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아들
장혜영
“예. 패밀립니다.”
“여보 저 윤정이예요.”
아내다.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참아왔더니 드디어 그녀가 먼저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윤정의 음성은 워낙 안개 흐르듯 차분하다. 그런데 오늘따라 더구나 낮게 가라앉아 겨우 들릴 정도이다. 게다가 말꼬리를 축축하게 적시기까지 해 심상치가 않은 분위기다.
“왜, 할아버지 병세가 더 악화되기라도 했어?”
도리대로라면 워낙 정도도 진작 병문안을 다녀왔어야 한다. 그러나 가게를 비울 수 없어서 차일피일 미뤄왔었다.
“외할아버지께서 오늘 새벽에……”
말끝을 맺지 못하고 울음으로 대신한다.
“도대체 어떻게 되셨다는 거야? 울지만 말고 말 좀 해봐.”
묻지 않아도 뻔한 대답이었지만 그래도 사람은 최종 확인을 하기 전에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상한 전율이 전신을 홍수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타계하셨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외할아버지께서 타계하시다니? 어제까지도 아무 일 없으시던 분이……”
정도는 입술도 떨리고 수화기를 든 손도 떨림을 감지했다. 병원으로 모시고 가려고 권유해도 환자는 한사코 거부했고 투약마저도 거절했다는 소문은 듣긴 했으나 이렇게 갑자기 타계하실 줄까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나도 진작 내려갔어야 하는데. 후회막급이다.
“알았어. 지금 곧 내려갈게.”
수화기를 내려놓기 바쁘게 정도는 부랴부랴 스튜디오를 나섰다.
“미경아. 네가 며칠 가게를 맡아야겠다. 미미외조부께서 돌아가셨대.”
“언제?”
미경이도 두 눈을 커다랗게 뜨며 경악한다.
“시간이 없어. 내가 없는 사이 가게를 잘 돌봐야 한다. 진남이 녀석과 만나지 말고. 집에도 제때에 귀가하고. 알았지.”
“알았어.”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온 정도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차고에서 차를 끌어냈다.
“어디 먼데 외출하시나 봐요?”
가정부아줌마가 대문 밖까지 나와 관심을 보인다. 그 얼굴에 자식을 멀리 떠나보내는 모친의 정 같은 것이 짙게 어려 정도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마침 미미는 잠들어있었다.
“미미를 잘 부탁드립니다. 며칠 걸릴지도 모르니까요.”
“걱정 말고 어서 다녀오세요.”
사실 그건 불필요한 걱정이었다. 미미에 대한 아줌마의 관심은 아내를 초월할 정도였으니까. 친손녀라고 해도 그런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보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정도는 차를 운전하여 강변도로를 따라 주행하다가 반포대교를 건너 강남을 빠져나왔다. 평일이라 차가 막히지 않는다고 하지만 계룡산학봉리까지 가자면 세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미미외조부의 얼굴이 자꾸만 시창에 얼른거린다. 훤칠한 키꼴에 건장한 몸집, 은백색 머리카락에 인자한 얼굴, 너그러운 미소와 걸걸한 웃음소리, 호탕하고 소탈하고 대범한 기백도 돋보였지만 나라를 위해 성스러운 전쟁터에서 불구자가 되고 평생 애국자의 삶을 살아온 그분의 참된 삶이 정도의 가슴 속에서 존경심을 불러일으켰었다. 일찍이 세상을 떠난 아빠 엄마를 대신하여 손녀 윤정이를 길러 시집까지 보내준, 아내에게는 아빠이고 엄마 같은 존재이다. 그 어려운 세월에 손녀를 위해 3천만 원이라는 거액의 결혼비용까지 부담하신 분이다. 언제나 정도를 보면 윤 서방, 윤 서방하면서 친자식처럼 사랑해주시던 분이다.
정도의 눈에서는 저도 모르게 굵은 눈물방울이 맺히며 두 볼로 이슬처럼 굴러 떨어졌다.
훌륭한 분이셨는데……
삶의 귀감이기도 한 분이었다. 좌절을 겪을 때면 노인에게서 신심을 얻곤 했었다. 아버지와 노인은 정도의 삶에 태양 같은 빛을 비춰주는 향도嚮導적 존재이기도 했었다. 이제 그 태양 하나가 지고 만 것이다. 늘 그분을 보면서 그분처럼 참된 인생을 살리라 용기와 신심을 얻었었는데……
학봉리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날이 어슬어슬 저무는 황혼 무렵이었다. 이곳의 단풍은 경기 서울지방보다 더 붉어서 온 산에 불길이 펄펄 날린다. 자그마한 냇물에 걸린 돌다리 하나를 건너면 기슭으로 세차게 번져 내리는 단풍의 붉은 물결을 배경으로 오붓한 산동네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다. 마을 앞 좁은 계곡의 논배미들에는 아직 추수가 끝나지 않은 황금작황이 늦가을 저녁바람에 의좋게 고개를 저으며 와스스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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