따랐다.
 처음에는 영화관이나 사우나, 찜질방 같은 데를 데리고 다녔었다. 물론 비용은 일체 미라가 석재수한테서 빨아낸 돈으로 충당했다.
 그런 곳에 익숙해지자 조금 더 영역을 넓혀 나이트클럽이나 경마장, 골프연습장 같은 데로 끌고 나갔다. 자기돈 한 푼 팔지 않고 즐길 수 있는 향락은 김정실을 완전히 유흥에 푹 빠져들게 했다. 나중에는 정선도박장, 강남도박장에도 스스럼없이 드나들게 되었고 남자들과 어울려 흥청망청 음주가무를 벌이기도 했다.
 한번 집에서 나오면 보통 며칠씩 외박하는데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러잖아도 남편이 촬영 때문에 외근 나가는 날이 많아 혼자 집을 지켜야만 했던 그녀는 늘 외로움에 답답했던 터라 한번 향락에 젖어들자 그 늪에서 헤어 나올 줄을 몰랐다.
 이제 김정실에게는 마지막 절차만 남은 것이다. 마약중독자가 되게 하고 불륜을 저지르게 하는 것이다. 정실은 벌써 도박판에 외제차까지 밀어 넣은 상태이다. 계좌의 적금은 텅텅 빈 지 한참 되었고 카드빛까지 엄청 걸머진 신용불량자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정실은 자신의 그런 방탕을 타락이나 외도로 보지 않고 여자의 행복추구의 당당한 권리라 여기고 향유하고 있으니 미라에게는 더 없이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은 향상하기는 힘들어도 타락하자면 이처럼 눈 깜빡할 사이에도 가능한 것이다.
 강남의 도박장에 도착해 보니 김정실은 그녀가 밑천으로 대준 5천만 원을 죄다 잃고 천삼백만 원을 빚까지 지고 물러나 앉아 있었다.
 “사모님, 난 정말 머리가 우둔한가 봐요. 한번도 따는 날은 없고 잃기만 하니 말이에요.”
 정실은 자기보다 까마득하게 연하인 새엄마를 그냥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미라도 호칭 같은 데는 괘념하지 않았다.
 “도박이라는 게 그렇지 뭐. 재미로 노는 거지 따려고 노나.”
 새엄마인 그녀도 며느리에게 반말도 경어도 아닌 애매모호한 표현을 쓴다.
 “그렇게 기 죽어 있지 말고 우리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해. 내일 또 돈을 대줄 테니까 걱정 말고. 인상을 쭉 펴라니까 그러네.”
 미라는 정실을 차에 싣고 강남에서 소문난 나이트클럽으로 달렸다.
 “남편이 알면 야단칠 거예요. 차까지 다 도박에 날린 걸 알면.”
 “까짓 차 한 대가 얼마라고. 그보다 더 좋은 걸 또 뽑아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사장님의 야심찬 프로젝트가 성공하고 신제품만 대박나면 문제없을 거야.”
 “정말요?”
 “그럼. 내가 언제 우리 며느님한테 거짓말을 한 적이라도 있었어.”
 “아이, 난 우리 새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정실은 갑자기 미라의 목에 매달리며 어린애처럼 어리광을 부린다.
 “이러지 마. 운전하는데.”
 “난 새엄마가 우리 신랑보다 더 좋아.”
 “그래도 신랑이 더 좋겠지.”
 “신랑은 나한테 부담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에요. 젖 달라고 보채는 아기처럼 밤마다 그 짓거리만 강요하잖아요. 아기를 낳으라 하고 아줌마가 되라 하고 가정부가 되라 해요. 날 성도구로, 아기 낳는 기계로, 집살림이나 하는 가정부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에요. 새엄마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난 이처럼 즐거운 세상이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고 내 인생을 향유하지도 못했을 거예요.”
 “부부라고 해서, 아내들이 남편만을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취미생활까지 희생되어서는 안 되지. 그건 남존여비의 봉건사상일 뿐이야. 아내도 자신의 인생을 즐기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 거야.”
 “정말 사모님은 나이도 어린데 어쩜 그렇게 인생에 도사지. 대학교수 같잖아요.”
 “내 경우가 돼 봐. 상황이 바뀌면 누구나 다 그렇게 돼 있어.”
 “상황, 무슨 상황?”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대체로 술은 정실이 혼자서 마셨다. 미라는 처음부터 맥주 한 컵을 달랑 놓고 버틴다. 자신이 먼저 취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웨이터를 불러 앉혔고 잘 생긴 웨이터의 권주에 정실은 금시 녹초가 되어버렸다.
 미라는 정실이 화장실에 나간사이 그녀의 술잔에 수면제를 슬쩍 풀어 넣었다. 그리고는 웨이터에게 부탁해 정실을 호텔방으로 옮겼다. 미라가 팔목에 필로폰주사를 찔렀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몰랐다. 완전히 필름이 끊겨버린 것이다. 이렇게 한두 달만 필로폰정맥주사를 놓으면 그녀는 결국 마약중독자가 되고 말 것이다.
 밖으로 나온 미라는 아까 그 웨이터를 불러 조용히 암시를 건넸다.
 “저 여자를 잘 부탁해요. 돈 같은 건 걱정 말고. 잘해 줘야 해요. 댁한테 완전히 미쳐버리게요. 임신까지 시키면 더 좋고요. 자 이거 받아요. 잘하면 뒤에 또 사례금이 있어요.”
 두툼한 돈뭉치를 받아든 웨이터는 그런 일이라면 자신이 있다는 듯 음탕한 눈길을 슴벅거리며 슬금슬금 호텔방으로 스며들어갔다. 호텔방에 몰래카메라 같은 걸 설치할 필요성 같은 것도 느끼지 못했다. 불륜현장을 촬영한 사진 같은 것이 없어도 여자는 임신 하나만으로도 모든 걸 증명할 수 있다. 벌써 정실에게서 그녀가 남편에게 여태껏 콘돔착용을 강요해왔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남편이 외도를 하여 다른 여자와 성관계를 가졌고 아이까지 임신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려고 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 여기고 참고 있었다. 지금 그녀에게 알려 주면 도리어 남편의 불륜에 대한 저주가 그녀자신의 불륜을 절제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음이었다. 될 수 있으면 타락이나 불륜의 도덕적 부정성을 깨닫지 못하게 해야 한다. 타락이나 불륜은 그저 향락과 즐김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권리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해야 한다. 한 사람을 타락시키려면 그의 판단력부터 마비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 밤만 지나고 나면 김정실의 일상은 완전히 바뀔 것이다. 무엇이나 처음이 어려운 것이다. 첫발자국만 내디디면 그 다음은 스스로 되는 법. 외도와 불륜, 도박과 마약은 그녀의 일상이 되고 말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아침, 날이 밝기도 전에 김정실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모님. 저 어제 술 취해서 실수했죠?”
 “글쎄 난 그냥 호텔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왔거든. 취하긴 했지만 실수한 것 같진 않은데.”
 능청을 떨었다. 가능한 한 모든 의혹에서 발을 빼야 한다. 완벽한 계책에 흠집이 생겨서는 안 된다. 그녀의 고의적 접근과 악의적 의도가 미리 발각되는 날에는 김정실은 각성할 것이고 남편에게 돌아가 연대를 형성하고 그녀의 공격에 공동방어선을 구축할 것이다. 그러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많다.
 “난 어쩌면 좋아요? 큰일 났어요.”
 “왜? 마음을 진정하고 차근차근 말해봐.”
 전화는 거실에서 받았고 석재수는 아직 침실에 잠들어 있었기에 서두를 것도 없었다. 그냥 느긋하게 소파에 다리 뻗고 앉아 불행의 늪에 빠져들며 손을 허우적거리는 그녀의 몸부림을 즐길 수 있었다.
 내가 너무 잔인한가?
 아니야. 언니는 죽을 때 아무 사람도 없었다. 혼자가 아니라 뱃속의 애까지 단번에 두 사람이 죽었다. 그러나 어느 누가 눈썹이나 까딱했던가.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석준범이 사흘 만에 조문을 온 것도 오고 싶어서가 아니라 핍박에 의한 발걸음이었다. 죽기 전에 언니가 남긴 유서내용은 죽어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난 죽고 싶지 않아. 그러나 난 죽을 수밖에 없어. 미라야. 너밖에 이 언니의 한을 풀어 줄 사람이 없구나. 네가 언니의 원한을 풀어 주기 전에는 언니는 저승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 같다. 너한테 물려줄 거라고는 카메라 한 대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우리 아기 이렇게 셋이서 전국을 유람하는 것이 내 소원이었는데……

 미라도 언니와 함께 죽었어. 난 미라가 아니라 강복녀야. 늙은 호색한에게 순결마저 짓밟히고 완전히 망가졌어. 산 설고 물 선 이 서울바닥에서 일개 아녀자가 재력 있고 문벌 있고 떵떵거리며 잘만 살아가는 자들과 대항하려니 내댈 밑천이라고는 몸뚱이 하나뿐이더라. 그래도, 아무리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는 한이 있더라도 미라는 언니의 원수를 갚고야 말거야.
 “글쎄 취한 김에 웨이터총각과……”
 “웨이터와 어쨌다는 거니? 자기라도 했다는 거니?”
 “그래요. 한자리에서 잤어요. 일어나 보니까 우리 둘 다 벌거벗고 이불속에……”
 “난 정실을 그렇게 안 봤더니 총각 유혹하는 재간이 다 있었네. 정말 대단하다.”
 미라는 깔깔 웃었다. 정실의 속은 지금 새카맣게 타서 재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지금 웃을 때가 아니잖아요. 무슨 대책이라도 강구해야……” 
 “대책은 무슨 대책. 잤으면 그만이지. 원상복구도 불가능하잖아.”
 “준범 씨가 알면 어떡해. 날 죽이려고 할 텐데!”
 “사람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런 거야. 날 봐. 아버지 벌 되는 사장님과 살아도 별 문제가 없잖아. 그리고 준범이가 알 수도 없고.”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정실이랑 나랑 둘만 알고 있으면 쥐도 새도 모를 거야. 걱정 마. 그래 총각 맛이 어땠어? 좋았어?”
 “사모님도……”
 말꼬리가 잦아드는 걸 보니 단맛은 실컷 빨아먹은 모양이다. 원래 도둑질해 먹는 과일이 더 맛있는 법이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지만 그건 죄다 허튼소리야. 걱정 말고 마음껏 즐겨.”
 “또 만나라고요?”
 “싫어? 싫으면 그만두고. 그건 정실이 자유잖아.”         
 “……”
 대답이 없다. 중이 고깃맛을 들이면 절에 빈대가 살아 남지 못한다고 한다. 이제 그녀는 총각의 품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며칠간 여행을 다녀와도 될 것 같다. 정실을 그녀가 유도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녀스스로 총각이 그리워 나이트클럽으로 찾아 갈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도박밑천만 5~6천만 원 그녀의 계좌에 입금시켜 주면 그만이겠지.
 이제 등산과 산행은 매 주 한번씩 다녀와야만 하는 그녀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언니 미혜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서만 카메라를 메고 이곳저곳 돌아다녔지만 날이 갈수록 산행과 여행은 그녀에게 각별한 멋과 의미를 안겨주었다. 부담 없는 자연, 주어진 섭리만큼만, 욕심을 부리지 않고 공존의 미덕을 자랑하는 자연이 삭막한 인간세상에서 찢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장소로 되기 시작했다. 자연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냥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우연하게 만난 『패밀리사진관』의 윤정도 사장님한테서 카메라입문서를 얻어 그녀의 촬영기술도 하루가 다르게 숙련되어 갔다. 그녀도 자신에 대한 윤정도의 관심이 예의와 서비스차원을 넘은, 은근한 정이 실려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 쓰지는 않았다. 윤정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와 가까이 지낼 수 있었던 거의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그랬다. 일일이 신경 쓴다는 건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그래서 그가 이름을 물어 왔을 때에도 본명 미라가 아닌, 서울에 올라와서 쓰기 시작한 가명인 파랑이라고만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윤정도는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모든 남자들과는 어딘가 다른 점도 있는 듯싶다. 관심의 정도가 끈질기게 집요하고 굵직했다. 게다가 우연한 인연까지 있어 할머니를 통해, 산행을 통해 윤정도와 만나는 차수가 늘어남에 따라 그의 인상도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윤정도의 관심을 호의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언니가 죽던 그날 이미 사랑 같은 건 자신의 인생에서 포기해 버렸던 것이다. 그녀의 삶과 인생은 오로지 언니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서만 필요했고 그만큼만 살아 있을 뿐이다. 얄팍한 애정 따위에 동요될 리가 만무하다. 윤정도가 유부남이고 그와의 정이 불륜이어서 멀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사랑 자체가 하나의 죄악일 뿐이다.
 그런데도 산행을 준비하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윤정도의 모습이 벌써부터 언뜻거린다. 덕유산에서 만났던 것처럼 또다시……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짓궂게 매달리는 윤정도의 모습을 기억 속에서 털어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녀의 기억 자락에 옷고름처럼 매달려 떨어질 줄을 모른다.
 맡겨놓은 필름이 현상되었을 것이다. 사진관에 들러서 인화된 사진을 찾아와야 했다. 그러나 어쩐지 윤정도의 얼굴을 대하기가 두려워진다. 공연히 가슴부터 두근거린다. 할머니의 고향에 고인의 유골을 뿌리러갔을 때 그와 함께 지냈던 시간들, 덕유산 산사의 어느 암자에서 밤을 함께 새웠던 시간들이 영화화면처럼 그녀의 기억 속을 스쳐 지나갔다. 영문 없이, 그냥 쳐다보기만 해도 정이 가는 사람이다.
 이러면 안 돼!
 난 이미 죽은 사람이야! 그 사람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려야 해.
 나는 언니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만 살아 있는, 사랑도 인정도 없는 유령 같은 존재야. 그런 유령이 어떻게 인간인 윤정도와 정을 나누고 인연을 맺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결국 그녀의 발길은 자신의 의사와는 달리 어느새 사진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물리칠 수 없는 어떤 강력한 유혹이 그 사진관으로부터 햇빛처럼 그녀를 흡입해 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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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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