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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28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12 by 아데라

바람의 아들 12
장혜영

 “너무 상심하지 마.”
 윤정은 놀라기는 커녕 미동조차 없다. 남편의 동정에 북받치는 그리움이나 슬픔 같은 것도 느끼지 않는 듯 담담하고 심드렁하다. 
 “혼자 있고 싶어요.”
 꿈속에서처럼 들릴 듯 말 듯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정도는 흠칫 놀라며 팔을 풀고 윤정에게서 한걸음 물러섰다.
 당신보다 전 저 사찰의 목탁소리와 함께 하고 싶어요.      
 그 말은 그렇게 들렸다.
 아내와 사찰 그리고 목탁소리!
 윤정은 왜 갑자기 목탁소리에 심취했을까?
 윤정은 땅에 깊숙이 뿌리를 박았던 발을 옮겨 드디어 걸음을 천천히 옮긴다. 가랑잎을 바스락바스락 밟으며 가볍고 그러나 천천히, 아주 천천히 언덕위의 사찰 쪽을 향해,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밤의 계곡에 은근하나 구성지게 울려 퍼지는 목탁소리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옮겨놓기 시작했다. 윤정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인은 아내에게서 멀어졌고 그만큼 윤정과 목탁소리와의 거리는 좁아졌다.
 잠간 사이에 윤정의 모습은 먹물 같은 어둠 속에 잠겨버린다.
 갑자기 정신이 돌았나?!

 장례식은 소박하나 구색이 정연하게, 빈틈없는 절차대로 거행되었다. 대리석 비석에는 『고 박병술지묘』라는 비문과 그분의 애국자적 일대기를 새겨 넣었다. 봉분위에는 고운 잔디를 입히고 묘지주변에 기념식수도 했다. 워낙 서울의 동작동국립묘지에 안치할 조건이 충분했지만 고인의 유언에 따라 할머니의 무덤이 있는 고향마을에 묻어주었던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나고 상경 길에 오를 때까지도 윤정은 침묵만 지켰다. 그녀의 눈길은 수시로 언덕위의 사찰로 향했고 법종法鍾소리와 목탁소리에 심취된 듯 귀를 솔깃이 기울이고 있었다.
 문득 정도는 운전 도중 룸미러 속으로 뒷좌석에 앉은 윤정이 가방 안에서 검은 가죽케이스를 씌운 할아버지의 일기책을 손에 들고 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아내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반짝거렸다. 연신 손수건을 꺼내어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정도는 아직 고인의 유고를 보지 못했다. 저 안에 무슨 내용이 적혀있기에 장례식 내내 눈물을 흘리지 않던 아내가 일기장을 보자 눈물을 흘릴까?
 호기심이 부쩍 동했지만 운전 중이라 빼앗아 볼 수도 없었다.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적혔어?”
 룸미러를 통해 윤정을 바라보며 물었으나 대답이 없다. 윤정은 말이라는 걸 아예 망각해 버린 실어증환자 같다. 아니면 죽음 앞에서 언어는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실망했는지도 모른다. 말은, 언어는 죽음의 의미를 표현할 수 없다. 말은 그저 인생을, 삶만을 표현할 수 있는 한계적 도구일 뿐이다.
 인생에는 정해놓은 길이 있는가?
 있다면 그건 어떤 길인가?
 고인이 그에게 남겼다는 유언이 새삼스럽게 뇌리를 스친다.
 아버지는 그의 이름을 정도라고 지어주셨다. 바를 정正자에 길 도道자이다.  그러나 그건 이름일 뿐이고 아버지의 소망일뿐이고 바른길 그 자체는 아니다.
 혹시 그 해답이 저 일기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고인은 나에게 당신의 내밀한 삶의 이야기를 적은 유고를 물려주신 건지도 모른다.
 정도는 발에 힘을 주어 가속페달을 밟았다.
 빨리 귀가해서 일기를 읽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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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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