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아들
장혜영




                                                         15장 배신자들

 


                                                                      1

 

 최 부장에게서 해고통지를 받았을 때 준범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었다.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최 부장이 해고서류를 그의 앞으로 내밀며 사인을 하라고 강요하자 그제야 사실임을 알았다.
 “무슨 이유로 절 해고하시는 겁니까?”
 “나도 잘 몰라. 사에서 결정한 거니까.”
 “잘리더라도 이유는 알아야 할거 아닙니까.”
 “말 안해도 석 PD가 잘 알텐데……”
 “전 정말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왜, 그 김하늘인가 뭔가 하는 아가씨 있잖아.”
 “네. 그런 엑스트라배우가 있습니다만……”
 “그 아가씨가 사에 신고를 했거든.”
 “네! 신고요?”
 “이걸 봐. 몰래카메라로 촬영한 테이프야. 석 PD 계좌 복사본도 보내왔어.”
 준범은 김하늘의 돌연적인 작태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녀에게서 돈을 받고 호텔에서 정사를 벌이긴 했지만 그 대가로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던가. 그것으로 교환은 원만한 등가로 처리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몰래카메라까지 이용해가며 정사장면을 촬영했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사실은 그런 게 아니라……부장님께서 한번만……”
 “너무 늦었어. 사측과의 타협이 어려울 거야. 검찰수사에 이첩하지 않은 것 만으로도 다행인줄 알아. 이만해도 사에서 많이 봐준 셈이지. 사에 고맙다고 인사해야 할걸.”
 방송사 PD의 비리나 금품수수사건은 비일비재였지만 신고만 들어오면 가차 없이 해고처분이 강행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있다. 최 부장의 말대로 검찰수사에 넘겨지지 않으면 행운인 셈이다.  
 준범은 벌써 이틀째나 과음후유증으로 간장이 붓고 위장염이 재발하여 꼼짝 못한 채 집에서 앓고 있었다. 알코올에 위장이 벌집이 되었는지 음식물 섭취마저 불가능해 벌써 여섯 끼나 꼬박 굶은 채로 생수나 꿀물로 간신히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병원에도 가기 싫다. 약국에 다녀 올 기운조차 없다. 그냥 집에 있던 약들을 아무거나 주워 먹었을 뿐이다. 아내가 집을 떠나 친정으로 간지 두 달이 넘어 병 수발을 들어줄 사람조차 없다.  잣죽이나 전복죽 같은 것을 먹고 싶었지만 생각뿐이었다. 예전에 아내 정실은 남편이 과음한 날이면 꼭 잣죽이나 전복죽을 끓여 숙취를 풀어주곤 했었는데……
 김하늘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그런 전화번호가 없다고 한다.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 분명하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그런 못된 짓을 한거지? 강복녀의 손에서 획책된 음모일 것만 같았다. 강복녀가 김하늘을 고용했을 것이고 그 대가로 엄청난 사례금을 주었을 테지.
 띤따띤따-따라라딴따-띤따-
 불현듯 휴대폰 벨이 울렸다. 정적만 군림하던 방안에서 벨소리는 유난히 쟁쟁했다.
 김하늘의 전화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준범을 긴장시켰다. 회사에서 해고당하자 그 많던 친구들도, 연예계지망생들도 약속이나 한 듯이 거짓말처럼 하루아침에 그의 앞에서 사라졌다. 종일 가도 전화 한통 넣어주는 사람이 없다.
 통화버튼을 눌렀지만 상대방의 목소리는 비어 있고 전류의 흐름소리만 쉬익- 들린다. 웬일인지 느낌이 으스스하다. 나한테 좋은 일이 생길 리는 만무하고.
 “말해. 왜 말 안해. 너 하늘이 맞지? 지금 어디 있어? 당장 그리로 갈 테니 어디 있는지 말해……”
 “석준범 씨.”
 잔뜩 흥분해 있던 준범은 상대방의 싸늘하고 냉담한 반응에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낮으나 정확한 목소리의 톤에는 섬뜩한 가시가 돋아 있었다.
 “진정하고 내 말을 좀 들어 보세요.”  
 예의마저 깍듯이 지켰지만 어조에는 여전히 경멸이 번뜩인다. 귀에 익은 음성이다 싶으면서도 이름은 금시 떠오르지 않는다.
 “아가씨가 누군지 먼저 신분부터 밝히시죠. 그리고 용건이 뭡니까?”
 “용건부터 말씀드리죠. 지금 속히□□병원으로 오세요.”
 “거긴 왜요. 아가씨가 누군데 나오라 말라 하는 겁니까. 데이트라면 몰라도.”
 “김정실 씨가……”
 “우리 집사람 이름은 어떻게 알죠!”
 “알다 뿐이겠어요. 아주 막연한 친분관계죠. 부인께서 지금 그 병원에 입원하셨거든요.”
 “뭐라고. 집사람이 무슨 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겁니까.”
 준범은 침대위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으나 머릿속에 파도가 출렁거리며 현기증이 발작했다. 도대체 혈액 속에 알코올이 얼마나 섞였기에 도저히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가.
 “나와 보면 아실 거예요. 꼭 아셔야 될 일이니까. 그럼 병원에서 봐요.”
 “이 봐. 당신 도대체 누구야? 너 강복녀 맞지. 아니, 은미라지? 은미혜동생……”
 그러나 정체불명의 아가씨는 이미 통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뒤였다.
 아무런 확증도 없다.  
 심증도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냥 어렴풋한 예감뿐이었다. 그녀가 죽은 은미혜의 동생 은미라일 거라는 막연한 추측뿐이었다. 전화로 한두 번 들은 적 있는 목소리인데도 오늘 따라 귀에 설기만 하다.
 알코올 탓인가?
 아니면 그녀가 음성을 변조한 탓인가?
 아내가 정말 입원했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준범을 집에서 유인해 내려는 미라의 간교한 계책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준범은 두렵지 않았다. 이미 올 데까지 왔고 더 물러설 자리도 없었다. 차라리 그녀와 독대하여 판가름을 하는 쪽이 나을 것 같다. 전에는 사업 때문에 접전을 차일피일 미뤄왔지만 지금은 해고당하여 할 일도 없다. 그녀 또한 아버지와 정실을 폐인으로 만들려던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으니 이제 공격목표는 준범이에게로 확정되었을 테고.
 “그래. 나가마. 내가 널 무서워 할줄 아냐. 어디까지라도 나가주마. 지독한 계집 같으니!”
 준범은 씨근벌떡 욕설을 퍼부으며 벌컥벌컥 옷을 주워 입었다. 현기증 때문에 눈 앞이 어지러웠지만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전번 설전 때처럼 초반 기싸움에서부터 밀리면 안 된다. 쪽팔리게.
 냉장고 안에서 우유 한 컵을 꺼내어 컵에 따라 마셨다. 마셨다기보다는 그냥 꿀떡꿀떡 삼켰다. 승부를 겨루려면 기운부터 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병원은 준범이네 집에서 멀지 않았다. 택시를 잡으니 30분도 되지 않아 도착했다. 운전하기조차 싫어서 차는 집의 차고에 버려둔 채 나왔다.
 병원에 도착해 시험 삼아 카운터에서 환자 명단을 체크해 보니 과연 아내의 이름이 적혀 있다.
 “208호실입니다.” 
 “실례지만 무슨 병으로……”
 “오늘 낙태수술을 합니다.”
 간호사아가씨의 대답 리듬은 행사장안내도우미들처럼 노래하는 듯한 어조다.
 “낙태수술이라고요?!”
 “지금쯤 아마 수술실로 들어갔을 거예요.”
 아내가 낙태를 해?!
 준범은 어두운 골목길에서 괴한의 주먹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떨떨한 기분이다. 몸매관리 어쩌고 온갖 구실을 대면서 임신을 거부했던 정실이 아니던가. 남편인 그도 정실의 그 괴벽한 고집 때문에 콘돔을 벗어던진 진정한 섹스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누구의 자식을 임신했단 말인가?
 도박에 가산을 날리고 음탕한 불륜을 저지른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임신까지 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콘돔 만큼 남편과의 사이를 멀게 했던 정실은 누군가에게 콘돔을 사용하지 않도록 허락한 게 분명하다.
 이름 할 수 없는 배신감과 모욕감이 욱 치밀었다.
 단숨에 2층 수술실로 달려 올라갔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올 동안을 기다릴 만한 인내성마저도 상실했다.
 마침 한 환자가 간호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수술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몸에 환자복을 걸쳤지만 준범은 첫눈에 환자가 아내 정실임을 알아 보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만 같았다. 눈 앞이 캄캄해지고 어지럼증이 발작하여 복도에서 비틀거렸다. 벽을 짚고서야 겨우 넘어지는 사고는 면할 수 있었다. 무릎을 꿇고 복도에 쭈그린 채 준범은 우-웩 우-웩 구역질을 했다. 파도처럼 밀려들던 배신감이 이제는 분노와 저주로 변하여 가슴속에서 흰 포말을 부걱부걱 게워내기 시작했다.
 “나쁜 년!”
 준범은 간신이 몸을 일으켜 계단을 내려왔다. 현기증 때문에 몇 번이나 난간을 잡고 쉬어야 했다.
 또다시 술 생각이 난다. 어디 가서 실컷 폭음하고 고주망태가 되어 불쾌한 모든 기억들을 망각하고 싶었다. 아버지회사의 파산, 아내의 타락, 회사에서의 해고……
 띤따 딴다 따라라란따-
 금방 병원 문을 나서자 또 전화벨이 울린다. 밖에서 울리는 전화벨소리는 방안에서보다는 가늘었지만 그 선율은 소름끼칠 만큼 또렷했다.
 심드렁하게 전화를 귀전에 가져다 대자 또다시 아까 그 아가씨의 음성이 수화기에서 기다리고 있다.
 “보셨죠? 기분이 어때요? 언짢으시죠.”
 “너 미라 맞지? 강복녀.”
 “판단능력이 여전하신 걸 보니 아직도 충격이 그리 크지 않으신가 보네요.”
 “너 지금 어디 있어? 꼼짝 말고 거기서 기다려. 나 지금 그리로 갈 테니까. 어디 해보자 이거지. 좋아. 오늘 네 소원 꺼주마.”
 “싫어도 응하셔야 하고 좋아도 응하셔야죠. 그밖엔 준범 씨에겐 다른 선택이란 없을 거니까요.”
 “쓸데 없는 말 그만 지껄이고 어서 네가 있는 장소나 대.”
 “바로 준범 씨의 집 길 건너편의 삼겹살집에 있어요. 오실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택시 타고 오세요. 택시가 병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요. 요금은 이미 선불했어요.”
 “그래 오늘은 어디까지라도 갈게. 걱정 마.”
 “용기는 살아서……”
 이번엔 준범이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시시콜콜 전화로 닭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만나 승부를 가르고 싶다. 누가 죽던지.
 문 앞에는 거짓말처럼 콜택시 한 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네가 치는 올가미에 기꺼이 목을 들이밀 테니 어디 재간 있는 대로 설쳐 봐라. 어차피 나한테는 택시요금 지불할 돈도 없으니까. 병원으로 올 때 택시요금으로 지불한 5천 원이 준범의 지갑을 지키던 마지막 금전이었다. 미라의 손바닥 안에서, 그녀가 원격조종하는 대로 지배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불쾌했지만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결판을 내고 나면 모든 건 잇달아 해결될 터이니 걱정이 뭔가.
 고기집 안에 들어섰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랜만에 들어선 식당이라 고기집 주인도 서빙도 죄다 바뀌어 낯설기만 했다.
 “석준범 선생님이시죠?”
 마담이 어떻게 알고 먼저 알은 체 한다.
 “네. 그렇습니다만……”
 “저쪽입니다.”
 홀 서빙의 안내를 받으며 구석 쪽으로 걸어갔다. 거기 식탁위에는 벌써 식사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그 아가씨는요?”
 “어느 아가씨 말씀이신지요?”
 “여기서 절 기다리던 아가씨 말입니다.”
 “선생님을 기다린 사람이 없는데요.”
 “그럼 이 음식은 누가 주문한겁니까?”
 “어떤 고객님께서 전화로 예약하셨거든요. 석준범이라는 남자 손님 한 분이 오실 거라며. 계산은 그 분이 카드로 하실 거라면서요.”
 “얼씨구. 놀고 있네. 나랑 숨바꼭질을 해보자 이거지.”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소주나 네댓 병 올려요.”
 “아가씨의 당부대로 이미 네 병을 올렸거든요.”
 “좋아. 주도면밀하고 완벽함을 과시하고 싶다 이거지. 정성이 지극해서 내가 마셔준다. 오늘은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해줄 테니까 무슨 고명한 수가 있나 두고 볼 테다.”
 준범은 식탁에 마주앉자 홀 서빙이 구워주는 삼겹살을 부추에 싸서 입이 미어지게 집어 넣었다. 그러잖아도 잔뜩 굶었던 차라 끝도 없이 들어갔다. 음식냄새만 맡아도 속에 메스꺼웠었는데 오늘은 무슨 영문인지 그 증상마저 말끔히 사라졌다.
 공짜라서 그런가?
 분노 때문에 미각마저 마비된 것일까?
 아무튼 포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소주도 달게 넘어간다.
 “석준범 씨 어느 분이십니까?”
 머리에 붉은 헬멧을 쓴 택배원이 식당 안에 성큼 들어서며 큰소리를 지른다.
 “전데요.”
 준범은 느닷없는 꽃 배달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택배원이 넘겨주는 자그마한 꽃바구니를 받고 사인을 해주면서도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꽃바구니 속에 편지봉투 하나가 들어 있기에 꺼내 보았다. 봉투 겉면에 깨알 같은 글씨가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준범 씨!
 안녕하세요.
 절 아직도 기억하시죠? 미혜에요. 바로 이 자리에서였죠. 준범 씨한테 삼겹살을 구워드렸고 술도 따라 드렸잖아요. 우리 아기도 준범 씰 보고 싶어 해요. 핏덩이이긴 하지만……

 메모지를 든 준범의 손이 저도 모르게 화들화들 떨리기 시작했다. 전신에 두툼한 얼음이 쫙 깔리며 오싹해 났다.
 봉투 안에서 무언가가 식탁위에 툭 떨어지는 바람에 준범은 흠칫 놀라기까지 했다.
 확대된 한 장의 컬러사진이었다. 사진 속에는 허리에 행주치마를 두른 은미혜가 식탁 앞에 앉아 활짝 웃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옛날 이 식당에서 홀 서빙으로 근무할 때의 미혜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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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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