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불타는 반도 
장혜영

 

 

                

 

             6장 사랑과 증오       

 

      

 

 


     2

 

 

 

 

 빗줄기는 밤이 깊어가면서 더욱더 굵어졌다.
 덕구는 야전병원의 군의, 간호사, 부상병들과 민청원들을 먼저 북으로 출발시킨 다음 자신은 사촌형 덕재와 여동생 향란이 그리고 월북을 결심한 종철이를 데리고 숙부네 집에 들렀다. 숙부네 식구들도 모두 데리고 북상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사실 그는 산곡리에 온 지 한 달 남짓 되지만 숙부네 집에 들른 적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 인사드리러 찾아왔을 때 숙부는 낯선 조카를 심드렁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맞아주었다. 인민군 장교복을 입은, 핼쑥한 조카를 이상한 눈길로 바라볼 뿐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울 아벤 워낙 저라탕께. 인민군이고 국군이고 군대라먼 몬타 눈꼴 사나와 한당께.”
 다행히도 덕재 형이 나서서 어석한 분위기를 애써 수습해주었다. 숙부의 그 무표정한 얼굴을 보기가 싫어서 다시는 그 집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에 흠뻑 젖은 채 방 안에 들어서는 조카를 맞이하는 최복구의 얼굴기색은 여전히 덤덤했다. 이번엔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고개를 수그린 채 잎담배만 뻐끔뻐끔 빨았다.
 “숙부님, 오늘밤 중으로 산곡리를 떠나야겠습니다. 어서 차비를 하십시오.”
 덕구는 구들 위에 엉덩이조차 부리지 않은 채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얼레. 떠나긴 어디로 떠난다는 겨?”
 최복구는 오래간만에 한마디 던지고는 아예 벽 쪽으로 돌아앉았다. 싫다는 뜻이다.
 “북으로 갑시다.”
 “이북엔 머달락꼬?”
 “미국 놈들이 밀고 올라오고 있습니다. 더 지체했다간 그놈들에게 당한다구요.”
 “난 누헌티도 나쁜 지꺼릴 한 적이 없응께 당헐 두려움도 없는 겨. 고향을 두고 개긴 어딜 개긴다는 겨, 난 싫혀.”
 “압씨. 무산시리 고집부리들 말고 어여 일어 나이소.”
 덕재가 무작정 아버지의 겨드랑이를 안아 일으켰다.
 “시간이 없구먼유. 이라다가 놈들이 들이닥치면 후회혀도 소양없지라우. 맏아들은 인민위원장에 노동당이꼬 둘째 아들은 지리산공비락카는 죄명만으로도 압씬 처단될개구먼유.”
 그 소리엔 최복구도 할 말이 궁해지는지 아들을 쏘아보며 한마디 하고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끙, 하고 일어났다.
 “그라게 그렇게 무서운 지꺼릴 머달라꼬 현겨. 고마 오솝소리 농새나 지을 거제.”
 보퉁이 몇 개만 부랴부랴 챙겨들고 집을 나섰다. 최복구의 마누라 수분이네, 맏사위 바당쇠, 둘째 사위 용팔이 그리고 두 딸과 손자, 손녀들이 비 오는 밤길을 걸어 총망히 마을을 빠져나왔다.
 “으매, 지끔 어일 개기는겨? 지는 개기 싫구먼유.”
 “장인어른, 북으로다 간닥꼬 미군의 추격에서 벗어날 것 같습디여. 기양 집으로다 돌아개기지라우.”
 수분이네와 두 사위가 불평불만을 토로했지만 최복구는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없이 조카 덕구를 따라 진창길을 철벅철벅 걸어갔다.
 마을 앞 냇가에 이르러보니 그 사이 내린 폭우로 나무다리는 홍수에 떠내려가 버렸다. 어둠 속에서 시커먼 흙탕물이 소용돌이치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자들은 물소리만 듣고서도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물이 불어서 건너갈 수 없는 겨. 것다가 날쌔까장 깜깜허제. 날이 볽고 비가 그치거덜랑 떠나는 기 어뗘?”
 최복구가 차라리 잘됐다는 듯 일행의 인솔자격인 조카 덕구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안 됩니다. 놈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그놈들헌티 죽는기나 물에 빠져 죽는 기나 죽는 건 몬타 마찬가징께.”
 “숙부님. 여기서 식구들을 데리고 잠시만 기다리라요. 우리가 건널만한 물길을 얼른 알아보고 올게요.”
 덕구는 덕재, 향란, 종철을 데리고 동쪽을 바라고 빗속을 뚫고 나갔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노인들이나 여인들이 건널만한 여울목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거의 되었을 때 다행히도 돌다리 하나가 나타났다. 돌다리는 비록 홍수에 잠기긴 했지만 그곳을 타고 건너면 물이 정강이까지 밖에 오지 않을 듯싶었다.
 덕재가 먼저 건너가 보고 돌아왔다.
 “어때요. 여자들도 건널만 합니까?”
 “되겠당께.”
 “그럼 형님은 어서 아까 우리가 올라온 곳으로 다시 가서 숙부네 일행을 데리고 올라오시오.”
 벌써 날이 밝으려는 듯 사위가 어렴풋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빗줄기도 한결 누그러든 듯싶었다. 가랑비만 부슬부슬 내렸다.
 “도중에 혹시 여의치 않은 일이 생기면 혼자서라도 그냥 물을 건너 북상하오.”
 “알았당께.”
 덕재는 진창길에 미끄러져 비틀거리며 언덕 아래로 사라졌다.
 사촌형 덕재를 보내고 나서야 덕구는 후회했다. 두 시간 가까이 걸어서 올라온 곳이다. 덕재형이 숙부네 일행을 데리고 오자면 왕복 네 시간 길이 될 터인데 그때면 한낮이 될 것 아닌가. 그리고 네 시간이 넘도록 비를 맞으며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숙부도 아니다. 진작 식구들을 거느리고 집으로 들어갔을 지도 모른다.
 “제기랄! 고집불통 영감태기 같으니라고!”
 덕구는 잇새로 욕설을 퍼부었다.
 커다란 밤나무 아래에서 비를 긋고 있는데 후퇴하던 인민군병사 두 사람이 냇가에 나타났다. 한 사람은 대위계급장을 달았고 한 사람은 중위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덕구는 나무 밑에서 달려 나가 군례를 부쳤다.
 “대위 동지. 저는 제6사단 13연대 xx대대장 최덕구입니다.”
 “중위 동무래 여기설라무니 머르 꾸물거리고 있슴메? 다들 후퇴하고 있으니께니 날래 후퇴하라우.”
 “여기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양키놈들이래 막 밀고 올라오고 있시오. 적들이래 23일 날 낙동강전선을 돌파했디요. 기럼 우리래 먼뎌 가갔시요.”
 “대위는 오른팔을 붕대로 감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중위는 총도 없고 신발조차 없이 맨발바람이었다. 그들은 허망지망 냇물을 건너 건너편의 숲 속 어딘가로 사라졌다.
 비도 그치고 날도 훤히 밝았으나 사람 데리러 간 덕재는 종시 나타나지 않았다. 설령 일행을 데리고 온다고 하더라도 이 곳까지 도착하려면 아직 두 시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그 사이 후퇴하는 군인 십여 명이 더 지나갔다. 지칠 대로 지치고 초췌할 대로 초췌하고 먼지 낄 대로 먼지 낀 초라한 행색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공포와 절망과 기아와 피곤으로 하여 누렇게 녹이 쓸어 있었다. 그들의 당황한 기색을 미루어 봐서는 조금만 더 지체했다간 적들에게 포로가 될 위험마저 있을 것 같은 아슬아슬한 분위기였다. 다급해난 덕구는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우리끼리 먼저 떠나자.”
 “사촌 오빠는요?”
 “벌써 강을 건너갔을 지도 몰라. 서두르자. 날이 완전히 밝기 전에 산 속으로 들어가 숨어야 한다. 적의 공중폭격이나 기총소사가 있을 수도 있고 추격병에게 생포될 수도 있으니까.”
 “오빠, 종철 씨의 결박을 풀어줘요. 길이 질척거려 걷기가 힘들잖아요.”
 “안 돼!”
 덕구는 퉁명스럽게 잘라버렸다. 향란에게는 위험이 없는 연인일지도 모르나 그에게는 위험천만한 적이었기에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전 괜찮습니다.”
 종철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운명에 복중하고 있었다.
 다리를 무사히 건넌 세 사람은 한길을 버리고 산속으로만 걸었다. 낮에는 폭격이나 수색을 피해 대체로 숲 속이나 동굴 같은데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행동했다. 국도를 따라 차량으로 이동하는 국군이나 미군부대의 공격이 훨씬 빨라서 퇴각하는 인민군부대의 퇴로를 차단하는 바람에 사실상 사면팔방으로 포위된 상태에서 이동을 해야 했다.
 덕구네 일행은 장안산, 덕유산, 속리산, 월악산을 전전하며 겨우 소백산까지 도착했다. 소백산까지는 별 어려움 없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다만 식량을 구하기가 힘들었을 뿐이다. 산열매나 나물을 따먹기도 하고 폭사당한 산토끼나 날짐승 같은걸 만나 불에 구워먹기도 했다. 이따금 외딴 동네를 만나면 농부들에게서 감자나 보리쌀 같은 식량을 구할 수도 있었다. 가난한 농부들이 거절할라치면 덕구는 그들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대고 위협하기도 했다.
 “빌어먹을! 인민을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우는 군대인데 쌀 한 알 주기가 그렇게 아까워. 반동새끼들 같으니!”
 그러면 농부들은 얼굴이 흙빛이 되며 감춰두었던 종곡이라도 후들후들 꺼내놓는 것이었다.
 “인민군은 꼭 다시 돌아올 거요. 그때면 몇 배로 보상해 줄 거요.”
 군율을 지키면 죽는 길밖에 없었다. 후퇴병에게 군율 같은 건 아무런 견제작용도 없었다. 생명보존의 본능은 군율보다 더 절박한 것이었다.
 그들이 소백산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사흘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어있었다. 모두들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게 되었다.
 “모두들 여기 꼼짝 말고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덕구는 총을 들고 어딘가로 떠나갔다. 아마 민가를 찾아 먹을 것을 구하러 간 모양이다. 그는 떠나기 전에 종철을 굵은 소나무에 포승줄로 단단히 옭아매 놓고서야 떠나갔다. 골짜기에는 향란과 종철 두 사람만 남았다. 밤인데다 날씨까지 흐려 산골짜기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북쪽으로 이동할수록 차갑게 느껴지는 가을바람이 홀 옷을 꿰고 살 속으로 스며들었다.
 향란은 오늘밤이야말로 종철을 구해줄 수 있는 절회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오빠는 이제껏 한 번도 그들만 남겨두고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다. 늘 함께 행동하곤 했다. 그런데 38선이 가까워지자 방심한 것인지 아니면 동생 향란의 발바닥에 온통 물집이 생겨 걸을 수 없게 된 때문인지 오늘밤만은 둘만을 산속에 남겨두고 떠나갔다. 걱정이 되었을 텐데도 동생더러 놓치지 말라거나 풀어주지 말라거나 함께 도망하지 말라는 당부조차 하지 않았다. 하긴 향란은 가라고 등을 떠밀어도 못갈 이유가 있다는 걸 덕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우선 그녀는 덕구와는 피를 나눈 남매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혈육과 사랑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동생은 반드시 오빠 쪽을 선택할 것이라 믿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것은 확인할 필요조차 없다. 게다가 향란은 노동당원이며 여맹위원장이며 인민군을 위해 일했고 반동들을 진압하는데 앞장섰던 《빨갱이》임으로 적들의 통치구역으로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덕구는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오빠의 그런 믿음을 악용해야만 하는 자신이 미워졌으나 향란은 사랑을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오늘을 위해서 깊숙이 간수해두었던 구운 감자 두 덩이를 품속에서 꺼냈다. 돌덩이처럼 굳어있었고 속살이 말라붙어 새알만큼 작았다. 하지만 그것은 한 사람이 굶주림을 달래기엔 충분했다.
 “종철 씨, 이걸 자시고 기운을 내세요.”
 “나보다는 향란 씨가 먹어요. 난 남자가 아닙니까.”
 “이걸 드시고 오늘밤 남쪽으로 내려가세요.”
 향란은 그의 몸을 얼기설기 묶었던 결박을 풀어주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라니요?”
 “아니면 우리 함께 이북으로 가서 살아요. 종철 씬 워낙 사회주의사상을 가지셨던 분이 아니세요. 그래서 전 종철 씨를 찾아 떠났을 때도 북쪽에 계시려니 했어요. 그런데……”
 “이북의 군관학교에 찾아 갔었지만 지주아들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했습니다. 그때 나는 실망하고 월남을 결심했던 겁니다. 북쪽사회는 나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나는 좌익사상에 기울어져 있습니다만 그들이 받아주지 않으니 별다른 수가 없군요.”
 “철저하게 자아비판을 하고 사상개조를 한다면 공화국정부의 이해와 용서를 받을 지도 모르잖아요.”
 “그러자니 지은 죄가 없군요. 죄도 없이 스스로를 매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지주 아버지를 가지게 된 게 어디 내 잘못입니까. 그것이 어찌 나의 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내가 뭘 자아비판하고 사상개조를 하란 말입니까. 차라리 난 사상이라는 이념의 포로에서 해방되어 일상의 노예가 되고 싶습니다. 다만 나 때문에 향란 씨를 고생시킨 본의 아닌 죄책감에 가슴이 아플 따름입니다.”
 “영호를 지키지 못한 건 제 잘못이에요.”
 향란은 옷고름을 눈가에 가져갔다. 차마 종수가 자신을 능욕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종수 때문에 영호가 죽었다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자신의 존재로 형제간의 의를 벌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종수는 이미 저승사람이 되지 않았는가. 죽은 사람의 죄를 끄집어  낸다는 것도 산사람으로서는 하지 못할 잔인한 행위라고 생각되었다. 어쨌든 그는 한 달 가까이 살을 섞고 살았던 남자였다. 사랑은 말고라도 미운정이 든 것만은 사실이다.
 “여자 몸으로 홀로 조선 8도를 방황하며 나를 찾느라고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군인열차에서 어린애를 분만하면서 얼마나 나를 원망했습니까. 모두가 네 탓입니다.”
 “아니에요. 제가 부덕한 탓이지요.”
 향란은 마음속으로 종수와의 관계를 생각하며 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한편 종철은 마음속으로 미령이와 있었던 정사들을 회억하며 향란에게 죄스런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너무나 먼 길을 돌아서, 너무나도 오랜 시간을 지나서 만난 것이다. 헤어졌던 기나긴 세월 속에서 그들은 저마다 서로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본의가 아니었다. 그들이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종철이게는 향란이었고 향란에게는 종철이뿐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본의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동거까지 하게 되었던가?
 “향란 씨. 향란 씨도 월북하지 말고 나랑 함께 이남에서 살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지 말고 저와 함께 이북에 가서 살아요.”
 향란이도 물러서려고 하지 않는다.
 “북에 가면 난 죽는 거나 다름없다니까요. 만주에 있을 때 소문난 항일투사인 김 장군의 소개장까지 가지고 평양군관학교를 찾아갔지만 쫓겨났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오죽했으면 사회주의사상에 물들었던 내가 월남을 결심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남한에서 삽시다.”
 “저 역시 종철 씨 경우와 다를 바 없어요. 제가 노동당원이고 여맹위원장이라는 사실을 벌써 잊으셨나요. 그런 저를 국군이나 미군이 가만둘 리 있겠어요. 빨갱이 년이라고 맨 먼저 잡아 죽일 거예요. 남한에 남는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할 뿐이에요.”
 향란은 어느새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먹이기 시작했다. 골짜기에 두텁게 깔린 어둠 속에서 이름 모를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리며 깊은 정적을 노크할 뿐 삼라만상은 잠잠했다.
 “그럼 우린 어떡해야 되는 겁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막달 잡은 배를 부둥켜안고 종철 씨를 찾아 떠났어요. 러시아군인들을 태운 군인열차 안에서 해산하고 혼자서 아기를 기르며 종철 씨를 기다렸어요. 그런데 정작 이렇게 만나니 헤어져야 하는군요.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예요. 무엇 때문에 우리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나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흑흑 오열했다. 종철은 그녀에게로 다가와 세차게 오열하고 있는 상체를 품안에 당겨 안았다.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쭈르륵 흘러내렸다.
 “세상에는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원망스럽습니다.”
 “우린 결국 갈라질 수밖에 없는 건가요? 저는 북으로 가고 종철 씬 남으로 가고 뿔뿔이 헤어져야만 하나요. 왜요? 무엇 때문인가요? 누가 우릴 갈라놓는 거예요!”
 향란은 종철의 품을 눈물로 적시며 세차게 몸부림쳤다.
 “전쟁이 우릴 갈라놓는 거죠.”
 “전쟁이 아니라 이념과 체제겠지요. 빨갱이요, 반동이요 하는 이념싸움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럼 우린 뭐가 되죠? 서로 사랑하는 사이면서도 동시에 이념의 적수란 말인가요?”
 “아마 그렇게 되겠지요.”
 “되지도 않을 소리예요. 우리가 어떻게 적이 될 수 있나요. 사랑하는 사람끼리 말이에요. 우리 사이엔 비록 잃어버리긴 했지만 2세까지 있었잖아요.”
 “그렇지만 지금도 향란 씬 나를 이북으로 데리고 가려하고 난 향란 씰 이남에 붙잡아두고 싶어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건 우리가 서로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사이라는 걸 증명하는 겁니다.……”
 “참, 말을 하다 보니 제가 깜박했네요.”
 향란은 종철의 품에서 떨어져 나오며 눈물을 훔친다.
 “오빠가 돌아오기 전에 어서 이곳을 떠나세요. 다시는 기회가 없을 지도 모르니 주저하지 말고, 어서요.”
 “그럼 향란 씨는요?”
 “제 걱정은 마세요. 오빠가 있잖아요.”
 “오빠가 향란 씰 가만두겠습니까?”
 “동생인데 죽이기까지야 하겠어요.”
 “전쟁이라는 건 부모형제도 모르는 잔인한 것입니다.”
 “글쎄 제 걱정은 말고 어서 떠나시라니까요. 오빠가 돌아올 때가 되었어요.”
 향란은 종철의 등을 마구 떠밀었다.
 종철은 몇 걸음 옮겨놓다가 다시 돌아서더니 그녀한테로 달려와 향란을 와락 품에 껴안았다.
 “향란 씨, 우리 언제면 또 만날까요?”
 “전쟁이 끝나고 통일이 되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통일이 가능할까요?”
 “오빠는 인민군이 반드시 다시 돌아와 남반부를 해방시킬 거라고 했어요.”
 “어느 쪽이 이기던지 아무튼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그때까지 꼭 살아계셔야 돼요.”
 “향란 씨도.”
 “그래요. 그럼 우리 그때 다시 만나요.”
 향란은 갈라지기 아쉬워하는 종철의 가슴을 품에서 떠밀어냈다. 종철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향란은 나무 밑에 등을 기대고 돌아앉았다. 그리고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느라 옷고름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려 두 볼을 적셨다.
 “종철 씨! 종철 씨!”
 하고 속으로 수천 번이고 되뇌어보았다. 한동안 지난 다음 능선으로 올라가 보니 종철이가 사라진 깊은 계곡엔 우거진 숲과 짙은 어둠과 끝없는 적막만 두텁게 깔려있을 뿐이었다.
 “종철 씨!”
 그녀는 또다시 오열하며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만난 분인가. 인젠 다시 만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국군이나 미군에게 빨갱이로 잡혀 도륙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이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던 걸 하는 후회까지 들었다.
 향란은 그렇게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다가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
 “일어나, 어서 일어나지 못해?”
 느닷없이 덕구가 발길로 엉덩이를 내지르는 바람에 향란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덕구의 손에는 자그마한 쌀자루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우묵한 눈길에서는 험상궂은 독기가 번뜩거렸다.
 “그 새낀 어디 갔어?”
 “누구 말이에요?”
 향란은 이실직고할 수도 없는지라 에둘러대려고 했다.
 “누군 누구야. 종철이 새끼 말이지.”
 “몰라요. 전 자다가……”
 “나발 불지 마! 그놈이 귀신이라고 저절로 나무에 비끄러맨 결박을 풀어. 분명 네년이 풀어 준거지. 도망치라고. 바른 대로 대봐.”
 “아니라니까요. 전 정말 몰라요.”
 “망할 년! 노동당원이란 년이 반동새끼를 풀어줘! 왜 너도 반동 년이 되고 싶어?”
 더 이상 속일 수도 속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향란은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요. 내가 도망치라고 풀어주었어요. 종철 씬 나에겐 반동이 아니라 영호아빠이고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걸 어떻게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있어요.”
 “그 입 닥쳐! 빌어먹을 년아! 죽여 버리기 전에!”
 덕구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어깨에 멨던 MI소총을 내리워 그녀의 가슴에 겨누었다. 무섭게 부릅뜬 그의 두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펄펄 일고 있었다. 그러나 향란은 두렵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까지 상실한 이 마당에 그녀는 인제는 산다는 것조차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살고 싶지도 않으니 죽이고 싶으면 죽여요.”
 “뭐라고? 이년이 정말 환장을 했나! 그놈은 큰형님을 죽인 원수의 동생이란 말이야. 알겠어. 지주아들이구 악질경찰의 동생인 반동새끼란 말이야. 인민의 적을 풀어주다니. 넌 당과 인민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어!”
 “우린 뭐 사람을 죽이지 않았나요. 종철 씨 아버지, 종수와 그 마누라까지도 죽였잖아요. 생매장까지……”
 “이, 이런 발칙한 년 봤어! 우리가 죄 없는 사람을 죽였어? 인민의 적들을 처단한 거지.”
 향란은 입을 다물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구해주었다곤 하지만 당과 인민 앞에 죄를 지은 건 사실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죄를 지었으니 이젠 처벌받을 일만 남았다. 그녀는 잠자코 고개를 숙인 채 오빠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종철 씨가 어디까지 갔을까?  아마 지금쯤은 위험구역을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겠지.
 “그놈이 달아난 지 얼마나 돼?”
 “글쎄요. 자다보니……”
 “망할 년 같으니!”
 솥뚜껑 같이 투박한 손바닥이 그녀의 따귀에 불이 번쩍 나게 날아들었다. 그 충격이 어찌나 강한지 향란은 옆으로 저만큼 뿌려나가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덕구는 종철의 종적을 추격할 셈인지 황망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향란은 속으로 제발 종철 씨가 무사하기를 빌었다.
 덕구는 날이 훤히 밝아서야 돌아왔다.
 “네년은 우리 최씨집안 종자가 아니야!”
 덕구는 나무 밑에 쪼크리고 앉아 있는 향란의 등을 발길로 짓밟았다. 향란은 맥없이 땅바닥에 폭삭 꼬꾸라졌다. 얼굴에 묻은 흙과 검불을 털고 다시 고개를 쳐들었을 때는 이미 덕구는 그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그녀를 홀로 산중에 버리고 가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향란은 그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빠의 불같은 성미에 죽이지 않은 것만도 최대의 자비를 베푼 것이었다. 혈육이고 동생이라는 인연 때문에 그만큼이라도 용서를 받은 것이었다.
 “오빠, 미안해!”
 오빠의 믿음에 배신감을 안겨준 자신이 미워지기도 했다. 연인으로서도 자격 있고 동생으로서도 자격 있고 싶었지만 양자택일이어서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러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디선가에서 웅글진 포성이 쿵∼쿵∼ 들려왔다. 미군과 국군이 전원 도착하여 38선이 완전히 봉쇄되기 전에 넘어가야만 했다. 안 그러면 여기서 잡혀 죽을지도 모른다. 발바닥에 물집에 생겨 걷지 못하면 기어서라도, 길 수 없으면 뒹굴어서라도 북으로 가야만 했다. 향란은 천근같이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그제야 그녀는 눈결에 옆에 놓여 있는 쌀자루를 발견했다.
 “오빠!”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오빠가 덜어놓고 간 것이 분명했다. 혈육이란 게 뭔지? 울면서 자루를 헤쳐 보니 삶은 고구마 두 개와 보리쌀 몇 줌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우선 고구마를 꺼내어 껍질을 벗길 새도 없이 게걸스레 먹어대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개를 다 먹어치우고 나니 기운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이만한 힘이라면 100리라도 거뜬히 걸을 자신이 생겼다. 향란은 주위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꺾어 지팡이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북쪽을 바라고 발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이젠 밤이고 낮이고 가릴 경황이 못 되었다.

 여동생 향란이와 갈라진 덕구는 밤낮으로 걸어서 며칠 만에 38선을 넘었다. 거기서 임시로 편성된 소부대를 인솔하고 계속 북상했다. 산줄기를 타고 강행군을 하는데다 통신망이나 부대상호간 연락도 끊어져 전황의 흐름이나 상황을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행군, 행군뿐이었다.
 덕구는 길을 걸으면서도 소백산 수림 속에 홀로 두고 온 여동생 향란의 모습이 걸음마다 밟혀 저도 모르게 버럭버럭 화를 내곤 했다. 대원들은 모두 성미가 괴팍한 그의 눈치만 흘금흘금 살피며 두려워했다.
 “빌어먹을 년! 그런 년은 죽어도 싸!”
 느닷없이 가래침을 내뱉기도 했다. 그러면 대원들은 슬금슬금 그의 곁을 피해 달아났다. 눈에 거슬리는 일만 있으면 권총을 뽑아들고 죽여 버린다고 위협했음으로 언제, 어떤 봉변이 떨어질지 몰라 대원들은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때로는 여자 혼자 산중에서 헤매다가 적들에게 잡혀 능욕을 당하지나 않았는지, 빨갱이라고 처참하게 처형되지나 않았는지 걱정되기도 했다. 그냥 데리고 올라올걸, 하는 후회도 없지 않았다. 후회가 누적될수록 덕구는 괜히 죄 없는 옆 사람들에게 짜증을 버럭버럭 긁어내군 했다.
 “이 자식아! 종아리가 부러졌어? 좀 빨랑빨랑 걸어!”
 덕구는 군사지도를 꺼내보고서야 자신이 이끄는 소부대가 숙천 부근에까지 이르렀음을 확인했다. 그곳까지는 별 탈 없이 무사히 도착한 셈이다. 그러나 숙천에 이르자 뜻하지 않던 불리한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후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그날 숙천과 순천상공에서는 유엔군의 낙하산투하작전이 수행되고 있었다.
 10월 20일. 미 제187공수연대는 1대대와 3대대를 경의선상의 평양 북쪽 40km지점에 위치한, 주공지역인 숙천에 낙하시키고 숙천으로부터 동쪽으로 20km떨어진 순천에 2대대를 낙하시킬 계획이었다. 187연대본부와 1대대는 오후 2시부터 낙하작전을 개시했다. c-119와 c-47수송기 113대에 편승한 1대대 병력과 74톤이라는 방대한 규모의 연대편제 장비도 일제히 투하되었다. 투하된 1대대는 숙천 동쪽 97고지를 신속하게 점령하고 연대지휘소를 설치했으며 이어 북쪽에 위치한 104고지를 점령하여 인민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뒤를 이어 낙하한 3대대는 숙천 남쪽 3km지점의 구릉지대를 점령하여 그곳을 경과하는 도로와 철도를 차단했다. 10월 20일부터 21일까지 숙천과 순천 일대에 투하된 병력은 낙하산병 4600여명과 105mm 곡사포 12문, 지프 39대, 3/4톤 트럭 4대, 90mm 대공포와 탄약, 연료, 전투식량 등 각종 보급품 584톤도 함께 투하되었다. 그 번 투하작전에서 인민군은 3천여 명이나 포로가 되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덕구가 인솔하는 소부대는 계곡이 그리 깊지 않은 자그마한 골짜기를 행군하고 있었다. 나무숲도 별로 우거지지 않아 거의 노출된 상태였다. 대원은 10여 명, 여러 부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라 서로 이름도, 얼굴도 모르고 있었다. 휴대한 무기는 물론이고 군복도 각양각색이었다. 인민군 복장, 국군 복장, 사민 복장뿐만 아니라 미군 복장에다 절반은 인민군 복장 절반은 국군이나 미군 복장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박 중위는 완전한 미군 복장에 철모까지 쓰고 있었다. 그런데 옷이 커서 우스꽝스러웠다.
 갑자기 하늘에서 비행기의 동음이 들려오자 덕구는 소부대원들을 구릉 위의 관목숲 속에 은폐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덕구는 나름대로 공습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잠간 사이에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으며 백여 대의 수송기들이 나타났다. 모두 넋을 잃고 숲 속에 몸을 은신한 채 하늘공중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집채만한 윤선이나 고래 떼처럼 시커먼 복부를 드러낸 수송기들의 엔진음이 우레같이 하늘땅을 진동했다. 이어 수송기들의 문이 열리며 수백, 수천 개의 낙하산병들과 군수품들을 매단 낙하산들이 투하되기 시작했다. 햇빛마저 가려지며 주위가 삽시에 어두컴컴해졌다.
 “이놈들이 인민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려는 속셈이구나.”
 덕구는 이를 부드득 갈았지만 별다른 대응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늘공중에서 낙하산을 활짝 펼친 채 매어달린 미군낙하산병들의 모습이 공포감보다는 서커스단공연처럼 재미있게 보였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중위 동무. 우리래 어드렇게 해야 하갔시오? 여기서 저 놈들이래 내려와 설라무니 듁여두기를 기달려사 하갔슴메?”
 미군 복장을 한 박 중위가 덕구 옆으로 엉금엉금 기어와 중얼거렸다. 자꾸만 철모가 아래로 처져 내려와 그러잖아도 주먹만한 얼굴을 가렸다. 그럴 때마다 박 중위는 짜증을 내며 철모를 치켜 올리곤 했다. 덕구는 말없이 주위의 지형을 둘러보았다. 사방 어디고 미군낙하산병들 천지였다. 벌써 그 일부는 땅에 착륙하며 몸에서 낙하산을 풀어내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꼼짝 못하고 죽고 마는가!
 “빠져나갈 곳이 없잖우. 피 한 방울 남을 때까지 싸우는 수밖에.”
 대오를 정비한 한 떼의 미군이 덕구가 은폐해 있는 구릉지대로 접근해왔다.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형을 점령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허리를 구부정한 채 카빈총을 들고 산병선을 유지하며 조심조심 다가왔다.
 “사격준비!”
 덕구는 목소리를 낮추어 명령을 내렸다. 진퇴양난의 궁지에 몰린 지금 상황에서는 과감히 돌격하여 포위를 뚫고 나가는 길밖에 다른 방도는 없었다. 그는 권총으로 맨 앞에서 올라오는 미군을 겨누고 있다가 사격권내에 진입하자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총성과 함께 적병은 다리부위가 명중되었는지 무릎을 털썩 꿇고 주저앉더니 정강이를 부여안고 뒤로 벌렁 뻐드러졌다. 그러자 소부대원들의 일제사격이 시작되었다.
 느닷없이 매복에 걸려든 미군은 잠시 주춤하더니 대응사격을 펼치기 시작했다. 적탄이 빗발치듯 구릉 위로 날아올라왔다. 잠시 뒤에는 뒤쪽과 양 측면에서도 미군의 협공이 시도되었다. 적탄에 쓰러지는 병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덕구의 옆에 엎드려 자동총사격을 하던 박 중위도 가슴에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중위 동무. 죽어선 안 되오. 함께 살아서……”
 “대대장 동지. 내래 아무래도……”
 말도 몇 마디 못한 채 맥없이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적의 강력한 집중화력 앞에서 전사자가 속출하자 나머지 일여덟 명의 대원들은 하나 둘 총을 버리고 적에게 투항하기 시작했다.
 “안 돼. 죽으면 죽었지 투항하면 안 돼!”
 덕구는 목이 터지라고 외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 이 덕구가 오늘 여기서 적의 포로가 된단 말인가. 그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안 돼. 죽으면 죽었지 비굴하게 포로는 될 수 없어. 덕구의 눈길은 느닷없이 옆에 쓰러져있는 박 중위의 시체에로 쏠렸다. 잠시 주저하다가 적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몸에서 미군 복장을 벗겨냈다. 눈을 부릅뜬 박 중위가 그를 쏘아보고 있는 것만 같아 슬그머니 외면했다. 군복을 벗겨 입고 군화를 벗겨 신고 철모까지 벗겨 썼다. 그런 다음 관목 숲을 기고 뒹굴며 적과의 거리가 비교적 먼 좌측방향으로 빠져나갔다. 피로 붉게 물든 군복저고리에 흙이 묻으며 흔적이 저절로 지워졌다.
 죽은 듯이 숲 속에 숨어 있다가 미군이 가까이 접근해오자 그들 속에 슬쩍 끼어들었다. 워낙 키가 크고 깡마른데다 굶주림으로 신체가 허약해진 탓으로 수척한 얼굴이며 칼날 같은 콧날이며 움푹 꺼진 눈 때문에 누가 보아도 서양사람 같아 보였다. 누가 말을 건네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껌을 질근질근 씹으며 장난을 치듯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들메를 매는 척하고 멈췄다가 뒤로 처진 그는 주위에 더는 미군장병들이 보이지 않자 북쪽편의 숲을 향해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뒤를 추격하는 사람은 없어 미군의 눈을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
 산줄기를 타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걸었다. 어느 날 지치고 굶주린 나머지 숲 속에서 잠이 들었던 그는 갑자기 주위에서 떠들썩한 소리에 잠을 깼다. 수많은 군인들이 그를 에워싸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깜짝 놀라 일어나보니 그들은 적군이 아니라 중국군이었다. 중국군은 그가 땅바닥에서 벌떡 일어나자 그를 포위한 채 총부리를 가슴에 겨누고 경계태세를 취했다.
 “동지들, 오햅니다. 전 인민군대입니다.”
 덕구는 유창한 중국말을 구사하며 머리에 뒤집어쓴 철모를 벗어던졌다. 까만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중국인민해방군 시절에 익혀둔 중국어가 은을 낸 것이다.
 지휘관인 듯한, 몸집이 웅장한 군인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어느 부대인가?”
 “인민군 6사단 13연대소속 중위 대대장입니다. 원래는 중국인민해방군 166사 496연대에 복무했습니다. 동지들, 정말 고맙습니다.”
 덕구는 지휘관의 손을 덥석 부여잡고 감격의 눈물을 줄줄 흘렸다.
 “우린 중국인민지원군부대요. 우리 중국인민지원군은 형제적인 조선인민을 지원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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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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