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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04 장편연재 "붉은아침" 2 by 아데라

장편연재 "붉은아침" 2
제1부 백년빙곡冰谷

장혜영


                                      1장 안개 내린 서울



 

                                                                           2


 
 일요일은 날씨가 화창했다.
 봄 계절 특유의 권태로움은 도리어 희락으로 느껴졌다.
 4월의 황홀한 꽃 바다 속에 묻힌 서울의 휴일은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울긋불긋한 옷단장으로 또 한 줄기의 꽃물결을 이룬다. 이 세상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존재는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준호는 드디어 남 교수의 소개로 한종수 노인을 방문하러, 그분이 계신다는 일산 신도시로 떠났다. 이번 걸음이 「6. 25 참전자 실록」자료 수집을 위한 마지막이자 가장 의미 있는 취재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 이제 장장 5년간의 준비작업이 끝나고 바야흐로 집필에 착수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50년 전에 죽은 사람이 50년 후에 다시 나타났다. 그 속에는 꼭 그 세월만큼이나 두터운 이끼가 덮이고 먼지가 쌓인, 길고 기막힌 사연들이 담겨 있을 것이어서 더구나 호기심이 동했다.
 2호선, 6호선, 3호선 전철을 갈아타야만 하는 교통 불편도 짜증날 대신 신명이 났다.
 열차는 구파발을 지나서부터 백석 역에 이르는 사이 지하와 지상을 번갈아 운행하며 계곡과 촌락들이며 지하철 지축 기지와 신도시 원당 아파트단지며 대공동평야며…… 싱싱한 교외 풍경들을 보여주어 객로의 지루함을 덜 수 있었다.
 두 시간 가량 소모하고서야 행선지인 정발산역에 도착했다.
 남 교수가 알려준 기억들을 더듬으며 정발산공원을 에돌아 단지빌라를 찾아갔다.
 아담한 2층 벽돌건물이었다.
 어느새 꽃비처럼 날아 떨어져 정원을 하얗게 덮기 시작한 벚꽃과 목련꽃은 소담한 철쭉덩굴과 푸르싱싱한 심녹색 향나무들과 정교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4단 혹은 5단으로 층층이 전지한 적갈색 향나무들은 정원의 운치를 한결 우아하게 가미加味한다.
 초인종소리에 응대한 목소리는 여자였다. 이슬 같은 촉촉한 물기가 흠씬 배어 부드러우면서도 그윽하여 목소리 임자의 모습이 꽃잎처럼 연상되었다.
 “남 교수님의 소개로 왔습니다. 아침에 전화를 드렸는데요.”
 “네, 어서 들어오세요.”
 육중한 쇠대문이 열렸다.
 준호는 정원으로 들어갔다. 인공으로 조성된 기암괴석들 틈에서 이름모를 화초들이 자라며 향기를 풍기고, 윤기 도는 강자갈로 포석된 행로가 그 사이를 구불구불 뻗어나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준호를 맞아준 사람 역시 20대의 아가씨였다. 깍듯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는 아가씨의 모습은 방금 전의 목소리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청순하면서도 단아한 인상이었다. 천재적인 조각가의 손에서 정성들여 쪼아 만든 것 같은, 흠 하나 없는 이목구비의 정교함과 균형감과 섬세함,  햇빛처럼 맑고 부드럽고 투명한 피부도 눈부셨지만 그보다도 여유 있는 얼굴선에서 풍기는 부드러움과 온화함과 안전감과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그윽한 매력이 넘쳐나고 있었다. 무단초월과 자유의지만을 현대청년의 이미지로 착각하는, 경망과 파행을 서슴지 않는 요즘 아가씨들에게서는 보기 드문 미덕이 엿보였다.
 “할아버지, 남 교수님께서 보내신 손님이 오셨어요.”
 아가씨는 경음악 같은 목소리로 거실 쪽을 향해 전갈을 올린다. 우유 빛의 미끈하고 단아한 블라우스가 그녀의 반듯한 미모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공간이 탁 트인 넓은 거실은 윤기 나는 붉은 목조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고 커튼을 열어젖힌 창문으로 금가루 같은 햇빛이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천장을 찌르는 열대관상수며 32인치 디지털평면 TV며 금붕어가 유유히 노닐며 기포를 뿜어올리는 커다란 수족관이며…… 어디를 보아도 귀족적이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거실 중앙의 가운데 소파에 웬 남자가 앉아 있었다. 넓은 이마는 광택이 반짝거렸고 성긴 발모는 은백색을 띠고 있었다. 목덜미는 유난히 굵고 짤막해 보였다.
 노인의 목청은 어찌나 우렁찬지 넓은 거실을 드렁드렁 울렸다.
 노인의 옆에는 앞치마를 두른, 가정부로 보이는 40대의 중년 아줌마가 공손히 시립한 채 주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노인은 아가씨의 전갈을 들었는지 잠시 하던 말을 중단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끊어진 말허리를 이었다.
 노인의 노골적인 푸대접에 준호는 모멸감을 느끼고 얼굴을 붉혔다.
 아가씨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잠시 재 전갈을 올리지 못한 채 노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가정부 역시 주인과 손님 쪽을 번갈아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노인은 대수롭지 않은 듯 신나게 이야기에만 몰두했다.
 “거참 이상하다 했어. 이놈의 도어 록을 잠그면 열리고 잠그면 열리고 하니 말이지. 혹시 밖에 누가 있나 싶어 문을 열고 내다보면 텅 빈 복도뿐인데도 저절로 도어 록이 스르륵 비틀리며 열린단 말일세.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드는 거야. 사람도 없는데 잠근 문이 저절로 열리니까 누군들 갑나지 않겠어. 도깨비짓 같기도 하구 귀신의 조화 같기도 하구. 등에 식은땀이 다 났다니까. 무슨 놈의 이상한 꿈인지 모르겠어. 오늘 어떤 일이 생길는지 궁금하이.”
 준호는 이 노인이 바로 50년 전에 죽었다는, 할아버지께서 사람이 아닌 귀신이라고 하던 그 한종수라고 판단을 내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어디에서도 죽음과 연계시킬 만한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저 유복한 말년을 누리는 평범한 한 노인의 모습일 뿐이었다.
 분명 아침에 노인에게 내방을 여쭈는 전화를 미리 넣고 떠났다. 그런데도 불청객 취급하듯 문전박대하니 도대체 무슨 영문일까? 망설이고 있는데 그제야 주인은 손님이 생각난 듯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아가씨에게 말을 던졌다.
 “방금 누가 왔다고 했냐?”
 “네. 남 교수님께서 보내신 손님이 오셨어요.”
 “이쪽으로 와 앉으라고 해라.”
 준호는 그제야 거실 안으로 들어와 노인에게 허리를 굽혀 초면 인사를 올렸다. 한복 바지저고리를 차려입은 노인은 풍채와 기상이 도도했다. 기다란 눈썹과 콧수염까지 은백색 성에가 내려 신선 같아 보였다. 너부죽한 얼굴은 약간 붓기가 있는 듯싶었으나 아직 잔존한 탄력으로 기름기가 흘렀고 약간 처진 두 볼에는 노인버섯 몇 송이가 돋긴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깨끗한 피부를 더욱 밝게 보여주었다. 인자하고 소탈하고 시원시원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역시 어디에도 죽음에 찢겨진 자국은 없었다.
 그러나 준호를 마주보는  순간 노인의 얼굴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찌푸린 이마를 길게 가르며 드러난 흉터 때문에 위엄과 독기마저 번뜩여 준호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것은 분명 죽음이 스쳐간 자국이었다. 한종수가 죽었다고 한 할아버지의 말은 거짓이 아닌 듯싶다. 그렇다면 한종수는 도대체 어떻게 죽었으며 또 어떻게 부활했는가? 호기심은 고무풍선처럼 둥둥 팽창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최준홉니다.”
 한종수는 이윽히 준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정이 증발된, 건조한 말꼭지를 뗐다.
 “자네 중공에서…… 중국에서 온 유학생이라면서?”
 “네.”
 앉으라는 허락이 없는지라 준호는 그냥 시립한 채 공손히 대답했다. 인제는 잊혀진 호칭인 중공이라는 말속에서, 비록 중국이라고 시정은 했지만 자신에 대한 한종수의 적의를 읽을 수 있었다. 한종수는 지금까지도 50여 년 전의 과거 속에서 살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오늘의 취재가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우려와 걱정부터 앞섰다.
 마침 한종수의 손녀인 듯한 아가씨가 커피를 날라 오며 가벼운 눈짓으로 그더러 소파에 앉으라고 권했다.
 “무슨 일루 이 늙은이를 찾았나?”
 시종 반갑지 않은 투였다. 남 교수의 면목을 봐서 차마 거절하지 못한 듯싶다.
 한종수는 커피를 받아 컵 안에 설탕을 집어넣고 스푼으로 휘휘 저어댔다. 설탕덩어리가 유리컵 벽에 부딪치며 달그랑달그랑 부산스런 소리를 냈다. 성미가 과격한 분이시다 싶었다. 하긴 준호의 할아버지 최덕구 역시 불같은 성미였다. 키가 9척이나 되게 훌쩍 크고 허리는 구부정하지만 지금도 걸음은 손자보다 더 빨랐고 목소리도 우렁찼다. 칼날 같은 콧날과 우묵한 눈, 꽉 다문 입술에는 강인함과 성급함이 엿보였다. 그것은 아마 전쟁이라는 혹독한 현실이 그들의 얼굴에 남긴 지울 수 없는 흔적일 것이다.
 구질구질한 설명 같은 건 노인의 짜증만 불러일으킬 것이었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6. 25 참전자 실록」이라는 책을 집필하는데 할아버지의 전쟁담을 듣고 싶어서 왔습니다.”
 초면인지라 차마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의문부터 털어놓기는 거북했다. 아니, 거북하다기보다는 결례일 것 같았다. 화제가 풀리노라면 그의 입에서 스스로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6. 25 참전자가 나 혼자 뿐이 아니거늘 하필이면 취재대상이 이 늙은인가?”
 한종수는 커피 컵을 들더니 한번에 마시고는 탁자 위에 내려놓고 손으로 입을 쓱 문지른다.
 “혹시 중국에 살고 있는 최덕구라는 분을 알고 계시는지요?”
 “강촌마을에 사는 최덕구 말이지?”
 한종수의 두 눈이 커다랗게 확대되었다.
 “네.”
 “알면 왜? 자넨 그 작자와 어떤 관계인가?”
 “제가 바로 그분의 손잡니다. 이번에 두 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책을 저술하려고……”
 “뭐라고? 덕구란 놈이 자네 할아비가 틀림없으렷다? 그지? 자네 할미는 곱단이고?”
 “네. 남 교수님한테서 6. 25전쟁 생존자명단을 체크하다가 우연히 할아버지의 성함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줄로만 알고 있었거든요.”
 드디어 화제가 본궤도에 올라섰다.
 “옳거니. 오늘 이런 일이 생기려고 그런 꿈을 꾼 거로구나. 왜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배 아픈가? 눈 꼴사나우니까 당장 내 눈 앞에서 꺼지게. 아침부터 재수가 없어. 아줌마, 이 사람을 내 집에서 어서 내보내게. 다신 내 집 마당에 그림자도 얼씬하지 못하게. 물어볼 것이 있으면 자네 할아비한테 가 물어보면 될 거 아녀.”
 한종수는 얼굴을 퍼렇게 물들인 노기를 구태여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할아버지.”
 옆에서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가는 뼈 있는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손녀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할아버지의 팔소매를 잡았다.
 준호도 덩달아 일어났다. 너무도 돌발적인 상황이라 훼손된 취재 분위기를 원상 복구할 비책이 미처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최덕구의 손자라는 말 한마디가 이처럼 한종수를 분개하게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당신들 시대에 쌓였던 적의가 손자에게까지 영향이 미치다니!
 “최덕구 그놈 내 손으로 죽여 버리지 못한 게 평생 한인데 그놈 씨알머리한테 전쟁담을 들려주라고. 내 몸에는 아직도 그놈의 삽날에 찍힌 상처자국이 있다. 어디 눈 똑바로 뜨고 봐!”
 한상권은 상의 웃자락을 부득부득 걷어 올리며 상처의 흔적들을 보여주었다.
 준호는 갑작스런 상황에 당혹하여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리구 이 배와 다리엔 북괴군 놈들의 총에 맞은 철환이 아직도 박혀있다. 그러니까 당장 나가! 다신 내 집에 코빼기도 드러내지 마.”
 노인의 눈에서 불꽃이 튕겼고 이마의 상처는 독기 오른 구렁이처럼 꿈틀거렸다.
 궁지에 빠진 준호는 난색을 지은 채 엉거주춤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주인이 나가라는데 왜 나가지 않고 장승처럼 그냥 버티고 서 있어. 어서 꺼지지 못해!”
 한종수가 아예 발을 구르며 추상같이 호령을 질러대는 통에 준호는 거실에서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벌써 50년이 지났는데도 노인의 가슴에 맺힌 한은 조금도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한종수의 이름을 혀끝에 올릴 때마다 두 눈에 불물이 이글거리고 이를 으드득으드득 갈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중첩되면서 준호는 오늘까지 이어져온 윗세대의 서릿발 치는 한의 응어리를 보고 진저리를 쳤다.
 아가씨가 축객당하는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금방 전까지도 노인의 무례함을 원망했지만 웬일인지 그녀 앞에서는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밖으로 나왔는데도 노인의 거친 매도가 방 안에서 그냥 흘러나왔다.
 준호는 도망치듯 대문을 나왔다. 결국  그는 한종수의 부활의 비밀도 알아 내지 못하고 쫓겨나고 말았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답게 괴벽한 성미다 싶었다.
 거리는 화사한 꽃물결속에서 환락의 웃음으로 넘실거렸다. 그러나 준호는 또 한 번 그 웃음의 깊숙한 곳에 어혈이 든 멍과 꽁꽁 언 얼음과 가시지 않은 전쟁의 흔적을 보았다. 지워지지 않은 한은 세월을 타고 진옥과 준호의 가슴에까지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전 살고 싶지 않아요. 죽고 싶어요! 이 썩어빠진 세상이 싫어요.”
 진옥의 울부짖음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다. 그리고 그 피멍은 포장마차에서 주사를 부리고  어두컴컴한 자취방에서 통곡하던 지은이의 가슴 어느 구석인가에도 응어리져 있을 것만 같았다. 거무스름하게, 옭아맨 듯이 거죽이 오므라든 한종수의 복부에 생긴 상처자국은 할아버지의 어깨와 팔 그리고 목 부위에 남은 상처자국을 연상시켰다. 할아버지는 적탄에 목을 부상당해 지금도 『목 삐뚜리』라는 별명을 달고 산다. 비가 오거나 눈이 내려 날씨가 찌뿌듯할 때면 그런 총상의 흔적들에서 통증이 발작하여 고통을 호소하곤 했다. 간헐적인 상처의 아픔은 할아버지로 하여금 가혹한 전쟁의 나날들과 총부리를 맞대고 싸웠던 사람들을 기억에서 추방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데 자신의 손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한종수가 살아 있다니 할아버지는 어떤 기분일까? 이제 할아버지의 최대의 한은 그 전쟁에서 자신의 손으로 한종수를 죽이지 못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가 6. 25전쟁에 참가한 이유는 솔직히 《성스러운 남조선 해방》이나 《조국통일위업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단지 38선을 넘어가 월남 도주한 한종수를 잡아 형님의 원수를 갚고 여동생 향란이를 찾아 고향 전라도로 돌아가 온 집 안 식구가 단란하게 모여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종수의 생존으로 할아버지는 그 중 어느 한 가지 소원도 이루지 못한 셈이 되고 말았다.
 크게 기대하고 왔는데 이렇게 아무런 소득도 없이 쫓겨나고 보니 체통도 구겨지고 자존심도 엉망이었다. 아무리 성이 나도 그렇지 주객간의 초보적 예의는 지켜야 할 게 아닌가. 더구나 지금이 어느 땐가. 세계는 냉전을 종식하고 평화를 지향하고 있으며 남북한도 적대관계의 해소와 긴장완화를 출발점으로 화해와 협력을 도모하고 있는데 말이다.
 “선생님.”
 허탈감에 빠져 방향감각을 잃은 채 발걸음에 육신을 실어놓고 어디론 가로 정처 없이 걸어가고 있는데 느닷없이 등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초행길인 이 일산의 거리에서 자기를 불러줄 면식 있는 여자는 없다는 생각에 그냥 걸음을 옮겼다.
 “선생님.”
 목소리는 아까보다 조금 더 가까워져 있었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보던 준호는 그 자리에 우뚝 심어졌다. 저만큼 뒤에서 총총걸음으로 따라오고 있는 여자는 한종수네 집에서 보았던 아까 그 아가씨였다. 한 줄기의 빛이 다가오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깨 위에서 넘실거리는 장발은 햇빛을 받아 광택이 일렁거렸다. 균형잡힌 날씬한 몸매가 완벽한 체형미를 보여 주었다. 하얗게 눈부신 스커트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율동 있게 엇바뀌며 다리의 각선미를 드러냈다.
 “절 부르신 겁니까?”
 “네.”
 약간은 잔약하다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할아버지께서 혹시 마음을 돌리신 건가요?”
 무너진 절망에 다시 한번 기대를 복구해 보았다.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선생님께 사과드려요.”
 “뭘 사과씩이나……”
 아가씨가 깊숙이 허리를 숙이는 바람에 준호는 도리어 당황하고 쑥스러워졌다. 긴 머리가 치렁치렁 가슴 아래까지 드리운 모습이 황홀했다. 아마 그녀의 그런 황홀한 미모는 조물주인 하느님도 자신이 창조하고도 놀라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진 원래 인자한 분이신데…… 오늘은 왜 저러시는지 모르겠네요.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노인이 아닙니까. 그 시대를 살지 못했던 젊은 제가 이해해야지요.”
 “먼 길 오신 분께 식사대접도 안하면 주인 된 예가 아니죠. 제가 사과도 드릴 겸 점심을 사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어요.”
 “아니 뭐 그러실 필요까지야……”
 솔직히 싫지는 않았다.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라면 너무나 아름답고 황홀할 것 같았다.
 “밥 생각은 없고…… 커피나 한잔 하던지요.”
 “그럼 저 쪽으로 가시죠.”
 아가씨는 길 건너편의 어느 커피집으로 그를 안내했다.
 실내는 분위기는 고풍스러우면서도 아늑했다. 은은하게 흐르는 클래식 음악의 부드러운 선율이 은연중에 사색을 유도하는 매력적인 운치를 만들어냈다.
 웨이터가 더운물을 따르고 주문을 받고 커피 두 잔이 배달되어 오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엔 퍽이나 긴 침묵이 흘렀다. 너무나 우연한, 명분마저 없는 만남이어서 두 사람 다 공유할 수 있는 화제를 고르기가 어려웠다.
 준호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와는 달리 결단적이지 못하고 조금 우유부단하고 조용한 성미였다. 여자 앞에서는 더구나 숫기가 없었다. 다행히도 진옥과의 만남으로 여자들과의 숫기가 조금은 트이긴 했지만 그래도 둘 사이의 주도권은 늘 진옥의 몫이었다.
 퍽이나 오랫동안 그들은 긴 공간을 메워 주는 음악의 선율에만 기대어 답답한 침묵을 이겨냈다.
 그래도 아가씨가 자신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 먼저 예의를 지켜 애써 쑥스러움을 감추며 침묵을 열었다.
 “제 이름은  유리예요. S대 생물학과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어요. 선생님은요?”
 우선 같은 대학에 다니면서도 그녀를 한 번도 본적이 없다는 사실에 준호는 놀랐다. 하긴 일상의 코스가 대학원기숙사, 강의실, 연구실, 도서관으로 이어진 단순노정이니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네. 저도 S대 인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공부하러 온 중국유학생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기쁩니다.”
 저도 모르게 가슴이 약간 떨리며 말마디들이 가끔 토막 났다.
 “어머, 같은 대학이네요.”
 유리는 맑은 얼굴에 엷은 미소와 함께 놀라움을 실었다. 그 모습이 더구나 매혹적이었다. 눈이 부셔서 감히 직시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나눌 수 있는 일상의 대화는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그 다음은 예의의 의미만 남은 건조한 화제뿐이다. 물론 날씨에 대해서도, 시국에 대해서도 고를만한 화제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오늘 분위기가 그런 여유와 낭만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어색한 분위기의 언덕을 넘어 공유할 수 있는 화제는 과연 무엇일까?
 “저의 할아버지의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전쟁에서 받은 상처가 너무나 컸나 봐요. 시종 자애로우시다가도 6. 25 화제만 나오면 금세 흥분하시며 거칠게 돌변하시곤 해요. 그때면 할아버지께서는 50년대로 회귀하시는 것 겉아요.”
 이번에도 유리쪽에서 먼저 화제를 만들어왔다.
 “용서가 아닌 동정을 해야겠지요. 저희 할아버지도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는데 유리 씨 할아버지 경우와 꼭 같습니다. 전쟁이 그분들의 가슴속에 분노와 적의를 심어준 것입니다.”
 화제가 서서히 무르익으면서 두 사람 사이에 감돌던 어색한 분위기도 차츰 사그라졌다. 진한 커피가 두 사람의 유약한 마음에 활력소로 자극했다.
 “제가 듣기로는 유리 씨 할아버지께서는 6. 25 전쟁 때 돌아가셨다고 하던데 어떻게 아직까지도……”
 꺼내기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호기심에 떠밀려 끝내 입 밖에 흘리고 말았다.
 유리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길게 비웠다.
 “제가 결례되는 질문을 했다면 사과하겠습니다.”
 “그 질문은 이담 직접 할아버지한테 물어보세요.”
 그녀가 화제를 회피하는 걸 보아 그 사건은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참혹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호 쪽에서 호기심을 접고 기회를 뒷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잠시 화제가 꺼진 사이 두 사람의 눈길이 우연히 허공에서 마주쳤다. 준호는 불에 데기라도 하듯 흠칫 놀라며 그녀에게서 눈길을 감아 들였다. 석탄덩이처럼 까만 눈동자와 백옥처럼 하얀 눈자위가 너무나 산뜻하고 투명하여 그윽한 호수 같아 가슴을 설레게 했다.
 유리도 당황한 듯 커피 잔을 입가에 가져간다.
 “솔직히 전 할아버지네 세대가 가여워요. 그분들의 개인적인 삶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국가와 체제, 계급과 이념의 희생물이 된 거잖아요. 동물들은 그런 것들이 없이도 자연의 섭리대로 서로 잘 공존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전 인간의 창조물인 국가와 계급차별과 이념의 세계가 싫어요. 인간을 사회공동체의 하찮은 부속물로 전락시키는 이념과 이념의 분할에 의한 국가가 싫어져요. 체제와 이념에 대한 그런 불만은 생물학을 전공하면서부터 더 확고해지기 시작했어요.”
 화제가 일상의 평지를 지나 진실의 능선을 오르기 시작하자 두 사람은 드디어 자연스럽게 따분한 구속에서 탈피하여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은 바로 그곳뿐이었다. 이제 그들은 남녀라는 차별과 초면이라는 낯설음을 초월하여 상대를 화제의 대상으로 국한 짓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은 지적인 사람들의 공통적인 병인지도 모른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의 추악함과 영악함을 동물성에 비유하여 매도하지만 사실 부당하게도 인간의 비난대상이 된 동물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비하는 억울한 누명일지도 모릅니다. 동물의 야성은 알고 보면 그 한계가 육체적 생존보장으로 그치지만 인간의 탐욕은 그것을 초월하여 체제와 이념으로 표현되는 정신적 팽창에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고 있으므로 비난을 받아 당연한 쪽은 도리어 인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동물세계는 육체적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전쟁은 있어도 이데올로기적인 만족을 위한 무의미한 전쟁은 없지 않습니까.”
 화제가 노랗게 구워지며 두 사람은 신이 나 커피 두 잔을 더 청했다.
 “그래요. 동물세계는 약육강식이 지배한다는 이유로 인간의 비난대상이 되고 있지만 그들은 먹이사슬에 의한 포식과 번식의 비례균형이 적절하여 강약공존의 생태계가 가능해 진 게 아니겠어요. 그러나 인간사회의 생태계는 어떠한가요. 약육강식은 자연계와는 물론이고 국가체제와 이념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동물들에게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인류 상호간의 살육과 동족상잔까지도 거리낌 없이 자행하고 있는 현실이잖아요.”
 “6. 25 전쟁은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생동한 증거겠지요.”
 “전 이따금 인간의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에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곤 해요. 차라리  단순한 그러나 악의 없는, 주어진 섭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동물세계가 부러워요. 먹이 하나를 놓고 치타, 하이에나, 독수리가 공유하는, 만족할 줄 알고 베풀 줄 아는 동물들이 더 돋보여요. 악어 같은 지독한 포식동물도 배만 부르면 먹이가 코앞에 와도 건드리지 않는다잖아요. 뿐만 아니라 악어는 또 남의 먹이가 되기도 하지요. 수달은 악어의 꼬리를 산 채로 잘라먹잖아요. 인간에겐 그런 관용과 배려마저 없어요. 아마 잡아서 내일을 위해 먹이를 창고에 쌓아 두었을 거예요.”
 커피 잔에서 피어오르는 비단같이 투명한 김발이 그녀의 얼굴을 커튼인양 가리며 신비롭게 보이게 했다.
 준호는 구수하게 풍기는 커피 향을 심호흡으로 가슴 깊숙이 들이마셨다. 그녀가 멋지게 보여주는 지적능력은 그녀의 미모보다도 더 준호를 매혹시켰다. 생물학을 공부하면서도 그 속에서 인간과 생명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싸움에서 이긴 숫 사자가 패배하고 권좌를 떠난 다른 숫 사자의 새끼들을 모조리 물어 죽이는 행위를 보고 인간은 잔인하고 지독하다고 매도합니다. 부상당한 동료를 잡아먹는 늑대도 인간의 비난대상이잖아요. 그러나 숫 사자의 그런 잔인한 만행은 새끼들을 죽임으로서 암사자들과 짝짓기를 하기 위해서이고 늑대가 동료를 잡아먹는 건 단지 굶주림을 달래기 위해서예요. 그러나 자식을 죽이고 형제를 죽이는 인간은 이념 때문이고 권력 탈취 욕구 때문이고 하찮은 금전 때문이잖아요. 간악하고 잔인하다면 인간이 동물을 능가한다고 해야 할 거예요.”
 유리의 사유는 일사천리로 뻗어나갔다. 그녀는 인간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제가 「6. 25 참전자 실록」이라는 책을 저술하려는 동기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 앞에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합니다. 주어진 섭리대로 살 줄 아는 동물을 비난하기 전에 세상의 섭리를 깨뜨리는, 동물보다도 못한 어리석은 탐욕을 버릴 때가 왔음을 이번 저작을 통하여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념의 가치보다 인간의 존엄과 생존이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을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전쟁은 국가나 이념의 차원이 아니라 인권의 차원에서 연구되고 비난과 참회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잘 생각하셨어요. 사실 저희 할아버지께서도 저더러 당신의 회상기를 대필해달라고 의뢰해 오신지 오래됐어요. 그러나 전 차일피일 미루고 있어요. 전 전쟁을, 설사 지면이라 할지라도 재현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고 쌍방의 접전으로 행해진 전쟁을 할아버지의 뜻대로 일방적 관점에서 서술해 이념의 새로운 희생물을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만일 전쟁에 대해 공정하고 객관적 접근을 시도하는 글을 저술할 수 있다면 그보다 의미 있는 일은 또 없을 거예요. 시간이 좀 지나 할아버지의 분노가 사그라지면 제가 다시 설득해 보겠어요. 누구 말도 듣지 않는 분이시지만 이 손녀 말은 잘 들으시니까 희망이 전혀 없지는 않을 거예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감사합니다. 그럼 유리 씨만 믿고 일이 성사되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이제 화제는 종착역에 이르렀고 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건졌다. 아쉬웠다. 그녀와의 만남은 비록 짧았지만 지지부진하던 의욕을 부활시키는 계기가 되어 의미 있는 시간들을 만들어냈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유리는 지하철 개찰구까지 그를 바래다주었다.
 “전화번호를 남기시면 제가 연락드릴요.”
 유리의 얼굴이 홍조로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오늘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저도요.”
 두 사람은 서로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인사를 한 다음 갈라졌다.
 플랫폼에 내려왔으나 머릿속에 박힌 유리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솔직히 지우고 싶지도 않았다. 착하기만 한 진옥과도 다르고 활달한 지은이와도 달랐다. 그녀는 어딘가 고전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신선한 매너감각이 있고 안개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인생에 대한 지적인 시야가 확연했다. 진옥이가 그에게 사랑을 알려주고 지은이가 그에게 초탈을 알려주었다면 유리는 그의 사색에 기름을 쏟아 부었다.
 준호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면서 줄곧 진옥과 지은이와 유리 세 여자를 생각했다. 어떻게 세 명 다 그토록 한결같은 미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토록 다를 수가 있을까 싶었다. 세상과 인생을 보는 눈들도 제 가끔이다.
 웬일인지 낯설어만 보이던, 일산으로 이어진 노정의 나무 한 그루, 전선주 한 대까지도 의미 있게 다가섰다.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그녀가 적어준 전화번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열한 개의 아라비아숫자들이 벌써 머릿속에 입력되었음을 발견하고 준호는 약간 놀랐다. 그림처럼 곱게 그어진 반듯한 글자들이 살아나면서 유리의 얼굴로 변했다.
 참으로 매력 있는 여자야! 커피를 마시던 그 우아한 모습, 수줍어하면서도 예의를 깍듯이 지키던 숙녀다운 모습들은 기억 속에서 쉽게 지워질 것 같지가 않았다.
 한종수를 만나러 갔다던 내가 지금 누굴 생각하고 있는 거지?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은인 벌써 얼굴을 보이지 않은 지 이틀째나 된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혹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길바닥에 쓰러졌다가 폭력배들에게 당한 거나 아닐까?
 그녀 방의 전화벨 소리가 여러 번 울렸다. 한밤중에도, 새벽에도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전화벨소리에 잠마저 제대로 이룰 수 없었지만 주인도 없는 빈 집에 들어가 전화를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많이도 전화를 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학생일까, 사회인일까? 의문만 무성해질 뿐 속수무책이었다. 관심이라기보다는 의구심이었다. 그리고 어둠만 도사리고 있는 텅 빈 방을 옆에 두고 혼자 있다는 사실도 싫었다.
 지난밤에는 혹시나 싶어 그 포장마차에 가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도 지은은 없었다. 모르긴 해도 그녀가 다니는 곳은 그곳 뿐만은 아닐 것이다. 마담에게 그 여대생이 왔었냐고 묻고 싶었으나 ‘참, 이상한 아저씨 다 봤네. 주정뱅이 계집애는 찾아서 뭘 하려고요. 혹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하고  의심이라도 할까봐 단념했다. 비록 지은의 행방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진옥이가 어느 날 갑자기 말 한마디 없이 떠나 종적을 감췄을 때처럼 간절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정말 입술이 갈라 터졌고 혓바닥에 소금이 하얗게 돋았었다.
 그녀의 방문은 언제나 열려있었다. 낮에 다녀갔는지 미닫이가 아예 활짝 열려있었다. 장판 바닥에 뒤엉켜진 이부자리와 창문 쪽에 놓은 컴퓨터까지 들여다보였다. 지은이가 아직은 낯선 이웃인 준호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 해제하고 있다는 느낌이 조그마한 감동을 일으켰다. 믿음이라는 건 사실 받는 것보다 주기가 더 힘든 것인데 말이다. 저 미닫이가 비록 허름할망정 믿음에 인색한 사람에게는 38선에 늘여놓은 전기철조망 같은 격리작용을 할 법도 싶은데 말이다. 지은의 매력은 예쁜 미모보다도 바로 세상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어놓은 그 도량에 있었다.
 로비를 지나 미닫이를 열려던 준호는 문틈에 끼워진 메모지를 보고 흠칫 멈춰 섰다. 펼쳐보니 거기엔 알아보기 힘들게 날려 쓴 글 몇 줄이 적혀 있었다.

          오빠. 방 안에 빨랫감이 널렸기에 세탁기에 넣어 돌렸어.
          지은이 예쁘지?

 그제야 준호는 빨랫줄에 널린 자신의 옷가지들을 발견했다. 그 속에 팬티도 있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혔다. 정말이지 며칠 안 된 사이에 지은은 친동생처럼 느껴졌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 친절한 그녀의 행동이 가장 정상적이고 기본적인 것일텐데도 도리어 이상하게 보이는 세상인심이 나쁜 것이지 그녀가 정에 헤픈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다시 그녀의 방 안을 들여다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사진 한 장이 서가에 걸려있었다. 청바지를 허벅지까지 내리고 남녀가 서로 그러안고 음양결합을 이루려는 찰나를 포착한 사진이었다. 왜 그녀가 저런 추잡하고 저급하고 에로틱한 사진들을 즐기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하느님이 하사한 자신의 육신으로 질탕하게 즐기고 싶은 걸까? 아니면 무의미한 육신을 마음껏 탕진해버리고 싶은 걸까? 그것으로 육신을 선물한 부모와 조물주에 대한 반항을 시도하려는 걸까?
 빨래는 진작 말라있었다.
 준호는 빨래를 걷어 안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컴퓨터 앞에 멍하니 마주앉았다. 한종수만 만나면 취재작업이 끝나고 집필에 착수하려던 종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럼 인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남교수가 지정해준 논문을 집필할까.
 컴퓨터를 작동시켰다.
 「6. 25 참전자 실록」파일이 떴다. 경개와 취재내용을 분류한 것이었다.
 마우스를 작동하여 다른 파일을 클릭했다. 「정지용 시어의 감각적 이미지화」라는 논문제목이 화면에 떴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자꾸만 유리의 미모가 기억 속에 재생되었고 그녀의 목소리도 귓전에서 속살거렸다.
 “이따금 인간의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에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곤 해요. 차라리 동물세계가 부러워요. 먹이 하나를 놓고 공유할 수 있는 동물들이……”
 인간은 도대체 언제까지 진리요, 정의요, 이념이요 하는 구실을 대고 전쟁을 치를 것인가? 6. 25가 진정으로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는 전쟁이었다면 그 밖의 다른 이유가 소용이 있었을까? 그러나 그 번 전쟁에서 통일은 국가와 체제와 이념을 위한 구실이 되고 말았으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랴. 통일을 위해 모든 이유는 그 가치와 의미를 포기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도대체 6. 25가 원한 것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또다시 미닫이문을 활짝 열어 놓은 지은의 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적어도 그녀의 일상에는 다행스럽게도 한종수에게서와 같은 그런 무시무시한 죽음과 연관된 경륜은 없었기에 그랬다. 그러한 경험이 어찌 단지 나이에만 관계되는 것이겠는가? 죽은 사람은 죽고 싶어서 죽은 것은 아닐 테고 산사람도 살고 싶다는 이유에서 살아남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소원이 아니고 강요된 것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누가 강요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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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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