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불타는 반도
장혜영

 

 


8장 눈물 젖은 38선

 

 

 

 

 

  
 

 북진을 다그치던 유엔군과 한국군은 38선까지 와서는 주춤하고 공격을 중단했다. 38선 돌파에 대한 미국 측의 정치, 군사적 판단과 더 나아가 국제적 여론을 의식한 신중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군부는 38선 돌파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국은 기사문리의 인민군의 폭격에 대응하기 위한 소규모병력 공격작전을 구실로 미 8군사령관의 양해를 받아낸 참모총장은 1군단장에게 예하부대에 38선 돌파명령을 하달하도록 지시했다. 당초 미 8군사령관에게는 소규모병력의 공격작전이 끝나면 곧 철수시키겠다는 조건으로 양해를 구했지만 그 규모는 제3사단 23연대규모였다.
 주문진, 여운포 지역에 배치된 한국군 1군단은 1군단 3사단이 10월 1일 양양에 진출하는 것을 시발점으로 10월 2일에는 1군단 3사단과 수도사단이 양양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공격속도를 가속시켰으며 중부지역의 2군단 예하 6, 9, 8 세 개 사단도 10월 9일부터 10일까지 각기 38선을 돌파했다.
 종수가 배속된 6사단은 춘천북방에서 38선을 돌파했다. 38선방어부대인 인민군 9사단의 저격을 받았지만 어렵지 않게 격퇴시키고 10월 8일 오후에는 화천을 점령했다. 이어 김화, 평강을 누비며 하루 평균 26km의 속도로 북진했다. 간혹 인민군의 저항이 있긴 했지만 이미 사기가 저락되고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들이어서 국군의 북진을 저지시킬 힘이 없었다.
 6사단은 10월 19일 성천을 점령하고 20일에는 순천에 돌입하여 그 곳에 낙하한 미 제187연대 2대대 병력과 합류한 다음 평양을 우회전하여 개천으로 진격하였다.
 종수는 군화대용으로 보급된 훈련화 바닥이 닳아 구멍이 뚫렸지만 헝겊으로 동이고 걸었다. 국군의 북진은 치열한 저항보다는 날마다 계속되는 급행군이었다. 종수는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돌부리에 걸채이거나 나무그루터기에 찔려 멍들거나 피가 흘렀지만 하나도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하루라도 빨리 압록강까지 달려가 덕구와 덕재 그리고 향란이와 종철이를 생포하여 처단함으로써 다시는 북한 땅이 덕구 따위가 주인행세를 하는 빨갱이천하가  되지 않도록 하려는 일념뿐이었다. 갈증 때문에 목에서 겻불내가 나고 보급지원이 미처 뒤따르지 못해 굶주리는 때가 많았지만 불평 한마디 없이 인내력으로 잘 견디어냈다.
 “어때 힘들지?”
 사촌형 종국이 상급이 아닌 형의 입장에서 가끔 그의 옆으로 다가와 관심을 보여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종수는 얼굴에 웃음을 짓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오늘의 고통이 돌아가신 부모처자와 친척들의 원수를 갚고 멸공의 길과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하나도 힘들지 않아. 그 생각만 하면 기운이 절로 나. 그런데 이놈들이 대체 어디까지 도망칠까? 만주 땅까지 꼬리 빼는 거 아냐?”
 종수는 국경이 가까워질수록 그냥 그게 걱정이었다. 만주라면 국군이 진격할 수 있을지가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놈들이 만주 땅으로 도망치기 전에 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는 기진맥진한 몸에 다시 기운을 주입하곤 했다.
 부대는 21일 저녁에 개천을 점령했다. 보급이 미처 따르지 못해 식량과 연료를 점령지에서 충당해야만 했던 부대는 그동안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행운을 만나 개천을 점령한 그날 밤 개천이 국군에게 점령당한 사실을 모르고 진입한 인민군 군용열차 두 대를 노획하여 도합 16량의 군용차량에 만재된 군수품을 획득했다. 탱크 8대를 포함하여 각종 중화기와 탄약, 포탄, 식량에 인민군군복까지 적재되어 있었다. 국군병사들은 땀에 절고 해어진 여름 군복을 벗어던지고 인민군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종수도 인민군군복을 갈아입고 다 해어진 훈련화를 벗어던졌다. 그 대신 고무냄새가 싱그러운 새 농구화를 신고 헝겊으로 만든 새 탄띠까지 어깨에 걸쳤다.
 “야, 우리가 도대체 국군이냐 인민군이냐?”
 “복장만 봐선 인민군이라 할 거야.”
 “6사단은 미8군 대신 인민군의 보급을 받는구만.”
 “어찌됐건 이젠 따스하고 배부르게 먹게 되어 기분 좋다.”
 병사들은 인민군군장을 갈아입고는 즐겁게 우스개를 주고받았다.
 종수는 덕구가 입고 있던 인민군군복을 몸에 걸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똑같은 군복을 입었지만, 이대로 덕구와 나란히 선다면 누가 국군인지 누가 인민군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적수였다. 군복이란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싶었다. 그저 단순한 제복일 뿐이었다. 인민군군복을 입었다고 빨갱이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인민군복장을 입고도 인민군과 싸울 수도 있다. 사람은 머릿속의 사상이 중요한 것이지 의복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깨달았다.
 “이러다가 우리 6사단이 인민군이 되는 거 아냐.”
 사촌형 종수가 등 뒤에 나타나며 익살을 부렸다.
 “빨갱이가 나쁜 거지 군복이 나쁜 건 아니지. 게다가 이건 소련군 군복을 모방한 것이거든.”
 “하긴 국군복장도 미군복장을 모방한 거잖아.”
 그러나 실은 종수도 종국이도 별 수 없이 인민군복장을 착용했지만 이상한 거부감을 느끼긴 마찬가지였다.
 뜻하지 않게 풍성한 인민군군수품으로 미진한 보급을 해결한 6사단은 다시 전의를 가다듬고 북진을 개시했다. 23일에는 인민군 18사단의 오래간 만의 강력한 저항을 격퇴하고 희천시가지를 점령했다. 거기서도 여섯 대의 군용열차를 노획하여 20대의 탱크와 의약품 등 풍부한 전리품을 노획했다. 부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충천했다. 단숨에 압록강까지 북상하여 통일을 이뤄낼 기세들이었다.
 “덕구놈이 마산까장 진격해 내려갔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종수는 그것이 궁금했다.
 “그랬을 테지. 어쩌면 유엔군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적화이긴 하지만 통일이 실현됐을지도 몰라.”
 종국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속에는 깊은 우려가 담겨있음을 종수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역시 압록강이 가까워오면서 그런 우려가 갈수록 깊어갔던 것이다.
 “지발 이번에는 다른 나라의 개입이 없어야 통일이 이룩될 수 있을 틴디 말이제.”
 “어쩐지 난 압록강 북쪽이 걱정돼. 미군이 우리를 도왔으니 제3국이 개입할 빌미를 제공한 셈이 되었잖아.”
 “만일에 제3국이 개입하면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되는 거지?”
 “글쎄. 하긴 그런 정치적 문제는 대통령이 알아서 할 일이지. 우리 군인들은 싸우기만 하면 되는 거야.”
 “난 제3국의 개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혀. 세계최강대국인 미국캉 감히 맞설 만한 나라가 어딨어. 계란으로다 바윗돌 치기디 미국캉 대항한다는 건 곧 어리석은 자멸을 의미하는 거지라.”
 “군사력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정신력도 결코 무시하지 못할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야.”
 “공산당의 유력한 무기가 정신력이란 말이지?”
 종국은 더 말하고 싶지 않은 듯 돌아서서 중대부로 가버렸다.
 그러나 그들의 우려와는 상관없이 6사단은 상부로부터 새로운 명령을 하달 받았다.
 “네가 학수고대하던, 압록강까지 계속 북진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어.”
 어느 날 갑자기 종국 형이 나타나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좀해서는 흥분하지 않는 종국이었지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이 살해되었다는 침통한 비보를 접하고도 차분하게 감정수위를 조절했던 종국이도 눈앞으로 다가오는 통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찬 모양이었다.
 “그냥 압록강까지 쭉 밀고 올라가는 거래?”
 종수도 사촌형의 흥분에 감염되며 다그쳐물었다. 이제 덕구, 덕재 형제와 향란, 종철을 생포할 수 있게 된 것이니 어찌 흥분되지 않을 수 있으랴.
 “우리 사단에는 압록강연안의 최북단 초산과 벽동을 진격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어.”
 “우리 연대는?”
 “초산으로 진격하게 됐어. 2연대는 벽동으로 가고 8사단은 희천, 강계를 거쳐 만포진과 중강진으로 진출한대. 이번 진격은 시간적 제한이나 부대 간의 공격균형을 유지할 필요 없이 누가 먼저 국경에 도달하느냐 하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어.”
 “그거야 당연히 우리 7연대가 맨 먼저지.”
 6사단 7연대는 10월 24일 7시에 진격을 개시했다. 인민군의 저항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적유령산맥을 타고 극성령을 넘어 강행군을 했다. 초산군 회목동에 도착한 것은 이튿날 오전이었다. 고산지대라서 그런지 11월도 안 됐는데 그날 오후부터는 가는 눈발이 이따금 날리기 시작하며 때 이른 초겨울 한기가 엄습했지만 장병들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종수는 압록강이 지척으로 다가올수록 통일도 그만큼 다가와 마음이 기쁘기도 했지만 한 편으론 국경까지 추격해 왔는데도 덕구네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실망감이 들기도 했다. 제발 만주로 도망가지 말아야 할 텐데.
 “다른 부대에 포로가 되었거나 총격전에서 격살되었을 수도 있잖아. 어쩌면 후퇴 도중 남쪽에서 포로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종국은 동생의 우려를 애써 달래주었다.
 “기연이 내 손으로 잡아서 처단혀사 쓰는디…… 큰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가족들과 친인들의 원수를 갚아줘사 그분들의 혼이 눈을 감고 편히 잠들게 아니야.”
 “군대는 나라를 위해 싸우는 조직이야. 사사로운 복수를 위하여 싸우는 조직이 아니란 걸 잊어선 안 돼. 우리 국군의 사명은 멸공과 통일이야. 사사로운 감정에 너무 얽매어선 안 되는 거야.”
 이 순간 종국은 형이 아닌 장교의 입장으로 돌아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중위님.”
 종수는 저도 모르게 발뒤꿈치를 딱 소리 나게 붙이며 거수경례를 했다.
 “알면 됐어. 참, 나와 같이 대대부로 가야겠다.”
 “먼 일루?”
 “적군 포로 한 놈을 생포했는데 알아듣지 못할 말을 지껄이고 있어 중공군 같아 보이는데 되놈 말을 아는 사람이 있어야지. 넌 중국말을 알잖아.”
 “중공군이락꼬요. 그럼 중공군이 끝내 한국전쟁에 개입한건가요?”
 “그런 것 같아.”
 “다 쑨 죽에 코 푼 거잖아요.”
 “자세한 건 나도 아직 모르니까 어서 가자꾸나.”
 천막을 치고 임시로 가설한 대대부에는 많은 장교들이 모여 있었다. 장교들 중에는 만주군 출신도 있었다. 종수네가 들어갔을 때는 안에서 심문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종수도 통역으로 천막 안으로 들여보내졌다.
 천막 안에는 대대장과 통역으로 동석한 참모장교와 경비병 몇 사람이 낯선 군복을 입은 군인을 상대하고 심문을 진행하고 있었다. 초록색의 군복은 여름 복장이었는데 어깨에 계급장도 없고 다만 가슴에 붙인 흰 무명헝겊에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검은 먹 글씨가 씌어있을 뿐이었다. 중머리를 깎은 군인은 군모를 벗어 손에 쥔 채 고개를 쳐들고 천정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조금도 기가 꺾인 표정이 아니었다.
 참모장교의 통역은 어설펐다. 종수의 유창한 중국어통역을 듣더니 아예 슬그머니 등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종수는 대대장의 말을 되받아 중국어로 질문을 했다.
 “당신은 어느 나라 군인인가?”
 “중국인민지원군이다. 당신들은 어느 나라 군대인가?”
 전혀 처음 듣는 군대이름이었다.
 “묻는 말에나 고분고분 대답해. 중국인민지원군 어느 부대인가?”
 “13병단 40군 ㅇㅇ사단 ㅇㅇ연대 소속이다.”
 군인은 조금도 주저 없이 묻는 말에 이실직고했다. 연대장, 사단장, 군단장, 병단사령관의 이름이며 부대의 현 위치, 병력숫자, 무기현황 등등에 대해서도 필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이번 전쟁에서 자기들이 이긴다는, 충분한 확신에 차있는 그런 당당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뭘 믿고?
 종수는 질문을 하면서도 뭔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중공군의 개입은 유엔군과 한국군의 작전에 불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민군이 낙동강계선까지 남진했다가, 통일을 눈앞에 두고 열광에 들떴다가 미군과 유엔군의 개입으로 작전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던 상황이 여기서 또 재연될 것만 같은 조짐이 뚜렷해서 몸서리가 쳐졌다. 그렇게 되면 국군의 최종목적인 멸공통일을 이루지 못할 것은 물론이고 손아귀에 들어온 덕구네도 잔명을 부지하게 될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중공군의 개입은 군 수뇌부의 북진전략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
 통역을 끝마치고 대대부 천막을 나오는 종수의 심정은 착잡했다.
 그러나 그의 우려와는 달리 부대는 중공군 포로가 제공한 불리한 정보에도 불구하고 북진을 계속 강행했다.
 밤부터 푸슬푸슬 날리기 시작한 눈은 이튿날 낮이 되어서야 그쳤지만 눈 때문에 푸근하던 산악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며 살을 에는 초겨울 한파가 엄습했다. 산과 골짜기는 죄다 백포를 뒤집어쓴 듯 새하얀 적설에 덮여있었다. 산길은 어찌나 미끄러운지 촌보를 옮기기가 힘들었다. 간혹 보이는 산간마을들에는 주민들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이 텅텅 비어있었다. 이 고장에서 큰 전투가 벌어지리라는 걸 미리 예측하고 죄다 피난을 간 모양이다.
 종수는 목이 마르면 손으로 눈을 움켜쥐어 덩이를 만들어서는 입 안에 넣고 녹이며 걸었다. 초산에 거의 이르러 인민군의 저격을 받았지만 국군의 강력한 화력에 쉽게 격퇴되었다. 퇴각하는 군대는 전의를 상실하는 법이다.
 “압록강이다!”
 드디어 국경 최북단 초산에 당도한 것이다. 장병들의 함성소리가 계곡에 메아리쳤다. 누군가 영마루에 태극기를 꽂았다.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 너머에 만주의 자그마한 산간마을이 육안으로 보였다. 이 강을 건너면 그가 살던 북만의 강촌마을로 갈 수 있다. 덕구와 덕재 그리고 향란이와 종철이란 놈은 그리로 도망갔을지도 모른다.
 장병들은 강변으로 달려 내려가 휴대한 수통에 압록강 물을 담기도 하고 강변의 흙을 수건에 담아 몸에 간수하기도 했다.
 “우리도 내려가자.”
 종국 형이 그의 어깨를 툭 치고는 강변으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그러나 종수는 웬일인지 그 모든 것이 심드렁해졌다. 덕구와 덕재, 향란과 종철을 찾지 못했다는 절망감이 마음을 어둡게 했다. 공허감과 허탈감마저 느꼈다. 그는 맨 마지막에 강기슭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압록강 물을 마시면서도 통일이 되었다는 실감은 느낄 수 없었다. 뒤에는 적군인 중국인민지원군이 있다. 국경까지 먼저 도착하겠다고 백사불구하고 달려오다 보니 7연대는 유엔군과는 물론이고 사단본부와도 동떨어져 있었다. 그 중공군 포로의 진술대로 정말 유엔군과 사단본부 사이에 지원군이 끼어들었다면 우리는 포위된 거나 다름없지 않는가.
 부대의 대부분 장병들은 북한이나 만주지역에는 처음인 남한출신들이었다. 그래서 압록강에 대한 그들의 호기심은 각별한 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종수에게는 그저 심드렁할 뿐이었다. 만주에서 태어나 20살이 넘도록 살았고 장가까지 든 그였다.
 대대는 1중대만 국경경비대로 남기고 주력은 초산으로 철수했다.
 한편 6사단 후방에서는 벌써부터 종수가 우려하던 상황이 현실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벽동으로 진격하려던 좌익의 2연대는 온정리에서 중국인민지원군 40군의 포위공격에 심대한 타격을 받고 붕괴된 채 주요장비를 버리고 태평 방향으로 간신히 퇴각했다. 2연대를 구출하기 위해 투입된 예비 19연대도 중공군에게 완전히 섬멸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 초산으로 진출했던 7연대는 사단의 철수명령을 받고 유엔군의 공수보급을 받으면서 신속히 철퇴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나마 유엔군 공군기의 엄호를 받았기에 철수가 가능했다. 그러나 공군기가 사라지면 금방 중공군의 밀집화력과 기습이 가해졌다. 국군장병들은 피리를 불고 꽹과리를 두드리면서 인해전술로 공격해오는 지원군의 전술에 질겁하여 공포와 불안에 떨었다. 7연대는 하는 수 없이 중장비들을 파괴하거나 소각한 다음 장병들더러 중공군의 겹겹의 포위를 각자 알아서 돌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종수는 연대장의 퇴각명령을 듣지 못했다. 독안에 든 쥐처럼 연대는 산골짜기에 갇힌 채 꼼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양쪽 능선에 매복한 중공군이 국군의 퇴각로인 계곡을 향해 맹화력을 퍼붓는 바람에 머리조차 쳐들 수 없었다. 종수는 중대장 종국이와 그리고 몇몇 병사들과 함께 105mm박격포견인트럭 밑에 엎드려 있었다.
 “어서 이 계곡을 빠져나가야 해. 여기 있다간 죽는 길밖에 없어.”
 종국은 적탄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산릉선을 향해 이따금 눈먼 총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날이 어둡기 전에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림자만 언뜻 해도 불벼락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트럭의 타이어고무에 불이 붙어 숨 막히는 열기와 연기가 화끈거렸다. 조급한 나머지 병사 한 명이 골짜기를 빠져나가보려고 트럭 밑에서 기어나가다가 밖에 머리를 내밀자마자 정수리에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 푹 꼬꾸라졌다. 종국은 병사의 다리를 잡아당겨 안으로 끌어들였다. 정수리에 뻥 뚫려진 관통상으로 핏물이 샘물처럼 콸콸 솟구쳤다. 신음소리 한마디 내지 못하고 즉사했다. 군복상의를 벗겨 얼굴에 덮어주었을 뿐 달리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트럭 주변에서 수류탄이 작렬하며 흙먼지가 뽀얗게 솟구쳤다. 파편과 돌멩이들이 머리 위의 적재함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음을 냈다.
 날이 어두워서야 종수는 계곡을 빠져나가려고 시도했다.
 “내가 엄호할 테니 넌 먼저 철수해라.”
 “그라들 말고 우리 함께……”
 “여러 사람이 함께 행동하면 안 돼. 목표물이 커지 거든.”
 종국은 기어코 동생의 등을 떠밀었다.
 종수는 눈물을 흘리며 트럭 밑에서 기어 나와 어둠 속을 뚫고 남쪽으로 허둥지둥 달려가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종국이 연발사격으로 중공군의 화력을 자기한테로 유도하는 엄호사격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달리던 종수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에 발이 걸려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국군의 시체였다. 도로 옆 배수로에 엎드려 한동안 총격전이 콩 볶듯 하는 골짜기 쪽을 바라보며 형님이 뒤따라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때 바로 앞에서, 2m도 안 되는 지척에서 국군 부상병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로 기어가 보니 하사계급장을 단 부상병인데 아래턱이 완전히 떨어져나가고 없었다. 찢어진 가죽만 피범벅이 된 채 낡은 커튼처럼 넌덜거리고 있었다. 하사는 말은 못하고 두 눈을 부릅뜬 채 자꾸만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의 두 팔은 수류탄파편이 박혀 흘러나온 피에 군복팔소매가 흥건히 젖어있었다. 종수는 저도 모르게 구토가 발작했다. 그러나 하사가 불쾌해 할까봐 가까스로 참았다.
 그가 가리키는 군복저고리 안주머니에는 낡은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다. 가슴에도 파편이 박힌 듯 핏물이 질퍽했다. 한마디로 그의 온몸은 만신창이 되어있었다.
 가족사진이었다. 누렇게 뜬 화면에 박힌 그의 아내의 얼굴은 복스러웠다. 남편이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마냥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하사는 갑자기 두 눈을 더 크게 부릅뜨더니 숨을 헐떡거리며 손가락으로 남쪽하늘을 가리켰다. 과다출혈 때문인지 하사는 그렇게 한동안 기를 쓰고 숨을 헐떡거리더니 불현듯 맥을 버리고 거짓말같이 땅바닥에 머리를 풀썩 떨어트리고 말았다.
 종수는 피 묻은 사진을 호주머니 안에 간수했다. 그리고는 하사의 목에서 군번표를 풀어냈다.
 거기서 두세 시간을 더 기다렸지만 사촌형 종국중대장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쯤엔 계곡의 총성도 잠잠해졌다. 7연대가 계곡도로에 버린 중화기들이 소각되면서 화광과 연기 만 하늘공중으로 삼단같이 솟구쳐오를 뿐이었다.
 느닷없이 근처에서 중국말소리가 들려왔다. 전쟁터순찰을 도는 중공군이 틀림없다고 판단한 그는 조심스레 웅덩이를 기어 나와 숲 속으로 살금살금 숨어들었다. 더 이상 종국 형을 기다릴 경황이 없었다. 어둠 속인데다 낯선 고장이고 또 군사지도마저 없어 그곳이 어딘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늘의 북극성을 쳐다보고 남쪽방향을 잡은 다음 계곡을 타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적설이 두텁게 깔린 적유령산맥의 산속에는 먹을 만한 마른 산열매조차도 없었다. 벌써 꼬박 하루 동안 굶었다. 추위가 덮치며 손발이 꽁꽁 얼어들었다. 게다가 졸음까지 밀려들었다. 그래도 밤에는 어둠을 빌어 적의 추적으로부터 몸을 은신할 수 있었지만 낮이 되자 이동조차 불가능해졌다. 유엔군의 공중폭격이 우박처럼 쏟아지는데다 도처에 중공군이 욱실거렸기 때문이다. 종수는 하는 수 없이 으슥한 수림 속에 은폐하여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밀린 잠이나 실컷 자기로 작정했다.
 어렴풋이 풋잠이 들었던 그는 갑자기 주위에서 떠들썩하는 소리에 깨어났다. 일여덟 명의 국군이 두 손을 머리 위로 쳐든 채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어 맞은편 능선을 넘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종수는 깜짝 놀라 그 자리를 피하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웬일인지 오른발이 돌덩이처럼 굳어져 움직여지질 않았다. 신을 벗고 손으로 발을 만져보니 얼음장처럼 차가울 뿐 감각이 없었다.
 “제기랄. 초저슬에 발이 다 얼다니! 아직도 얼마를 걸어야 할디 모를 틴디.”
 그는 투덜거리며 손으로 눈을 움켜쥐고는 발에 대고 부비기 시작했다. 추위가 혹독한 만주 땅에서 살 때 어른들한테 배워둔 민간요법이었다. 동상에는 뜨거운 물이 아니라 찬물이나 또는 눈으로 발을 비벼야 한다는 민간요법이었다.
 그런데 무슨 낌새를 챘는지 느닷없이 십여 명의 중공군이 그가 숨어 있는 산비탈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긴장해진 그는 신을 신을 사이도 없이 손에 거머쥔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외발뜀질로 영마루를 향해 뛰어 올라갔다. 비탈이 몹시 가파른데다 적설까지 두껍게 쌓여 나무뿌리나 가지를 부여잡고 기어 올라가야만 했다.
 “챈먠 유디런. 쫘주타!(앞에 적이 있으니 사로잡아라)”
 중국말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총소리도 울렸다. 몇 발은 그의 주위에 떨어지며 눈가루를 일으켰고 한 발은 귀뿌리를 스쳐가며 휘잉, 하는 뼈를 긁는 바람소리를 냈다. 귀뿌리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인젠 꼼짝 없이 죽었구나!
 이런 절망감이 순간적으로 뇌리에서 번개 쳤다. 후퇴 시기에 남쪽 끝에서 북쪽까지 산발을 타고 도망쳤을 덕구네의 모습도 지금 나처럼 궁색하고 초라했을까? 군인이라는 자존심도 버리고 오로지 도망치기에만 급급했을까? 비굴하고 너절하고……
 더욱더 요란한 총소리와 공간을 좁히며 신변을 압도하는 화력망에 저도 모르게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눈먼 적탄 한 방에도 내 목숨은 끝장날 것이다. 그러면 복수는 언제 하는가? 차라리 투항하고 포로가 되는 게 어떨까? 후사를 도모하려면 무엇인들 못하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주춤 뜀박질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비탈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중공군은 기를 쓰고 그를 추격해 올라오고 있었다.
 안 돼! 포로가 될 바엔 차라리 자살하고 말거야. 살아서 원수를 갚아야 돼!
 종수는 또다시 기운을 내어 얼마 남지 않은 영마루를 바라고 필사적으로 눈 속에서 버둥거렸다.
 “짠주! 쥐써우 터우썅바. 부터우썅 따쓰 니! (서라! 손들고 투항하라! 투항하지 않으면 죽여 버릴 테다!)”
 함성소리와 총탄이 빗발쳤지만 종수는 탄우 속을 뚫고 기어이 영마루에 올라섰다. 그러나 그는 눈앞에 벌어진 뜻밖의 상황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의 앞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오~하나님! 진정 절 버리시려는 겁니까?
 그는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뒤에는 적이 추격해오고 앞에는 낭떠러지가 가로막고. 어느새 적군은 영마루에 올라서고 있었다. 그들은 그의 등 뒤에 총을 겨눠들고 외쳤다.
 “베뚱! 쥐써우! (손을 들고 꼼짝 마!)”
 종수는 저도 모르게 총을 거머쥔 채 두 손을 머리 위에 추켜들었다. 발밑에 보이는 아스라하게 높은 절벽은 눈 뿌리가 실 정도로 가마득했다. 뛰어내릴 자신이 없었다. 눈 덮인 그 골짜기 아래로 뛰어내리기만 하면 분신쇄골이 될 것만 같아 두려움이 앞섰다.
 적병들이 한 걸음, 한 걸음 그의 등 뒤로 다가왔다. 정강이까지 푹푹 빠지는 적설을 가르는 소리가 스르륵- 스르륵- 분명하게 들려왔다. 10m, 8m, 6m, 5m…… 이제는 3m 정도밖에 남지  않았을 거라고 느껴지는 순간 종수는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떴다.
 중공군에게 생포되면 포로가 되어 인민군에게 넘겨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내 운명은 다시 한 번 산곡리에서처럼 덕구와 덕재의 손아귀에 맡겨질 것이 아닌가. 안 돼! 죽으면 죽었지 그건 안 돼! 차라리 이 벼랑에서 뛰어내려 분신쇄골이 될지언정! 종수는 저도 모르게 아아악! 하고 목구멍이 터지라고 날카로운 고함을 내질렀다. 파도처럼 엄습하는 두려움과 공포를 잊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그에게로 접근해오던 적군들은 갑작스레 터져 나오는 괴성에 깜짝 놀라며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격발장치를 당기는 순간 종수의 육체는 이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종수가 마지막으로 들은 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총성뿐이었다. 허공중에 날아 떨어지는 순간 그는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여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하늘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다행히도 깊은 눈 웅덩이에 떨어져 두 번째로 사경에서 목숨을 건졌다. 털끝 하나 다친 곳도 없이 몸도 성했다. 다만 손에 들고 있던 오른쪽 농구화를 잃어버렸을 뿐이었다. 총까지 손에 거머쥔 대로였다. 벼랑 위를 올려다보니 적군은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적들은 그가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었을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헐벗은 나뭇가지 위에서 이름 모를 새들이 요란스레 우짖어댔다. 푸른 하늘은 창창하고 살진 구름 몇 덩이가 밝은 태양의 정원을 스쳐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종수는 평소에는 무심하게 대했던 자연의 그런 일상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스럽게 느꼈다. 저도 모르게 두 눈에 눈물이 글썽해졌다.
 종수는 웅덩이 안에서 기어 나왔다. 셔츠를 벗어 오른발에 감은 뒤 머루넝쿨을 주어 칭칭 동여맸다.
 “그래도 덕구놈이랑 후퇴할 때는 추위 걱정은 없었지라. 9월이라 산에 열매도 있었을 테고. 그 놈은 나보담 행운아였당께로.”
 종수는 발 꾸러미를 하며 혼자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밤이고 낮이고 가릴 경황이 없었다. 산 속에서 꾸물거리다간 언제 포로가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가까스로 눈 속에서 일어나 연대의 집합장소인 구장동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른 발가락이 동상이 심해 걷기가 힘들었다. 나뭇가지를 꺾어 지팡이를 만들어 짚었다. 산비탈에서는 아예 눈 위에 드러누워 나뭇단처럼 계곡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내려가기도 했다. 걸으면서도 밀린 졸음에 떠밀려 끄덕끄덕 졸았다. 맥을 버리고 곰처럼 눈 위를 엉금엉금 기어가다가 그대로 적설 위에 엎드려 잠이 들어버릴 때도 있었다.
 “얼마 되들 않는 거린디도 후퇴란 것이 이라게 힘든디 덕구랑 놈도 엔간히 혼쭐이 났겠구먼. 종구성말맹키로 증말 국군이나 미군의 포로가 되었는디도 몰라!”
 무엇 때문에 의식의 골목에 늘 덕구와 덕재 그리고 향란이와 종철의 모습이 어슬렁거리는지 모를 일이다. 사실 경관복을 벗고 국군에 입대한 목적도 그들을 추격하여 그 자신의 손으로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목적은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패퇴하는 꼴이 되다니!
 “중공군이 개입하들 않았닥캐도 이런 요상헌 일은 없었을틴디고마. 허긴 덕구나 덕재 놈도 나 맹키로 미군과 유엔군을 원망했을 티디만……”
 “누구얏? 꼼짝 말고 손들엇!”
 느닷없이 등 뒤에서 날카로운 호령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 말소리는 너무나 귀에 익은 한국말이었다.
 “난 6사단 7연대 소속 한 일병입니다. 당신들은?”
 종수는 손을 들면서 몸을 돌렸다. 그를 향해 총을 겨눈 네 명의 군인들도 종수처럼 인민군복장을 입었지만 첫 눈에 국군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건 말이 없이도, 눈길과 표정만으로도 통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우리도 7연대 소속입니다.”
 종수는 그들한테로 달려가 한 사람, 한 사람 돌아가며 얼싸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난 혼자서 중공군들에게 잡혀 죽들 않으면 산속에서 헤매다가 늑대 밥이 되는 줄 알았당께.”
 “구장동은 이미 중공군에게 점령되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네. 그러니 우린 묘향산을 우회하여 개천 쪽으로 퇴각해야 될 것 같네.”
 그들은 어떤 경로를 통했는지 알 수 없으나 독단적으로 행동한 종수보다는 많은 정보를 장악하고 있었다. 종수는 그들의 제안에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묘향산 쪽도 별로 안전한 지대는 아니었다. 중공군은 대개 유엔군 공중폭격을 피해 야간기습을 많이 했다. 그들은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믿고 국군의 월등한 화력에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앞 사람이 쓰러지면 뒤에 사람이 그 자리를 메웠다. 그렇게 끝없이 쉴 새  없이 밀고 올라왔다.
 종수네 일행은 극도로 지친데다 부상당한 사람도 있고 손과 발에 동상까지 입어 될수록 교전을 피해 행군만 계속했다. 눈 덩이로 굶주림을 달랬고 서로 일깨워주는 것으로 밀려드는 졸음을 쫓았다.
 천신만고로 중공군의 포위망을 빠져나와 개천에 도착했다.
 개천에 도착한 연대병력은 3552명 중 겨우 몇 백 명에 불과할 만큼 6사단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종수는 개천에서 뜻밖에도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촌형 종국 중대장을 만났다. 그는 어깨에 부상을 당했지만 다행히도 찰과상에 불과했다.
 “어떻게 그 죽음의 계곡에서 살아나온 거야?”
 종수는 중대장의 손을 부여잡고 너무 반가운 김에 눈물을 흘렸다.
 “사내자식이 울긴. 할일이 많은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말도 못 들었냐.”
 “성이 신선도 아닐 틴디 살아났당께 증말 신기혀!”
 “어디 맞춰봐.”
 “글매. 내가 빠져나온 뒤 둬 시간도 안 돼서 중공군이 우리가 있던 계곡으로 돌격해 내려온 것 같던디 말이지……”
 “죽은 중공군의 옷을 벗겨 입었지. 어둠 속에서 그들은 날 알아보지 못했어. 그들처럼 팔에 흰 헝겊까지 둘렀으니까.”
 “누가 말을 건네는 사람도 없었어?”
 “말을 걸어 왔지.”
 “그래서?”
 “손가락으로 귀를 가리키고는 손을 휭휭 내저었지. 그랬더니 총소리에 귀가 먼 줄 알고 그냥 지나가더구나. 하하하.”
 “하하하.”
 두 사람은 통쾌하게 웃었다. 전쟁이 아무리 서로를 살상하는 잔인한 행위이긴 하지만 용기 하나만 가지고는 살아남기가 어려운 것이다. 때로는 기지와 임기응변도 자신을 보존하는 유효한 호신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근디 어떻게 나보담 먼첨 개천에 도착했제?”
 “중공군의 군마를 타고 하룻밤을 달렸어.”
 “긍께 중공군의 군복을 입고 즈그들의 말을 타고 암행어사 출도 한 셈이네.”
 “그런가.”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건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다. 더구나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몸성히 살아났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종수의 마음은 개운하지 않았다. 덕구네를 복수하려던 목적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한 번의 전쟁으로 끝났을 그와의 복수전이 이제는 언제까지 지연될지 아무도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종수는 그 뒤에도 휴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까지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여러 전투들에서 여러 개의 훈장도 수여받았다. 그러나 정전에 이를 때까지 그는 끝내 고대하던 덕구와 덕재를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고 제대하던 날 종수는 북쪽하늘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토해냈다.
 “이젠 전쟁도 끝났응께 내 느그놈들을 은지 다시 만날 겨.”
 물론 동생 종철의 소식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월북 도중 향란의 도움을 받아 구원되었다는 사연과 미국으로 이민 간 사실도 막내 동생 종학을 통해 알았다. 종학이도 서울에서 공부를 하다가 6.25를 만나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숨어서 지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대학을 졸업하고 그도 둘째 형 종철을 따라 미국 엘레이로 유학의 길을 떠난 대로 그곳에 아예 뿌리를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향란의 소식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후퇴 길에서 종철을 구해준 뒤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덕재의 생사도 묘연했다. 덕구 역시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종수는 어느 하루도 덕구, 덕재, 향란의 존재를 기억 속에서 잊은 적이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종군하여 자기 손으로 복수할 가능성이 없다는 걸 스스로도 알면서 죽기 전에 그를 만나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아버지와 친척들의 원한을 결산할 날이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문뜩 그의 앞에 준호가 나타났고 그의 할아버지가 바로 그가 찾으려던 숙적 최덕구임을 알게 되었을 때 한종수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원수의 손자가 사랑하는 손녀와 연인이라니?!  이게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다. 복수는 못할망정 덕구와 사돈지간은 될 수 없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손녀딸의 연애를 막아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준호의 아비가, 공산당사상이 골수까지 침투된, 빨갱이 최영식이 자신의 친아들이라고 하니 종수는 정말 미쳐날 지경이었다. 곱단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폭탄선언은 너무나 치명적인 충격이었다.
 내 피가 빨갱이의 몸속에서 흐르다니?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곱단이가 그의 비난과 불만을 감수하면서까지 그에게로 달려와 사실을 공개한 걸 보면 거짓말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종수는 이 사실이 불가사의하다고만 생각되었다. 영식을 아들로 인정하고 만나주고 받아들인다는 건 곧 최덕구를 용서하고 아버지와 일가친척들의 원한에 대한 복수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었기에 그로서는 수락할 수가 없었다.
 아아.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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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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