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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2.16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75 by 아데라


바람의 아들
장혜영



준범은 휴대폰도 전화도 불통이다. 회사에 전화를 넣어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보았다.
 “석 PD부탁드립니다.”
 “그만뒀습니다.”
 “아니, 무슨 일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본인과 직접 문의해 보시죠.”
 “언제 그만둔 거죠?”
 “아마 열흘 정도 될걸요.”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무작정……”
 “모른다니까요. 죄송합니다.”
 통화는 일방적으로 중단되었다.
 이제 해고사실은 확실한 것임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준범이 녀석은 그동안 어디서 뭘 하고 지냈지?
 갑자기 그것이 궁금해진다. 워낙 좌절 앞에서 의기소침하고 절망을 잘하는 친구다. 자그마한 스트레스도 폭주로 풀어내는 스타일이었다.
 해고라니!
 그 엄청난 고통을 이기지 못해 벌써 술독에 빠져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친구에게 버림까지 받지 않았는가.
 조급해졌다. 한 시간이라도 지체하다간 준범에게 만회할 수 없는 불상사가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한 예감이 밀려들었다.
 “어느 식당이라고 했지?”
 “태양호프집에서.”
 늘 준범이와 동행하는 단골집이다.
 정도는 미경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스튜디오에서 달려 나왔다. 총망히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아침부터 그가 식당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그곳 말고는 달리 찾아갈 곳이 없었다. 호프집에 없으면 삼겹살 집에. 삼겹살 집에 없으면 자택에라도 찾아갈 볼 작정이다.
 생각밖에도 준범은 호프집에 있었다. 덩그런 홀을 독차지하고 혼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어제 오후에 들어온 사람이 밤을 새고 아침까지 술을 마셔요.”
 정도나 준범은 이 호프집에 단골이라 마담이나 직원들은 모두 면식이 있었다.
 “그만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해도 말을 듣지 않아요. 윤 사장님께서 마침 오셨으니 다행이네요.”
 “아줌마. 500 네개 추가요.”
 준범은 머리를 식탁위에 처박은 채 손만 허공에 대고 허우적거렸다. 균형을 잃고 허우적대는 그의 몸무게를 받아내지 못해 의자가 부산스럽게 삐거덕거렸다.
 “저것 보세요. 아직도.”
 “올리세요. 제가 결산할 테니까요.”
 정도는 준범에게로 다가갔다. 준범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맥주컵만 식탁에 대고 떵떵 그루박는다. 아직 절반이나 남은 맥주가 식탁위에 넘쳐나며 거품을 뿌직뿌직 뿜어냈다.
 “혼자 마시지 말고 나도 끼워주라.”
 “당신 누군데 끼워달라는 거야.”
 고개는 쳐들었으나 눈은 뜨지 못한다. 컵을 쳐들었으나 잔이 기울어져 맥주가 쭈룩쭈룩 흘러내렸다.
 “나 정도야. 술을 얼마나 마셨기에 친구도 몰라보는 거냐.”
 “친구! 나 너 같은 친구 없어. 아니, 나 같은 건 네 친구 될 자격이 없다고. 더럽고 치사하고 구린내 나고 구정물 같은 놈이거든. 너 같이 깨끗한 놈, 신선 같고 예수 같고 부처님 같은, 결백한 놈의 친구가 될 저격이 없단 말이야. 넌 날 버렸잖아. 왜 또 왔어? 날 비웃으려고? 훈계하려고? 그래 좋아. 맘대로 해 봐. 욕하고 때리고 짓밟고 침 뱉고……난 인젠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준범인 인젠 죽었어. 아줌마 술 가져오라는데 귀 먹었어요?”
 “여기 가져 왔잖아. 이걸 받아.”
 “싫어. 네가 주는 술은 깨끗하고 투명해서 싫어. 술맛이 안나. 너랑 나랑은 차원이 다르잖아. 넌 보석이고 난 개똥이고 낄낄낄……”
 폭언을 쏟아 붓고 난동을 부리고 마구 포효하고 있었다. 체념과 절망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전에는 이렇게 자신의 결격사유를 구실삼아 친구를 무시하고 경멸한 적은 없었다. 언제나 정도를 존중했었다.
 “진정하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차근차근 말해 봐.”
 “뒤를 들춰서 끝끝내 똥이 얼마나 구리고 얼마나 더러운 가를 알려고. 그래 말해주마. 네 말처럼 내가 사람구실을 못해서 죄를 받았다. 징벌 받았다고. 실컷 비난하고 타매하라. 내가 껴안고 잔 김하늘이라는 잡년이 날 회사에 금품횡령죄와 성추행죄로 신고했어. 왜. 인젠 속이 시원하냐? 우리 예수님.”
 “좀 그만 비꽈라!”
 정도는 준범의 노골적인 야유에 참다못해 버럭 언성을 높였다. 견고하다고만 여겼던 인내의 둑마저 무너진 것이다. 식탁에 대고 텅- 소리가 나도록 드세게 박은 유리컵에서 맥주방울이 튕겨 오르며 얼굴에 튕겼다.
 닦을 염도 하지 않았다. 취중에도, 생전 본적이 없는 친구의 분노한 표정에 깜짝 놀란 듯 준범은 움찔하며 목을 틀어박는다. 거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정도를 가만히 훔쳐보고 있었다.
 “제발 좀 그만 비아냥거려. 그날 일은 내가 사과할테니까. 날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고. 난 그 무슨 부처님도 예수도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결백하지도 않아. 나도 너처럼 더러운 놈이야. 치사하고 구정물 같고 진흙탕 같고 개똥같은 놈이란 말이야.”
 정도는 컵을 들어 입에 대자 단숨에 바닥을 비우고는 식탁에 텅 내려놓는다. 불물이라도 삼킨 듯 위장이 휘딱 뒤집혔다.
 준범은 아연실색하여 아예 두 눈을 화등잔처럼 휘둥그렇게 뜬 채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한마디 끼어들 엄두조차 못 낸다. 어찌된 영문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다. 태양이 서쪽에서 뜨고 강물이 산위로 흐른다면 믿을지라도 친구 정도가 더럽고 치사한 놈이라는 자백은 믿기지가 않았을 것이다. 정도는 그에게 정직과 결백의 우상이자 상징과도 같았다.
 정도는 연이어 네 컵이나 잔을 비웠다. 양주까지 청해 폭탄주를 만들어 물처럼 마셨다.
 “왜 그래? 갑자기. 나 무서워!”
 준범은 술이 확 깨는 듯 정도 앞에 놓인 술을 슬금슬금 자기 앞으로 당겨간다.
 “이리 내. 나도 오늘은 너처럼 대취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어. 너처럼 절망하고 좌절하고 타락해서 인생을 막살고 싶단 말이야.”
 “넌 나랑은 인생길이 달라. 넌 지금까지 정직하고 참된 인생을 살아왔잖아.”
 “그런 소리 다 집어치워. 나도 이제부터는 돼가는 대로 살아버릴 거야. 너처럼 말이다.”
 “너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냐? 미미 엄마가? 아니면 미미의 병세가 더 악화되기라도 한 거냐?”
 “그런들 어때서. 다 그렇게들 사는 게 아니었냐.”
 “그러나 너만은……”
 “너만은, 너만은 그러지 마. 나도 너랑 같은 사람이야. 감정도 있고 욕망도 있고 실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번듯한 얼굴이 있지만 감춰진 홍문도 있다고. 그러니까 너 날보고 어깨 처질 필요 없어. 주눅들 필요도 없어. 당당하게 살아야 돼.”
 “아무래도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으니 말이다. 얼마 전까지도 이렇지 않았잖아.”
 “얼마 전까지? 그 말이 무얼 의미하냐. 무얼 담보라도 하냐고. 상황은 한 시간 뒤에라도 변할 수 있어.”
 한참 광기를 부리고 나니 금방 기운이 빠졌다. 그제야 정도는 실내에는 자기들뿐이 아니라는 걸 발견했다. 마담과 홀 아줌마 그리고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손님 몇 사람까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그에게 눈길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제야 정신이 좀 들어? 나 너 땜에 술 다 깼어.”
 준범은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은 듯 비실비실 물러앉으며 정도의 눈치만 살핀다.
 “미안해. 나 깜빡 돌았나 봐. 벼락술에 취했나 봐. 우리 자리 옮길까?”
 “어디 갈 건데?”
 “나도 모르겠어. 가다가 걸치는 곳에.”
 “미미한테 안가 봐도 돼?”
 “어머니가 계셔.”
 “널 데리고 가고픈 곳이 있긴 한데.”
 “어딘데?”
 “멀어.”
 “상관없어.”
 “오늘 하루만은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 묻지 말기다.”
 “알았어.”
 두 사람은 호프집에서 나왔다.
 이제는 취한 사람이 준범이가 아니라 정도로 바뀌었다. 정도는 눈앞이 흔들흔들 그네를 뛰었고 발걸음이 허공중에 둥둥 떠다녔다. 밤새 술을 마시며 취했다 깨였다 반복하던 준범은 지금은 정신이 들 때가 되었는지 아까와는 달리 멀쩡하다.
 아직도 준범은 정도의 고백을 믿고 있지 않고 있는 게 틀림없다. 여전히 정도는 정직하고 결백한 성인군자라고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정도의 존재는 친구라는 의미를 넘어서 그의 문란한 생활을 규제하는 체벌이나 고문처럼 느껴졌으리라. 자신의 사생활이 정도의 비난거리가 되는 것이 싫었으리라. 뿐만 아니라 설령 정도의 고백이 죄다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준범은 그것을 인정하기가 현상유지보다 힘들었을 것이다. 정도만은 깨끗한 친구였으면 싶었을 게다. 그것은 자신의 불결에 대한 보상심리이기도 할 것이고.
 “용천사요.”
 택시에 승차한 준범의 입에서 느닷없이 흘러나온 행선지는 숙취의 몽롱한 상태에 빠진 정도의 의식에 파문을 일구며 돌멩이처럼 털렁 떨어졌다.
 용천사라?!
 아내가 출가한 절이 아닌가.
 “가는 데가 어디라고?”
 “용천사.”
 “용천사엔 뭘 하러 가는데?”
 “용천사가 아니라 용천사 뒷산 봉우리야. 차가 용천사 아래 주차장까지밖에 못가거든.”
 “글쎄 거긴 왜 가냐고?”
 “너 정말 아직도 소문을 못 들은 거니?”
 “무슨 소문?”
 “용천사 뒷산 봉우리 바위위에 살아있는 부처님이 계신다잖아.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뜨거운 낮이나 추운 밤이나 늘 봉우리청석위에 앉아계신대.”
 “그래서?”
 정말이지 부처님 같은 데는 털끝 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윤정이 용천사로 출가한 뒤로는 더구나 그쪽을 멀리하게 되었다. 윤정을 유혹해간 부처님이 미웠다. 부처님이 정말 선량한 분이라면 윤정을 남편과 자식에게 돌려주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잔인했다.  당신 욕심만 부릴 뿐 다른 사람의 고통은 외면한다.
 “그 생불한테 기도하면 소원이 다 이뤄진다잖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대.”
 “난 안가.”
 “안 되면 말고. 한번 장난삼아 해보는데 손해 볼 건 없잖아. 미미의 병이 완쾌되기를 기도해 봐.”
 “병은 의사가 고치는 거지 부처가 고치는 게 아니야. 그리고 미미는 지금 병이 호전되고 있고.”
 “그러지 말고 한번만 내말 들어 봐 잠자코 있어.”
 결국 준범의 강권에 못 이겨 용천사로 올라갔다.
 윤정이 있을 암자 앞을 지나갈 때 정도는 일부러 고개를 계곡 쪽으로 외면했다. 준범에게도 그녀가 이 절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병원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간 윤정이 야속했다. 아니, 그건 어쩌면 죄다 변명인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파랑이 있다. 윤정의 모든 것을 대신할 파랑이 있다. 그래서 인제는 윤정이 없어도 된다. 이런 것들이 무의식중에 작용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 역시 명분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파랑은 아내를 대신할 수는 있지만 그 전부일 수는 없다. 미미의 엄마가 될 수도 없고 정도의 합법적인 부인일 수도 없고……
 아닌 게 아니라 영마루위에는 많은 신도들이 모여 청석을 향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저기 보이지. 저 분이야. 소문난 생불生佛이.”
 준범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청석위에 한 물체가 덩그러니 앉아 있다. 승복을 착복하고 있는 걸 보아선 사람 같은데 얼핏 보기에는 나무그루터기나 바위돌과 흡사하다. 스님은 산 아래 깊은 계곡을 향해 허리를 곧게 펴고 단정하게 앉아 두 손을 합장한 채 망부석처럼 까딱 않고 앉아 있다.
 등을 돌려대고 좌선을 한 모습이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습에는 정도의 가슴을 꿈틀하게 하는 익숙함이 깊숙이 배어있었다.
 설마 그녀가?!
 아무래도 미심쩍어 준범이 열심히 절을 하는 틈을 타 좀 더 가까이에 다가가 보았다. 정도는 비구니가 거느리고 있는 분위기만으로도 그녀가 다름 아닌 아내 윤정임을 알아보았다.
 이럴 수가?!
 윤정이 어찌 이런 곳에!
 정도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아연실색하여 그 자리에 말뚝처럼 굳어져버리고 말았다.
 맙소사!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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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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