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연재 "바람의 아들"'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0.05.10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42 by 아데라


바람의 아들
장혜영



                                                6장 꽃은 왜 아름다운가?


                                 

                                                                   1

 


 정도에게 주말연휴 같은 건 따로 없었다. 주말이라고 해도 영업을 하고 싶으면 사진관문을 열면 되었다. 그러나 새해에 접어들면서부터 정도는 주말이면 반드시 가게문을 닫았다. 두 번째 사진집 출간을 위한 촬영이 이유이긴 하지만 더 깊숙한 원인은 경영불황이었다. 『동방사진관』의 개업에다 갸울퍌 비수기까지 겹쳐 단골들마저 줄어들어 사진관 셔터를 개폐하는 일이 작업의 전부인 날들이 늘어갔다. 봄철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조금은 호전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기대어 날씨이고 마음이고 혹독하기만 했던 겨울을 견뎌내긴 했지만 그 역시 허사였다. 4월도 중순에 접어들었는데도 경기는 좀처럼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불안과 초조 때문에라도 사진관에 앉아 있기가 불안했다. 그렇다고 집에 들어가기도 싫다. 아내가 자리를 비우고 간 집은 썰렁한 냉기 뿐이었다.
그래서 위안 삼아 매달린 것이 두 번째 풍경사진첩 촬영 준비작업이었다. 그 역시 꼭 출간된다는 담보도 없는 막연한 시도였다. 작년 말까지도 친구 석준범은 두 번, 세 번의 사진집 출간에 후원자가 되어주겠다며 자진해 나섰었다. 그러나 금년 초부터 준범의 자금내원인, 아버지의 전자제품회사가 영문모를 불황으로 부도의 위기에 봉착했다. 게다가 준범의 개인사정도 여의치 못했다. 야심작을 꿈꾸던 미니시리지 촬영은 자금난으로 중도하차했고 현처이던 그의 아내 정실은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바람이 불더니 자유부인행세를 하며 도박과 마약과 외도의 세계에 빠져 들어갔다고 한다. 인젠 콘돔으로나마 간신히 이어졌던 그들 부부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이 파인 것이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준범이네 가정에 이처럼 엄청난 액운이, 불행과 재앙이 덮쳐든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준범은 분명 알고 있을 테인데도 친구 앞에 토설하기를 망설인다.
 다만 한마디, 두서 없는 말만 되뇔 뿐이다.
 “이게 다 그 강복녀라는 요귀 년 때문이야.”
 “강복녀라니 누군데?”
 “새엄마. 계모 말이야.”
 “부친께서 또 재혼하셨어?”
 “환장하신 거지. 집안이 망하려고. 나보다 열 살이나 거의 연하인 새파란 계집애야. 그년을 보는 순간 우리 집구석이 망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어. 망하게 하려고 이를 갈고 기어 든 년에게 아버지가 여색에 눈이 어두워 말려 든 것이지.”
 “전부터 아는 사이었어.”
 대답이 없다.
 “너하고 무슨 악연이라도 있는 여자였냐고. 안 그러면 어떻게 모친인데 년이라고……”
 정말이지 친구가 허망하고 비참하게 무너져 가는 모습을 더 이상 묵묵히 지켜보고 만 있을 수는 없었다. 우정을 빌미로 친구의 사생활을 치사하고 시시콜콜하게 들추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의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책임이고 그 책임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친구이다. 같이 아파하고 괴로움을 나누는 게 친구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준범은 언제나 화제가 이 로터리에 이르기만 하면 입을 다물어버리고 만다. 정말이지 친구에게도 토설하지 못할 만큼 끔직한 사연이 있는 듯싶었다. 그가 수사관이고 준범이 혐의범이 아닌 이상 강박진술을 받아낼 수도 없으니 스스로 이실직고할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친구의 신상에 폭풍우 같은 어떤 엄청난 불행이 덮쳐들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예감이 정도를 불안하게 했지만 예방하거나 물리칠 아무런 방법도 없었다.
 후원자가 그런 최악의 상황에 처했는데도 촬영집 준비를  강행하게 된 것은 먼저 번 작품집을 출간해 준 출판사 이 부장이 무심코 흘린 언질이 동기가 되어 주었었다.
 “좋은 작품이 있으면 명년 쯤 책 하나를 더 낼 생각도 있습니다만. 아직은 결정된 건 아니지만.”
 사람은 가능성이 조금만 보이면 생명을 걸고 그것에 매달리는 동물이다. 지푸라기가 바다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없다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일단은 잡고 보는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
 “가끔은 너의 그 원리주의에 숨이 막히기까지 해. 절대적 원칙은 로봇이나 컴퓨터의 전유물이지. 인간에겐 너무 버겁고 부담스러운 거잖아. 조금은 자유주의자가 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준범은 입만 열면 정도를 원칙 앞에서는 추호의 동요도 없는, 피도 눈물도 없는 원리주의자로 몰아붙이곤 한다. 불의와는 타협할 줄 모르는,융통성 없는 고집불통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정작 정도자신은 지금처럼 원칙이 아닌 자그마한 가능성에마저 급급히 매달리는 동물일 뿐이다.
 원칙 대로 살아오신 아내의 외할아버지, 원칙 대로 살아오신 아버지야말로 명실공히 원칙주의자라는 월계관을(준범에게는 멍에에 불과한)쓸 자격이 충분한 사람들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영광과 신비도 하나하나 평범한 인생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원칙은 정말 준범의 말처럼 로봇이나 컴퓨터의 전유물일까.
 정도는 주말관광인파를 피할 속셈으로 새벽에 집에서 출발했다. 봄꽃이 피는 자연 속에서 세속의 잡념을 죄다 털어버리고 싶었다. 아내에 대한 원망, 사라진 은파랑에 대한 궁금증, 아버지의 느닷없는 산 중 은거에 대한 의문……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지리멸렬하다. 일상은 단지 그에게 하나의 부담이고 고민거리일 뿐이었다.
 해탈! 해탈! 해탈!
 새벽시간이라선지 하행차량들이 뜸했다.
 정도는 가속페달을 힘껏 밟아 고속도위를 기분 좋게 질주했다. 경부고속도의 영동분기점에서 19번 국도를, 묵정에서 581번 국도를, 청량리에서 37번 국도를 번갈아가며 하행하면 덕유산국립공원의 삼공리 목적지에 당도하게 된다.
주행하는 동안 도로변에는 한얀 목련꽃과 벚꽃, 노란 산수유와 개나리꽃이 만발하여 구겨졌던 기분이 금시 개운해졌다. 소박하지만 꾸밈없는 산수유꽃과 화사하고 탐스러운 목련꽃은 벌써 철이 지나 풀풀 날리는 낙화가 도로위에 서글픈 꽃비를 뿌린다.
 덕유산공원입구에는 벌써 가까운 곳에서 모여든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덕유산은 봄철이면 무르익은 산철쭉으로 가을이면 그윽한 단풍으로 겨울이면 황홀한 설경으로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명소이다. 정도는 첫 번째 사진집에도 덕유산단풍사진 두 점을 넣었었다. 특히나 이번에는 파랑이 촬영한 고목나무와 청석 그리고 독수리 등 몇 점의 작품도 포함시키려고 한다.
 삼공리 삼거리를 지나 공원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잠시 길 맞은 편 상가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신 뒤 매표소에서 입장권 한 장을 끊었다. 구절양계곡을 따라 60 리나 뻗은 구천동계곡은 내외구천 33명소를 자랑하는 명승이다. 언제 모여들었는지 계곡의 냇가로 구불구불 뻗은 산행 길엔 벌써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계곡은 이름 모를 꽃향기로 진동하고 울긋불긋 꽃물결로 눈부시기까지 했다. 진달래는 벌써 꽃잎이 졌거나 철늦게 핀, 시든 꽃잎 몇 개만 달랑 가지에 매달려 때 지난 아름다움과 영광을 지키고 있다. 금방이라도 산행 길에 폭포처럼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이 무성하고 탐스러운 산철쭉은 싱싱한 덩굴에 불이라도 달린 듯 연한 홍자색 꽃잎들을 황홀하게 펼치고 있다.
 정도는 산행초입부터 철쭉꽃에 넋을 잃고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필름도 미리 십여 개나 준비해 갖고 왔다. 백여 컷 속에서 한 두 컷만 살려도 성공이다. 기종機種도 세 개나 준비했고 렌즈도 여러 개 휴대했다. 목에 걸기도 하고 어깨에 메기도 하고 손에 들기도 했다. 피사체의 특성에 따라 이 카메라, 저 카메라를 바꿔가며 촬영하기에 가장 적합한 아침 사광을 놓칠세라 셔터를 부지런히 눌러댔다.
 계곡의 수려한 경관은 해발고도가 높아질수록 더욱 황홀했다. 33경 중 16경인 인월담부터 계곡의 풍경은 순수한 자연의 모습을 드러내며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제 청류동, 비파담, 구월담, 금포탄, 구천폭포, 백련사가 하나하나 나타날 것이고 백련사만 지나면 그 위에 덕유산 정상인 해발 1614m의 향적봉이 우뚝 솟아 있다.
 구월담을 지나 신래휴계소에 이르러 다리도 쉬울 겸 정자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된 관광객들의 표정은 마냥 즐겁기만 하다. 자연은 사람들의 시름을 잊게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원망과 불만과 증오심마저 해소시키고 맑고 순진한 동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강력한 정화작용이 있는 듯싶다. 옹졸했던 마음은 대공무사해지고 때 묻은 양심은 맑은 계곡물에 투명하게 씻기고……
 그냥 어린애가 되어 벌거벗고 저 냇물 속에 풍덩 뛰어들어 물장구라도 치고 싶은 기분이다. 인간세상의 영욕은 자연의 태연한 무위無爲 앞에서는 부질없는 집념에 지나지 않는다.
 아내와 파랑과 아버지와 미경이, 준범의 얼굴들이 또다시 의식의 계곡을 타고 안개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정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발 오늘 하루 만이라도 지루한 일상에서 도피하고 싶다.
 금포탄과 구천폭포를 지나자 백련사가 나타났다. 봄꽃 속에 묻힌 산사는 아늑하다 못해 권태롭기까지 하다.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성스러움이 게으른 풍경소리와 더불어 은은하게 발산되고 있었다. 두 손을 합장하고 읍을 하며 지나가는 스님의 모습이 느닷없이 아내의 얼굴로 보여 정도는 급히 시선을 비틀었다.
 낙화유수라는 성구를 떠올리게 하는, 꽃잎이 찰랑거리는 맑은 계곡수가 발밑으로 또랑또랑 흘러가는 아치형의 우아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백련교를 건너자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108계단이 아스라니 높게 앞길을 가로막았다. 정말 이 계단을 오르면 모든 번뇌가 다 해소될까 하는 어리석고 유치한 의문이 떠오른다. 108개의 번뇌는 몰라도 한 두 개의 번뇌라도 잊을 수 있다면 또 이 계단을 올라가는 어려움 만큼을 지불하여 해소될 수 있는 고뇌라면 그게 다 무슨 고뇌이겠는가? 이 계단들은 그냥 백팔개의 번뇌를 확인하는 절차에 그칠 뿐인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계단을 오르는 의미도 그 만큼 줄어들 테지. 
 정도는 그 첫 번째 계단을 오르며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아내 이윤정의 고뇌.”
 두 번째 계단을 밟으며 또 중얼거렸다.
 “이건 파랑의 고뇌.”
 아니, 내가 왜 파랑 때문에 고뇌해야지. 그녀는 그냥 내 인생의 역전을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녀 때문에 내가 고뇌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바로 그 때였다.
 정도의 눈길이 무심코 대웅전으로 이어진 계단상층부를 올라가는 한 아가씨의 뒷모습에 박혀들었다.
 어디서 많이 본 눈 익은 모습이다.
 누구지?
 느닷없이 의문의 쪽문을 열고 기억의 복도에 들어선 사람은 파랑이었다.
 그렇다. 그녀는 분명 은파랑이었다. 투피스정장차림의 깔끔하고 날씬한 몸매, 학의 다리처럼 미끈하고 쭉 빠진 다리, 등허리에서 치렁거리는 머릿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신변에 언제나 싱싱하게 거느리고 다니는 절제된 균형미와 세련미, 지적인 품위가 첫 눈에 은파랑임을 알아볼 수 있게 했다.
 파랑 씨가 여기까지 웬일이지?
 이런 곳에서 파랑 씨를 만나다니?!
 갑자기 가슴에서 쿵쿵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공연히 허둥지둥했다. 파랑 씨, 하고 이름을 불러야 할지 그냥 모르는 척 지나쳐야 할 지, 그녀의 뒤를 미행해야 할 지 아무런 결단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발길은 그의 의식의 지배를 떠나 스스로 파랑 씨의 종적을 따라 벌써 이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감각은 언제나 이성을 한 걸음 앞선다. 이성은 한 박자 늦은 감각의 뒷전에서 이러쿵저러쿵 시비만 거는 것이다. 옹졸한 노파나 다를 바 없다.
 파랑은 백련사 대웅전을 한 바퀴 돌아 보고는 절을 빠져 나갔다. 절에는 별로 흥취가 없는 듯싶다.
 그녀의 목과 손에도 카메라 두 대가 들려있었지만 법당과 야외 부처만을 사진에 담고 있다. 아내와는 다른 점이다. 절의 무엇이 아내의 마음을 유혹했을까?
 사찰을 뒤로 하고 다시 산행 길에 접어들었던 파랑은 갑자기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뒷산 등성이로 방향을 잡고 능선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자 혼자서, 그것도 젊고 예쁜 아가씨가 인기척이 없는 산 중으로 독행하다니.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담도 크다 싶었다. 그녀는 정도나 다른 사람들처럼 산철쭉 하나에만 넋을 빼앗긴 것 같지 않았다. 조금 높직한 바위에 오르자 백련사 아래로 길게 뻗은 구천동계곡을 카메라에 담는다. 저만큼 위에 우뚝 솟은 향적봉정상에도 렌즈를 맞추고 연이어 셔터를 눌렀다. 자연의 국부적인 풍경이 아니라 전체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정도는 파랑의 눈길을 피해 숲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런 미행이 결코 신사다운 행동이 아니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기를 쓰고 매달리는 호기심을 뿌리칠 수 없었다.

'문학 > 소설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44  (0) 2010.05.24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43  (0) 2010.05.16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41  (0) 2010.05.03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40  (2) 2010.04.23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39  (1) 2010.04.12
Posted by 아데라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