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아들 9
장혜영
다른 사람의 것이라면 가까스로 선정한 십여 점의 사진만을 인화했을 것이지만 그녀의 것만은 그 전부를 인화해주고 싶었다. 게다가 아가씨의 부탁도 있었지 않은가. 이 사진들에는 사진의 일반적인 기교를 떠난 사진이라는 존재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위층에서 문소리가 나고 이어 미경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빠. 나 왔어.”
그러나 한시라도 급히 사진을 보고 싶은 마음이 미경의 존재를 지운다.
정도는 다른 손님들에게는 한번도 사용해 본적이 없는, 자신이 촬영한 예술사진을 인화할 때만 사용하던, 콘트라스트효과가 가장 강한 아그파Agfa6호 인화지를 선택했다. 특수효과를 얻기 위한 인화에만 특용되는 사진종이였다. 고급인화지를 써서라도 표백, 블리칭, 스파팅, 등 사진교정과 화장술을 써서라도 그녀가 만족할 만한 훌륭한 사진 몇 장을 건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사진을 뽑았으나 역시 카메라가 심하게 흔들렸거나 노출과다 또는 노출부족현상이거나 화면구도가 굴절되고 잘려나가고 불안정하거나 초점이 맞지 않거나 하는 실패작들뿐이었다.
프로작가인 정도가 보기에도 단두 점, 말라 죽은 고목과 커다란 바위를 담은 사진만이 살릴 만한 가치가 있을 뿐이었다. 강한 직사광작용으로 과도한 콘트라스트현상이 도리어 하늘을 배경으로 한 고목의 위엄과 장엄함을 부각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끼칠 만큼 공포감에 휩싸이게 한다. 정오의 순광順光에서 촬영한 청석靑石은 세월의 무상함과 풍상고초를 느끼게 하는 음울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거느리고 있다. 흐린 날이나 새벽의 사광斜光을 즐기는, 차가운 분위기를 선호하는 정도에게는 신선한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그러한 촬영효과는 그녀가 의도적으로 지향한 것은 아닐 테지만 예술이란 워낙 어떤 의미에서는 우연의 산물이기도 하지 않는가. 별다른 생각 없이 무심코 찍은 사진이 나중에 마음에 들 때가 종종 있다.
두 점의 사진을 놓고 정도는 교정작업에 들어갔다.
사진을 정착액에 담갔다가 2~3분 뒤에 꺼내어 반듯한 면의 플라스틱위에 놓았다. 하늘의 꺼멓게 점으로 박힌 구름 몇 점과 역시 흑점으로 보이는 먼 산의 숲들을 표백시키면 고목의 형상이 한결 부각될 것이었다. 표면을 휴지로 닦은 후 표백제인 청산염을 화면의 다른 부분에 번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농도가 옅은 것부터 붓에 찍어 발랐다.
15분쯤 지나 사진을 다시 정착액에 넣어 표백을 정지시켰다. 이런 과정을 원하는 화면이 얻어질 때까지는 몇 번 반복했다. 스파팅 과정까지 거쳐 인화지위의 미세한 흠집이나 얼룩까지 말끔히 제거하면 화면 전체의 톤을 조화시키자 사진은 제법 한 폭의 훌륭한 예술작품처럼 완성되었다.
사진을 가지고 지상 카운터로 올라왔다. 햇빛 아래서 자세히 보는 순간 정도는 다시 한번 엄습하는 공포감에 전율했다. 고목은 나무가 아니라 무슨 괴물 같았고 청석은 무시무시한 위엄을 아니, 독기를 거느린 채 화면을 꽉 채우며 음흉하게 도사리고 있었다. 인간의 광기를 제압하는 자연의 어떤 거대한 무언의 위용이 과시되고 있는 느낌이다. 그 위엄 앞에서는 그 누구든 공손해지고 오로지 순종만을 해야 할 것 같다.
미모의 아가씨가, 천사 같은 은파랑이 이런 무시무시한 공포의 존재에 눈길을 돌리다니?!
이것은 단순한 카메라의 농간일까 아니면 그녀가 포착하려 의도했던 피사체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파랑을 평가하는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공포를 보았으며 또 보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름다움과 공포!
아름다운 마음과 눈으로 본 공포와 괴물!
자연에 대한 경외감인가. 자연을 인격화시키려한 것일까.
단 한가지 만은 분명하다. 공포는 그녀의 관심사이다.
느닷없는 이러한 결론은 잠시 정도를 당혹스럽게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냥 파랑의 뜻과는 상관없는 카메라의 농간이라고 까닭을 달아주자. 그것이 파랑을 위해서도 정도를 위해서도 편안한 선택이었다. 정말 자연의 수려함을 본 그녀의 아름다움이 카메라의 무시로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녀는 촬영에는 문외한이 아닌가.
“오빠. 이건 무슨 사진이야? 어머, 무서워! 누가 이런 괴물을 찍었지.”
어느새 등 뒤에 와서 어깨 너머로 사진을 건너다 보던 미경이 혼비백산하며 뒷걸음질을 친다.
“야, 이 싸가지 없는 계집애야. 너 지난밤엔 어딜 갔었냐? 또 중국집 배달 녀석이랑……”
“오빠. 날 욕하는 건 상관없지만 진남 씬 욕하지 마.”
“이런, 이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인젠 공개적으로 두둔까지 하냐. 너 정말 그 사람과 관계를 정리하지 않으면 아빠와 죄다 일러바칠 거야.”
“제발 그러지 마. 오빠. 나 죽는 꼴 보지 않으려면 눈 한번 감아줘.”
“네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 데, 넌 유부녀야. 남편이 있는 여자라고. 유부녀답게 행실을 똑바로 가져야 할 것 아니냐.”
“살아만 있으면 남편이야. 남자구실을 해야 남편이지……”
“구실을 하든 못하든 너희들은 법적으로 맺어진 부부야. 부부는 서로에게 책임이 있고……”
갑자기 그들의 대화를 중단하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정도는 동생에게 눈을 흘기며 송수화기를 들었다.
'문학 > 소설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11 (0) | 2009.10.20 |
---|---|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10 (0) | 2009.10.08 |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8 (0) | 2009.09.22 |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7 (0) | 2009.09.15 |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6 (0) | 2009.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