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영소설'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09.09.15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7 by 아데라

바람의 아들
장혜영

  집안에 들어와 보니 식탁위에는 정도도 아까워 마시지 않고 두었던 고급양주병과 마른 고기안주들이 지저분하게 널려있었다.
  “죄송해요. 말렸지만 말을 들어야죠. 제 월급에서 뺄게요.”
 
아줌마는 허둥지둥 식탁을 거두며 거듭 사과했다. 접시와 수저, 음식물들도 사내의 손에서 뿌려나간 듯 방바닥에 어수선하게 나뒹군다.
 
“언제까지 있을 건데?”
 
정도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아줌마에 대한 불쾌감보다는 아내에 대한 불만이 날이 갈수록 깊어갔다.
  아내는 남편과 자식을 이런 살벌한 전쟁터에 내버려두고도 마음이 편할까?
  할아버지의 병환이 악화되면 다시 내려가더라도 일단은 올라왔다가……

 

  2

 

  정도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어두컴컴하고 숲마저 무성하고 바위에는 검푸른 이끼가 두터운, 깊숙한 계곡이었다. 물은 차고 투명한데 그 속에 정도는 알몸으로 서있었다. 머리위로는 장쾌한 폭포가 쏟아지는데 그 힘찬 낙차에 수면은 여지없이 구멍이 뚫리며 깊숙이 밑바닥까지 파여 들었다. 움츠러들려고 하나 줄기찬 물줄기에 갈기갈기 찢기기만 하는 수면, 그 주위에서 질탕치며 부걱거리는 하얀 포말덩이들, 안개발로 실실이 피어오르는 물보라와 부산스레 돌아치며 꿀렁- 꿀렁거리는 물 트림소리는 정도의 육신 어딘가에서 이상한 욕망을 꿈틀거리게 했다.
 
물 속에는 그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내 이윤정도 있고 여동생 미경이도 있고 그리고 엉뚱하게도 파랑도 있었다.
 
정도는 아내에게로 다가가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 사이로 자꾸만 굵은 물줄기와 파랑이 막아선다. 탄력과 부드러움으로 싱싱하고 기름진 그녀의 가슴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아내는 아내대로 연신 뒷걸음을 쳤고 미경은 물 속에 몸을 담근 채 훌쩍훌쩍 울기만 했다.
 
잠을 깨고서야 정도는 자신이 시트위에 질퍽하게 몽정했음을 발견했다. 창피한 나머지 아줌마가 보기 전에 서둘러 시트를 벗겨 슬그머니 세탁기 안에 집어넣었다. 
  내가 도대체 누구하고 몽설한 거지? 아내랑? 아니면 파랑이랑?
 
“사정은 해서 뭘 해. 그게 섹스의 전부는 아니잖아. 정액이 콘돔 속에 그들먹이 차오르는 그 불쾌감을 넌 몰라. 죽어버린 액체, 하수구를 찾지 못한 썩은 구정물에 지나지 않지. 그 얇은 막이 나와 아내 사이에서 생명의 탄생으로 통한 통로를 차단하고 있단 말이야. 그건 섹스가 아니라 단순한 배설이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수정이고 헛된 짓일 뿐이라고.”
 
석준범이 그토록 저주하는 콘돔과 대상마저 없는 몽설은 너무나도 비슷한 것이 아닌가.
 
“나도 사람이고 여자야. 스물다섯밖에 안된 청춘이란 말이야!”
 
살아있어도 남자구실을 못하는 남편에게서 성적쾌감을 얻을 수 없는 여동생 미경이의 눈물과 한탄도 조금은 이해될 듯도 싶다. 겨우 스무사흘이다. 아내와 갈라진지 고작 스무사흘뿐인데도 이처럼 황당하고 치사한 꿈을 꾸었다. 이불을 끌어안고 사정했다. 아직은 생소한 파랑과……
 
무언가가 부족한 자의 불안과 슬픔 그것은 어쩌면 은파랑의 그 이상한, 사진이라고 말할 가치조차도 없는 조잡한 피사체들에서 나타나는 결여와 부족함에서도 꼭 같이 느낄 수 있었던 기분이다. 가끔 결여와 부족함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아편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결여와 부족이 결코 인생의 궤도에서 탈선하는 명분으로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인생은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그의 이름을 지어주었듯이 인생에는 정도正道가 있다. 정도는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려고, 이름값은 하려고 29년 동안 하루도 되는대로 일상을 소비한 적은 없었다. 인생을 바르게 살도록 해주는.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던 윤리와 양심과 정의 같은 것들로 삶의 균형감각을 오늘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내가 없었던 스무사흘동안에 나에게 무슨 변화라도 생겼단 말인가? 이불위에 사정한 끈적끈적한 몽설이 무엇을 설명하는가? 그냥 정상적인 생리작용이라고 가볍게 지나칠 수는 없는가. 꼭 거창한 이유를 붙여만 하는가.
 
설령 이 몽설이 석준범의 콘돔이나 미경의 성적불만이나 파랑의 이상한 사진과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정도는 그들처럼 불만을 토로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토로해서는 안 된다. 몽정은 몽정일 뿐 어떠한 마음의 변화도 입증하지 못한다고 믿어야 한다. 그 간단한 생리현상을 이유로 아내에 대한 배신, 외도 등 무시무시한 윤리적, 양심적, 결론들을 도출해낸다는 그 자체가 일종의 죄악이다.

'문학 > 소설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9  (0) 2009.09.30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8  (0) 2009.09.22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6  (0) 2009.09.08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5  (0) 2009.09.01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4  (0) 2009.08.27
Posted by 아데라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