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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6.03 장편연재 "붉은아침" 5 by 아데라

장편연재 "붉은아침" 5
제1부 백년빙곡冰谷

장혜영


                                       


                                                      3


                                                                                        
 
덕구는 아침 일찍 청동불상을 휴대하고 은파로 떠났다. 해거름 전에 귀가해야 했기 때문에 출발을 서둘렀다.
 한나절이나 거리며 골목들을 누비며 골동품 점들과 전당포들을 뒤졌으나 기대했던 비싼 값을 주겠다는 점포는 끝내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무쇠덩이에 구리물을 도금한 걸세. 가치가 없는 거네.”
 이유인즉 이러했다.
 저녁 무렵에야 겨우 어느 전당포주인이 쌀 두 말 값을 주고 저당 잡아주었다.
 겨우 지전 몇 푼을 받아가지고 전당포를 나서는 덕구의 가슴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젠 어쩔 수 없이 곱단일 종수에게 빼앗기게 되었다는 생각에 절망과 울분과 비통으로 마음이 괴로워졌다.
 그는 길가의 어느 싸구려 선술집에 들어가 술로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시작했다. 눈이 빠지도록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곱단의 가여운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으나 그렇다고 빈손으로 그녀한테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아 탄식을 연발하며 무심한 대폿술만 퍼마셨다.
 정말 이대로 곱단일 종수 놈에게 빼앗기고 마는가?
 무슨 다른 방도는 없을까?
 아무리 궁리해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더 이상 여기 버티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고 선술집에서 나왔다. 지금쯤은 종수가 곱단이를 자택으로 끌고 갔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그는 초조한 김에 40리 길을 내처 달음박질쳤다.
 곱단인 날 얼마나 기다렸을까?
 기다리다가 절망했을 것이고 절망하다가 저주했을 것이고 저주하다가 포기하고 체념했을 것이다.
 술기운이 혈관 속으로 번지며 분노가 치밀어 올라 그는 혼자서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이넘아, 곱단일 전디려만 봐라. 느그넘의 뼉다굴 부숴뿌릴 팅께니. 칼차고 권총 찼닥꼬 누 두려워 헐까벼. 어림도 없당께로.”
 곱단이네 집은 텅텅 비어있었다. 구들 복판에는 물이 담긴 대야가 놓여 있고 그 옆에는 세수수건 하나와 낡은  베치마저고리가 달랑 놓여 있을 뿐 곱단이는 보이지 않았다.
 순간 덕구의 눈에서는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이넘이 끝내!”
 집으로 달려갔다. 우선 자초지종을 확인해야 했다.
 “아부지, 곱단이가 어일 개겠는디 모릅디여?”
 “글매다.”
 최복만은 불물이 뚝뚝 떨어지는 아들의 눈길을 감히 직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트린 채 곰방대만 뻐끔뻐끔 빨아댔다. 내손으로 곱단이의 머리를 얹어주고 수레에 태워 작은 나리님 댁으로 데려다주었다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뱉어낼 수가 없었다. 그 역시 덕구와 곱단의 사이가 끔찍하다는 걸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며느리 될 사람을 데려가는데 아버지가 돼가지고 막지는 못할망정 머리를 얹어 실어다주었으니 아들을 대할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작은 나리님이 읍내로 데려갔어요.”
 저녁상을 차리던 여동생 향란이가 치미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길길이 뛰는 오빠를 측은하게 바라보더니 이실직고했다.
 “머락꼬? 종수넘이?”
 “그래요. 수레에다 실어서요.”
 그러나 향란이도 차마 아버지가 그 수레를 몰고 갔다는 말은 못했다.
 “긍께 그게 은진디?”
 “날이 어두워져서요.”
 “쩌런 쌔레비릴 넘이!”
 덕구는 이를 뿌드득 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제야 최복만이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 아들의 난동을 제지했다.
 “참어사 쓰지라. 니가 시방 기연이 나리 허구 대들 작정이드냐?”
 아버지가 문지방을 가로막았으나 덕구는 선불 맞은 늑대처럼 포효하고 울부짖었다.
 “나리넌 먼 썩어뿌러진 나리랍디여, 즘생보담 못헌 넘얼! 오늘 즈그 죽고 나 죽고 생사결판얼 내뿌릴게라우.”
 덕구는 한사코 팔소매를 잡고 매달리는 아버지를 사정없이 구들바닥에 뿌리쳤다. 부엌으로 내려가 도마 위의 식칼을 집어 들고는 문을 박차고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나갔다.
 덕구는 읍내까지 15리 길을 단숨에 달려갔다. 숨이 가쁜 줄도 몰랐다. 머릿속에 자꾸만 종수란 놈이 곱단의 옷을 벗기고 이불 속으로 끌어들이는 상상이 떠올라 한순간이라도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곱단아, 지달코 있으락카이. 내가 도착 헐 때까장만 당하들 말구!
 헐떡거리고 중얼거리며 기를 쓰고 달렸다.
 종수네 집 대문은 이미 안으로 굳게 닫혀있었다. 집 주위는 키를 넘는 돌담장으로 견고하게 둘러막혀있었다. 돌담 주위를 빙빙 돌던 덕구는 뒤쪽 담장 밖의 느티나무 위로 올라가 나뭇가지를 타고 담벼락을 넘어 들어갔다.
 정원에 들어선 그는 우선 나뭇가리와 헛간에 불부터 질러놓았다. 종수네 집에 불을 지를 생각이 애초부터 있은 건 아니었다. 불길이 치솟으면 집 안이 수라장이 될 것이고 그 틈을 타서 곱단이를 구출하려는 계책 같은 건 더구나 없었다. 그저 종수에 대한 증오가 나뭇가리를 보자 불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불현듯 던져주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치밀하고 냉정하고 침착한 성미가 아니었다.
 묵은 나뭇가지어서 불길은 금시 활활 번져갔다. 불붙는 나뭇단 하나를 들어 옆의 곳간지붕 위에 던졌다. 그리고는 종수가 신방을 차렸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 사랑채를 향해 호랑이처럼 돌진해갔다. 분노 때문에 사지가 푸들푸들 떨렸다. 어렸을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기억의 스크린으로 흘러 지나갔다. 종수가 채찍으로 잔등을 후려치던 일이며 언 개똥을 먹으라고 강요하던 일이며 오줌에 세수하라고 윽박지르던 일이며…… 그야말로 가난이라는 죄 아닌 죄 때문에 갖은 수모를 다 당했었다. 그러나 그 집 땅 한 뙈기에 명줄을 걸고 사는 소작농신세인지라 분하고 억울해도 참아야 했다. 사실 그런 수모쯤이라면 덕구는 지금이라도 참을 만 했다. 그러나 곱단이를 빼앗아가는 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가난한 소작농이라고 해서 좋아하는 여자까지 바치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사랑채의 넓은 방에는 등불이 켜져 있었다. 촛불을 켜놓은 듯 장지문창호지가 환했다. 이마를 맞대고 앉은 두 사람의 그림자가 창호지에 비쳐 어른거리는 걸 보자 덕구의 가슴속에선 용암처럼 피가 벌렁벌렁 끓어올랐다.
 마루 위에 성큼 올라선 그는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발길로 장지문을 냅다 질렀다. 우지끈 소리가 나며 문짝의 허리가 부러져 나갔다.
 그때까지도 곱단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고 종수는 그녀를 설득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지빌 일도 시키들 않을 팅께 그 머시냐 머시마 한나만 낳아달랑께. 그라먼 지빌 기언이 정실로 디리앙글끼라우.”
 온갖 미사여구를 총동원하여 그녀를 품 안에 넣으려고 구슬리던 차 느닷없이 장지문이 와지끈 박살나며 칼을 꼬나든 덕구가 방 안에 뛰어들었다.
 뜻밖의 봉변에 혼비백산한 곱단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방구석에 옹크리고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나 종수는 진작 예견했던 일이라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종수의 그런 의연한 태도에 놀란 쪽은 도리어 덕구였다. 칼 앞에서도 표정 하나 흩트리지 않는 태연한 종수의 태도가 그를 질리게 했던 것이다.
 “덕구 이자슥. 역가 어이간디 암짝케나 달레든지라. 그따위 식칼 한 자루를 휘둘러 내이나 눌 위협할락꼬. 내가 그라게 호락호락혀 보인다냐. 존 말루 타이를 때 어여 그 칼 땡겨삐리라!”
 말투마저 차분했다.
 덕구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왕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건지고 황망히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수습했다.
 “허튼소리 혀쌓티 말고 싸게 싸게 곱단이나 내놔. 곱단이만 돌려주면 순순히 돌아갈 팅께.”
 “에림도 없는 소리 하들 마. 곱단이가 느그 마누라락도 된다냐? 요걸 봤제?”
 종수는 여유 있는 동작으로 베개 밑에서 권총을 꺼내어 덕구의 가슴을 향해 겨누었다. 이때를 대비해 미리 감춰둔 듯싶었다. 종수한테로 한 걸음 한 걸음 접근을 시도하던 덕구는 시커먼 총구를 보자 흠칫 발걸음을 멈췄다.
 “죽고 잪들 않으먼 어여 칼얼 땡기랑께 그랴.”
 종수는 능청스럽게 얼굴에 웃음까지 가득 담는다.
 “니넘이 가심에 총부릴 디리댄닥꼬 누 징하게 무서워 할 줄 알지라. 어이 담이 있으먼 쏴보레이. 느그 죽나 내가 죽나 보장께로.”
 “쏘락카먼 몬 쏠 것 같아. 이 미련헌 인간아. 난 순사야. 느그따위 목숨 하나 죽이는 것  쯤은 포리를 잡는 것 보담 더 식은 죽 먹기야……”
 “안 됨다. 쏘뭉 안 되꼬마. 떼까닥 그 칼으 제뿌립쏘. 떼까닥요.”
 여태껏 방구석에 구겨 박혀 떨고만 있던 곱단은 덕구가 위험에 봉착하게 되자 두려움도 잊고 발딱 일어섰다. 다급히 덕구에게로 달려가 그의 손에서 식칼을 빼앗아냈다.
 “서방님, 지발 내 나츠 바서라도 쏘지 맙쏘. 서방님이 하란 대루 다 하게스꼬마.”
 그때 밖에서 불이야 하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곳간과 나뭇가리 쪽에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고 머슴들이 불길을 잡느라 물을 끼얹는 소리가 부산스레 들려왔다.
 “그랴, 잘헌다. 느그 스스로 구데이럴 폿싱께 날 원망헐 암 것도 없을 팅께니. 여봐라. 밲에 누 없느냐.”
 “예. 나리, 부르셨습니까?”
 마루 아래 대령하고 있던 건장한 사내들이 문 앞에 나타나 허리를 굽실했다.
 “이 사램얼 주재소에 델꼬 가 김 순사에게 맡겨뿔고 온너라.”
 “예. 그런데 밖에 이 사람의 형이란 작자도 잡아놓았는뎁쇼. 곳간과 나뭇가리에 불을 지른 것 같은데 어떻게 처리할까요?”
 덕민은 심부름 오던 도중에 또 물꼬에 모여든 물고기를 잡다가 뒤늦게야 종수네 집에 도착했었다. 마침 불붙는 나뭇가리 앞을 지나다가 억울하게 방화범으로 잡혔던 것이다.
 “항께 데빌고 가라우.”
 “예. 분부대로 합죠.”
 두 사내는 덕구에게 달려들어 겨드랑이를 잡아 끼고 우격다짐으로 밖으로 끌고 나갔다.
 “야, 이넘아. 너 곱단의 털끝 한나락도 맨쳤다간 내 손뿌닥에 삑다구도 추리지 못 헐 줄  알아!”
 덕구는 끌려 나가면서도 발버둥질을 치며 욕설을 퍼부었다.
 “하하하. 여석. 배포 함 번 싸내답다.”
 “지발 저이를 놔줍쏘”
 곱단은 울음을 터트리며 방바닥에 무릎을 폴싹 꿇었다.
 “덕구의 운명은 지비가 허기에 달렸당께. 긍께 알아서 혀.”
 “서방님 시키는 대로 뭐락또 하겠슴다.”
 곱단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가 유도하는 대로 순순히 비단이불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종수는 병아리새끼처럼 육신을 파딱거리는 곱단의 몸을 품 안에 꼭 당겨 안았다. 도리어 덕구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았다. 그가 도와주었으니 말이다.
 곱단은 종수의 눈길이 몸을 더듬으며 옷가지를 하나씩 벗겨 나가자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여 전신에 소름이 돋고 사지가 오그라들며 턱을 덜덜 떨었다.

 최복만은 종철을 등에 업어 안방으로 옮겼다. 물을 떠다가 수건으로 얼굴과 몸의 피를 닦아주었다. 옆구리와 어깨 부위에는 핏멍까지 생겼다.
 “도련님, 머땜시로 무산시리 나리께 요로코롬 거지깔얼 하셨답디여? 참으로 그 가이내와 먼 일이락도 있었어랑가?”
 복만은 상처를 씻어주며 자신의 아픔처럼 안색을 흐린다.
 “제가 곱단 씨와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곱단 씨를 불행에서 구해주려는 일념에서 다급히 궁여지책을 대다보니……”
 “으메, 길타고 그란 거지깔얼 되느냥 나리께 여쭙디여. 달븐건 죄 참아두 가문에 똥칠 허는 일만언 용서하들 않는 나리님이 앙그라우. 나리께 겁나게 잘못혔닥꼬 비이다.”
 “참, 향란인 잘 지냅니까? 중학교를 다닌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종철은 진작부터 향란의 안부가 궁금했다. 서울에서 학도지원병 모집을 피해 만주로 피난 오는 봉천행 열차에 몸을 실으면서 맨 처음으로 기억에 떠올린 사람이 바로 향란이었다. 2년 전 그가 서울 A대학으로 유학을 떠날 때 그들 둘은 열여섯 동갑내기였다.
 “이렇게 갈라지면 언제 또 만나죠?”
 은파강 기슭에서, 달빛은 은은하게 쏟아지며 수면 위에서 은가루처럼 부서지는데 요란스레 옥자갈 위를 굴러가는 여울목에 나란히 앉아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물짓던 그녀, 길을 떠나는 날 아침에는 몰래 동구 밖 느티나무 뒤에 숨어서 손수건을 흔들며 그를 바래주었던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예, 잘 지내고말고라. 나리께서 학비까장 대주어 중핵꼬에 댕기제라우. 아리께부텀 시국이 어지러워 집에 내려와 있구먼유.”
 “제가 좀 만나보고 싶어 하더라고 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내일 저녁 강변에서요.”
 “으매, 징하게 상한 몸으로 어떡케?”
 “괜찮습니다. 뼈가 부러진 건 아니니까. 오늘밤만 지나면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예, 분부대루 하지라우.”
 “자식 벌 되는 저게 말씀 낮추십시오. 민망하여 어쩔 바를 모르겠습니다.”
 “천한 아랫것이 감히 어이 아케락꼬 귀하신 도련님캉.”
 “다 같은 사람인데 귀천이 따로 있습니까. 당연히 어린 제가 어르신께 경어를 써야지요.”
 “먼 말씸얼 허신다요. 되도 않얼 말씸얼……”
 최복만은 너무 놀란 나머지 엉금엉금 무릎걸음을 치며 방 안에서 물러나갔다.
 방 안에는 종철이 혼자만 남았다.
 곱단은 어떻게 되었을까? 덕민은 형님 댁에 도착했을까. 형님이 과연 내 계책에 속아 넘어 갈 것인지?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제 자신이 곱단 씨를 위해 줄 수 있는 도움은 이것으로 끝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재물과 세도를 믿고 횡포를 부리는 형님이 원망스러웠다. 왜놈의 앞잡이질을 하는 것만 해도 부끄러운 일인데 가문을 더럽히는 패덕행위까지 서슴지 않는 형의 처신이 야멸쳤다. 그리고 가문의 법도만 중히 여기고 사회적 윤리는 외면하는 아버지의 처사도 불만스러웠다. 그래서 귀향한지 불과 며칠밖에 안 되는데도 벌써 이 집이 싫어졌다.
 어머니는 집에 계신다 말 뿐이었다. 비구니처럼 진종일 안방에만 들어앉아 있었다. 집 안팎의 모든 결재권을 아버지한테 맡긴 채 침묵 속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어머니의 지나친 무관심은 종철을 질식하게 했다.
 “왔냐?”
 2년 만에 만난 아들에게 한 어머니의 말씀이란 고작 이 한 마디 뿐이었다. 그리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아들의 말을 묵묵히 경청만 했다.
 누나 영자와 여동생 영화 그리고 막내 동생 종학이도 모두 어머니와 함께 안채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다. 사랑채와 안채는 한 울안에 있지만 마치도 체제나 이념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와도 같았다. 이 두 세계의 엄격한 구별과 행동반경의 한계는 모두 아버지에 의해 규정되고 감독되는 것이어서 월권행위는 절대로 엄금상태였다. 아버지는 그것을 이 가문의 완벽한 법도라고 믿고 계셨다. 그런 구속 때문에 이 집안엔 생기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맏아들의 방탕과 패덕마저도 막아내지 못한다는 걸 망각하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에야 종철은 최복만을 통해 곱단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곱단이가 끝끝내 형님의 강압에 정조를 유린당했고 덕구와 덕민은 주재소에 구치되었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가. 도적이 매를 든다더니.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능멸하고 구속까지 한단 말인가.
 최복만의 말에 의하면 한상권은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 읍내로 올라갔다고 한다. 아마 덕구와 덕민을 풀어주라고 아들에게 부친의 영향력을 행사할 모양이다. 아버지는 그것을 의리와 자비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종철은 웬일인지 유치한 위선이라고만 생각되었다. 아버지가 진작 나섰더라면 막을 수 있었던 불행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향란이년학꼬 말혔어라우.”
 최복만이 말꼬리에 슬쩍 흘리고 나간 한마디가 종철의 고요하던 가슴에 텀벙 떨어지며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어서 날이 어두웠으면 싶었다. 그런데 그녀가 나오기나 할까? 어언 2년이란 세월이 흘러갔고 그 세월이 그들 사이를 멀어지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초조해졌다. 세월과 시간은 사람의 마음에 덮이는 먼지나 이끼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종철은 기다리기가 답답하여 날이 채 어둡기도 전에 집을 나섰다.
 마을을 벗어나자 눈앞에 넓은 논벌이 펼쳐진다. 논배미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들길이 황혼의 어스름 속에 서서히 묻혀들고 있는 모습이 황홀했다. 수없이 많은 잠자리, 하루살이, 모기떼들이 공중을 날고 이름 모를 풀벌레와 개구리들이 구수한 향촌의 경음악을 연주했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아늑하고 여유롭고 평화롭다 못해 게으르고 권태롭기까지 한 초야의 정취에 오래간만에 흠씬 젖어들며 종철은 어린애처럼 흙길 위에 뒹구는 돌멩이를 구둣발로 차보기도 하고 풀 가지를 꺾어들고 휘휘 휘젓기도 하면서 강가로 걸어갔다.
 방죽에 올라서니 검푸른 은파강이 기름진 옥토를 적시는 젖줄처럼 유유히 흘렀다. 달이 떠오른 모양 멀리 아득한 지평선 위에 떠도는 몇 송이의 구름조각이 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따금 수면 위로 풀떡풀떡 뛰어오르는 물고기들과 여울목을 거슬러 올라가느라 푸드득 푸드득 꼬리질 치는 성미 급한 붕어들의 물장난이 이채로웠다.
 “종철 씨.”
 자연의 경관에 넋이 팔려 있는데 느닷없이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뒤를 돌아보려는 찰나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두 눈을 감싸왔다.
 “향란 씨!”
 종철은 보지 않고도 그녀임을 육감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저기 여울목 기슭에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살포시 기대었던 향란의 향긋한 체취를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바로 그 체취였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왕년의 수줍음을 잘 타던 시골소녀티를 말끔히 벗어던지고 지금은 도시물이 든 어엿한 개화여성이라는 것뿐이었다. 등 뒤에서 남자의 눈을 가린다는 건 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개방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종철 씨, 보고 싶었어요.”
 그녀는 종철의 손을 부여잡고 어린애처럼 퐁퐁 뛰며 기뻐했다. 자신의 감정을 당당하게 표현할 아는 그녀의 당돌한 모습에 종철은 당혹과 함께 대견함을 느꼈다.
 “나도 보고 싶었습니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동쪽 지평선에 두둥실 떠오르며 그들의 모습을 조명했다. 들길에 피어난 민들레꽃처럼 청순하고 소박하기만 하던 향란의 용모는 도도한 교양미와 무르익은 탄력으로 숙녀의 은은한 미색을 발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기슭으로 내려가 잔디 위에 나란히 앉았다. 조잘대는 여울은 흘러내리는 달빛을 조각내며 꽃 보라처럼 반짝거렸다.
 “참, 몸은 좀 어떠세요? 곱단이 때문에 아버님께 야단맞으셨다면서요?”
 “괜찮습니다. 육신의 고통쯤은 대수롭지 않은데 곱단 씨를 불행에서 건져주지 못한 게 유감스럽습니다. 덕민, 덕구 오빠도 구속되었다면서요? 너무 걱정 말아요. 아버님께서 읍내로 가셨으니 오늘 낼 중으로 풀려날 겁니다.”
 “권세에 의해 정의와 윤리가 유린당하고 있는 현실이 가슴 아파요. 정의와 윤리가 권세를 압제하고 징벌할 만한 힘이 없다는 현실은 또 세상에 대한 불신과 염오를 느끼게 해요.”
 그녀 역시 지식인의 공통적인 고질병인 염세주의에 깊숙이 빠져 있구나 하는 생각을 건지며 종철은 빙그레 웃었다. 염세주의는 사람들을 비관론에 빠져들게 하지만 세상과 인생을 냉철하게 성찰하는 진지한 태도만큼은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젊은 세대의 성숙은 염세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 가능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 몰입하거나 집착하면 해가 될 것이다.
 “그런 우려는 잠시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정의는 반드시 불의를 이길 것입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두 사람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강변에 널린 자갈을 주워 수면 위에 던져 본다. 돌멩이가 수면 위를 스치는 개수를 세던 향란이 다시 화제를 이었다.
 “공부를 포기하고 낙향한 걸 보니 서울 쪽도 난세라 뒤숭숭한 모양이죠?”
 “네. 학도지원병에 끌려가 일본 놈의 총알받이가 되기 싫어서 피신해 왔습니다.”
 “일본 놈들은 망할 때가 된 걸 모르나 봐요. 최후발악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패망직전의 마지막 발악이지요. 무쏠리니 파시스트정권이 무너지고 독일도 무조건 항복을 했으니 일본은 고립무원의 독전을 해야만 하는 어려운 처지에 봉착한 겁니다. 사이판에서의 패전으로 도죠 수상이 퇴임하고 연합군 측과의 강화담판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육군부측의 주전론에 눌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금년 4월 오키나와가 미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평화를 주장하는 스즈키 킨다로가 수상으로 임명되었지만 육군강경파의 주전론의 장벽에 가로막히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모든 징후를 볼 때 일본의 패망은 다만 시간문제만 남았을 뿐입니다.”
 그리웠던 정은 가슴에 묻은 채 이상하게도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국제정세에 관심을 보였다.
 “일본이 패망하면 세계는 판도가 다시 그려질 것인데 그 모습이 어떨지 궁금해요. 미국식자본주의 세상이 될까요? 소련식 사회주의 세상이 될까요?”
 “모르긴 해도 두 개의 축으로 나누어지겠지요.”
 “종철 씬 어느 쪽을 선호하세요?”
 “글쎄요. 사회주의사회가 폭력과 독재와 집단주의라는 비난을 받지만 난 그래도 계급이 청산되고 평등을 사회이념으로 삼는 사회주의체제를 더 선호하게 되네요.”
 “왜 평등은 물론 자유까지 주장하는 미국식 자본주의사회는 싫은가요?”
 “말은 듣기 좋지만 자유와 평등은 공존할 수 없는 대립적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자유는 불평등을 전제로 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반대로 평등은 부자유를 전제로 할 때에만 가능하지요. 자유의 결과가 빈부의 격차라는 사실만 보아도 그것은 출발시점부터 평등의 박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개념은 절대로 병존이 불가능합니다.”
 “사회적 개입으로 빈부의 격차를 균등화시킨다잖아요.”
 “그 역시 자유에 대한 약탈이고 억압입니다. 사회주의가 폭력적 수단에 의해 자유를 파괴하고 평등을 실현한 것처럼 사회적 개입 즉 법률이나 제도적 규제의 방법으로 자유를 제한하고 평등을 실현한다는 점에서는 양자가 다를 바 없지요.”
 “그럼 종철 씬 사회주의 운동을 하나 봐요. 아버님께선 지주인데……”
 “난 아버님을 부모로써 존경하지만 계급적 차원에서는 반대합니다. 학교에서도 사회주의 운동을 많이 했습니다.”
 종철의 단호한, 지어는 무례한 선언에 향란은 놀란 듯 두 눈이 동그래진다.
 “이념이란 게 뭘까요? 그것 때문에 부모자식 간에, 형제 간에 적수가 되니 말이에요.”
 “혈통은 자연적인 섭리이지만 이념은 인간의 가치추구입니다. 물론입니다. 난 아버지도 반대하지만 일본 놈 앞잡이질을 하는 형님과도 다른 길을 걸을 것입니다. 절대로 부자간, 형제간이라는 정분에 얽매어 그들과 타협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인생이 힘들 텐데요.”
 향란은 종철의 얼굴을 근심어린 눈길로 쳐다보았다.
 “올 때는 몰랐는데 정작 오고 보니 시골이 답답해서 아무래도 오래 머무를 것 같지 못합니다. 조만간 여길 떠나야겠습니다. 은파에 동창생들이 많습니다.”
 “저도 함께 가요.”
 “안 됩니다. 이 난세에 여자가 밖으로 돈다는 건 위험하니까요. 내가 먼저 나가서 자리를 잡은 다음 그때 마을을 떠나도 늦지 않을 겁니다.”
 “2년이나 혼자 있었는데…… 같이 있고 싶어요... ...”
 “향란아, 너 머달라고 여그 있는 거제?”
 불현듯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두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잔디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의 뒤에는 얼굴에 퍼렇게 멍이 든 덕구가 험상궂은 표정을 지은 채 종철을 노려보고 서 있었다.
 “오빠, 주재소에 갇혔다더니 언제 풀려나온 거야?”
 향란은 반색하여 덕구의 팔소매에 매달렸다.
 “풀려나오셨다니 참 잘 됐습니다.”
 종철이도 기뻐하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덕구는 그가 내민 손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머땜시제라. 즈그들학꼬 먼 압씨 죽인 웬수가 있당가라우? 머땜시 즈그 집 구석얼 망치뿌릴락꼬 그라는 거라우. 성은 곱단이럴 자근년으로 삼더니 동숭매넌 또 즈그 누까장 넘볼락꼬. 흥! 어림도 없제라. 향란아, 어여 집에 가자.”
 덕구는 향란의 팔목을 거머쥐고 마을 쪽으로 잡아끌었다.
 “왜 이래 오빠. 도련님하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작은 나리하고 둘째 도련님은 다르단 말이야.”
 향란은 한사코 발을 벋디뎠다.
 “달브긴 머시 달븐디. 그넘이 그넘이제라. 암말 말고 아랍이나 따라와.”
 “저한테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사람을 잘 못 보고 하는 말씀입니다.”
 “쩌리 싸게 비키들 못혀제라우. 그라지 않아도 종수넘헌티 당헌 화풀일 헐 디가 없어 징하게 주먹이 근질거리는디.”
 “뭘 하던지 이 손은 놓고 말하시죠. 아무리 동생이라고……”
 “지누 지 맘핀대루 허는디 지비가 먼 상관이랑가? 지비성 종수란 넘언 마슬의 크내기도 지 맘 핀대로다 끌고가 자근년으로 삼는디…… 지비도 성 하딘대로 즈그 누를 암짝케나 끌고갈  작저이간디?”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남의 속에 없는 말을.”
 “그라고라니? 지가 말얼 하는디도 지비의 허락얼 받어사 쓰겄소. 울 아베맹키로 만만하게 봤담시롱 큰콧배기 다칠 줄 알어라우.”
 덕구는 한사코 향란의 팔소매를 끌고 갔다.
 “이러면 안 됩니다. 말로 해야지……”
 “제길헐, 문둥이 같언넘! 지가 머간디 넘으 일에 감 놓아라, 배놓아라 상관인디.”
 번개같이 날아드는 주먹세례에 얼굴읅 맞은 종철은 눈앞에서 불꽃이 번쩍 튕겼다. 그는 무쇠망치 같은 거대한 충격에 떠밀려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오빠, 왜 죄 없는 사람을 때려? 종철 씨, 괜찮으세요? 어디 다치신 데라도……”
 “이 가이나야 잔말 말고 싸게 따라와!”
 덕구는 무슨 쌀자루처럼 향란을 질질 끌고 방죽 위로 올라갔다.
 종철이 땅바닥에서 기어 일어났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은 방죽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어느새 눈이 팅팅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맥없이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불과 이틀 동안에 도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 정리가 안 되었다. 곱단이를 구원하는 일에 실패했고 향란이와는 갈라졌다. 아버지에게 봉변을 당했고 덕구의 주먹에 일격을 당했다. 이 모든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무슨 죄라도 지었단 말인가?
 종철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장판 위에 털썩 쓰러졌다.
 “들어가도 되겄냐?”
 느닷없이 장지문 밖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종철은 욱신욱신 쑤시는 육신의 통증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일나들 말고 기양 누이라. 그랴, 어이 크게 상헌 딘 없냐?”
 아들의 옆에 와 정좌하며 부드러운 어조로 관심을 보였다. 어제의 그 험악한 기색은 가신 듯 사라지고 자애롭고 인자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마 최복만이 자초지종을 소상히 고해 올려 뒤늦게야 내막을 안 모양이다.
 “네가 보기엔 시국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으냐?”
 한상권은 아들에게 자신의 경솔함을 사과하자니 자존심이 걸리는 모양 전혀 엉뚱한 화제를 꺼내며 아들과의 접근을 시도했다. 권위라는 것은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오래잖아 일본은 패할 겁니다.”
 “그라겠제라. 일본이 망하먼 우리 나라넌 독립하것제?”
 “네.”
 “공산당 천하가 될 것 같으냐 민족주의자들의 천하가 될 것 같으냐?”
 “글쎄요. 아마 국가 간, 민족 간 투쟁은 계급투쟁으로 바뀔 지도 모르지요.”
 “그랴?!”
 한상권은 곰방대를 붙여 물다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굴에 늘 포진하고 있던 미소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의혹의 그늘이 짙게 드리웠다.
 “그라제, 그라게 될란도 모르제.”
 다시 담뱃불을 붙이고는 몇 모금 뻑뻑 빨다가 입 안의 연기를 밖으로 후ㅡ욱 내뿜었다. 얼굴에서 증발했던 미소가 서서히 회래하며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아들 셋얼 두었다만 즈그들 각기 개기는 질이 달바 뿔뿔히 흩어짐시로 이 아베캉 멀어디고 있응께 가심이 아프다. 이넘으 시상 땜시로 가문이 풍비박산 나는 게 앙근디 걱정이구나.”
 한상권은 휴우-하고 가벼운 한숨을 몰아쉬었다.
 “기양 누어 쉬 거라. 난세라 밲이 흉흉헝께 나돌들 말고 몸조리나 잘 혀.”
 종철은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는 아버지께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해.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간 미치고 말 거야.”
 종철은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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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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