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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27 장편연재 "붉은아침" 4 by 아데라

장편연재 "붉은아침" 4
제1부 백년빙곡冰谷

장혜영

 

                                                           2

 

 “보셔요.”
 아내가 깨우는 소리에 종수는 부스스 눈을 떴다.
 “머땜시 그랴? 졸려 죽것는디……”
 귀찮은 듯 이맛살을 구기며 다시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소로 나갈 시간이 되었어요. 오전에 하남마을로 순찰을 내려가 봐야 된다고 하셨잖아요.”
 “으매! 그라제. 내가 깜박혔어라우. 진즉 깨워줄 것이제.”
 종수는 졸음이 무겁게 매달린 눈을 손등으로 부비며 이불 속에서 기어 나왔다. 머리맡에는 깨끗이 빨아 다듬이질까지 한, 눈부시게 하얀 비단 속옷이 정갈하게 포개져있었다. 하루도 거름 없이 깨끗한 속옷을 씻어 입히는 아내의 정성을 대하는 순간 종수는 오늘따라 마음 한 구석이 뿌옇게 그늘졌다. 좋으나 궂으나 2년이나 속살을 부비며 살아온 조강지처였다. 처녀 때는 서울 양반가의 규수로서 인근에 소문난 옥모의 아가씨였다. 그런데 시집오던 그 해에 느닷없이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생긴 마마자국 때문에 지금은 용모가 추하다 못해 험상궂기까지 했다. 쳐다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고 밥맛마저 잃어졌다. 게다가 결혼 한지 2년이나 되었건만 복중에 태기마저 없어 아내에 대한 종수의 미련은 날이 갈수록 요원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에 대한 종수의 미련이 증발할수록 그녀의 애정은 더더욱 깊어만 갔다. 등불을 켜들고도 트집거리 하나 발견할 수 없을 만큼 그녀는 아내의 본분을 완벽하게 수행했으며 현처답게 남편을 신 받들 듯이 정성껏 모셨다.
 “꿀물 드세요. 지난밤엔 제대로 주무시지도 못하신 것 같은데……”
 아내는 긴 삼회장 치마꼬리를 장판바닥에 가볍게 끌며 아미를 다소곳이 숙였다.
 종수는 그녀가 건네주는 꿀물그릇을 말없이 받아들고는 단모금에 비웠다.
 그녀 말처럼 종수는 지난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것은 오늘이 그가 그처럼 고대하던, 곱단이를 첩실로 맞아들이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하루만 지나면 한 이불 속에서 그녀의 부드러운 속살을 맛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그를 흥분시켰고 그 흥분이 졸음을 빼앗아갔던 것이다. 오래전부터 곱단이의 청초함과 순박함과 민들레꽃 같은 자연적인 미색이 그를  유혹했었다. 그래서 큰마음을 먹고 아버지에게 자신의 뜻을 말씀드렸으나 부친은 비천한 소작농가문이라며 반대했다. 대신 양반가의 규수를 중매했던 것이다. 규수의 출중한 미모는 그의 가슴속에 남아 있던 곱단이에 대한 미련을 말끔히 가셔주었다. 그러나 그 환락이 한 달도 못가서 불행과 이어질 줄이야 누나 알았으랴. 심한 천연두를 앓고 난 아내는 어느 날 갑자기 보기 흉한 곰보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그의 마음은 또다시 곱단이에게로 슬금슬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녀를 손안에 넣으려고 분가할 때 아버지에게 간청하여 곱단이네 소작지까지 함께 챙겼다. 소작지만 손에 넣으면 그 땅을 부치는 소작농을 딸려 보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종수는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속옷과  제복을 입고 옆구리에 군도와 권총을 차고 다리에 각반을 둘렀다. 아내는 말없이 옆에 시립한 채 남편을 일일이 거들어주었다.
 마루에 내려가 구두를 신고 일어서자 어느새 아내는 두 손으로 군모를 받쳐 든 채 대령하고 있었다. 오늘 따라 그러는 아내가 측은하고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다.
 당신이 곰보가 아니던지, 곰보가 되었더라도 아이만 낳아 줬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그러니 날 무정하다고 원망하지 마.
 종수는 아내의 괴물 같은 얼굴을 흘끔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를 보기가 민망하여 속으로나마 자신의 그늘진 양심에 이유와 변명을 달고 싶어졌다.
 “오늘 강촌마을서 사는 곱단일 집따 들일락 했응께 그라게 알고 있어라우.”
 대답이 없다. 진작 알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종수는 아내가 말없이 돌아서며 옷고름으로 눈가를 찍는 모습을 눈결에 보았다. 그런 아내를 외면한 채 고개를 수굿하고 집을 나와 버렸다. 원래는 곱단이를 첩실로 맞아들이는 간단한 혼례식 같은 걸 치르려고 생각했다. 아무리 빚 대신 맞아들이고 천출 소작농이라 할지라도 처녀가 아닌가. 가랑머리는 풀어서 틀어 올려줘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예식이 아내의 가슴에 못으로 박힐까봐 단념하고 말았다. 첩실의 도래를 말없이 허락한다는 것만 해도 아내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곱단의 불만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천천히 풀어주어도 될 것이다.
 아무튼 곱단이가 제 발로 순순히 걸어 들어와 줘야 할 텐데.
 거리에 나서자 행인들은 누구라 없이 그를 보고 허리를 굽실거렸다. 종수는 중키에 암팡진 체구였지만 얼굴에는 항상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다녔다. 손아래 사람들의 인사에는 “그랴, 오냐.”하고 응대를 하며 웃음으로 받아주었고 손윗사람들을 만나면 꼭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서 공손히 허리를 굽혀 맞절을 했다. 종수는 그러는 것이 동방예의지국의 백성이 지켜야 할 당연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하남읍 주재소는 마을의 중심인 삼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종수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주재소의 순사들이 모여서 출동준비를 끝마친 뒤였다.
 “빠가! 한상 왜 이렇게데쓰 늦어쏘까? 젊은 사람이노!”
분서에서 내려온 야마토경부가 손으로 코밑수염을 비비꼬며 눈을 부라렸다. 난쟁이 키에 뚱뚱한 그는 마치 축구공 같았다. 근시안경을 통해 보이는 두 눈은 두꺼비눈알처럼 툭 불거져 보였다.
 “죄송합니다!”
 종수는 군화뒤축을 딱 소리 나게 부딪치며 차렷 자세를 취하고는 뺨을 맞을 준비를 했다.
 “다음날부터노 일찍일찍이노 출근해쏘까.”
 “하이!”
 야마토의 고양이발톱 같은 손아귀에 뺨을 맞지 않은 것만 해도 재수가 좋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제군들이노 자기가 맡은 마을로 내려가소까 징병자들이노 출하를 거역하는 자들이노 일일이노 조사해쏘까. 잡아들일 자노 잡아들에데쓰. 압수할 양곡은 압수했쏘까. 알았소까?”
 “하이!”
 일렬횡대로 늘어선 순사들은 야마토의 훈시에 일제히 군례를 붙였다.
 “한상이노 김상이노 데리고데쓰 읍내노 맡아소까. 오늘은 용서해서노 안 돼쏘까.”
 “하이!”
 종수는 군례를 붙이고 파리하다 못해 말라비틀어진 김 순사를 뒤에 달고 주재소를 나섰다. 야마토의 그런 안하무인과 오만함이 눈꼴사나운 적이 많았지만 벌어먹고 살려니까 참는 수  밖에 없었다.
 거의 날마다 돌고 돌아도 주재소 감방의 수감자만 늘어날 뿐 상부에서 떨어진 징병숫자를 채울 수 없었다.  출하곡도 자원납부는 둘째 치고 강제적 압수에도 불구하고 절반 숫자에도 미치지 못했다. 징병대상자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참군을 거부하거나 심지어는 도주까지 했다. 출하곡은 양곡이 없다는 구실을 대고 납부를 거절했다.
 종수는 마을 맨 끝의, 거의 찌그러드는 오막살이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곱단인 지금쯤 강촌마을을 떠나 우리 집으로 오고 있을까? 아내가 순순히 용납해 줄까? 이런 궁리를 하며 문고리를 잡았다. 노루발쪽을 매단 문고리는 손에 닳아서 반들반들 윤기 가 돌았다.
 “갑산댁 함씨, 지겠지라우?”
 “뉘깅가?”
 담이 끓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간신히 새어나왔다.
 “주재소에서 나온 한종수구먼유.”
 갑자기 안에서 우당탕퉁탕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잠잠해졌다. 징병독촉 때문에 주재소에서 출동한 줄 알고 할머니의 손자가 몸을 숨기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콧구멍만한 단칸방에서 숨으면 어디 숨을 것인가.
 출입문이 어찌나 낮은지 허리를 굽혀도 안 되어 거의 기어들어가야만 했다. 방 안도 천장이 낮아 허리를 곧게 펼 수가 없었다. 천장은 비가 새어 썩은 서까래가 처져 아래로 데룽거리고 허물어진 벽체로는 밖이 훤히 내다보였다. 오래된 환자가 거처하는 방에서만 나는 그런 퀴퀴하고 불결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바람에 뒤따라 들어온 김 순사는 손으로 입과 코를 움켜쥐었다.
 갑산댁 할머니는 누덕누덕 기운, 손바닥만 한 넝마조각으로 여윈 하체를 가린 채 반쯤 상반신을 일으키고 종수를 망연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아직 이마에서 젖내가 풍기는 어린 손자 녀석은 경황실색하여 할머니의 등 뒤에 숨어 전신을 후들후들 떨고 있다. 병색이 짙은 할머니의 얼굴은 누렇게 떴고 해골만 앙상했다.
 “순사나리, 우리 쟤마는 지발 쫌 그 징베인지 머인지한테서 빼줌세나. 쟐 부뜨러가뭉 이 늙은 노데기가 혼차설라무니 어케 살라는검메?”
 “오늘은 안 되오. 벌써 밀린 지가 며칠이오.”
 김 순사는 다짜고짜 구두를 신은 채로 구들로 올라가 갑산댁의 등 뒤에 쭈그리고 앉아 떨고 있는 손자의 덜미를 움켜쥐었다.
 “순사나리, 지발 이 늙은 것의 살페 쪼꿈 바줌세. 그리뭉 하널이 나리를 도바줄기요.”
 할머니는 김 순사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늘어졌다.
 “왜 이래 이 할망구가! 죽고 싶어. 디럽기시리!”
 김 순사는 군화발로 사정없이 늙은이의 가슴을 내질렀다. 갑산댁은 어이쿠!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렁 넘어졌다. 그 순간 이불이 벗겨지며 헌 넝마속옷 한 벌로 겨우 하신을 가린 앙상한 하체가 드러났다. 김 순사는 징그러운 듯 구들바닥에 대고 가래침을 퉤 내뱉었다. 그러나 갑산댁은 몸을 일으키더니 또다시 김 순사의 바짓가랑이를 이악스레 부여잡는다.
 “이 할망구가 정말 살아 있는 게 원수 같은가!”
 총개머리가 어느새 허공중에 쳐들렸다.
 “그만 혀. 노인네 하꼬 그게 먼 무례헌 지껄이냐. 김 순사는 어여 이 청년이나 델꼬 밲에 나가 지달코 있어.”
 종수가 제지시켜서야 김 순사는 난동을 중지하고 청년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함씨, 증말 미안허지라우. 즈그들 맘맹키로는 함씨의 손자를 징빙 보내고 잡지 않으나 국가대사이고 공무집행잉께 헐시 없구먼유. 손주가 군에 간닥캐도 지방정부에서 냉중에 함씰 잘 보살피 디릴 팅께 너머 걱정 마이소. 그라고 이 돈으로다 약이나 함 첩 지어 묵으이다.”
 종수는 호주머니에서 1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어 솔 껍질 같이 거칠고 갈고리처럼 휘어든 노인의 손에 쥐어 주고 밖으로 나왔다. 고독한 늙은 노파의 정상은 불쌍했으나 그렇다고 국가대사를 그르칠 수는 없다고 자신의 우울한 기분을 위안했다.
 몇 곳을 더 돌아다니며 징병을 거부하는 자 일여덟 명과 출하양곡 몇 섬을 압수해 갖고 주재소로 돌아왔다. 주민들은 길가에 그들의 그림자만 얼씬해도 고양이를 본 쥐들처럼 골목으로 비실비실 피해 달아났다.
 우리가 뭐 약탈을 일삼는 강도라도 되는가. 공무집행을 하고 있을 따름인데. 기분이 불쾌했다.
 그때까지도 곱단이에 대한 소식은 없었다. 집을 나올 때 행랑채의 마당쇠한테 곱단이가 도착하면 금방 달려와 소식을 전해달라고 부탁해 놓았던 것이다.
 제 발로 순순히 걸어 들어오지 않으려나. 끝내 내가 몸소 출동해서 끌고 와야……
 아무튼 서두르지 말고 저녁때까지 기다려보기로 작심했다. 종수는 그렇게 조급한 성미는 아니었다. 제법 느긋한 인내와 여유를 부릴 줄도 알았다. 그러나 일단 인내의 어느 한계를 넘기만 하면 견고한 인내의 방죽도 무너뜨리는 놀랄만한 광기를 과시했을 뿐만 아니라 뿌리까지 뽑아내는 끈질김을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늦게 달아오르지만 일단 달아오르기만 하면 쉽게 식을 줄 모르는 성미였다. 평소엔 얼굴에 미소가 떠날 줄 모르고 사근사근한 면양 같다가도 성만 나면 독기를 뿜는 한 마리의 늑대로 변했다.
 혹시 곱단이와 덕구가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더니 그게 정말인가? 덕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걸까? 그도 아니면 덕구란 놈이 언감생심 곱단을 넘보고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걸까? 그래만 보라지. 내가 제 놈을 가만둘 것 같은가. 그러잖아도 덕구의 불손한 눈길이며 언동들이 진작 눈에 거슬려 버릇을 고쳐 줄 기회만 노리고 있는 중이었다. 도저히 무서운 거라고는 없는 놈이었다.
 지넘이 머신디 감히 내캉 대적혀! 죽고 잡지 않으면 잠자코 있을 거이제!
 해가 서산에 기울고 저녁노을이 은파벌을 붉게 물들였지만 곱단의 소식은 여전히 없었다. 종수는 금방이라도 둑을 넘어나려는 인내심을 가까스로 붙들고 있었다.
 강북으로 갔던 순사들이 촌민 대여섯을 잡아가지고 돌아왔다. 모두 늙은이들이었다.
 키가 작은 야마토는 발끝을 빳빳이 세우더니 다짜고짜 키꺽다리 박 순사의 뺨을 후려쳤다. 박 순사는 쓰러질 듯이 옆으로 비틀거리다가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고 허리를 곧게 펴며 “하이!”한다.
 “왜노 출하곡이노 한 섬도 없소까?”
 “최 서방네는 식구가 열두 명이나 되는데 쌀 한 말밖에 없는지라…… 정 영감네는 감자 반 섬 뿐이고…… 그래서 사람들만 잡아왔습니다.”
 입귀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박 순사는 닦을 엄두마저 내지 못한 채 그냥 말뚝처럼 굳어 있었다.
 “빠가야로! 이따위노 늙다리들데스 잡아다가노 머해쏘까! 군대에노 보낼 수도 없는데쓰, 전선에서노 우리 관동군이노 백성들을 위해 피를 흘리고노 굶고 있는데쓰. 먹을 걸 보내야노 싸울 게 아니데쓰, 당장노 돌아가서노 쌀을 거더왔쏘까! 감자 한 알이노 쌀 한 알이노 조쏘까. 천황폐하의 군대노 굶어죽어서야 되거소까. 쌀이노 걷어오지노 못하문  제군들의 목숨이노 내노아쏘까!”
 “하이!”
 박 순사는 수하 인원 두 사람을 데리고 허둥지둥 밖으로 달려 나갔다. 사실 그들도 기아로 죽어가고 있는 백성들에게서 고혈을 짜내자니 양심의 가책을 느낀 모양으로 풀이 죽어 있었다.
 “한상이노 징병 갈 자들을 잡아왔소까 잘해쏘까! 소까! 오늘이노 집으로 돌아가소까.”
 다행히도 야마토는 토끼수염 같은 콧수염을 쭈뼛 곤두세우며 벌쭉 웃었다. 종수의 어깨까지 툭툭 두드렸다.
 한종수는 맥없이 소에서 나왔다. 또 하루를 무사히 보낸 셈이었다. 금년 여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일이 어찌나 많은지 눈코 뜰 새조차 없이 분망히 돌아쳐야만 했다. 아무래도 전세가 일본 측에 불리한 눈치다.
 사실 사람들의 비난의 눈길을 대할 때마다 그들에게 미안한 생각도 없지 않았고 그래서 이놈의 노릇을 그만두자고 생각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험악한 난세에 순사라도 한자리 하니 살아가는 데는 도움이 많았다. 정말이지 돈과 벼슬이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세월이었다. 일본의 승리는 그에게도 유익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돼 보려고 순사노릇도 열심히 했다. 그러노라니 양심의 가책 또한 그만큼 커졌다.
 땅거미가 슬슬 내리며 날이 어두워지자 종수의 천성적인 인내와 여유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고대하던 오늘인가. 마음만 먹었으면 솔직히 빚이라는 명분 하나로도 2년 전에 벌써 곱단이를 첩실로 맞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곱단의 몸뚱이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었다. 그녀 자신이 더는 갚을 방도가 없는 스스로의 빚에 눌려, 첩실로 들이려고 해도 반항이나 거절을 못하고 순종하기를 기다렸다.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까지 잃고 고아가 된 그녀는 더 이상 3년 동안 산처럼 쌓인 빚을 갚을 방법이 없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며 그 깨달음은 주인의 첩실요구가 명분이나 도의를 떠났다는 이유로 거절하거나 반항할 최후의 방선마저 무너졌음을 알려주는 계기로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확신이 종수더러 자신이 몸소 나서지 않더라도 그녀가 제 발로 순순히 찾아들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확신과 믿음이 황혼과 함께 허무하게 무너지게 되자 종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종수는 퇴근하기 바쁘게 자전거를 타고 강촌마을로 향했다. 오늘은 강제로라도 곱단이를 집안에 들여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이미 빼어 든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 넣을 수는 없었다.
 우선 아버지한테 들렀다. 제 발로 걸어들어 왔다면 몰라도 강제로 끌고 갔다면 동네 여론이 무성할 것이기 때문에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아버지께 미리 여쭈어야 했다. 아버지 몰래 데려갔다가는 책임추궁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안방 도배를 하던 소작농 최복만이 그를 보자 맨발바람으로 마루 아래로 내려와 땅바닥을 핥을 듯이 허리를 굽실거리며 공손히 인사를 올린다. 종수는 최복만을 볼 때마다 집에서 기르는 삽살개가 떠올랐다. 아니 솔직히 주인에 대한 그의 충성은 개보다도 더 지독했다.
 “작은 나리께서, 오셨습니껴?”
 “그랴유. 아버님께선 안에 지겐가?”
 “나리께선 그 머시냐 베돌빙이 돈닥캐서 논얼 돌아보신닥꼬 오나적에 나가신대루 아즉 댕게 오들 않았구먼유.”
 “근디 요 방은 머땜시 뜽금없이 도밸 볼르는깅가?”
 “둘째 도련님께서…… 아, 아니 그게 앙그라……”
 부지중 말을 실수한 듯 최복만은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직 40대의 중년 나이인데도 벌써 체소한데다 허리까지 꼬부장하고 얼굴에 주름살이 주글주글한 복만은 60이 다된 늙은이 같아 보였다. 주인만 보면 감히 고개도 쳐들지 못하고 땅바닥을 설설 긴다.
 “둘째 도련님이라니? 서울 가서 대학공부 허는 동숭매 종철이가 돌아왔어라?”
 “긍께 머시냐 저…… 나리께서 누캉도 입 밲에 내들 말락꼬 허셨는디……”
 “나하꼬도 거지갈헐 것이 있는디? 문제 없을 팅께 어여 말혀 보지라.”
 “예. 그라지라우. 실은즉슨 둘째 도련님께서 학도지원빙인지를 피해 이곳으루다 도망혔간디 안방얼 곤치던 참입네다.”
 “머락꼬? 동숭매가 학도지원빙얼 피해 도망을 혔닥꼬! 쩌럴 시가……”
 “형님,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어디선가 동생 종철이 불쑥 나타났다.
 종수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징병과 출하를 거두러 다니는 순사인 자신의 신분으로 징병을 피해 도주한 동생을 마주 대한다는 사실이 미묘한 기분을 던져주었다.
 “패망하는 왜놈들의 총알받이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딱히 갈 곳도 없고 해서……”
 “한심헌넘! 그러탁꼬 비거퍼게 도망얼 쳤가니! 먹물얼 먹었담시로 나라를 위해 결사봉공허던 못혈석시, 증말 실망했다아이가.”
 종수는 동생의 아래위를 못마땅한 눈길로 흘겨보았다.
 “형님, 나라를 위하다니요? 도대체 어떤 나라를 위한다는 겁니까? 일본입니까, 조선입니까?”
 종수는 갑자기 대답이 궁해졌다. 일본이라고 대답할 수도 없었고 조선이라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일본을 위한다면 반역자라 할 것이고 조선을 위한다면 자신의 신분과는 배치되었다.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했으니 일본과 조선은 한나라가 아니냐고 대답할 수도 있었지만 그와 시비를 가르고 싶지 않았다.
 “됐다. 오널은 너학꼬 시비장단헐 시가이 없응께. 냉중에 보자. 이보게 최 서방, 싸게 싸게 술기 쬐깨 메워각꼬 날 따라 오게라우. 볼일이 쬐깨 있시.”
 “예, 작은 나리. 그라디유.”
 주인이 시키는 일에 종래로 이의나 의문, 거부나 조건을 달아본 적이 없는 최복만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건 오로지 하나 절대 복종 뿐이었다. 그래서 한상권의 집식구들은 누구나 무슨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행랑채의 머슴들을 젖혀놓고 소작농인 그를 찾곤 했다.
 복만은 도배일은 큰아들 덕민에게 맡겨 둔 채 잠간 사이에 수레를 메워 가지고 종수 앞에 나타났다.
 “어디루다 모시지라?”
 “곱단이네 집으루 가세나.”
 “예, 작은 나리.”
 거미줄 같이 얼기설기 주름살투성이인 복만의 얼굴에 보기 드문 의혹의 빛이 걸렸지만 그도 잠깐이었을 뿐 금시 순종의 표정을 지으며 그가 시키는 대로 수레를 몰았다.
 종수는 자전거를 타고 수레 뒤를 따랐다.
 형의 행동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종철은 수레 뒤를 멀찍이 따라나섰다.
 곱단은 어둠이 내린 마당의 토방에 나와 홀로 쭈크리고 앉아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엄마가 없는 집안이 무서워지고 싫어진 것이었다. 흐느낌소리는 어찌나 낮은지 풀벌레 소리와 개구리울음소리에 먹혀들어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울다가도 가끔 삽짝문 밖을 기웃기웃 내다보군 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실 그녀는 해가 서산에 기울면서부터 마음이 안달아 나기 시작했다. 빚 갚을 돈을 장만해 가지고 돌아온다던 덕구는 나타나지 않고 날만 어두워 가는데 그럴수록 짐을 챙겨가지고 댁으로 들라던 종수의 목소리가 귓전에 쟁쟁해 마음의 언덕에 불이 펄펄 일었다. 덕구가 그 많은 돈을 장만해 가지고 돌아오리라는 기대 같은 건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지금 기대어 볼 곳이라고는 그밖에 없었다. 혹시 하늘이라도 도와서 덕구에게 금덩이라도 내려 주신다면……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삽짝문 밖에서 종수가 나타났다.
 “머땜시 우리 집으루 오들 않고 아즉까장 집게서 울고만 있다야. 어여 일어나랑께. 이베는 역가 지비네 집이 앙그라, 울 집이 지비네 집이랑께.”
 종수는 곱단의 어깨를 부축해 일으켰다.
 곱단은 차마 거절을 못하고 전신을 파르르 떨기만 했다.
 “머 하고 있슴둥? 어째슬라무니 아직두 오재이씀둥! 난…… 흐흐흑!”
 저도 모르게 오열이 터져나가 그녀는 급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종수의 손길이 몸에 와 닿는 것이 무섭고 징그러웠지만 뿌리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돈으로 빚을 갚지 못하면 몸으로라도 갚아야 하는 게 도리가 아닌가.
 “쪼끔만 지달립소. 우티나 바까업게스꾸마.”
 곱단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지연시켜 덕구에게 기대를 걸어보고 싶어 구실을 골랐다.
 “재우 재우 옵소. 쪼끔만 더 늦으뭉 이 곱단이르 다시능 보지 못할검다.”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없는 텅 빈 방 가운데, 등불도 밝히지 않은 채 멍하니 앉아 찢어진 지게문만 멀거니 바라보았을 뿐 속수무책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재앙 앞에서 그녀가 자신을 위해, 덕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시간을 지연시키는 것뿐이었다.
 문이 삐거덕 열리더니 허리가 구부정한 덕구 아버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분을 보자 또다시 참고 있던 설움이 북받치며 눈물이 흘러나왔다.
 덕구의 아버지는 부엌으로 내려가더니 낡은 대야에 물독의 물을  담아들고 구들 위로 올라와 그녀 앞에 놓았다. 그리고는 부시를 켜 등잔불을 밝혔다. 그의 우묵한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밭고랑 같이 깊숙이 파인 주름살 속으로 스며들었다.
 “얼골얼 씻어사제. 기양 폴자가 요라거니 학꼬 맴이 써군혀도 참어사 쓰지라. 작은 나리께서 느글 안시럽게 여겨 거둬중께니 그리 알고 어여 말얼 들으랑께. 내가 머크락으 얹어주린.”
 머리를 얹는다는 말에 곱단은 세면을 하다말고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폴자지라 폴자. 작은 나리헌티 개길 시 있는기 암나 누릴 시 있는 행운이 아닝께 지뿌혀야제.”
 최복만은 콧물을 훌쩍거리면서 그 투박한 손으로 그녀의 삼단 같은 가랑머리를 풀어 서투른 동작으로 말아 올리고는 벽 구석에서 곱단이 엄마가 쓰던 비녀를 찾아내어 꽂아주었다.
 “됐는겨. 솔차니 나리 댁 가근년 맹키로 어엿혀. 작은 나리께서 밲께 지달코 지기닝께 어여 나가자. 암것도 챙겨가꼬 가들 마. 작은 나리 댁에 머시 없을락꼬.”
 최복만이 부축하는 대로 곱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물이 자꾸만 쏟아져내려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아바디, 이 곱단이가 아바디의 아들 덕구를 지달리고 있는지도 몰름까?
 억울하고 슬프고 막연했다.
 “자, 어여 이 술기 위에 올라앙그라.”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종수는 곱단이가 나오자 그녀를 번쩍 안아 들어서 수레 위에 올려 앉혔다.
 그 순간 이것이 정든 집과 덕구와의 마지막 이별이라는 생각이 곱단의 머릿속에 스쳤다.
 “아이 되꼬마! 난 못 가꼬마, 난 이 집에서 떠나지 않겠슴다.”
 그녀는 몸부림치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종수는 동네사람들이 들을까봐 당황해졌다.
 “뜽금없이 머땜시 이라능가라우? 내가 머시냐 느그를 죽을 데로다 델꼬 개기락또 혀는겨? 울고불고 함시로. 한나적에 고아가 된 지비가 안씨러워, 더러운 시상에 가이나 혼자 살도록 내비둘 시가 없어서 도와줄락 헌 것 뿐인디. 어여 울음얼 딱 그치비리랑께. 죽으락꼬 개기는 것두 앙긴디. 호의호식 시켜줄락꼬 개기는 건디. 최 서방, 지끔 머학꼬 섰당가. 어여 술길 몰들 않코.”
 “예. 작은 나리님. 분부대로 할 거구먼유. 그랴 곱단아. 작은 나리님 분부대로 혀 낭패가 없지라. 암짝케나 시키는 대로만 하거라이.”
 종수는 그녀를 달래느라 졸지에 진땀을 쫙 흘렸고 최복만은 부랴부랴 수레를 몰고 골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느닷없이 어둠 속에서 종철이가 불쑥 나타나 무작정 수레 앞을 막아섰다.
 “형님, 이러면 안 됩니다. 이유도 없이 사람을 납치해 가다니요. 당장 곱단 씨를 수레에서 내려놓으세요.”
 “아니, 넌 또 머신디 맬겁시 상관이냐. 이유가 없긴 머땜시 없어. 곱단인 3년 동안이나 내 빚얼 갚들 못혔어. 그라고 성네 집에 개기는 건 곱단이헌티도 행운이먼 행운이제 불행언 아니지라.”
 “어쨌던 이건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입니다. 빚을 졌다고 강제로 첩실로 끌고 가다니요. 노예사회도 아닌데……”
 “쩌리 비켜! 넘의 일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간섭혀싿들 말고 느그 처신에나 신경 써. 학도지원빙얼 피할락꼬 도망친 걸 알먼 느근 깜빵살이란 걸 알란 말이야. 어여 수레를 몰게.”
 종수는 수레 앞을 막아선 동생 종철의 가슴을 사정없이 떠밀었다. 유약한 종철은 거쿨진 형의 힘을 당할 수가 없어 맥없이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는 형 종수가 저렇게 험상궂은 기색을 지으면 누구도 그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설득을 포기했다. 수레가 지나가도록 한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종수는 밤 9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아내 이씨는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곱단의 도래를 맞이했다. 아이를 낳지 못한 그녀였기에 기분은 나빠도 할 말은 없었을 것이다.
 “지비가 쬐깨 염려혀서 모깡시켜가꼬 옷 갈아입혀 주구랴.”
 “네에-”
 이씨는 정실부인이 아니라 첩실이나 종년처럼 허리를 굽혀 순종했다. 얼굴이 박색이 된 것쯤은 몹쓸 천연두가 구실이 될 수 있겠지만 칠거지악의 첫 번째 죄목인 아들을 낳지 못한 죄는 회피할 수 없는지라 그녀는 늘 속죄하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절대 순종을 바쳤다. 그 때문에 첩실을 맞아들인다고 행악질을 부릴 처지도 못 되었다. 이 집에서 쫓겨나지 않고 정실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야 했다. 사실 돈 많은 부자나 권세가들은 미색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준 정실을 두고도 첩실을 맞아들이는 것이 요즘 세태이기도 했다.
 이씨 부인은 손수 곱단을 데리고 안채로 들어가 목욕을 시켜주었다. 익을 대로 익은 처녀의 몸매는 광채가 눈부셨다. 여자인 그녀도 반할 정도였다. 이제 이 몸뚱이가 남편에게서 그녀의 자리를 빼앗아갈 유혹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시샘도 없지 않아 꿈틀거렸다. 하지만 시샘한들 뭐하랴. 모든 건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목욕이 끝나자 이씨는 그녀를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가 자신이 입던 삼회장 비단치마, 저고리를 꺼내어 옷단장까지 시켰다. 그러자 곱단의 미모는 한결 요염해졌다.
 그러는 동안 곱단은 그냥 울기만 했다. 이씨도 덩달아 눈시울을 적셨다. 그러나 둘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곱단은 수레를 타고 읍내까지 이르는 동안 덕구가 오나 줄곧 어둠 속을 살펴보았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종수네 대문 앞에 당도해 수레에서 내리며 그녀는 최후의 희망마저 포기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체념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마님이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이다.
 옷단장에 화장까지 하니 곱단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같이 아름다웠다. 천한 첩실로 들이기에는 너무나 우아하고 은은한 미색이 완연했다.
 이씨는 곱단이를 데리고 남편이 거처하는 사랑채로 나갔다.

 형님을 제지하는데 실패한 종철은 그 길로 집으로 달려왔다. 아버지의 양심에 호소할 생각에서였다.
 마침 한상권이 방금 소작지를 돌아보고 집으로 돌아와 발을 씻는 중이었다.
 허둥지둥 달려 들어오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자애로운 얼굴에 근심의 빛이 짙게 어렸다.
 “아버님.”
 “밲에 나댕기들 말고 집에 가만히 앙가 책이나 읽으락꼬 혔간디 어일 개겠다온 거냐? 혹시 마슬 사램덜 눈에락도 발각되어 경찰에 고발이락도 하먼 어이 되든 니두 알 것제. 어여 방 안으루 들어개거라. 저낙이나 묵자.”
 “아버지.”
 “머땜시 그랴. 아베캉 먼 헐말이락도 있다냐?”
 마루 위로 올라서던 한상권은 고개를 돌려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그 얼굴에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인자한 미소가 가득했다.
 “저……”
 “에레워 말고 어여 말혀보랴. 니 눈엔 느그 압씨가 그라게 징하도룩 맥힌 사램맹키로 보이냐?”
 “그런 게 아니고요. 형님이 방금 강촌마을에 다녀갔습니다.”
 “그넘언 머땜시? 느글 봤간디?”
 “네.”
 “그랴. 경찰서에 잡아 넣기락도 혀것다더냐?”
 “그런 게 아니라 곱단 씨를……”
 “회령댁 곱단이 말이제, 곱단이럴 어떡혔다는 건고?”
 “수레에다 태워갖고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그랴.”
 한상권의 얼굴에 놀라는 기색이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시 온화한 미소가 안개처럼 펼쳐졌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서글서글한 모습은 도저히 화낼 줄 모르는 사람처럼 선량하고 너그럽게만 보여 종철은 도리어 안타까웠다. 곱단이를 첩실로 끌고 갔다는데도 꾸중 한마디 안 하시다니.
 “그게 되기나 할 소립니까. 빚을 졌다고 첩실로 끌고 가다니요. 지금이 노예사회인가요, 제발 아버지께서 나서셔서 억울한 곱단 씨를 도와주십시오. 형님을 꾸짖어 곱단 씨를 구해주십시오.”
 “글매, 아베도 그리혔으먼 존드끼 쟆다만……”
 한상권은 한숨을 몰아쉬며 마루에 걸터앉아 곰방대에 담배를 붙여 물었다. 장죽에 달린 상아물부리가 유난히 투명해 보였다.
 “암리 자슥이락또 분가해가꼬 달븐 가정얼 일겄응께 넘의 집이 앙그냐. 것다가 회령댁은  성네가 분가함시로 갈라준 땅뙈기에 딸린 소작농잉께 자연히 성의 소유가 된기라. 그렁께 어이 아베의 소관이 될 시 있겄냐. 빚얼 갚들 못혔닥꼬 자근년으로 딜인 건 너머허긴 허다만 그도 느그성의 일잉께 아베락도 참견헐바가 못되는구나. 니도 알드끼 자근년얼 딜이는 건 법에 어긋나는 일도 아니잖냐. 어쩜 의지 가지 없게 된 곱단이럴 위해서는 다행스런 일일 시도 있고.”
 “아버지, 형님의 행위는 도덕성을 상실하고 인간의 존엄을 무시한 비인간적인 소행입니다. 반드시 제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나서서 곱단 씨의 인권을 지켜줘야 합니다.”
 “그랴. 니 말이 틸리당게 앙그야. 압씨도 느그성이 왜넘으 개다리질 허는 건 눈꼴이 사납다만 사램마다 살아가는 호구책이 제가끔잉께 어쩔 시가 없구나. 지속으로 낳은 자슥이락 카디만 머리빡이 크먼 뜻대로 따라 주들 안응께 안타깝구나. 그러탁꼬 피럴 낭군 부자간의 천륜얼 가를 시도 없구.”
 이제 곱단이를 불행 속에서 구해줄 모든 희망이 물거품으로 되었다는 생각이 종철을 조급하게 했고 그 조급함은 다시 그의 머리  속에 기적 같은 묘책을 떠올려 주었다. 그 일로 인해 자신이 감내해야할 불행과 고통에 대해서는 미처 고려하지 못하고 말부터 꺼냈다.
 “아버지, 사실은 저와 곱단 씨는 이미 한 몸이 된 사이입니다.”
 “지금 머락카노? 한 몸이 되다니? 그게 먼 소리더냐?”
 “아버지, 이 불효자식의 불민함과 경망함을 용서해주세요.”
 종철은 땅바닥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전번에 회령댁이 사망했을 때 강변에서 혼자 울고 있는 그녀를 보고 그만 젊은 혈기의 일시적 충동을 참지 못하고……”
 “머라꼬? 긍께 니캉 곱단이캉 잼이락도 잤다는 거더냐?”
 “소자 가문을 더럽힌 죄 죽어 마땅합니다. 소자는 이제 곱단 씨를 책임져야 할 몸입니다.”
 “그게 정말이니?”
 “네.”
 한상권은 억이 막혔는지 한동안 말없이 입만 딱 벌린 채 마루 아래 엎드린 둘째 아들을 멀거니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러니 제발 형님한테서 곱단이를 구해주세요. 두 형제가 한 여자를 범한다는 건 불륜이 아닙니까?”
 “야, 이 문둥이 같은넘아! 얼어죽얼!”
 갑자기 우레 같은 불호령이 떨어지는 바람에 종철은 물론이고 안방에서 도배를 하던 덕민이와 머슴들도 놀라서 대청 정원으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이런 즘생보담 못헌너엄! 그 가이나를 느그성이 자근년으로 디릴락카는 사실얼 알고 있음시로도 기런 불측헌 불륜얼 저지르다니! 천륜얼 어긴 니 죄럴 어이 감당할락꼬 요로코롬 무모헌 지꺼릴 헌거더냐!”
 “아버지, 소자는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죄 없는 곱단 씨만은 제발 구해주십시오.”
 “거그 누 없는고? 천륜을 어긴 이넘얼 싸게 싸게 끌어내 느티낭구 아치에 달아매고 매게 쌔레비레라!”
 한상권은 마루 위에 버티고 선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종철이도 머슴들도 한상권이 이처럼 화산같이 분노한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모두들 벌벌 떨었다. 머슴들은 일제히 땅바닥에 엎드려 도련님을 용서해달라고 빌기 시작했다.
 “안 디여! 들럭쟁이캉 살인범언 용서해두 불륜과 천륜을 저지른 죄는 길코 용서헐 시 없지라. 덕민아, 어여 쩌넘얼, 낭구꼭대기에 매달거라.”
 “나리님, 지발 도련님얼 함번만……”
 “어허, 이넘이 누 아케락꼬 감히 거역한다냐! 쩌넘얼 매달들 않으먼 느그넘얼 달아매고 새릴 팅께 싸게 시키는 대로 몬헌당가.”
 한상권이 전에 없이 길길이 뛰는지라 머슴들은 자신에게 불덩이가 튕길까봐 벌벌 떨며 종철을 땅에서 부축해 일으켰다.
 “아버지, 소자는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다만 곱단 씨를……”
 종철은 굵은 밧줄에 정원의 아름드리 느티나무가지에 매달리면서도 곱단이를 위해 청들기를 잊지 않았다.
 “네 이넘, 아즉도 니가 지은 죄럴 회개하든 몬헐 석시 불륜의 정에 매워 지집얼 돕고 있는 거냐. 몽두이로 쩌넘얼 매게 쌔레비레라!”
 덕민과 머슴들은 눈물을 흘리며 허공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린 종철의 등짝과 엉덩이를 몽둥이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종수를 따라 수레를 몰고 읍내로 갔던 최복만이 돌아왔다. 눈앞에 벌어진 뜻밖의 상황에 한동안 눈이 휘둥그레 있던 그는 갑자기 몽둥이질이 우박 치듯 날아드는 속으로 뛰어들며 종철을 몸으로 막아 나섰다.
 “나리, 안 디여유. 찰코 소인얼 죽여비리이다. 둘째 도련님헌티 먼 죄가 있답디여?”
 “자넨 모르먼 싸게 아케서 비켜서시. 가문의 법도캉 기강얼 세우는 중잉께 최 서방이 간섭 헐 자리가 아니어라.”
 최복만의 갑작스런 등장에 한상권의 포효가 조금은 누그러드는 듯싶었다. 아마 그와의 오랜 친분과 풍상고초를 겪은 경륜이 그의 말을 듣게 했는지도 몰랐다. 아니 실은 그도 자식을 몽둥이로 때리게 한 것이 가슴 아파 중지시키려고 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참고 있든 차였던 지도 몰랐다. 아무튼 매질은 멈춰졌다.
 나무에서 풀려난 종철은 다시 아버지에게 간청했다. 그의 입과 이마에서 피가 흘렀고 옷은 핏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아버지, 더 큰 불륜을 저지르기 전에 어서 사람을 보내어 곱단 씨를 데려오십시오.”
 “최 서방, 지끔 사램얼 종수네 집따 보내어 곱단이럴 데려오게.”
 “예.”
 최복만은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종철을 업고 안방으로 달려가며 아들 덕민을 불렀다.
 “덕민아, 너 이 질로 싸게 싸게 작은 나리님 댁에 뛰어가 나리께서 분부하신 말씀얼 전달허고 온너라.”
 “예.”
 덕민은 육중한 몸뚱이를 뒤뚱거리며 대문 밖으로 나갔다. 불같은 성미의 동생 덕구와는 달리 하늘이 무너져도 태평하고 우유부단한 성미의 소유자였다. 행동도 굼벵이처럼 굼떴고 머리도 고장 난 물방아처럼 삐걱거리며 제대로 회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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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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