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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24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80 by 아데라


바람의 아들
장혜영




                                                                16장 죽음과 삶

 

                                                                             1

 

 춘삼월이지만 아직 아침기온은 쌀쌀하다. 철 지난 겨울은 아직도 왕성하던 자신의 계절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음지나 숲속 그늘 밑에 잔명을 유지하고 있다. 낮에는 훈훈한 봄바람과 꽃잎들 뒤에 숨었다가도 밤만 되면 어슬렁어슬렁 도심거리로 밀려든다. 아직은 철 이른 꽃잎들을 얼리고 미니스커트속으로 기어들어 방종한 아가씨들을 추위에 움츠러들게 하며 끈질기게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려고 애쓴다.
 그래도 봄은 제 절기를 잊지 않고 완강한 겨울의 저항에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낮이면 완연한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일요일 아침이다.
 날씨도 화창하고 바람도 잔잔하다. 벚꽃은 아직 만개하진 않았지만 개나리나 목련, 진달래꽃 나들이는 지금이 적기다.
 정도는 오늘 사진관문을 닫고 아침 일찍부터 나들이차비를 서둘렀다. 딸애 미미가 항암치료에 효과를 보고 병원에서 퇴원한 뒤로 그는 갑자기 할일이 없어졌고 한가하기만 했다.
 그러던 차 어제 파랑이한테서 데이트청구 전화가 왔던 것이다.
 “내일은 저랑 같이 어딜 다녀와요. 시간이 되시면.”
 “시간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언제쯤 떠날 건데요?”
 어디로 무엇 하러 가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녀와 함께 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지 행선지나 용건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싶었다.
 “아침 일찍요.”
 “알겠습니다. 아침에 제가 차를 갖고 파랑씨를 모시러 댁까지 갈게요.”
 이유도 행선지도 모르는 여행이 도리어 스릴 있고 흥미진진할 지도 모른다. 일요일이라 그러지 않아도 사진관은 쉬는 날이다. 여동생 윤미경이 서울을 떠나고는 그가 혼자서 사진관 일을 했다. 파랑더러 도와주었으면 하고 의중을 떠보았지만 그녀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얼마 전부터는 스스로 어느 주간지의 사진기자로 취직하여 출근하고 있다.
 “아빠. 어딜 가? 미미랑 같이 가.”
 “오늘은 안돼. 할머니랑 같이 집에 있어. 다른 날 어린이대공원에 데리고 갈게. 할머니랑 같이.”
 발을 동동 구르며 조르는 미미를 가까스로 달래 놓고 집을 나섰다.
 파랑은 벌써 대문 밖에 나와 그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그녀의 옷차림은 언제 봐도 세련된 스타일이다. 짙은 하늘색 투피스는 그녀의 지적 분위기에 너무나 잘 어울렸다. 날씬하면서도 단아하고 절제미와 규형미가 돋보였다. 거기다가 중후함과 중량감이 추가되어 절묘한 미의 조화를 이뤘다. 그녀의 존재로 거리가 환하고 꽃들마저도 무색할 지경이다. 밝다기 보다는 은은하고 화려하다기 보다는 절제된 모습이 파랑이었다.
 차가 대문 앞에 다가오자 가볍게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한다. 늘 초면에 만나는 사람처럼 깍듯이 예의를 지켜 정도더러 황망히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본 그녀의 배는 오늘따라 더 육중해 보인다. 임신 8개월째라 헐렁한 투피스를 걸쳤지만 불룩한 배는 가리지 못하고 있다. 그 배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인사를 하기 위해 허리까지 90도로 굽혔을 것이다. 
 “많이 기다리셨죠? 어서 타세요. 미미를 달래 놓고 오다 보니 좀 늦었습니다.”
 문을 열어주었다.
 “아직도 아침날씨는 쌀쌀합니다. 좀 늦게 떠날 걸 그랬습니다.”
 “괜찮아요. 공기가 신선해서 기분이 상쾌한데요 뭐.”
 차분하기만 하던 파랑의 표정이 약간은 들떠 보인다. 무슨 일로 어딜 가기에 좀해서 감정 변화를 표면에 드러내지 않는 파랑이 소풍 떠나는 어린애처럼 들떠 있을까.
 정도도 덩달아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빨리 행선지를 알고 싶다. 그러나 신비감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 꿈틀거리는 호기심을 꾹 참고 있었다. 신비감이 깨지는 순간 들뜬 분위기도 덩달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로 운전할까요?”
 “북한산으로요.”
 북한산?!
 그렇지. 정도의 예측이 십중팔구는 맞아떨어진 셈이다. 북한산엔 지금 산수유와 진달래, 개나리꽃이 한창 필 철이다. 그녀가 차 뒷좌석에 실은 찬합에는 모르긴 해도 맛있는 행찬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봄날의 꽃 나들이! 말만 들어도 설레는 낭만과 환락이 뿌듯하게 느껴진다.
 파랑은 부른 배 때문에 자세를 잡기가 불편한지 등을 의자등받이에 깊숙이 기댄다. 임신한 배가 무슨 북이나 질그릇처럼 덩그러니 앞쪽으로 내밀려 있다. 보기가 민망했지만 파랑의 얼굴은 임산부에게서만 볼 수 있는 본능적 모성애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자애로움과 평화로움, 너그러움과 만족감이 아지랑이처럼 하늘하늘 피어오르고 있다. 얼굴피부마저도 젖살처럼 부드럽고 투명하고 윤택이 돌아 한결 예뻐 보인다.
 처음으로 그녀의 복중에 태아가 자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임신한지 4개월 만이었다. 파랑은 그보다도 훨씬 전에 임신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정도와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단 한번의 정사가 임신으로 이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던 정도는 뜻밖의 결과에 당혹스러웠다. 파랑은 시집을 가야하고 그는 처자를 거느린 유부남인데 그들 사이에 자식이 태어난다는 건 되지도 않을 소리였다.
 “파랑씰 봐서라도 낙태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복중태아의 장래를 봐서는 더욱 그렇고요.”
 낙태를 권고했지만 파랑은 단호히 거부했다.
 “낳을거예요. 그 남자와도 이혼을 했으니 누구 눈치도 볼 것 없어요.”
 “낳아서는 어떻게 양육하려는 겁니까?”
 “전 이미 죽은 사람이에요. 전 언니의 생명을 대신 살고 있어요. 언니의 소원을 꺼주고 싶어요. 언니는 아기를 낳으려다가 목숨까지 잃었어요.”
 “언니 때문에 파랑씨의 인생을 포기한다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단지 언니 때문 만은 아니에요. 저도 여자예요. 아이도 낳고 싶고 엄마도 돼 보고 싶어요.”
 “그건 결혼한 다음에 떳떳하게 할 수 있는 일이잖습니까.”
 “결혼이라는 건 형식에 불과한거예요. 사랑이 중요한거죠.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는다는 건 행복한 일이예요. 콘돔을 사용하지 않고 진정으로 정사를 가진 건 선생님 뿐이에요. 꼭 출산할거예요.”
 갑자기 파랑은 어린애로 변하기라도 한 듯이 어리광까지 부렸다.
 “선생님한테 부담 끼치지 않을 게요. 누를 끼치지 않을거니까 걱정하실 것 없으세요.”
 “부담되고 화가 미칠까 봐 그러는게 아니라 파랑씨와 태어날 아기의 운명이 걱정되어서 그러는겁니다.”
 “제가 다 알아서 처신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정도는 그녀의 강인한 표정에서 파랑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권고와 설득을 포기했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자신에게까지 길게 드리우고 또 한번의 실수가 재현되고 있음을 감지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그 거세찬 흐름을 막아낼 수 없음을 알고 그냥 망연히 상황을 관망하기만 했다. 이런 부도덕한 삶을, 불륜을 일삼으려고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정직하고 결백한 삶을 살려고 시시각각 자신을 채찍질해 왔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불민한 일이 발생한걸까. 돌이킬 수도 없고 지울 수도 없고 씻을 수도 없는 실수를 저질렀을까.
 그런데 문제는 파랑은 이런 삶을 실수라고 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원했고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니 이 또한 어찌된 영문인가? 정도가 실수라고 후회하는 불륜을 파랑은 사랑이라고 자부하고 있으니 말이다.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어쩌면 파랑의 운명적인 처지로서는 불륜을 통하지 않고는 사랑을 구하기가 어려웠던 건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불륜은 파랑이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정도를 낳아준 어머니 채순희처럼. 그네들이 걷는 불륜의 오솔길은 변두리로만 빙빙 돌다가 어느 순간엔가는 남몰래 슬쩍 한길과 이어지고 은밀한 소통을 하면서 자신의 그늘지고 구석진 생명을 연장해가는 것이고. 그 오솔길에서 묻혀온 흙과 검불은 한길을 더럽게 짓밟아 놓지만 노정路程에 지친 행인들의 휴식을 위해 그늘을 찾아갈 수 있는 아주 유용한 갓길을 만들기도 한다. 한길은 자신의 평탄함을 과시하며 먼 길을 가야할 사람들에게 편리를 제공하지만 갓길은 그늘이나 약초를 캐거나 사냥을 할 수 있는 불법공간을 가만히 제공하기도 한다.
 도심을 벗어나 산길에 진입하여 갈림길에 이르자 정도는 창밖의 봄 풍경에 넋이 빠진 파랑에게 물었다.  
 “어느 쪽으로 갈겁니까?”
 “우회전 하세요.”
 오른 편 포장도로로 진입하면 다름 아닌 아내가 수행하는 용천사로 통한 길이다. 그쪽으로 가면 계곡수도 있고 숲도 울창하지만 등산객이나 관광객은 왼편 계곡보다는 적다.
 인젠 더 이상 팽창하는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어딜 가는지 정말 모르세요?”
 “꽃 나들이라는 건 알겠습니다만 딱히 어디로 가는지는……진달래나 산수유는 왼쪽으로 가야 많을 텐데요. 아직은 좀 이른 철이긴 합니다만……” 
 “꽃 나들이가 아니라 사찰로 가는 거예요.”
 “네! 사찰이라고요?”
 정도는 전혀 뜻밖의 대답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파랑은 여전히 길가의 갈참나무숲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있다.
 윤정이 참선하는 용천사로 가는건 아닐까?
 “소문을 못 들으셨어요?”
 “무슨 소문을요?”
 “득도하신 스님의 설법을 들으러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든 지가 언젠데요. 그 스님의 설법을 듣고 그분 앞에서 기도하면 무슨 소원이든지 죄다 이루어진대요.”
 “금시초문인걸요. 어떤 고승이기에?”
 “고승도 아니고 비구니래요. 청석위에서 참선하고 깨달음을 얻은거래요. 전 불자는 아니지만 비구니의 설법이 너무나 의미심장하고 이치에 맞기에 벌써 두 번이나 다녀왔어요.”
 비구니라는 말마디만 정도의 청각에 잡혔을 뿐 그 나머지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물론 용천사에 아내 한사람만 여자라는 법은 없다. 또 주변에 절이 용천사 하나뿐인 것도 아니다. 많은 절들이 있고 또 절마다 여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웬일인지 파랑의 입에서 튕겨 나온 비구니가 윤정을 가리키는 것 같아 가슴이 꿈틀하는 충격을 받았다.
 “다른 데로 갑시다. 절은 뒷날 가기로 하고.”
 정도는 갑자기 아내를 만나기가 두려워졌다. 옆에 파랑을 대동했다는 죄책감에서도 그랬다. 파랑과 그 일이 있은 뒤로 두 번 다시 육체적 결합은 없었지만 윤정의 존재는 나날이 그의 기억 속에서 퇴색해갔다.
 “안돼요. 오늘은 꼭 저를 동행해 주셔야 해요. 복중태아를 위해서라도.”
 파랑은 생전 하지 않던 교태까지 부리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 온다. 그만 온몸이 엿가락처럼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어느 절인데요?”
 “용천사요.”
 용천사!
 예측대로다. 윤정이 출가한 절이다.
 그러나 이미 차머리를 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게다가 파랑의 전에 없던 애정공세까지 받고나니 더구나 물리칠 용기가 없다.
 에라. 죽어 봐서 죽는가. 내친 김에 한번 당해 보자. 다행이도 파랑은 득도한 비구니가 정도의 아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것 같다. 윤정도 파랑을 지금쯤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제야 정도는 전에 없이 용천사로 이어진 길에 사람들의 행렬이 장사진을 이룬 것을 발견했다. 윤정이 도대체 그 청석위에서 무슨 깨달음을 얻었기에 불자들이 이토록 줄을 잇고 있을까. 이제는 그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차를 산 아래 주차장에 대고 도보로 언덕길을 올라갔다. 처음 윤정을 이 절에 데려다 주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가파른 비탈길에서 자주 앉아 쉬어 갔었다. 그때는 사람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었다. 일요일도 아니었다. 오늘은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잠시 앉아서 다리쉼을 할 곳도 없다.
 사찰의 대웅전 뜰에는 벌써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득도승의 불법강의를 고대하고 있었다. 법당 안이 좁아 아예 거대한 석불 밑에 강단과 마이크를 설치하고 앞뜰 바닥에 신도들이 자리를 잡도록 배치해 놓았었다. 경청하러 온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앞뜰은 발 디딜 자리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 밀려들고 있다.
 천만다행이었다. 아내가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남편을 알아 본다는건 바다 밑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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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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