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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16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43 by 아데라


바람의 아들
장혜영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비탈은 가파르고 험준했다. 가시덤불과 집채 같은 바위들이 앞을 막았다. 금시 숨결이 가빠지고 이마에 땀방울이 돋았다. 파랑은 능선을 톺아 오르다가도 가끔 발길을 멈추고 풍경을 촬영했지만 정도는 숨이 턱에 닿아 헐떡거리며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느라 사진 찍을 경황조차 없었다. 기운도 탈진한 상태여서 거의 기다시피하며 풀뿌리와 나무가지를 잡고서야 겨우 톺아 오를 수 있었다. 보아하니 그녀는 이런 등산을 많이 경험해 본 경력자 같았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등반을 했으니 말이다. 숙녀의 모습과는 다른 한 면모가 아닐 수 없었다.
 얼마나  올라 왔을까?
 한 시간 가량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불현듯 저만큼 비탈 위에서 앗! 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고개를 들고 보니 파랑이 가파른 비탈에서 발을 빗디딘 모양인지 아래로 허공 나뒹굴고 있었다.
 “파랑 씨!”
 정도는 저도 모르게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비탈을 달려 올라갔다. 금방 전까지 비탈에서 엉금엉금 기던 그에게 언제 그런 힘과 용기가 솟구쳤는지 모를 정도로 그는 민첩한 동작으로 능선위로 이동했다.
 “파랑 씨. 괜찮습니까? 어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그녀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달려가 무작정 상체를 부축해 일으켰다. 다행히도 얼굴에는 아무 상처도 없는 것 같았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여기까지 어떻게?”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그것부터 확인하셔야죠. 아가씨가 이런 험한 산길을……”
 “괜찮아……”
 그러나 파랑은 말끝을 채 끝맺지 못하고 신음소리를 대신한다.
 “다리가……”
 “다리가요? 어느 다리가 아픕니까?”
 “오른쪽다리가 삐었나 봐요.”
 “어디라고요? 어디 봅시다. 이런 긁혀서 피가 나잖아요. 벌겋게 독을 쓰면서 벌써 부어오르기 시작했군요. 이만해도 다행입니다. 자칫하면 생명도 위험할 번했습니다.”
  파랑은 몸을 일으키려고 다리를 움직였지만 금시 비명을 지르며 다시 주저앉고 만다.
 ”이대로는 걸을 수 없으니 잠시 안정하고 휴식해야 합니다.”
 “광선이 좋을 때 ……조금 있으면 직사광이 내리 쬐일 건데요. 다 선생님께서 빌려주신 책을 보고 배운 거예요.”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없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미소가 없어도 그녀의 얼굴은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면적 아름다움의 저장이 없이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거기에 신비함까지 가미되었으니 미모의 주축을 이루게 된 것이고.
 “어떻게 여길 오시게 되었어요?”
 인간의 만남에는 화제가 필요하다.
 “꽃구경을 왔다가 우연히 파랑 씨를 보고 미행했습니다.”
 진실이 밝혀진 마당에서 솔직함도 도리어 변명의 구실밖에 못했다. 자신의 결례를 정당화시키려는 선의적인 의도 같은 것도 없지 않았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것 같은 데요. 이사라도 가셨나요?”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집념 같은 것은 없다는 어투의 질문을 만들어 본다.
 “결혼했어요.”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명료했다. 상대방의 호기심 같은 데는 전혀 무관심한 표정이다.
 “결혼을요! 그러셨군요. 축하합니다.”
 표정을 감추기에는 역부족일 만큼 경악은 컸다. 자신의 존재가 그녀의 결혼에 어떠한 영향도 없을 거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결혼은 정도를 놀라게 했다. 어쩌면 그녀의 존재는 자신의 인상 속에 영원한 아가씨로만 남기를 바랐던 것은 아닌지. 기대상실감이……
 “하나도 행복하지 않아요.”
 두 번째의 발언은 거의 핵폭탄 수준의 파괴력을 과시했다.
 “행복하지 않다니요?”
 “사랑이 없는 결혼이니까요.”
 “사랑이 없는 결혼이라니요?”
 “이른바 정략결혼이에요.”
 “정략결혼?!”
 갈수록 심산이고 헝클어진 실타래 같다.
 “신랑 되시는 분도 오늘 동행하셨나요?”
 “아니요. 같이 다니고 싶지 않아요.”
 “무슨 영문인지? 물론 제가 알아서는 안 될 일이겠지만……”
 “아버지 벌이나 되는 노인이거든요.”
 “네?!”
 정도는 거의 소리를 질렀다. 숲 속의 새들이 놀라서 푸르릉- 날아나 버렸다. 멀리 산기슭 밑의 계곡에 오붓하게 자리 잡은 백련사가 철쭉꽃과 나리꽃 속에 묻혀 있었다. 그녀가 근심하던 한낮의 직사광이 촬영의 호황기를 밀어내며 계곡과 산줄기들을 순광의 평범함으로 물들인다. 이제 산골 해는 정오만 넘으면 금방 서쪽으로 기울 것이다.
 “파랑 씨가 무엇이 부족해서 그런……”
 그것은 실례였다. 다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할 줄 아는 신사적 풍도의 상실이었다. 정도는 급기야 자신의 경망에 제동을 걸었지만 이미 말의 의미는 쏟아진 뒤였다.
 “자연은 솔직해서 좋아요.”
 파랑은 세련된 지적 기지를 보이며 그의 경솔함을 탓하지 않고 체면도 세워주는 선에서 자연스럽게 화제를 공유영역으로 유도하며 긴장될 번했던 분위기를 바꾼다.
 “사실 전 자연 같은데 흥미를 가진 적은 없어요. 대학공부에 열중하며 일상에 쫓기는 생활만 했었죠. 그러다가 풍경사진을 찍으면서부터 자연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어요.”
 “그게 언제였습니까? 어떤 계기로 풍경사진에 흥미를 갖게 되셨는지?”
 정도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차분한 어조로  그녀가 풀어내는 화제의 기슭에 발을 담갔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아직도 그녀가 결혼했다는 사실, 그것도 아버지 벌이나 되는 노인과 결혼했다는 사실에 발작했던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 왜 불쾌해야 되는지 그 이유도 알지 못했다.
 “언니 때문이었어요. 언니의 소원은 카메라를 메고 전국을 관광하며 풍경사진을 찍는 것이었어요. 이 카메라도 언니 거예요. 그런데 사진을 찍으면서부터 자연은 인간과는 달리 가식도 없고 대공무사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악의 없는 공존과 공정한 생존경쟁과 섭리에 따른 생존방식,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의 표현, 절제된 욕망……”
 파랑은 자신의 결혼에 대해서 그 결혼으로 그늘이 드리워진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는 진실을 감추고 싶은 듯 엉뚱한 자연의 화제에 열을 낸다.
 “파랑 씨의 말은 어쩐지 저에겐 인간에 대한 불신, 증오, 절망으로 들리는군요. 인간에 대한 기대상실감이 역으로 자연에 대한 호감을 유도한 것은 아닌지?”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그것이 자연을 편애하게 된 원인의 전부는 아닐 거예요. 언니의 소원을 풀어주어야겠다는 단순한 책임감 같은 것도 있었어요.”
 “언니는?”
 “죽었어요.”
 “미안합니다.”
 파랑은 잠시 화제에 커다란 여백을 만들며 개나리꽃잎 하나를 따서 손가락에 끼운 채 빙글빙글 돌린다. 그녀의 얼굴로 구름이 강물처럼 흘러갔고 부슬비가 내렸으며 눈꽃이 펄펄 날린다. 언니의 죽음과 불행한 결혼! 공개해서는 안 될, 가슴 속에 넣고만 있어야 될 엄청난 비극이 존재했음을 예감할 수 있었다. 미모의 아가씨라고 해서 그 생활마저도 아름다운 것은 결코 아닌 것 같다.         
 오늘 그녀와의 우연한 상봉으로 그들 사이는 한결 더 가까워 진 듯도 했지만 실은 더 멀어진 것 같기도 했다.
 가까운 산 주위를 돌며 저녁 편의 사광을 이용해 사진 몇 컷을 더 찍었지만 파랑의 접질린 발목이 점점 더 부어올라 더 이상 걸음을 옮길 수가 없게 되었다.
 “아무래도 그 다리로는 가파른 산을 내려갈 것 같지 못합니다. 백련사까지 내려가려고 해도 성한 다리를 가진 사람도 한 시간은 걸릴 텐데. 날은 벌써 저물고……”
 “먼저 내려가세요. 전 뒤에서 천천히 내려갈게요.”
 “저야 뭐 급히 내려갈 일도 없지만. 파랑 씨가 걱정 되어서요.”
 “저도 급한 일은 없어요.”
 “결례가 안 된다면 제가 업고서라도……”
 “어떻게……”
 “파랑 씨만 괜찮으시다면 전 괜찮습니다.”
 결국 타협이 맺어졌다. 그러나 빈 몸으로도 내려가기 힘든 비탈을 사람까지 업고 내려간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미끄러워 넘어지지 않으면 비탈에서 뒹굴기도 했다.
 “안 되겠어요. 저 때문에 선생님까지 다치시겠네요.”
 땀투성이가 되어 숨을 헐떡거리는 정도를 보다 못해 파랑이 먼저 그의 등에서 내렸다.
 “그럼 어떡하죠. 이 산중에서 밤을 새울 수도 없고.”
 “아까 올라올 때 이 능선 어디에 자그마한 암자 한 채가 있는 걸 본 듯 한데요.”
 “참, 이제야 저도 생각납니다. 왼쪽 어느 암벽 밑에 있었던 것 같은데요. 제가 얼른 가보고 올 테니 여기서 잠간만 기다리십시오.”  
 불과 백m도 되지 않는 지척의 암반위에 지은 암자 한 채가 나타났다. 밋밋한 경사면을 이룬 거대한 암반위로는 맑은 샘물이 부채살 같이 날개를 펼치고 굴러 떨어졌다. 벼랑위에 드리운 개나리꽃은 석양빛을 받아 피를 토해놓은 듯 붉게 빛났고 여기저기 널려 있는 돌탑들은 아버지가 은거한 싸릿골 농가집 주변의 돌탑들을 연상시켰다. 고요하고 은은한 암자의 정취는 불국정토의 성역다운 상서로운 기운이 다분하다.
 파랑이 기다리는 곳으로 되돌아와 그녀를 업고 다시 암자에 이르렀을 때에는 어느새 계곡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산골의 어둠은 내린다 하면 말이 떨어지기 전에 금시 먹물을 풀어놓은 듯 새까맣게 짙어버린다.
 암자에서 수행하는 스님에게 하룻밤 묵어가도록 허락을 받고 쪽방 하나를 빌렸다. 절밥 한 그릇을 얻어먹고 나자 암주庵主인 수행승이 두드리는 구성진 목탁소리와 청아한 염불소리가 고요한 밤하늘에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암반위를 스쳐 흐르는 냇물소리는 양금소리 같기도 하고 하프연주소리 같기도 하다.
 주위는 어둠 속에 잠겨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지만, 철쭉도 개나리도 보이지 않았지만 풀벌레 우는 소리를 타고 그윽한 꽃향기가 감돌며 계곡에 진동한다.
 불공 드리는 스님의 수행 방에서 스며 나온 초불 빛이 자그마한 뜰의 돌탑들이 늘어선 암반위에 서있는 파랑의 어렴풋한 그림자의 윤곽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녀도 수많은 돌탑들 중의 하나로 보인다. 칠흑 같은 어둠만 끝없이 흘러가는 깊은 계곡을 이윽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들 수 없는 밤이네요.”
 벌써 정도가 가까이에 다가온 걸 알아차린 모양 파랑은 혼잣말처럼 나직이 속삭인다.
 “어둠 때문일까요. 아니면 꽃향기에 취해서일까요?”
 “어둠은 반드시 공포와 이어지고 꽃향기는 반드시 행복과 이어질 거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거죠.”
 “어둠을 앞에 두고 행복을 생각할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래요. 공포겠지요. 태양의 아래에서는 그처럼 아름답게 보이던 저 숲과 산봉우리들도 어둠 속에서는 괴물처럼만 보이네요. 스님은 양초 한 대로 어둠을 불사르고 낮의 아름다움을 재생시킬 수 없을 것이고 염불 한마디와 목탁소리도 인간의 가슴 속에 엄습하는 두려움을 지울 수는 없을 거예요.”    
 어둠 속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서있는 파랑의 모습도 태양 아래에서처럼 아름답지 만은 않았다. 그녀의 검은 그림자와 돌탑의 그림자는 거의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닮아 있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때로는 괴물이나 다름없이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도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아름다움과 추함 그것은 단지 빛의 밝음과 어둠의 단조로운 조화일 따름이고.
 “백 년도 못 살면서 천 년을 살 것처럼 이라는 나훈아의 노래가 문득 생각나네요. 어둠 앞에 이렇게 우두커니 서있으려니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분노와 증오 그리고 복수의 불덩어리가 이글거리는 것만 같아요. 한은 꼭 복수로만 풀어야 할까요? 자연은 대공무사하다고 하지만 실은 자연 속에도 복수는 있잖아요. 홍수, 이상기후, 사막화……이런 것들은 죄다 인간의 부당한 행위에 대한 자연의 보복이 아닐까요.”
 복수!
 눈앞에 일망무제하게 펼쳐진 저 어둠과는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말이다. 낮 동안 정도와 파랑은 똑같이 자연풍광 앞에서 인간에 대한 불신과 저주, 증오심 같은 걸 말끔히 잊고 지냈었다. 그런데 밤은 또다시 그들을 죄악으로 가득 찬 지옥으로 몰아넣으며 불만과 저주로 충만된 악한으로 변신시키고 있다. 
 거창한 원한을 가슴에 안고 복수를 벼르는 여자!
 그것이 파랑이라니?!
 믿기지도 않았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아름다움의 화신 만으로도 족하다. 이 무시무시한 어둠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 정도의 인상 속의 파랑은 바로 그런 완벽한 존재였다. 아니, 존재였으면 싶었다.
 정도는 조용히, 말없이 파랑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녀 스스로 그녀의 가슴을 복수로 불태우게 한 원한을 털어 놓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파랑은 원한의 문턱에서 입을 다물어버린다.
 이튿날 아침 파랑은 스님이 공들여 만들어준 나무지팡이를 짚고 산을 내려왔다.
 삼공리주차장에서 헤어질 때에야 파랑은 정도에게 사진필름 몇 개를 건네주었다.
 “이왕 만난 김에 필름을 맡길게요. 부탁해요.”
 그녀가 타고 온 승용차가 고급 외제차임을 발견하고 정도는 놀랐다. 반지하방에서 살던, 백수나 다름없던 파랑이다. 남편이 연상이라고는 하지만 대 재력가인 것이 분명하다.
 젊음과 금전의 등가교환!……
 정도는 눈치 빠르게 시창 앞 선반에 놓인 휴대폰번호를 머릿속에 기억해두었다.
 “시간이 있으면 우리 사진관에도 들러주십시오. 성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얼마 남지 않았어요. 얼마 지나지 않으면 저도 자유의 몸이 될 거에요. 그 때면 다시 그 반지하방으로 돌아갈 거예요. 필름도 선생님 사진관에 맡길 거고요.”
 파랑은 의미심장한 그러나 불확실한 말 몇 마디를 남기고는 그의 곁을 떠나갔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
 반지하방으로 돌아온다고.
 이게 다 무슨 뜻인가?
 언니의 죽음, 정략결혼, 복수……
 이것들은 죄다 어떤 하나의 계획에 포괄되는 의미들일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제한된 시간 속에서 무언가의 목적을 위한 의미의 복합체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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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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