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연재 1
이 작품은 계간 "문학시대"82~83호에
분재되었던 소설입니다.
1
할머니가 무엇 때문에 자꾸만 내 꿈에 나타날까?
지난밤에도 할머니의 꿈 때문에 잠을 꼬박 설쳤다.
게다가 은정 씨와 전화까지…
이런 생각을 하던 중 나는 무심결에 내 손에 《르 몽드》지가 들려있음을 발견했다. 그제야 나는 여태껏 대학가신문가판대에서 《르 몽드》지를 구입했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알았다.
사고 싶어서도, 읽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르 몽드》가 내 손에 들려 있을까?
감각과 의식이 철저히 분리되어있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내 눈앞으로는 지금 아름다운 센 강이 흐르고 그 강 위로 화려한 알렉산더3세교가 구름처럼 걸려있다. 높이 6m의 절묘한 아치형교각, 장엄하기까지 한 아르누보양식의 청동가로등들과 머리에 아기천사 상을 떠인 네 개의 거대한 탑 기둥… 파리의 여름 날씨는 후텁지근하고 건조했지만 습기를 머금은 서늘한 강바람과 우거진 라임나무가로수 그늘은 청량하다.
그러나 의식은 감각이 제공하는 이 모든 신선한 메시지들을 기억에 낙서하기를 거부한 채 집요하게 마르셀교수와 은정의 모습을 기억 속에서 뒤져내기에 여념이 없다.
지금 생각해도 은정의 옷을 벗길 때 그녀가 자고 있었는지 잠든 척 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총각인 나는 그녀의 옷을 벗기고 알몸을 애무하고 성기를 삽입하고… 하는 정사의 모든 과정을 어떻게 그처럼 유창하고 거침없이, 신들린 듯, 마치 노련한 섹스광처럼 일사분란하게 해낼 수 있었든가? 배우지도 않았고 예습 같은 건 더구나 없었고 누가 귀띔해준 적도 없지 않은가.
본능?!
본능이란 뭐지?
라임나무가로수 아래에서 신문을 펼쳐들었지만 다시 접었다. 보고 싶지 않다. 은정과의 통화에서 받은 아침의 스트레스가 풀리기도 전에 연이어 마르셀교수에게 핀잔을 들어 울적해진 기분이 아직도 가슴 한 구석에서 서성거린다. 교수의 유난히 크고 뾰족한 코와 긴 턱은 무슨 동상처럼 기억 속에 분명하게 낙서되어있다.
“프루스트. 왜 네 작곡에는 늘 괴상한 분위기가 안개처럼 드리워 있는 거야? 사람을 치 떨리게 하는 지독한 고음 미의 지속음, 도, 시, 라, 시의 불분명한 혼동, 4도 5도 음정 차이의 급격한 하강음, 조약상승과 순차이행, 하강음들의 불안정함, 첫마디는 높고 그 다음은 대체로 하강하는 형식의 악절반복, 하나의 모음을 질질 늘어 붙이는 곡조, 단조라고 해도 너무 흐느끼는 듯한 암울하고 절망적인 정서, 라, 미, 시 5도 음정의 지나친 애용… 이게 다 동양음악의 그 이상한 기법들이 아니야! 물갈이를 해야 해. 아니 피 갈이를 해야 돼! 서양음악의 진수를 배우려면 말이야. 이름만 프랑스식으로 고친다고 서양음악을 정통하는 게 아니야.”
피 갈이를 하라고?!
내 피와 내 의지가 상호 배척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나 자신도 이러고 싶지 않다. 동양음악이, 국악이 싫다. 그런데 왜 이런 이상한 곡들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르셀교수를 격분시키는 동양식음악이 나오는 거지? 국악이 싫어서, 서양음악을 전공하겠다고 은정의 모친인 정 교수의 만류도 뿌리치고 파리로 도망쳐온 (꼭 도망이라는 표현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닌가.
그런데…
센 강 좌안의 고전주의 양식의 앵발리드저택과 청동대포들이 진열된 정원과 황금빛 찬란한 돔 교회의 지붕에 시선의 초점이 맞춰지는 순간 나는 느닷없이 엄습하는 이상한 공포감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이유도 없이 누군가의 시선이 내 뒤를 감시하고 있다는 느낌에서였다. 누군가의 눈길이 나를 주시하고 누군가의 손길이 나의 일거일동을 원격조종하는 듯 했다. 그리하여 나 자신도 하나의 로봇이나 꼭두각시가 되고. 그 손길이 나더러 《르 몽드》지를 구입하게 했고 센 강변으로 등을 떠밀고…
그렇다면 이 산책마저도 나 자신의 의지의 결단이 아니라는 말인가?
저도 모르게 주위를 흘금흘금 둘러보았다. 유유히 흐르는 센 강과 호화판 유람선들, 산책로와 콩코드광장 그리고 환희에 넘친 관광객들이 보였을 뿐 누구도 나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오빠. 유학을 접고 귀국하라는 엄마의 독촉이 불같아. 오빤 국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니까 국악을 전공해야 된다나. 그리고 결혼날짜도 잡고… 아이, 짜증 나!”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이 은정은 하품까지 길게 하며 심드렁한 억양이었지만 나는 신경이 가야금줄처럼 팽팽해졌다. 전공을 바꾸고 결혼하는 일이 어디 말처럼 쉬운가.
“은정이도 부모님과 같은 생각이니?”
“난 아무런 대도 상관이 없어. 자기인생 자기 살지 누구 지배 속에 살겠어. 엄마가 오빠한테 전화를 하라고 강요하니까 전했을 뿐이야. 오빠인생은 오빠가 알아서 결정하는 거지. 오빠한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아.”
언제나 이렇게 방관하는 어조다. 그러나 정작 내가 미안하게 느끼는 건 그녀의 부모가 아니라 은정이 본인이었다. 그날 밤의 실수가 오늘의 책임감이 되어 나의 발목을 잡고 내 앞길에 장애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그런데 귀국강요전화는 날이 갈수록 더욱 빈번해지며 나의 의지를 옥죄어오고 있다. 부담이 되고 싶지 않다는 은정의 말이 더 큰 부담이 되어 내 어깨를 짓누른다.
56번국도변의 그 허름한 민박…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마르셀교수의 핀잔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은정의 모친은 나더러 국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나 스스로도 그때 국악교수이며 해금연주가인 은정의 모친 앞에서 어떻게 해금을 연주했는지 모른다. 권유에 못 이겨 그냥 손이 움직이는 대로 한곡 탓을 뿐인데 정 교수의 마음에 쏙 들어버릴 줄이야. 은정이 연주도중에 거실에서 나가는 바람에 나는 무안하여 슬그머니 해금을 내려놓고 말았다. 내 전공은 작곡과 바이올린이지 해금이 아니다. 어렸을 적에 할머니네 집에서 조금 갖고 장난친 일 말고는 해금을 만져본 적조차 없다. 아니, 보기조차 싫었다. 그 깽깽거리는 소리가 역겨웠다.
그런데도 마르셀교수는 오늘 내 바이올린연주에까지 트집을 걸고 넘어졌다.
“프루스트. 넌 글리산도, 비브라토, 레가토주법밖에 몰라. 바이올린주법에는 그런 기교 말고도 피치카토, 트레몰로, 마르틀레, 스피카토 등 수다한데 왜 그 몇 가지 주법에만 매달리는 거야. 그건 어디서 배워먹은 거지?”
그런 연주법을 어디서 배웠냐고. 그 순간 내 기억 속에 떠오른 것은 뜻밖에도 할아버지의 해금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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