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불타는 반도
장혜영
5장 불행한 사람들
1
월요일.
준호는 명심해서 아침 일찍 기침했다. 오늘은 등교를 못해도, 「6. 25참전자 실록」집필을 미루더라도 특별히 하루 말미를 내어 진옥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안 그러면 진옥의 원망이 두렵다기보다 그녀의 사랑을 배신하고 마지막 한 가닥의 믿음까지 저버렸다는 자괴감에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9월도 막가는 계절이어서 그런지 낮에는 아직도 여름이 떠나가며 남긴 더위가 마지막으로 진멸하며 기온을 상승시켰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싸늘하다.
금방 씻고 옷을 갈아입는데 옆방에서 지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일어났어? 어서 건너와. 된장찌개 끓였어.”
늦잠을 자지 않으면 하루 종일 낮잠을 자던 지은이가 요샌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조반을 짓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술과 담배도 많이 줄였다. 그녀의 방탕하던 생활이 질서가 잡히며 정상적 궤도에로 복귀하는걸 보며 준호는 진심으로 기뻤다. 역시 사랑은 위대한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의 주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자신에게 책임감을 느낀다. 그녀는 소박당하고 버림받아 포기했던 자신을 되찾고 생명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했으며 그래서 정규적인 관리경영에 착수한 것이다.
“냄새가 죽이는데……”
준호는 지은의 방에 들어서며 방 안에 그윽하게 풍기는 토장냄새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정식 동거를 시작한 명철은 준호만 나타나면 언제나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
“많이 들어. 오빤 된장찌개 좋아하잖아.”
“좋다마다. 하루 세 끼라도 싫단 말 안 할 거야. 아무래도 난 시골티를 벗지 못하려나봐.”
금방 숟가락을 들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된장찌개를 한 술 떠서 입에 넣으려는데 느닷없이 휴대폰 벨소리가 띠리리루룽, 띠리리루룽, 울렸다. 준호는 입가로 가져가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
“XX국제텔레콤입니다. 중국에 사시는 최덕구님께서 전화를 주셨는데 받으시겠습니까?”
안내도우미의 상냥한 음성이 수화기에서 들렸다.
“누구라고요?”
“최덕구님이십니다. 먼저 목소리를 확인하시고 받으시려면 1번을, 취소는 별표를 눌러주십시오.”
“네? 최덕구요……”
“준호냐? 할아비다.”
수화기에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국 초청장을 만들어 보낸 지 오랜데 이제야 중국 측 출국수속이 끝난 모양이다.
“네, 할아버지, 안녕하십니까?”
“그래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 넌 무사하냐?”
“네.”
“네 할미가 방금 서울 가는 비행기에 올랐니라. 11시 30분쯤이면 인천공항에 도착할 거라고 하더라. 시간을 맞춰 마중 나가거라.”
“그래요. 그런데 할아버진 왜 함께 떠나지 않으셨나요?”
“가고 싶지 않아서 그만뒀다.”
“할머니보다는 할아버지를 나오시라고 수속해 보냈는데요.”
“숙부네 식구도 다 죽고 친척 하나 없는데 누굴 만나려고 그곳엘 가겠냐?”
“그래도 할아버지의 고향이 아닙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머닌 더구나 한국에 오실 일이 없으시잖아요.”
“모른다. 그렇게 가지 말라고 해도 기를 쓰고 가겠다니 할 수 있니. 가고 싶으면 혼자 가라 했더니 혼자서라도 간다고 나서더구나. 아무튼 마중은 나가 보거라. 초행길이라 길도 모를 텐데……”
손자 앞이라 감정을 자제해서 그렇지 할아버지의 퉁명스러운 어투로 미루어 할머니의 한국행에 불만이 많으신 게 분며왰다. 할머니가 한국에 와서 만날 사람은 한종수 뿐이었으니 기분이 불쾌할 만도 했다. 할아버지가 70년 만에 고향땅을 다녀 갈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 것도 한종수가 보기 싫어서였을 것이니 말이다. 한국이 잘 살고 있다는 소문은 할아버지도 모르진 않는다. 못사는 중국 조선족의 초라하고 남루한 모습을 보인다는 건 곧 굴욕이요 할아버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무엇 때문에 한사코 한국행을 결심했을까? 할아버지의 불만과 부부감정의 파열을 감수하면서까지 한국행을 단행했던 무슨 이유라도 있었을까? 한종수와의 옛정을 잊지 못해서? 그럴 리가 없다. 할머니가 종수에게 첩실로 들어간 것은 자원이 아니라 강박에 의한 것이라고 준호는 알고 있었다. 할머니 곱단이가 사랑한 사람은 할아버지 최덕구였다. 그렇다면 할머니의 한국행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참, 그러고 보니 불쑥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아버지 최영식의 구속사건이었다. 당신의 아들이 구속되어 중국으로 강제 송환된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 달려 나오시는 걸까? 그러나 할머니가 나오신다고 무엇이 달라지랴. 한국에 2년씩 체류하면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준호로써도 속수무책인데. 그저 노파심에, 자식 걱정하는 모성애에 떠밀려 나오시는 건지도 모른다.
“무슨 전환데?”
지은은 준호의 모든 일에 대해 궁금해 했다.
“응. 할머니가 오늘 한국에 도착하신대.”
“그래. 오빠 기쁘겠다. 나도 같이 공항에 마중 나갈까?”
“됐어. 혼자 가도 돼.”
오늘도 진옥이와의 약속은 또 밀려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건지며 조반식사를 했다. 무엇 때문인지 진옥의 부탁은 차일피일 미루게만 되니 이상했다. 모처럼 명심하고 해주려면 이렇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곤 했다. 진옥이한테 미안했다.
“다녀올게.”
준호는 한마디 남기고는 방에서 나왔다. 택시는 요금이 너무 아름차 할머닐 모시고 올 때나 타기로 하고 지하철역으로 갔다.
신도림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느라 지하도를 걸으면서 준호는 할머니의 도래에 웬일인지 불안한 예감이 앞섰다. 할아버지의 만류와 권고를 외면한 할머니의 고집이 심상치가 않았던 것이다. 준호는 한 번도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거나 토를 다는 걸 본적이 없었다. 그만큼 할머니는 남편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현처였다. 그런데 그런 할머니의 신조가 그 자신에 의해 깨트려진 것이다. 거기엔 형체는 보이지 않지만 윤곽만은 분명한 어떤 불길한 화근이 엿보였다.
김포공항에서 이사한 지 얼마 안 되는 인천국제공항은 웅장하고 화려했다. 바가지요금을 강요하는 택시나 찾기 힘든 버스정류장 때문에 교통 불편이 존재하긴 했지만 공항시설은 세계 선진국 수준이어서 다시 한 번 한국의 발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베이징 발 인천 행 여객기는 정시에 인천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준호는 출구에 서서 세관검사를 마치고 나오는 손님들을 일일이 살펴보았다. 할머니는 맨 마지막에야 출구에 나타났다. 70고령을 넘은 할머니는 허리가 구부정했고 머리카락도 서리가 하얗게 내려있었다. 공항아가씨가 바퀴가 달린 여행용가방을 끌고 할머니를 부축하여 출구를 나오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물처럼 주름살이 얼기설기 그어진 얼굴을 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채 대기실 쪽을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할머니, 여깁니다.”
준호는 할머니한테로 달려가 허리 굽혀 인사를 드렸다.
“고맙습니다.”
할머니를 부축하여 나온 공항아가씨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시죠?”
준호는 가방을 받아들고 할머니를 부축하여 공항에서 나왔다.
할머니는 누구를 기다린 모양 연신 주변의 사람들을 두리번거린다.
“괜찮다. 그런데 아범은?”
할머니가 찾는 사람은 분명 준호의 아버지 최영식이었다.
“할머니, 거긴 일단 구속되면 마음대로 바깥출입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럼 감옥이냐? 때리기도 하고?”
“때리진 않고요.”
“콩밥을 준다던?”
“식사도 제대로 공급되지만, 다만……”
“중국으로 돌려보낸다는 거지?”
칠순이 넘은 고령치고는 비상한 판단력이다.
“네.”
“어째서 신고 당했다고?”
전화로 상세히 말씀드렸건만 할머니는 재확인의 필요를 느낀 모양인지 꼬치꼬치 캐묻는다.
“체불임금 아니, 밀린 월급과 손가락을 상한 보상금을 받으려고 회사 사장을 찾아갔다가 구타당하셨어요. 화가 나서 그 사람들과 대항했다고 회사 사람들이 아버질 경찰에 신고했나 봐요.”
“월급 안 주고 배상 안 한 게 아범 탓이냐? 그리고 손찌검을 먼저 한 것도 회사 놈들이라면서.”
“그렇지만 아버진 불법체류자여서……”
“한국에 중국 조선족치고 불법체류하지 않는 사람이 몇이라더냐? 그 사람들이 다 죄인이란 말이냐.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 말로는 고국이요 같은 핏줄을 나눈 동포라면서 고만한 일도 봐 주지 못한다니.”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을 줄 알고 준호는 입을 다물고 택시정류장으로 걸어갔다. 할머니의 법은 과학적인 법학이론에 근거한 법조문이 아니라 풋풋한 인정이었다. 인정에 어긋나는 법은 법이 아니었다.
택시가 영종대교를 건너 신 공항고속도로에 들어서자 할머니는 그때까지 무겁게 지키고 있던 침묵을 깨트리며 입을 열었다.
“아범을 면회할 수야 있겠지?”
할머니는 한국이 초행길인데도 그래서 할머니에게는 놀랍고 신기하기만 할 황홀한 바깥풍경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시종 아들 걱정에만 골똘히 잠겨 있었다.
“아마 면회는 가능할 겁니다. 저도 두 번인가 뵜습니다.”
“아범이 한국을 그렇게 욕했다면서? 한국 놈들을 개보다 못한 놈들이라고. 돈밖에 모르는 짐승 같은 놈들이라고. 양심도 인정도 없는 놈들이라고 욕했다면서.”
“예. 그 때문에 더구나 회사 사람들의 불만을 자아내 수모를 당한 것 같습니다.”
준호는 할머니가 그 말을 상기시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상기만 시켜놓고는 다시 화제는 비워두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시더니 이어 무거운 한숨을 후, 토해냈다.
“그런데 네 아비가 뭘 몰라서 그런 거야.”
“뭘 모르다니요?”
“조금만 더 기다려라. 조만간 알게 될 거다. 이 할미가 산 설고 물선 이 한국 땅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한국 땅에 뭘 하러 왔겠냐. 그래 아범은 꼭 중국으로 돌려보낸다던?”
“아마 그럴 겁니다. 출입국관리소로 넘어갔으니까요.”
“안 돌아가게 하는 방법은 없고?”
“네. 법에 따른 절차입니다.”
“법도 사람이 만들어내는 거란다. 두고봐라만 네 아빈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이 할미가 장담한다.”
“네?!”
준호는 그야말로 소스라치게 경악했다. 칠순을 넘기신 고령의 할머니가, 무식한 시골농부인 할머니가, 한국 땅을 난생처음 밟아보는 할머니가 준호로서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겠다는 확신에 누군들 놀라지 않겠는가. 그럼 2년씩이나 한국에 체류하면서 서울의 명문대학에서 박사공부를 하고 있는 준호는 뭐가 되는가? 할머니의 진지한 표정을 봐서는 결코 실없는 소리 같지는 않았다.
택시가 경인도로를 벗어나 남부순환도로로 진입하여 안양교를 건넜을 때에야 할머니는 드디어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그 사이 할머니가 지키고 있던 침묵이 숨 막히고 지루하게 느껴졌던 건 할머니의 얼굴표정과 거느린 분위기가 너무나 심각하고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여기 한종수라는 사람이 있다고 그랬지?”
“네?”
“강촌마을에서 살던 지주 한상권의 맏아들 말이다.”
드디어 할머니는 한국행의 진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왜 그 말이 진작 나오지 않나 궁금하기 짝이 없었던 준호다. 그러나 정작 고대하던 말이 할머니의 입을 통해서 밖으로 흘러 나왔을 때 준호는 핵폭탄이 폭발한 것 같은 커다란 충격을 느꼈다.
“네.”
그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기까지 했다. 어쩌면 세월의 먼지 속에 묻혀 있던 어떤 역사의 진면모가 바야흐로 그 원형을 드러내려고 꿈틀거리는 듯도 싶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분은 왜 찾으십니까?”
“만나게 해줄 수 있겠니?”
“글쎄요. 그분 태도가 어떠실지?”
“서울서 산다지?”
“일산이라는 곳에 사시는데요. 서울이나 마찬가지에요.”
“내가 왔다고, 곱단이가 서울에 왔다고 전해만 주거라.”
“네. 그거야 어려울 것 없지만……”
사실 준호는 한종수가 할머니의 청을 거절할 거라는 우려가 앞섰다. 반드시 응할 것이라는 할머니의 확신에 찬 기대와 믿음이 한종수의 냉담한 거절 한마디로 허물어지고 또 그 때문에 할머니의 한국행 꿈이 불행한 악몽으로 끝날까 미리부터 두려워졌다. 최덕구의 손자라는 이유 하나로 손녀딸과의 접근에 반기를 든 한종수가 아닌가. 그런 사람이 원수의 아내인 할머니를 만나 줄까? 어림도 없는 소리다. 그러나 할머니의 평생소원이 옛 정인을 만나는 것이라면 손자로써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50년 전 과거의 일이고 첩실이긴 하지만 속살을 부비고 살았던 부부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할머니가 한종수를 청할 명분이 되기에는 충분할 것 같았다.
지은인 할머니를 친할머니처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 사이 시장에 나가서 풍성한 찬거리를 사다가 지지고 볶고 튀기고 하여 푸짐한 점심상을 차려놓고 준호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색시는 우리 준호하고 어떤 사인가?”
노인들은 정에 약하다. 지은이가 친손녀처럼 따뜻하게 반기자 금방 호감이 가는 모양이다.
“오빠예요.”
“오빠라니? 아니 준호야. 너한테 언제 이런 예쁜 동생이 있었냐? 가만 있자. 그럼 촌수가 어떻게 되는 거니?”
할머니가 깜짝 놀라며 정식으로 족보를 캐려 들자 지은은 노인과 실언했음을 깨닫고 급급히 말을 정정했다. 고정한 노인들은 젊은이들의 깜짝쇼나 이해불능의 언행들에 늘 어리둥절해지게 마련이다.
“색신 시집갔나?”
“오래잖아 결혼할 거예요.”
“그래.”
못내 아쉬워하는 할머니는 심지어 실망의 표정까지 역력하다. 그새 벌써 지은이가 마음에 들어 은근히 손자며느리를 삼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노독에 피로해진 할머니는 식사가 끝나자 준호의 방으로 옮겨와 휴식을 취했다.
“그 사람한테는 연락을 해 보았냐?”
부탁을 한 지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채근이다. 준호는 워낙 내일쯤 유리한테 전화하려 했지만 할머니가 이다지도 간곡하게 부탁하자 더 지체할 수 없었다.
“네. 지금 연락드릴 테니 할머닌 걱정 마시고 주무세요.”
준호는 밖으로 나왔다. 할머니의 일 때문에 잠시나마 잊었던 유리가 기억의 뜰 안으로 사뿐 들어서며 방그레 웃었다. 태양이 두둥실 떠오르고 보름달이 둥실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꽃이 활짝 피어나고 물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마음은 가을 숲처럼 설레고 깊은 계곡으로 맑은 시내물이 졸졸졸 흘러내렸다. 호수공원에서 만났던 일, 공작산에서 폭우 내리는 하룻밤을 지냈던 일, 여관에서 함께 하룻밤을 보낸 일…… 이제 준호의 기억의 언덕에는 온통 유리에 대한 황홀한 화폭으로만 꽉 들어차 봄꽃처럼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
“유리 씨 준홉니다.”
“네. 준호 씨.”
“보고 싶었습니다.”
“저도요.”
“지금 어디 계시죠?”
“도서관이에요. 준호 씨가 오셨나 찾아보았지만……”
“중국에서 저희 할머니가 오셨습니다. 공항에 마중 나갔다 오느라고 학교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네 그러세요. 기쁘시겠어요.”
“부탁할게 있어서 전활 드렸습니다.”
“말씀하세요.”
“어려운 부탁이어서 말하기가……”
“우린 남이 아니잖아요.”
목소리가 가슴 속으로 잦아드는 걸 보니 유리의 얼굴이 수줍음에 붉게 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유리가 꽃송이라면 수줍음은 아침이슬이었다. 그렇게 잘 어울렸다.
“할머니께서 유리 씨 할아버지를 만나 뵙고 싶다며 저더러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하시는군요.”
“네 저희 할아버지를요? 그럼 할머닌 곱단이라던 그 분이시겠네요?”
“그렇습니다. 유리 씨도 아시다 시피 두 분은 전에……”
말하기가 거북하여 입을 다물었다. 유리도 한동안 대답을 비운다.
“부담이 된다면 제 부탁을 철회하겠습니다.”
“아니에요. 부담돼 그러는 게 아니라요 할아버지께서 만나주실까 그것이 걱정되었을 뿐이에요.”
“나도 같은 심정이었지만 할머니의 부탁이 워낙 간곡하셔서. 불가능한 상봉이라고 미리 예측하고 소개해달라는 부탁마저 거절한다면 손자 된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유리 씨께 전화 드렸습니다.”
“잘하셨어요. 제가 기회를 봐서 할아버지께 말씀드려 보겠어요.”
“고맙습니다.”
“절 남으로 보실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고요. 유리 씨가 보고 싶습니다.”
“사랑해요!”
“내가 해야 할 말인데. 난 언제나 이렇게 유머감각이 부족합니다. 매너도 없고.”
“전 그게 좋아요. 촐랑대지 않고 묵직한 이미지 말이에요. 그리고 무엇이 없다는 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무진장하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얼마든지 포용할 수 있는 그 여유와 넉넉함 말이에요. 그럼 나중에 또 뵙겠어요.”
통화가 끝났으나 준호는 한동안 휴대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무튼, 유리 씬 어디가 달라도 달라.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충분한 여자야.”
할머니는 그때까지도 주무시지 않고 멍하니 창문 밖을 내다보며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50년이라는 기나긴 과거에로 이르는 추억은 무겁고 깊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손자가 나타나기 바쁘게 통화내용부터 확인했다.
“그래 만나겠다고 하더냐?”
“아직은 좀 기다려야 될 것 같아요. 그분 손녀에게 부탁했으니까 곧 소식을 알려 줄 거예요. 피곤하실 텐데 눈 좀 붙이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시고……”
그제야 할머니는 이불 속에 누웠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4시가 넘었다. 진옥의 일은 다음날로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준호는 남은 시간 동안 「6. 25참전자 실록」 집필이나 하려고 컴퓨터 앞에 마주앉았다. 그러나 아무리 사고력을 집중해도 머릿속에 글줄의 내용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온통 할머니에 대한 생각만 가득했다.
할머니는 분명 한종수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덕구와 갈라놓고 강제로 첩실로 끌고 갔을 뿐만 아니라 동행시켜 달라는 그녀의 간청을 뿌리치고 홀로 월남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당신을 배신한 한종수를 찾아 한국으로 발걸음을 하셨다. 할아버지의 기분이 상할 걸 알았을 텐데도, 할아버지가 홧김에 이혼할 수도 있다는 위기를 몰랐을 리도 없었을 텐데도 기어이 한종수를 찾아 한국으로 나오셨다. 할아버지는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북경까지 동행하셨다가 할머니만 홀로 비행기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가셨을까. 게다가 종수는 월남하여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 물론 그 아내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곱단이를 잊고 배신한 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당신이 한종수를 직접 면대하여 가슴 속에 쌓인 원한을 풀려는 심산일까? 이런 저런 잡념이 사유의 궤도에 쌓이며 정상적인 논리적 심사숙고를 전개할 수가 없었다.
머리도 식힐 겸 밖으로 나와서 담배 한 대를 붙여 물었다. 어느새 해가 떨어지고 땅거미가 깃들기 시작했다. 장바구니를 들고 귀가하는 동네 아줌마들의 발걸음이 총총하다. 저녁 무렵이 되자 낮 동안 열을 낼까 싶던 더위가 금방 식으며 싸늘한 초가을 바람이 소슬하게 불어왔다. 가로수 잎들도 더러는 수분이 증발되어 바람에 스치며 사각사각 메마른 소리를 낸다. 벌써 가을이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다. 할머닌 인생의 가을이 아닌 겨울의 언덕에 올라서 있다. 그런데도 할머닌 가을에 묻어둔 무언가를 두터운 역사의 전설 속에서 파내며 때늦은 수확을 시도하고 있다. 그게 무얼까? 한종수의 존재는 과연 할머니의 가을인생을 묻어버린 겨울의 적설일까?
띠리리루룽- 띠리리루룽-
갑자기 호주머니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유리의 얼굴을 떠올리며 준호는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네 준호 씨 저 유리예요.”
“유리 씨.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됐나요?”
지금은 할머니보다 준호가 더 조급해진다. 할머니의 인생에도 가을이 있었다면, 수확할 무언가가 있었다면, 그런데도 때 이른 계절의 도래에 그 수확물을 차가운 눈 속에 묻어버릴 수밖에 없었다면 늦게나마 적설 속에서일망정 수확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할아버지께서 응대조차 안 하시네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우린 남이 아니라했잖아요.”
“시정할게요.”
수화기 안에서 그녀의 수줍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아직 기대를 버리지 말고 좀 더 기다려 보세요. 제가 한 번 더 말씀드리겠어요. 싫다고 딱 거절하지 않으신 걸로 봐선 희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잖아요.”
“글쎄요. 만나게 하실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그분들은 만나셔야 해요. 시작만 떼놓고 매듭을 짓지 못하셨잖아요. 그 많은 정의, 공식만 세워 놓고 답을 풀지 못했잖아요. 이제 그분들의 인생에 답을 써야 할 때가 되었어요. 아니 너무 늦은 거죠. 해답이 없는 공식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늦었지만 그분들의 인생 공식은 답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건 다행한 일이 아닐까요.”
“유리 씨의 표현은 너무나 적절합니다. 공식은 답을 구하기 위해 세운 겁니다. 할머니도 그걸 느낀 거죠. 인생은 결국 어떤 해답을 얻기 위한 하나의 공식에 불과한 건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또 공식은 과정입니다. 과정은 결말로 이어져야 합니다.”
절망은 면했다는 사실에 안도의 숨이 나갔다. 할머니를 위해서도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할머니가 깨어났을 때는 밤 10시도 넘은, 늦은 시간이었다. 준호는 할머니를 모시고 거리로 나갔다. 지은이와 명철이까지 불러갖고 부근의 뷔페에서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할머니는 고기를 드실 만큼 이도 튼튼했다.
“전화가 왔더냐?”
“네.”
“그래 뭐라더냐?”
“내일 아침에 확정한 대답이 있을 거래요.”
할머니의 얼굴은 기대가 허물어지는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인지 내내 어두웠다.
“분명 내가 왔다고, 강촌마을에 살던 곱단이가 왔다구 전달했냐?”
“네.”
할머니는 다시 입을 다무신다.
내일 소식이 올 때까지 다시는 입을 열지 않으실 듯 이 빠진 입을 꼭 다무셨다. 50여년을 기다려온 할머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을 기다리기가 초조해하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도 할머니는 잠들지 못한 채 베갯잇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먹였다. 준호도 덩달아 하룻밤을 뜬 눈으로 꼬박 새고 말았다. 할머니의 말 못하는 아픔이 감염되며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30년도 안 되는 경륜으로 50여년의 아픔을 앓으시는 할머니의 마음을 속속들이 헤아리기엔 아직 나이가 너무 어린 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아침녘에야 늦잠이 드셨다.
“오빠, 오늘은 할머니를 모시고 대공원으로 놀러가자.”
지은이가 벌써 조반상을 차려놓고 할머니를 모시러 준호의 방으로 건너왔다.
“오늘은 어디 가볼 곳이 있어.”
“어딜? 한국에 친척도 없으시다며.”
“그럴 일이 또 있어.”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인가?”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아직은 어찌 될지……”
띠리리루룽- 띠리리루룽-
전화벨이 울리자 준호는 하던 말을 중단하고 다급히 방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왔다.
“할아버지께서 오늘 만나보시겠다고 대답하셨어요!”
“정말입니까? 다행입니다. 모두 유리 씨 덕분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만나는 게 좋을까요?”
“중도지점 어디라도 좋다고 하셨어요. 종로에 제가 잘 아는 삼계탕집이 있거든요. 거기서 점심식사를 함께 드실 겸 만나는 게 어떨까요. 비린내가 없는 와룡이라는 닭을 소재로 인삼, 찹쌀, 대추, 검정깨, 율수, 호두, 잣 등 30여 가지 잡곡을 넣어 끓이는데 맛도 좋고 값도 싸요. 음식 맛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줄 수도 있고요.”
“그게 좋겠습니다. 그럼 몇 시에 만나는 거죠?”
“12시에 삼계탕 집에서 만나요.”
할머니는 그 소식을 들으시더니 아침식사도 거절하셨다.
“늦지 않겠니? 먼 곳이지? 기찰 타야 하니, 지하철을 타야 하니? 버스를 타면 안 되냐? 어서 떠나자꾸나.”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는 신을 신고 주방에 나와 서계신다. 너무 일찍이 가도 기다려야 했지만 할머니의 독촉에 못 이겨 결국은 집을 나서고 말았다.
약속장소인 「토속촌삼계탕」집은 종로구 체부동 중앙박물관 옆에 있었다. 5백석 규모의 전통 한옥양식의 음식점인데 점심때가 되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물밀듯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준호는 유리가 이미 전화로 예약해 놓은 아늑한 안방에 자리를 잡았다.
유리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나타난 것은 약속시간보다 10여분쯤 늦은 시간이었다.
“오셨습니까.”
준호가 밖에까지 나와 한종수에게 깍듯이 인사를 드렸지만 노인은 그를 거들떠 보지조차 않고 준호 옆을 스쳐지나 식당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이 분이 저의 할머니십니다. 그리고 이분은 유리 씨의 할아버지시고요.”
준호가 소개를 했지만 두 노인은 한동안 마주선 채 멍하니 굳어 있었다. 악수는 고사하고 인사 한마디 없이 서로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두 사람 다 얼굴에 경악과 당혹과 어색함이 감돌고 있었다.
“할머니, 앉으세요. 식사가 곧 들어올 거예요. 할아버님도……”
두 노인은 손자, 손녀의 권유를 수락해 착석하긴 했지만 여전히 입은 열지 않았다. 50년 세월을 인사 몇 마디나 안부 몇 마디로 체크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리석다고 생각되었던 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동안 쌓이고 썩고 녹 쓴 정과 한과 그리움과 저주를 무슨 말로 표현해야 좋을까 그들은 망설이고 있었다.
“왜 날 버리고 갔어요? 데리러 온다고 속이구선!”
드디어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말이 담고 있는 슬픔과 원한의 무게와 체적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을 만큼 노인의 얼굴표정은 담담했다. 울지도 않았고 눈가에 이슬 같은 것도 맺히지 않았다.
“미안해. 그땐 그럴 경황도 없었고, 38선이 막힐 줄 누가 알았어. 지금은 덕구 그놈과 산담시로……”
한종수는 말꼬리를 끊고 두 젊은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럼 두 분께서 말씀을 나누십시오. 식사를 곧 올려올게요.”
준호는 다급히 그의 눈길을 피해 밖으로 나왔다.
유리도 그의 뒤를 따라 나왔다.
다른 때 같으면 막았을 것이지만 오늘은 경황이 없는지 한종수는 “멀리 가지 마” 한마디 던졌을 뿐 두 사람 만의 만남을 묵인했다.
그들은 넓은 홀로 나와 다른 상을 잡고 앉았다.
“50년 동안 가슴에 묻어둔 말이 있을 텐데 정작 만나니 할 말이 없나 봐요.”
“무슨 말부터 했으면 좋을지 몰라 그러는 거죠.”
그들이 간간히 담소하며 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안방에서 한종수가 왁자하니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죠?”
유리가 먼저 놀라며 일어섰다. 그들은 식사를 하다 말고 다급히 안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준호할머니는 식탁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고 한종수는 목청을 높여 소리 지르며 허공중에 팔을 휭휭 내젓고 있었다. 삼계탕에는 누구도 숟가락조차 대지 않았다.
“할머니, 왜 이러세요?”
준호가 묻자 할머니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했다.
“네 아빈 최덕구의 아들이 아니라 이분의 아들이란다. 할민 영식이한테 제 아빌 찾아주려고 한국으로 온 거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야! 나한텐 그따위 아들이 없어!”
한종수는 버럭 언성을 높였다.
“내 속으로 설어 내가 낳은 앤데 내가 모르면 누가 알아요. 당신의 아들이 지금 어느 감옥엔가 신고 되어 잡혀 들어갔으니 아비인 당신이 나서서 구해주구려. 지금껏 그만큼 길러주었으면 난 어미가 할 소임을 다 했으니 이제부턴 영감이 그 앨 맡아야겠어요. 영감한테 호적을 올려 한국에서 살게 하던지 맘대로 하시구려.”
“되지도 않을 소리야. 공산당간부질을 30년이나 했다는 그런 빨갱이가 내 아들이라니! 나한텐 그런 아들이 없어!”
“할아버지. 사람들이 구경해요. 목소리를 낮추세요.”
유리가 귀띔해서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한종수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나 여전히 극도의 흥분으로 사지를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나더러 그놈을 구해주라고. 한국을 자본주의라고, 돈밖에 모르는 놈들이 사는 더러운 나라라고 욕했다는 그놈을. 어림도 없어! 그런 놈은 당연히 잡아서 중국으로 추방해야 돼.”
“영감이 아무리 아들이 아니라고 해도 피는 못 갈라요.”
할머니의 담담한 말에 한종수는 상체를 흠칫 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의 충격이 너무나 큰 것 같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한종수는 전신을 푸들푸들 경련하며 천장을 쳐다보고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뒤로 벌렁 넘어지며 의식을 잃었다.
다급히 앰뷸런스를 불러 한종수를 병원으로 후송했다.
할머니는 병원 구급치료실 복도의 벤치에 그린 듯이 앉아 조용히 침묵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울음소리는 내지 않았다.
준호와 유리는 휴게실에서 자판기커피를 뽑아 마셨다.
“이렇게 되면 우린 무슨 관계가 되는 거죠? 불륜을 저지른 게 아닌 가요!”
유리가 고개를 떨어트린 채 가만히 속삭였다.
“불륜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준호는 문제의 엄중성을 벌써 간파했지만 차마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정한다는 건 곧 유리와의 사랑에 종지부를 찍는 것과 같았다.
“우린 연인 사이가 아니라 사촌남매지간이 되는 거잖아요. 전 사촌 여동생이고 준호 씬 사촌 오빠이고. 어찌 이럴 수가 있죠. 어찌 이런 일이 우리한테……”
유리는 말끝을 적시며 가볍게 어깨를 들먹이기 시작했다. 준호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 급단하지 말고 차근차근 생각해 봅시다. 할머니의 말씀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유리 씨 할아버지도 방금 반대하셨잖습니까.”
“아니에요. 전 할머니의 말씀을 믿어요. 그게 어디 장난칠 일인가요. 아기아빠가 누구인가는 누구보다 엄마가 잘 알아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사랑은 변해서는 안 됩니다.”
“할머니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젠 그만 만날 수밖에 없잖아요. 잊을 수밖에 없잖아요. 모르면 몰라도 알고서야 어떻게 더 이상 불륜을 연장할 수 있나요. 오누인데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어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거예요.”
유리는 그의 옆을 떠나 구급치료실 앞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도 고개를 숙이고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우리의 사랑이 과연 이렇게 끝나고 만단 말인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무엇 때문에 나와 유리 씨가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의 희생양이 돼야 하는가! 너무도 억울하고 불공평했다.
준호는 병원 밖으로 나왔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비틀거렸다. 할머니의 등장으로 그들의 사랑은 만회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러니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안 돼. 난 유리 씨를 버릴 수 없어. 그와 나는 이미 갈라질 수 없는 한 몸이 되었다. 그런데 유리가 사촌동생이고 나는 그의 사촌 오빠라니 이게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준호는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하늘과 땅이 물레바퀴 돌듯 눈앞에서 핑글핑글 돌아갔다.
왜? 죄는 누가 짓고 피해자는 우리어야 하는가!
'문학 > 소설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편연재 "붉은아침"29 (0) | 2012.06.13 |
---|---|
장편연재 "붉은아침"28 (0) | 2012.05.27 |
장편연재 "붉은아침"26 (0) | 2012.05.11 |
장편연재 "붉은아침"25 (0) | 2012.04.29 |
장편연재 "붉은아침"24 (0) | 2012.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