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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17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79 by 아데라

바람의 아들
장혜영

아니다. 그것은 옛날 정도의 생각이다. 지금은 정도는 동생 윤미경이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지 않은가. 아내와 이혼하지도 않았고 아이까지 있는 유부남으로서 파랑과 불륜마저 서슴지 않았었다. 그런 입장에서 더 이상 뭐라고 미경의 소행을 비난한단 말인가.
 이미 깨어진 물독이나 다름없다. 미경을 추적하여 잡아 들일 수도 없거니와 설령 잡아 들였다고 해도 그건 빈 껍데기일 뿐 마음은 붙들지 못할 것이다. 정도가 걱정되는 건 단 하나 뿐이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매제 오광혁에게 알려야 하는가.
 묘책이 떠오르지 않아 안절부절하는데 카운터에서 전화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가 교도소에 들어가며 휴대폰을 꺼버린 대로 그냥 두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모르긴 해도 휴대폰에 불이 났을 것이다.
 “형. 왜 온종일 전화하는데 받지 않아요?”
 “배터리가 떨어져서. 지방에 좀 다녀오느라고……”
 “미경인 가게에 나갔습니까?”
 “아니. 어디 잠간 들렀나 보지 뭐.”
 “들르긴 어딜 들러요. 지난밤에도 아예 집엘 들어 오지 않았는데요.”
 “답답하니까 바람 쐬러 나갔겠지. 나하고도 아무 말이 없었어.”
 일단은 우물쩍 넘겨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또 무슨 광기를 부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남자 구실도 못하는 사람이 시도 때도 없이 아내를 집에 불러 들여 뭘 하려고 자꾸만 찾는대요. 하고 불만을 토로하던 미경의 목소리가 귀전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사실 오빠인 그도 여동생이 변태성욕자로 변한 매제의 성노리개가 되는 것이 마음에 걸린 지가 오래었다.
 “아닙니다. 그년이 진남인지 한 새끼와 짜고 도망친 것이 틀림없습니다.” 
 “무슨 증거라도 있어?”
 “예감이 그래요. 내가 다리만 성했어도 그 씹 새끼를 작살내는 건데! 아이고 원통해! 그 놈을 끓는 물에 튀해버리지도 못하고.”
 듣기에도 거북한 독설들을 마구 퍼붓기 시작했다. 아무튼 부부간에는 감응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벌써 아내의 가출을 냄새 맡은 걸 보라.
 “답답하니까 어디 놀러 나갔겠지. 며칠만 더 기다려 봐. 그러다가 돌아오면 어떡할래.”
 “놀러 나간 사람이 전화 한 통 없이 떠나요. 분명 도망친 거라고요. 그 씹 새끼를 사타구니에 꿰차고 멀리 도망친 거라니까요. 아이고, 분해라! 쫓아가 잡아 오지도 못하고.  덜미를 잡기만 하면 뼈다귀를 분질러 놓고 그 개 불알을 도끼로 썩둑 잘라버렸을 텐데. 아이고, 내 가슴이 터진다!”
 “그 계집애가 정말 진남인지 하는 녀석과 같이 도망쳤다면 나부터 가만 있지 않을 거야. 어떤 방법을 대서라도 꼭 데려올 테니 걱정 마. 지들이 달아나 봤자 손바닥 안이지. 대한민국국토 안에 있을 거잖아.”
 정도는 저도 모르게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얼굴이 붉어졌다. 목소리 톤도 꼬리로 갈수록 낮아진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건 생활이 그만큼 위선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됐어요. 가재는 게 편이라고. 설마 형이 동생 편을 들지 않고 내편을 들겠어요. 나만 분통이 터지고 억울할 뿐이지.”
 편 가르기! 혈육이라고 해서 편을 가르고 이념이 같다고 해서 편을 가르고 동족이라고 해서 편을 가르고 처지가 같다고 해서 편을 가르고 이해관계를 같이 한다고 해서 편을 가르고……편이이라는 건 무엇인데 진리나 정의를 파열시키는 명분을 얻었는가. 이해관계, 혈통, 사상, 이념 이런 것들이 진리와 정의를 갈기갈기 찢어 한 조각씩 나눠 가지고는 자기존재의 정당성을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으니 완전한 진리와 정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지금 나부터도 도리보다는 미경을 감싸 돌고 싶은 마음을 거부하기가 힘들다.
 “정말이라니까. 그런다고 또 굶지 말고 식사랑 꼬박꼬박 챙겨 먹어.”
 “지금 밥이 목에 넘어갑니까. 속에서 불길이 활활 치솟는데.”
 “내가 중국집에 전화해 자장면이라도 시켜줄까? 참 동생. 족발 좋아하지. 족발집에 배달 주문해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그새 속이 타면 술이라도 한잔 마시고 푹 자라고. 한숨 자고 나면 좀 화가 풀릴 거야.”
 “됐습니다. 내가 뭐 먹다 죽은 귀신이 붙은 줄 아시우. 형은 미미엄마가 비구니가 되어 절에 들어가도 음식이 목구멍에 잘도 넘어갑디까. 짐승이 아닌 이상……”
 광혁은 화가 나면 언제나 남의 아픈 상처를 건드린다. 분통이 터지는 모양 전화를 일방적으로 툭 끊어버린다. 인젠 아내가 가출한 것이 확실해졌으니 처남까지 덩달아 미워진 것이겠지.
 그러나 정도는 불쾌한 인상을 남기면서라도 통화가 끊어진 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크게 걱정했던 일이 그런대로 수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뒤끝이 깨끗해야 될 터인데 하는 우려가 없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발등의 불은 끈 셈이니 한시름 놓인다.
 정도는 안도의 숨을 쉬며 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산더미처럼 밀린 사진정리 작업에 착수했다. 그것들은 연말 전으로 정리하여 출판사에 교부해야만 했다. 내년 4월이면 책을 출간할 것으로 일정을 잡고 있었다.
 정도는 작품들에 일일이 번호를 달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중에는 파랑이 촬영한 작품들도 3분의 1가량 차지했다. 그래서 이번 사진집은 더구나 각별한 의미가 있다. 자신의 이름과 파랑의 이름을 나란히 기입할 생각이었다. 아직 파랑에게는 그런 내심을 한마디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책을 내밀어 그녀에게 뜻밖의 기쁨을 선물하고 싶었다. 사진은 그들을 만나게 해준 인연의 끈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들의 인연은 또 그녀를 아마추어로부터 프로작가로 성장시키는 추동력으로 되었다. 사진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과 같은 그들의 깊은 관계가 있었을까.
 사진은 그들을 행운으로 이끈 것일까 아니면 불행으로 이끈 것일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사진은 사진대로이고 그들은 그들대로 존재하는 지도 모른다.
 띤따 딴따 따라란란따-
 금방 작동시킨 휴대폰 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시름 놓았다 했더니 또 귀찮게 구네.
 광혁인 줄 알고 짜증을 내며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
 “왜 또? 아참, 내가 족발을 배달시켜 준다했지. 깜빡 했어……”
 “윤정도 씨의 휴대폰입니까.”
 그의 말허리를 자르며 전파를 타고 온 소리는 광혁이 아닌 귀에 선 음성이었다.
 “네.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요?”
 “경찰입니다.”
 “네! 경찰이라고요?”
 전혀 뜻밖의 말에 정도는 가슴이 섬뜩해지며 놀라기까지 했다.  경찰이 나한테 전화 걸어 올 일이 뭐 있지? 경찰이라는 명칭부터가 불길한 예감을 떠올린다.
 “공무집행중이니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뭘 협조하라는 거죠.”
 “친구 중에 혹시 석준범이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네. 그런데요.”
 “□□방송사에 근무하다가 얼마 전에 해고당한 31살의 남자죠?”
 “그렇습니다. 그 친구한테 무슨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해고당한 일 때문에 절망과 좌절로 술만 퍼마시던 준범의 얼굴이 기억 속에 떠올랐다. 자식이 술김에 무슨 사고를 저지른 게 틀림없다. 정신 차리라고 그만큼 타일렀건만……
 “지금 이쪽으로 오실 수 있습니까.”
 “무슨 사고입니까? 교통사고인가요? 아니면……”
 “상세한 건 현장에 오시면 말씀드리죠. 급하니까 빨리 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딱딱한 사무적인 어투지만 그 냉담함 때문에 말 뜻은 귀 하나 떨어지지 않고 명료하다.
 “거기가 어딥니까?”
 “경기도 □□군 □□리 □□산입니다.”
 “알았습니다. 곧 출발하겠습니다.”
 웬일인지 다리가 자꾸만 후들거렸다. 셔터도 잘 닫기지 않았고 자물쇠도 몇 번 만에야 겨우 잠갔다. 집으로 돌아와 차고에서 차를 끌어내려고 했지만 차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제야 정도는 어제 파랑이 차를 빌려 갔었다는 사실을 기억속에서 떠올렸다. 그는 허둥지둥 밖으로 나왔다. 이러다가 자신마저 길에서 교통사고를 저지를 것 같아 마음이 불안해진다.
 도로변으로 나와 택스를 잡았다.
 경찰이 알려준 곳까지는 생각보다  거리가 멀었다. 도심을 벗어나고 교외를 빠져서도 지방도를 한참이나 달렸다. 지방도로마저 벗어나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와 산길을 20분 가량 더 주행했다. 집에서 출발한지 3시간 30분이나 걸려서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짧은 산골 해는 어느새 지고 대지에는 땅거미가 어슬어슬 지기 시작했다.
 산길에는 많은 경찰차들이 늘어서 있었고 산 위의 4부 능선쯤에는 경찰유니폼을 입은 강력계형사들이 널려있었다.
 경찰관 한 명이 차 옆으로 다가와 군례를 붙였다.
 “이곳은 지금 교통통제중입니다. 돌아가십시오.”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라는 전화를 받고……”
 정도는 죄 지은 일도 없이 공연히 주눅이 들어 목소리를 깔고 눈도 깔고 어깨마저 움츠러트렸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경관은 어딘가로 무선전화통화를 한다. 그러더니 다시 절도 있게 경례를 붙인다.
 “절 따라 오십시오. 반장님이 능선 위에서 선생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금방 눈 앞에서 비탈을 오르는 형사의 피둥피둥 살진 엉덩이가 씰룩거렸고 자루가 비주룩이 내민 권총집이 무겁게 흔들거린다.
 자식. 이런 무시무시한 데는 왜 온거지?
 비탈길에는 사람의 발길이 뜸한 듯 풀이 무성한데 벌써 저녁 이슬이 맺혀 바짓가랑이를 후줄근하게 적셨다. 저만큼 위에는 평범한 무덤 하나가 쓸쓸하게 보인다.
 준범이가 이런 곳에 왔다니 도저히 그 저의를 알 수가 없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무덤의 상돌위에는 먹다 남은 제사음식과 술병이 나뒹굴고 그 옆에는 자그마한 구덩이가 파여져 있다. 구덩이 주위에는 『수사 중 접근 금지』라는 흰 글씨가 찍힌 붉은 바탕의 금줄이 둘러쳐져 있었다. 구덩이 주위에 둘러선 형사들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웅덩이 속에는 시신인 듯 한 물체에 백포가 덮여져 있었다.
 “오셨습니까. 석준범이 바로 여기 구덩이 속에서 음독자살을 한 채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걔가 왜 음독자살을 합니까? 며칠 전에도 저랑 같이 술을 마셨는데요.”
 “일단 시신부터 좀 확인해 주셔야겠습니다.”
 형사 한사람이 구덩이 아래로 내려가 백포를 열자 변사체가 드러났다. 독극물 확산 때문인지 시신의 얼굴에는 시커먼 반점들이 가득 돋아 있었다. 그랬지만 그 얼굴의 임자가 석준범이라는 건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맞습니까?”
 “네. 못난 자식 같으니! 해고당했다고 죽기까지 하다니!”
 정도는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그러나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애써 참았다.  주위 사람들의 눈길이 모두 그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해자의 부친은 병원에 입원 중이고 계모 강복녀와 아내 김정실은 연락이 안 되고 있습니다. 윤 선생님을 부른 건 사망자의 휴대폰에 입력된 최근발신번호와 착신번호를 확인한 결과 선생님의 전화번호가 많이 찍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자도 확인이 되었습니다. 죽기 전의 상황을 제일 잘 알고 있을 것 같아서요.”
 “네. 며칠 전에도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절망에 빠져 있기에 위로를 했었는데……”
 “그 밖의 사실은 모릅니까?”
 “그 밖의 사실이라니요? 무슨 사실 말입니까?”
 “아내가 아닌 다른 아가씨를 사랑한 것 같은데요.”
 “김하늘이라는 아가씨 말입니까?”
 “김하늘이라는 아가씨와도 관계가 있었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하고.”
 “혹시 이 사진의 아가씨를 아십니까?”
 강력계 형사반장이 내민 사진을 받아들고 화면을 유심히 들여다 보던 정도는 하마터면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지를번 했다. 사진속의 주인공은 얼마 전에 지혜가 그더러 확대해 달라고 부탁해 왔던 것이었다. 필름도 아닌 낡은 사진이었다. 사진속의 주인공이 누구냐는 질문에 지혜는 그냥 아는 사람이 부탁한 것이라고만 대답했기에 정도의 인상에도 남아 있지 않은 사진이었다. 그런데 그 사진을 어떻게 준범이가 가지고 있단 말인가……
 “혹시 아시는 분이신가요?”
 형사의 눈길은 예리했다. 정도의 놀란 표정을 어느새 포착한 것이다.
 “아니. 아닙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 이름이 뭐죠?”
 “은미혜라고. 여기 이 무덤의 주인이지요. 비석에 비문이 적혀 있지 않습니까.”
 은미혜라고?!
 은파랑과 성이 같다. 그렇다면 죽었다던 파랑의 언니가 아닐까?
 아무튼 이 사진의 존재를 미루어 준범의 죽음이 파랑과 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혹시라도 이 사진이 파랑이 확대를 부탁했던 거라는 사실을 실토하면 그녀에게 불리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럼 사망자의 이 휴대폰에 찍힌 전화번호의 임자가 누군지는 모르십니까? 하나는 공중전화번호임이 확인되었는데 휴대폰번호는 소지인의 확인이 안 되고 있습니다. 한 아주머니가 얼마 전에 분실한 것이라는 사실만 알 뿐이지요.” 
 휴대폰액정화면을 보던 정도는 다시 한번 놀랐다. 그 번호는 그가 병원에서 미미를 병간호할 때 누군가 대기석에 두고 간 것을 주은 것이었다. 병원에 바치려고 하는데 파랑이 달라고 해서 주었던 것이다.
 “제가 책임지고 임자를 찾아 줄게요.”
 그러며 가져갔었다. 그 뒤로는 그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제야 이틀 전에 파랑이 정도에게서 차를 빌려갔던 일이 불현듯 생각났다. 그렇다면 준범의 죽음은 파랑과 관계되는 거란 말인가. 언니가 죽었다던 파랑의 말이 기억 속에 떠올랐다. 복수에 불타 섬뜩하던 눈길도 새삼스럽다. 파랑의 언니를 죽인 건 준범이고 파랑은 언니의 복수를 위해 준범을 죽이고……
 그럼 이건 자살이 아니고 타살이고 음모에 의해 계획된 살인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자신은 살인범인 파랑을 도와 친구를 모해한 공범이고……
 맙소사!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친구가 남긴 유서와 파랑이 남긴 유서를 보고서는 자신의 판단이 확실함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결국 친구를 죽인 건 그 자신이나 다름없다.
 눈 앞이 아찔해났다.
 그러나 그는 친구의 억울한 원한을 풀어주기는커녕 파랑에게 해가 돌아갈까봐 모든 사실을 마음속에 묻어두고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이야말로 친구를 두 번 죽이는 의리 없는 배신자의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런들 무엇 하랴. 그에게는 파랑의 존재가 더 귀중했으니 말이다.
 준범아. 미안해! 산 놈은 살아야 된다는 걸 너도 알잖아.
 이튿날 아침 파랑이 차를 돌려주려고 사진관으로 나왔다.
 “덕분에 요긴하게 썼어요. 저 때문에 차 없이 불편하셨죠?”
 “어제는 친구가 죽어서 불행한 하루였습니다.”
 “무슨 일로요?”
 “자살했습니다. 좋은 친구였는데. 방송사 PD였어요. 해고당하고 절망 끝에……”
 정도는 파랑의 얼굴을 쳐다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니, 그는 남이 괴로워하고 당혹해 하는 모습을 정면으로 지켜 볼 만큼 잔인하지 못했다. 웬일인지 사실의 내막에 대해서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설마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망각 속에 묻어두고 그냥 아름다운 여자로 가슴 속에 남았으면 싶었다.
 “해고당했다고 자살을 해요. 속이 워낙 좁은가 보죠. 죄송해요. 친구를 험담해서.”
 “여자문제도 있었나 봐요. 나도 모르게. 미혜라는 여자와 살았는데……”
 문득 파랑이 손에 쥐고 있던 차키를 방바닥에 딸깍 떨어트리는 바람에 두 사람은 동시에 놀랐다. 화제가 더 이상 전개되면 두 사람 다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공포감에 휩싸여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굳이 대화가 없어도 그들은 감응이 충분히 오고갔다.
 “오늘은 제가 병원에 가 볼게요.”
 파랑은 평소와는 다른,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서둘러 스튜디오에서 나갔다.
 정도는 그러는 파랑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못한 채 선 자리에서 안절부절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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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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