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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9.20 장편연재 "붉은아침"35 by 아데라

제2부 불타는 반도
장혜영

 


2

 
 
두 줄의 검은 비단 띠를 드리운 할머니의 영정은 침울했다. 준비된 사진이 따로 없어 여권의 증명사진을 확대한 것이어서 분위기도 따분했다. 간소한 빈소의 계단에는 굵은 양촛불이 가물가물 타올랐고 구리 향로에서는 조문객들이 피운 향대가 소리 없이, 파랗고 가느다란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었다.
 준호는 제단의 왼쪽에 상복을 입고 시립해 있었다. 조문객들이 들어오면 어이어이 곡성을 내라고 아산 댁이 시켜주었지만 그는 그냥 허리를 굽혀 답례만 드리는 것으로 사의를 표했다. 나오지 않는 울음을 억지로 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준호는 왠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의 인생이 불행하긴 했지만, 동정심도 들었지만 그 슬픔과 동정이 눈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혹시라도 유리가 장례식장에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가끔 빈소 밖의 통로 쪽에 눈길을 던져 확인하고 있었다. 유리와 이별하게 된 데는 한종수 뿐만 아니라 할머니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지금까지, 50여년을 넘게 지켜온 비밀이었다면 그냥 가슴에 묻은 채로 이 세상을 떠나가는 편이 당신을 위해서도 후손들을 위해서도 좋았을 것이다. 결국은 돌아가시면서 아들을 앞세우고 손자에게 불행의 그늘을 던져 줄 이유는 무엇인가. 어쩌면 호의라고 하여 죄다 유익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다하려는 할머니의 선택은 선의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한종수나 최영식 그리고 준호와 유리에게는 불행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할머니 자신에게마저 위안은 되지 못했다. 책임을 다한다는 건 특정된 시간과 공간 즉 환경 속에서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다.
 장례식장의 식순에 따라 빈소를 차리긴 했지만 처음에는 조문객이 얼마 안 되었다. 이튿날 오전까지는 지은이, 명철이, 아산 댁뿐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소문이 펴졌는지 오늘부터는 준호와 안면 있는 교수들이나 대학원 동기들 그리고 아버지와 면식 있는 강촌마을 사람들이 몰려들며 제법 빈소답게 법석거렸다. 지은이도 상복을 입고 준호의 옆에 시립하여 조문객들을 맞았다. 그녀는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나 자꾸만 눈물을 흘렸다. 사랑하는 사람의 불행이 가슴 아픈 모양이다. 사실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명철이보다도 준호였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휴식해. 태아한테 안 좋으니까.”
 준호가 휴게실로 등을 떠밀었으나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오빠 혼자 두자니 너무 안쓰러워!”
 3일째 되는 날 오후에는 유리의 둘째 할아버지 한종철과 셋째 할아버지 한종학도 빈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준호는 혼자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지은은 할아버지를 마중하러 인천국제공항으로 나갔고 명철과 아산 댁은 빈소 밖의 일을 거들고 있었다. 준호는 유일한 상주였음으로 잠시도 빈소를 비울 수 없었다. 밤이 되어야 지은이가 교대해 주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을 잠깐씩 붙이곤 했다.
 두 노인의 모습에서는 이미 동방적인 부드러움보다는 서구적 신사적 풍도가 당당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분향하고 절은 올렸지만 위안의 말은 여느 사람들과 달랐다.
 “젊은이가 고생이 많네.”
 고인보다는 산사람의 고생을 걱정한다.
 “늙은이들은 죽어서도 젊은이들에게 무거운 짐밖에 안된다네.”
 윗세대의 그늘에 묻혀 사는 아랫세대의 고단함과 번뇌까지 이해해주었다.
 “할머닌 참 착하신 분이셨지. 너무 착한 것도 탈이랄 만큼 말일세.”
 어쩌면 한종철은 준호에게 착함만이 지을 수 있는 죄를, 착하기 때문에 선택권을 포기하고 선택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당하기만 했던, 당하는 것으로 악한 사람의 죄행을 도와준 공범  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비극에 대해 암시하고 있는 듯도 싶었다. 악은 선을 통해서만 행해질 수 있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말해 주는 듯싶었다. 하긴 착함이 없으면 악이 뿌리내릴 토양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너무 착한 것도 탈이라고 하겠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가 오늘의 은혜를 배로 갚아드리겠습니다.”
 “자네를 위해서가 아니라 고인에 대한 나의 예의이니 신경 쓸 것 없네. 늙은이들끼리의 결산이니 자네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니까.”
 돈 몇 푼 갖고 생색을 내려하지 않는, 너그러우면서도 호방하고 섬세하면서도 속되지 않고 예의바르면서도 구애받지 않는 신사풍도가 돋보였다. 동방적인 성숙되고 완벽한 교양미와는 다른 개방적이고 조화로운 지성미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할아버지께서도 오시겠지?”
 “곧 도착하실 겁니다.”
 “정말 얼마 만인가. 어느새 5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네그려. 보고 싶네. 많이 변하셨겠지?”
 “모두들 그러시는데 옛날 그대로라고 합니다.”
 “남자성격이셨어.”
 모든 한을 접으며 인간적으로, 긍정적으로 다가서는 한종철의 흉금이 바다처럼 넓어 보인다. 정과 한도 세월이 지난 뒤에 돌이켜보면 한조각의 추억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생의 무상함을 달관한 모습이다.
 “전 생각이 잘 안 납니다. 키가 훌쩍 크셨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
 한종학은 좋은 기억만을 떠올리며 두 가족 간에 있었던 피맺힌 원한을 우회했다.
 “그때 넌 겨우 예닐곱 살 밖에 안 되었으니까. 직심이었어. 순박하고.”
 그분들은 이미 비참한 죽음 앞에서도 일상의 태연함과 여유를 보여 줄 수 있는 고령의 나이가 되었다. 남은 생이 다하기 전에 서둘러 과거를 청산하려는 조급함보다는 유연한 만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참, 우리 유리가 자기 대신 나더러 자네한테 조문을 해달라고 이 할아빌 전권대표로 파견했다네.”
 “고맙습니다.”
 전혀 눈물을 흘릴 대목이 아닌 데서 느닷없이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인사는 나중에 유리한테 하게……”
 “오셨습니다.”
 명철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할아버지께서 도착하신 모양입니다. 실례지만 잠간 나가봐야겠습니다.”
 준호는 서둘러 신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할아버지가 지은의 부축을 받으며 택시에서 내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전보다 훨씬 더 연로해보였다. 조금 남았던 얼굴의 살집도 완전히 빠져 골격이 앙상했고 그 위에 주글주글 구겨진 살 거죽이 엷게 씌어져 있었다. 움푹 꺼진 눈과 칼날 같은 코, 두드러진 광대뼈…… 전봇대처럼 유난히 큰 키도 허리가 구부정하게 휘어들어 이전보다는 수척해보였다. 다만 이상하게도 머리카락만은 숱도 많고 색깔도 새까맣다. 그러나 정작 노쇠해버린 건 할아버지의 육신보다도 침울하고 피로한 표정을 만들어 내는 마음과 정신이었다. 할머니가 한국으로 떠난 뒤 할아버진 하룻밤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아직도 할머니를 한종수에게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먼 길 오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준호는 노인에게로 다가가 갈고리처럼 휘어든 거친 손을 덥석 잡았다.
 “할민 왜 죽은 거냐? 어떻게? 혹시 그놈 때문에?”
 할아버지의 관심은 여전히 한종수였고 한종수와 곱단의 관계에 대해서 궁금해 했다.
 “수면제를 과다복용하시고……”
 “수면제는 왜 먹었다니? 누가 먹인 거래?”
 그냥 의심의 화살촉을 한종수에게로만 떠밀고 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뭐야? 네 아비가 죽었다고?”
 “네.”
 “뭣 땜에?”
 “당신이 한종수 노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살했습니다.”
 “아니, 영식이가 한종수놈의 아들이라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누가 그러던. 네 할미가 그러더냐? 네 할미는 종래로 할아비한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최덕구는 놀란 눈길로 손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눈물 같은 건 흘리지 않았다. 그냥 여윈 육신을 화들화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눈보라 속에 웅크리고 선 한 그루의 빈약하고 앙상한 겨울나무 같았다.
 “우선 안으로 들어갑시다.”
 준호와 지은이는 최덕구를 부축하여 빈소로 모셨다.
 그때 사람들 속에 끼어있던 한종철이 앞으로 나서며 인사를 건넸다.
 “형님, 절 모르시겠습니까? 종철입니다. 한상권의 둘째 아들 말입니다. 얜 막내 동생 종학이구요.”
 최덕구는 두 팔을 부축하는 손자와 지은이를 뿌리치고 스스로 걸음을 옮겨놓다가 느닷없는 인사에 흠칫 몸을 떨며 그 자리에 심어졌다. 고개를 돌리더니 만감이 교차되는 시선으로 그들 형제를 번갈아 훑어보았다. 덕구의 퍼렇게 빛깔이 죽고 말라터진 입술이 눈에 뜨이게 푸르르 경련하기 시작했다.
 “자네들은 왜 여길 왔어?”
 “형수님께서 불행하게도 타계하셨다는 비보를 접하고 달려왔습니다.”
 “필요 없네. 필요 없어. 다들 돌아가!”
 최덕구는 두 팔을 내젖고는 그들의 앞을 그냥 지나쳐 빈소로 들어갔다. 갑자기 몸의 균형을 잃고 걸음을 비틀거려 준호와 지은이가 노인의 겨드랑이를 부축했다.
 “비켜!”
 화를 버럭 내며 손자와 지은이를 사정없이 떠밀었다.
 빈소에 올라가더니 한 동안 멈춰선 채 할머니의 유상을 이윽히 쏘아보기만 했다.
 “할아버지, 여기다 분향하시고 절을……”
 “됐다. 분향이고 절이고 우선 할아비가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최덕구는 조문객들이 분향재배하는 방석 위에 털썩 주저앉더니 가부좌를 틀었다.
 “그래 네 할미가 그 종수란 놈을 만났더냐?”
 할머니는 아직까지도 할아버지에게 덕구와 종수 사이에서 승부를 가르는 시금석 같은 존재임이 분명했다. 곱단이가 종수를 만났다는 건 덕구가 종수에게 패배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러나 준호는 손자로서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네.”
 “으음!”
 최덕구는 쓴입을 다시며 다시 한 번 등 뒤로 고개를 돌려 할머니의 우울한 유상을 노려보았다. 할머니의 표정은 체념 그 자체였다. 영식을 임신했을 때 곱단이가 복중태아를 지워버리겠다고 모질게 몸부림치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래서 그녀가……
 “그래 그건 그렇고. 네 아비도 그 놈을 찾아갔었니?”
 “아닙니다. 아버진 그런 아버지가 없다고, 당신의 아버지는 할아버지라고 고집을 부리시다가 자결했습니다.”
 “그렇다면 네 할미도 네 아비도 잘 죽었다. 죽을 때까지도 날 속이다니. 고약한 할망구 같으니. 잘 죽었어!”
 “조문객이 오셨습니다.”
 명철의 전갈과 함께 나타난 사람은 뜻밖에도 유리의 할아버지 한종수였다. 오늘은 양복정장에 넥타이까지 깔끔하게 받쳐 매고 나타났다. 머리도 반듯하게 빗어 넘겨 온 몸에서 재력과 부티가 철철 흘렀다.
 준호는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저도 모르게 할아버지의 기색부터 살폈다.
 두 노인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번쩍하고 번갯불이 튕겼다. 거문고 줄처럼 드르릉, 떨렸다. 서로를 확인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 없을 만큼 두 사람의 가슴속에서는 상대의 모습이 하루도 추방된 적이 없었다. 한이라는 어둡고 깊숙한 마음의 감옥에 감금한 채 만날 순간만을 고대하고 있었던 그들이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너?!”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입을 열고 손가락으로 서로를 가리켰으나 금방 입을 다물었다. 최덕구의 다리도 한종수의 다리도 떨리고 있었다. 허공에 쳐든 손가락도, 늙어서 붓기가 팅팅하고 주글주글한 손가락도 떨리고 있었다.
 “넌 한종수가 아니냐?”
 드디어 말마디들을 토해내는 최덕구의 눈길은 뜨겁게 타오르며 한종수의 얼굴을 향해 불화살마냥 박혀들었다.
 “넌 최덕구가 분명하지?”
 한종수의 눈길도 칼날처럼, 날카로운 얼음조각처럼 시퍼렇게 응고되며 덕구의 면부를 사정없이 찔렀다.
 한동안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조각상처럼 굳어져있었다. 말도 없이 눈길과 표정만으로 상대방의 기를 제압하려고 기싸움을 벌였다. 누구도 지려하지 않는 막상막하의 대결이어서 긴장된 분위기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덕구와 종수는 실로 서로에게 원자폭탄 같은 존재들이었다. 숨 막히는 긴장이 오래도록 흘렀지만 누구도 그들의 신경전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슬쩍 건드리기만 하면 핵폭탄이 폭발할 것만 같은 공포감 때문이었다.
 “그만들 하십시오.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앉아서 회포나 풉시다.”
 그래도 한종철이 나서서 폭발 직전의 긴장된 분위기를 전환해보려고 수습책을 동원했다.
 “나발 불지 마! 누가 저따위 놈과 회포를 풀어! 복수를 해도 직성이 풀리지 않을 텐데. 이 안에서 당장 나가버려! 빈소를 더럽히지 말고.”
 최덕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등을 돌리고 벽 쪽으로 돌아섰다.
 “뭐라고? 망할 놈의 새끼!”
 종수의 반격에 덕구는 후닥닥 돌아서더니 사자처럼 그에게로 육박해나갔다. 종수도 진작 공격을 경계하고 있은 듯 그를 맞을 태세를 취했다.
 “그래 어디 한번 너 죽고 나 죽고 결판을 내보자!”
 “자자, 왜들 이러십니까? 연세도 지긋하신 분들이 젊은 사람들 앞에서 추태를 보이시다니요. 참으십시오.”
 종철과 종학이가 그들 사이를 막아섰다. 준호와 명철이 그리고 지은이도 싸움을 말렸다.
 “어쨌든 우리 노친한테 분향하고 절은 못해.”
 덕구는 숨이 차 헐떡거리며 종수의 조문을 강력하게 거절했다.
 “왜? 네가 뭔데 날 막아? 곱단인 내 마누라였어.”
 “누가 네 마누라냐. 강제로 끌고 간 거지.”
 “아무튼 날 찾아온 사람이니까 술 한 잔은 따르고 가야겠다.”
 “안 돼. 절대로 허용 안 해!”
 “너한텐 허락할 자격도 없어. 이건 나와 곱단의 둘 사이의 일이니까.”
 “절만 해봐라. 내 오늘 널 가만두지 않을 테다!”
 덕구는 길길이 뛰었다. 준호와 명철이가 할아버지 등을 떠밀고 잠시 옆방으로 모셨다.
 한종수가 분향예배하고 제주를 따르는 식순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덕구를 다시 빈소로 모셨다.
 “할아버지 분향하지 않으시렵니까?”
 “싫다! 괘씸한 할망구 같으니 잘 뒈졌어!”
 최덕구는 할머니의 시신을 발인하고 화장하는 동안 울지도 않았고 절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물론 제주 한 잔 따르지 않고 내처 술을 마시며 괘씸한 년! 하고 연신 중얼거렸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느낀 것이다. 할머니의 배신 때문에 종수와의 싸움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화장까지 끝나자 일행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준호는 자취방으로 돌아가려고 고집부리는 할아버지를 가까스로 만류했다. 한종수도 집으로 가려고 자가용에 오르는 걸 종철 형제가 억지로 붙잡아 들였다.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좌석에는 금방이라도 작렬할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긴장이 초조하게 감돌았다. 이따금 마주치는 두 노인의 눈길에서 번갯불이 번쩍거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게 했다.
 “자, 두 분 형님들, 인상들을 좀 풉시다. 벌써 50여 년의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이젠 가슴속의 한들을 잊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고말고요. 남북이산가족이 만나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습니까. 다들 과거의 아픈 기억들을 잊고 새롭게 출발합시다.”
 종철과 종학은 분위기 전환을 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두 노인의 굳은 안색은 좀처럼 풀리질 않았다.
 “참, 형님. 향란의 소식을 알고계십니까? 전 그때 소백산에서 그녀와 갈라진 뒤로는 전혀 소식을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네.”
 종철이 깍듯이 차리는 예의에 덕구는 아까부터 그와는 차마 반말은 못했다.
 “그러지 마시고 어서 좀 알려주십시오.”
 “반동분자를 도망치게 도와 준 년은 내 동생 자격이 없네. 지금 북조선에 살고 있지만 난 한번도 만나주질 않았어. 제 년이 아무리 만나겠다고 사정을 한들 소용 있나. 내가 만나주지 않는데.”
 “네~ 북한서 살고 있군요. 아무튼 살아있다니 다행입니다. 만약 그녀가 죽었다면 전 정말 평생 뼈아픈 죄책감을 느꼈을 겁니다. 결혼도 했고요?”
 “아직까지 자넬 기다릴 멍텅구리가 어딨어. 애들이 넷이나 돼.”
 “역시 다행입니다. 행복하게 산다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이승만이 조선전쟁을 도발하지 않았다면 아마 이북 사람들은 더 잘살았을 걸세.”
 “전쟁을 먼저 도발한 쪽이 누군데. 김일성이 아닌가?”
 그 때에야 입을 꾹 다물고 창밖만 응시하던 한종수가 발끈하고 화제의 덜미를 물었다.
 “이승만이지.”
 “김일성이야!”
 “수많은 귀순용사들과 6.25당시 북괴군이었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인정하는 사실인데도 부정을 해!”
 “그런 변절자들의 말을 누가 믿어. 네 놈이나 믿지. 우리는 조국의 지키지 위해 자위반격을 했을 뿐이야. 그러니 우리의 조국해방전쟁은 정의의 전쟁이지.”
 “도둑이 매를 든다더니 네놈이 바로 그렇구나. 네놈들은 적화통일의 야망을 이뤄보려고……”
 “또 시작입니까. 그만들 싸웁시다. 지겹지도 않습니까. 통일이야 남쪽이고 북쪽이고 할 것 없이 다 바랐던 것 아닙니까. 이념이 달랐을 뿐이지. 이념 때문에 동족상잔이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세대에 지은 죄를 우리 자신이 시정하고 후손들에게 평화와 통일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21세기는 냉전이 종식되고 평화가 도래한 시대입니다.”
 종철은 두 사람에게 화해를 붙이느라고 안간힘을 썼다.
 “넌 입이 열 개라도 우리 형제 앞에서는 할 말이 없어. 우리 아버지와 내 아내를 죽인 놈이 누군데 대한민국 땅에까지 와서 감히 목청을 높이는 거야! 여기가 북한이나 중국 땅인 줄 알아.”
 종수가 갑자기 식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최덕구의 얼굴에 삿대질을 해댔다.
 “지금 누가 할 소릴 누가 하고 있어. 왜놈 앞잡이질을 하며 숱한 반일투사들을 잡아 죽이고 무고한 우리 형님을 잡아다가 때려죽인 놈이 누군데? 곱단을 첩실로 끌고 간 놈이 누군데 감히 어디 대고 삿대질이야!”
 최덕구도 질세라 주먹으로 식탁을 꽝 내리쳤다. 그 바람에 물 컵이 땅바닥에 굴러 떨어지며 박살났다.
 “이런, 이런 쳐 죽일 놈 봤나! 회개는 못할망정. 우리 큰할아버지와 가족을 생매장하고서두 속죄는 고사하고……”
 “그건 인민군이 한 일이 아니야. 당지 백성들이 분노해서 한 일이지. 그리고 듣자니 네놈도 우리 삼촌네 식구들을 죄다 학살했다더구나. 그리고 또 우리 노친과 내 아들 영식이가 누구 때문에 죽었어? 다 네놈 때문이 아니야!”
 식사가 들어와서야 싸움은 요행 그쳤다.
 최덕구는 숟가락을 들고 국물을 뜨다가 그만 내려놓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준호도 슬그머니 일어나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가 보았다. 할아버지는 화장실에서 끄억끄억 울고 있었다.
 “못된 할망구 같으니! 날 버리고 혼자 떠나다니!”
 그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준호도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할아버지, 그만 안으로 들어갑시다. 지나간 일은 다 잊어버리세요. 그게 할아버지의 건강에도 좋으실 겁니다.”
 “나더러 어떻게 잊으라는 거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못 잊는다. 너도 그놈이 말하는 걸 들었지. 자기가 지은 죄는 모르고 이 할아비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있지 않느냐.”
 “누군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어요. 당시 상황이 그러니까 어쩔 수 없었던 것뿐이지요.”
 “아무튼 난 저 안에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다. 집이 어디냐? 날 좀 집까지 데려다주렴.”
 “가시더라도 식사나 하시고……”
 “집에 가서 대충 먹으련다. 여기서 먹다가 음식이 목에 걸려 죽을까봐 두렵다. 어서.”
 “네.”
 준호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밖으로 나왔다. 전화로 식당 안에 있는 지은이를 불러냈다.
 “그리고 너 내일이나 모레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좀 예약해라.”
 “왜요? 그렇게 빨리 귀국하시려고요?”
 “하루가 새롭다.”
 “한번 나오시기가 쉽지 않으신데 오셨던 김에 서울구경이라도 하시고 가셔야죠.”
 “서울구경이 아니라 그냥 살라고 해도 싫다. 잘산다고 거들먹거리는 놈들이 눈꼴사나워.”
 할아버지는 지금 한종수를 질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못살고 초라한 자신의 모습이 종수의 기름이 철철 흐르는 모습과 대비되며 구겨지고 무너지는 자존심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할아버지, 왜 안에 들어가시지 않고 밖에 나와 계세요?”
 지은이가 달려 나오며 물었다.
 “몸이 불편해서 집에 가 휴식하시겠대. 난 손님들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네가 좀 집까지 모셔다드려라.”
 “알았어.”
 지은은 불평 한마디 없이 택시를 불러 할아버지를 뒷좌석에 모셨다.
 “저 금방 들어갈 게요. 지은아, 그리고 할아버지께 구수한 된장찌개나 끓여 드려. 식당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신가봐.”
 “걱정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오빤 손님들이나 잘 접대해.”
 준호는 택시가 떠나길 기다렸다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갔냐? 안 가면 내가 자리를 뜨려고 했는데 다행이구나.”
 한종수는 방 안으로 들어오는 준호에게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눈길은 준호의 얼굴이 아닌 동생 종철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진종일 그는 준호를 한 번도 정면으로 쳐다보지 않았다. 손녀딸과의 관계를 의식한 나머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이제 준호는 손녀딸을 사랑하는 총각이 아니라 그의 친손자가 된 것이다. 한종수는 유리의 할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최준호의 친할아버지기도 했다. 아버지 최영식도 한씨이고 준호도 한씨였다. 한종수도 준호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지만 될 수록이면 거북함을 피하려고 애썼다. 준호는 한종수가 조문을 와준 것만으로도 할머니를 대신해 고맙게 생각했다. 진작 아버지를 만나주고 아들도 받아들였더라면 그도 자살까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사람의 욕심이 어디 끝이 있는가? 그의 이번 조문걸음은 아들에 대한 사죄의 뜻도 있을지 모른다. 비록 뒤늦은 참회이긴 하지만, 그는 자신이 벌려놓은 일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것이다.
 식사가 끝나자 모두들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한종철이 만은 뒤에 남아서 준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준호라고 했지?”
 “네.”
 “나하고 얘길 좀 해도 괜찮겠나?”
 “네?”
 “자네하구 할 말이 좀 있네.”
 “네.”
 “우리 어느 커피숍으로 들어가세.”
 “제가 모시겠습니다.”
 부근의 어느 가까운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자그마한 홀에 테이블 몇 개가 놓여있었지만 분위기는 의외로 은은하고 시설도 깔끔했다.
 “뭘 드시겠습니까?”
 “아메리카노로 하지.”
 “여기 아메리카노 두잔요.”
 주문을 하면서도 준호는 종철의 세련되면서도 우아한 자세에 일종의 경외감을 느꼈다.
 무슨 일로 날 찾았을까?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일 때문일까? 아니면 할아버지와 한종수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나와 유리 씨 일 때문에? 아무튼 영문도 모른 채 긴장해졌다.
 “난 오늘 유리의 작은 할아버지 신분으로가 아니라 같은 남자로서 자넬 만난 걸세. 그러니 어려워할 것 없이 속심을 털어놓고 얘기해 보자고. 가능할까?”
 “할아버지의 기대에 실망을 끼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분이 자신을 찾은 목적이 분명 유리와 자신의 일 때문이라는 걸 확인하자 갑자기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십중팔구는 불륜을 중지하고 사랑을 포기하라는 권유일거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천장에 가설한 확성기에서 첼로 독주의 은은한 멜로디가 가늘게 흘러내려 오고 있었다. 구석 쪽에 앉은 남녀는 무슨 화제 때문인지 두 사람 다 눈에 눈물이 글썽한 채 울음을 참느라 창밖의 분주한 거리에 눈길을 던져놓고 있었다.
 “자넨 유리에 대한 사랑이 분명 이성간의 사랑이라고 확신하고 있나? 물으나마나한 질문 같지만 한 번 더 심사숙고하기를 바라는 의미가 있어 그러네. 다시 말하면 자넨 남녀 간의 이성애를 남매간의 혈육애로 바꿀 자신이 있나 하는 뜻일세.”
 갑작스러운 질문에 준호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쉬울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대답이었다. 이성애와 혈육애는 결코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는, 터널이나 케이블이 없는 통행금지구역이다. 그런데도 그 구역의 통행을 강행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지 않는가. 사실 인간의 사랑은 혈육애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 사랑은 타의에 의해 강요된 것이다. 그래서 강한 예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성애는 자의에 의한 선택이다. 다시 말해 이성애는 협소한 혈육애의 구속과 예속에서 이탈하는 개인의 자유의지의 실현이다. 양자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저는 그 계선을 비법 월경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성애라는 해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더러 저 넘을 수 없는 바다를 건너 혈육애의 해변으로 건너가라고 합니다.”
 “원래부터 있었던 곳이라면 그 곳도 자네의 영역이네. 비법 월경자가 아니지. 자넨 떠나온 곳도 없고 돌아갈 곳도 없네. 자넨 오래전부터 그 땅에서 씨를 뿌리고 살고 있었네. 그렇지 않은가?”
 “그러시다면 할아버님께서는 저와 유리 씨의 관계가 정당화, 합리화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의외의 태도에 준호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반문했다.
 “유리한테도 같은 뜻의 말을 해주었네. 불륜의 바다를 건너 연인 사이로 된 게 아니란 뜻이지. 자네들의 만남은 한 남자와 한 여자로서였네. 그리고 사랑했을 뿐이네. 그게 왜 불륜이 되나? 누군가에게 불륜의 행위가 있었다면 그건 자네들이 책임져야 할 바가 아닐세. 책임질 사람이 따로 있겠지. 하지만 그들에게 그 책임을 모두 지운다는 것도 도리가 아닐세. 그들 역시 그 시대의 피조물이기에 말일세.”
 “할아버지, 저희들의 마음을 그토록 깊이 이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해가 아니라 느낌일세. 때로는 이치보다 느낌이 더 정확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습니다. 이치대로만 살자면 힘들겠지요.”
 “힘든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걸세. 자신의 양심을 배신하지 않는 삶만큼 쉽지 않지.”
 “그런데 유리 씨의 할아버지와 저의 할아버지께서 우리의 사랑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효녀인 유리 씨는 할아버지의 의사를 거부할 수 없는 거지요.”
 “나도 형님을 설득해 보았네. 형님께서는 남매사이라고 하는 혈연관계보다는 최덕구의 손자라는 사실이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일세! 형님과 자네 할아버지간의 전쟁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유리나 자넨 그분들이 장악하고 있는 가장 유력한 유생역량이거든. 그런 유생역량을 적에게 제 손으로 들어 바칠 수는 없을 거네. 그리고 효도는 절대적인 복종과 순종만을 의미하는 건 아닐세. 효도는 부모가 낳아준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부모의 능력을 연장시키고 확대해주는 것이기도 하다네. 다시 말하면 효도는 때로는 거역이 될 수도 있지만 결국 그 거역은 부모님을 위한 것이라네. 부모가 생명을 주었으면 자식은 그 생명을 스스로 경영해야 하네.”
 “아버지와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생과 사의 계선이 너무나 희미하다는 것입니다. 생이 과거의 죽음이며 오늘의 죽음이 비워둔 자리를 메우는 것이라면 죽음은 과거의 생이며 내일의 생의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 아닐까요? 생사는 그저 자연의 존재방식일 따름이고요.”
 “그렇지. 비운다는 건 마련해주고 제공해 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하네. 자네들의 사랑은 바로 그 비워진 자리가 있기에 그 자리를 메울 수 있는 거지.”
 모든 문제가 명쾌하게 풀린 것 같기도 하고 더 복잡하게 헝클어진 것 같기도 하여 종잡을 수 없었다. 유리 씨와의 사랑을 계속하라는 권고라는 의미는 확실히 느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윤리적, 사회적 명분이 뚜렷하게 제시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사랑은 이념의 대결과도 이어졌다가 또 윤리적 문제와도 충돌했다가 하면서 공식적인 문제풀이만 지속될 뿐 시종 정확한 답은 얻어지지 않는다.
 “제 생각은 지금 헝클어진 실타래와 같습니다.”
 “그게 도리어 인생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르지. 너무 완벽하고 정확한 해답은 수학에서나 가능한거지 인생의 공식에서는 얻을 수 없는 건지도 모르네. 모든 걸 다 따지고 의식하면 사람은 하루도 살아갈 수 없을 걸세.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감정에만 충실하게. 나머지 윤리적 문제는 시대의 수수께끼로 남겨두고. 사랑의 배신자로 되지 말게. 그건 죄를 두 번 짓는 것과 같네.”
 “그러나 유리 씬 며칠 뒤면 미국으로 떠나갑니다.”
 “거리나 국경이 사랑을 갈라놓는 물리적장애로는 될 수 있지만 정신적장애로는 될 수 없네. 사랑은 몸으로보다는 마음으로 하는 거니까. 그리고 그 애의 미국행도 상황에 따라서는 포기할 수도 있는 거고.”
 상황에 따라서 포기한다? 그럼 유리를 미국으로 보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내가 하기에 따라 상황도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지? 그녀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가지 말라고 매달리기라도 하란 말인가.
 “자, 우리 그만 일어날까? 시간도 꽤나 흘러간 것 같으니.”
 종철은 할말을 다한 듯 벗어놓았던 양복저고리를 집어 들었다.
 “네.”
 준호도 따라서 일어났다. 결산단을 쥐려하자 종철이 슬쩍 당겨갔다.
 “인색한 늙은이로 만들지 말게. 늙으면 남는 게 자존심뿐일세. 허허허.”
 소탈하게 웃으며 카운터로 걸어갔다.
 “언제 기회가 있으면 제가 한번 모시겠습니다.”
 “사양하지 않겠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네. 그땐 우리 둘 만의 만남이 아니라 유리까지 끼어야 하네. 뿌연 남자들끼리야 무슨 재미가 있나. 안 그러나?”
 “네.”
 택시를 타고 사라지는 노인의 모습을 바래며 준호는 미소를 지었다. 인간의 매력은 정신적 한계의 범위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건져냈다. 마음의 넓이는 곧 매력의 폭이었다.
 이제부터 뭔가를 시작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생겨났다.
 유리 씨를 미국으로 못 가게 잡아두는 묘책은 없을까? 남매간이라는 수치와 불륜을 넘어 사랑의 결실을 맺을 명분은 없을까? 오늘의 비극을 있게 한 과거에 오늘의 비극을 고집함으로써 반항하고 싶었다. 오늘의 비극을 행복으로 전환하고 싶었다. 오늘을 조작해낸 과거의 모든 것들을 순수한 사랑 하나로 매장하고 싶었다.
 유리 씨, 사랑합니다! 우리 편이 또 한 사람 생겼습니다.
 거리엔 벌써 어둠이 내렸다. 그러나 어둠은 노면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채 가로등과 현란한 네온간판들의 장식등불빛에 주춤하며 멀리 하늘공중에 멈춰 서서 낙하의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제야 할아버지가 걱정되었다. 집에 가서 뭘 하시는지? 식사는 하셨을까? 부랴부랴 택시를 불러 타고 자취방으로 달렸다. 할아버지한테 유리 씨와의 관계를 말씀드려야하나?
 그러나 할아버진 하루아침에 손자며 아들에게 남이 되어버렸다. 지은의 할아버지처럼 이제 나는 너희들의 할아버지가 아니니 맘대로들 해라 하고 체념하고 포기하실 지도 모른다. 그러나 웬일인지 준호의 마음속의 할아버지는 한종수가 아닌 최덕구였다. 혈통을 이어야만 할아버지일까? 사상이 배제된, 단순한 혈통의 계승만으로 할아버지와 손자가 될 수 있을까? 그와 할아버지 사이에 존재했던 26년간의 인연과 정을, 사랑을 어찌 하루아침에 잘라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정과 사랑은 피보다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할아버지는 한 술도 대지 않은 된장찌개와 밥그릇을 차린 밥상을 앞에 놓은 채 고개를 떨어트리고 앉아있었다.
 “아무리 드시라고 해도 소용없어. 대답도 하시지 않아.”
 지은이가 그의 귀에 대고 가만히 속살거렸다.
 “할아버지, 좀 식사하시고 누워 쉬세요.”
 그래도 고개를 들지 않는다. 당신의 손자가 아니라고 외면하실 작정인가.
 “할아버지.”
 “비행기표는 예약했냐?”
 고개를 숙인 채 불쑥 한마디 던진다.
 “아직은…….”
 “어서 알아보라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알았으니 걱정 마시고 어서 식사나 드세요.”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냥 자겠다. 밥상을 물려라.”
 할아버지는 일어나서 주방으로 나갔다. 수도꼭지를 틀고는 얼굴에 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아내와 아들과 이제는 손자까지 잃은 셈이다. 한종수와의 대결에서 완패당한 것이다. 그처럼 커다란 정신적 상실을 보상받을 곳도 없었다. 어서 중국으로 돌아가는 길만이 싸움에서 승리한 한종수의 의기양양한 꼬락서니를 보지 않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래도 중국에 가면 며느리가 있고 둘째 아들과 셋째 딸이 있다. 그들이야말로 피가 다른 영식이네 식구와는 달리 할아버지의 피를 고스란히 받은 가족이었다.
 “상 치워. 편히 주무시도록 이불을 펴드리는 게 효도하는 거야.”
 준호는 이불을 내리워 구들에 폈다.
 “비행기에 유골을 휴대하게 할까?”
 할아버지가 방 안으로 들어서며 묻는 말이다.
 “글쎄요. 아마 가능할 겁니다.”
 “그럼 됐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유골을 당신 곁으로 가지고 가고 싶어 한다.
 준호는 유리 씨와의 관계를 할아버지께 말씀드리지 않기로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그 일 말고도 등에 지고 있는 심적 고통이 감당하기 힘드실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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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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