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연재 4
이 작품은 계간 "문학시대"82~83호에
분재되었던 소설입니다.
연재 4
“깜빡하고 차에 술을 둔 채 그냥 왔네.”
얼음장 같은 구들위에 앉지도 못하고 몸을 옹송그린 채 은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외할머니가 손수 빚어 보낸 곡주를 차에 실은 채 내버리고 온 것이다.
민박은 누추하고 손님도 없고 을씨년스러웠지만 의외에도 소주나 마른안주 같은 것은 있었다. 술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일정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우리 사이를 좁혀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추위를 덜어보려는 단순한 방편이었을 뿐이었다.
한기가 깊어선지 주독으로도 어한이 못 된다. 이불을 깔고 앉아 잠간 새에 소주 한 병씩을 비웠으나 간에 기별조차 안 간다. 각자 한 병씩 더 터트렸다. 말없이 술만 마셨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가부터 남방이 효력을 발생하며 방안이 훈훈해나는데다가 알코올의 효과로 몸에 열까지 오르자 갑자기 전신에 불이 달린 듯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방안에는 동침을 유도하는 베개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음을 발견했다. 무슨 연유로 내 시선이 갑자기 그런 시설물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내 육신이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그 순간의 일이었다.
더워서 코트를 벗은 그녀의 가슴을 보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은정의 섹시함을 발견했다. 느닷없이 가슴 속 어딘가에 숨어있던 정욕이 꿈틀거리며 홍수 같은 에너지가 신체의 민감한 부위에로 급류하고 있음을 느끼고 얼굴이 활활 달아올랐다. 너무도 우발적이고 찰나적인 감정이라 억제할 수도 향유할 수도 없었다. 의식은 그냥 그 거세찬 정체불명의 흐름에 휘말려 미지의 목표를 향해 뒹굴어갈 뿐이었다. 그 거대한 흐름이 과연 나 자신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어떤 신비한 마법에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의해 움직이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은정은 술에 취한 듯 이불위에 누워 눈을 감은 채 잠들어있었고 나는 그 옆에 쭈크리고 앉아 수욕이 번뜩이는 음탕한 눈길로 터지도록 익은 그녀의 싱싱한 육신을 훑어 나갔다.
“은정아!”
대답이 없다. 쌔근쌔근, 조금은 거친 숨소리뿐이다.
손을 덥석 잡았다. 순간 그녀의 육신이 꿈틀했지만 내 손을 뿌리치거나 눈을 부릅뜨거나 하는 다른 반응은 없었다. 잠든 것인지 잠든 척 하는지? 모든 시도는 모험이었고 모험에는 예습이라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모험은 공포를 포괄한다. 그런데도 공포의 짜릿한 자극 때문에 모험은 만인이 즐기는 락이 아닌가. 남의 눈길을 피해 으슥한 구석에 숨어서 적는 몇 행의 음탕한 낙서!
떨리는 손을 그녀의 가슴을 향해 더듬더듬 이동시켰다. 오만하고 탄력 있게 우뚝 융기된, 발달한 가슴에 손끝이 닿는 순간 나는 작렬하는 폭탄의 충천하는 화광에 화상을 입은 느낌이었고, 헉! 하고 가쁜 숨을 들이쉬었다. 정신이 아뜩해졌다. 정확히 그 느낌은 쾌감이라기보다는 두려움과 공포감이었다.
그래도 애타는 갈망으로 가슴을 졸이는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정은 눈을 감은 채로다. 다만 그녀의 가슴이 힘차고 싱싱하고 율동감 있게 오르내릴 뿐이었다. 정말 깊이 잠들어버린 걸까?
나는 색광처럼 용기를 내어 그녀의 육신을 거칠게 더듬어 나가기 시작했다. 부지런한 농부가 비옥한 전답에 깊숙이 보습을 박아 갈아엎듯이… 하나하나의 부위들을 확인해 나갔다. 내 손이 움직이는 대로 그녀의 육신은 갈피갈피 마루 높은 파도가 번져갔다. 마치도 강기슭에 잡혀 나온 살진 붕어처럼 팔딱팔딱 세차게 경련했다. 폭발전야의 흥분을 억제할 수 없어 나는 미친 듯이 그녀의 단추를 끄르고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단추 하나도 제대로 벗겨지지 않았다. 은정은 가는 신음소리만 낼 뿐 꼭 감은 눈을 끝내 뜨지 않았다. 나는 무치하고 비열한, 거의 능욕에 가까운 광란을 제지하거나 저항하기는커녕 잠결에 뒤척이는 척 몸을 돌려 나의 망동에 동조해왔다.
이제 나의 손과 발은 노련한 섹스광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섹스의 과정을 체크해 나갔다. 마치도 누군가의 손에 의해 원격조종을 받는 로봇처럼, 신들린 무당이 신이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듯이 무의식적으로 비옥한 처녀지를 개척해 나갔다.
부풀대로 부푼 남성이 도가니처럼 펄펄 끓는 여성 속으로 삽입되는 순간 나는 불꽃 튀는 정욕의 섬광에 눈이 부심을 느꼈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나는 못하는 담배를 꼬나물었고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프랑스로 유학 갈 거야.”
그것은 국악을 전공하라고 권유하던, 내 마음을 국악에 묶어두려고 딸까지 끌어들여 미인계를 쓰던 정 교수의 신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오빠 장래니까 오빠가 알아서 결정해. 경비는 마련됐어?”
은정은 하룻밤의 인연을 명분으로 치사하게 남자의 발목을 끌어안고 늘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그 밤의 정사는 오늘까지도 나의 일거일동에 제동을 걸고 진로를 좌우하는 지배세력이 되고 있다.
이제는 그녀의 전화벨소리조차 공포 그 자체로 느껴진다. 그녀의 눈길과 목소리와 관심의 영역에서 도망치고만 싶을 뿐이다. 그녀 자신은 어떠한 강요도 해오지 않지만, 엄마의 의사를 전달할 뿐이라고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사랑이기에 앞서 책임감을 유발하는 명분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고만 생각된다. 사실 유학을 온 것도 그녀와 그녀 부모의 영향권에서 해탈하기 위한 하나의 탈출구였을 뿐이다. 그런데 파리에 오면, 그녀들의 감각적 유효영역을 벗어나기만 하면 탈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섣부른 오산이었던가. 그들의 영향력은 국경도 바다도 무시한 채 무난하게 나에게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귀국. 전공분야이전, 결혼이라는 온갖 구속으로 나의 수족에 쇠고랑을 걸어오고 있다.
두 개의 아치형교각 위에 275m길이의 석조구조물인 퐁 뇌프다리로 시테섬승선장의 베르갈랑광장으로 건너갔다. 밤나무와 라임나무숲이 우거진 광장의 벤치에 앉으면서 새삼스럽게 손에 든 《르 몽드》지의 존재를 깨달았다. 신문은 손에 닳아 이미 볼품없이 구겨져있었지만 기억 속에서는 쩍하면 추방당하는 존재였다.
퐁 뇌프교를 건넌 행위가 과연 나 자신의 의지였을까? 누군가의 조종에 의한 것은 아닐까? 나 자신의 의지대로 스스로의 일거일동을 지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신문을 펼쳐들었다. 그러나 한글자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누군가 나의 의지에 엇서며 신문독서를 거부하는 듯싶다. 신문을 읽으려는 나와 신문열독을 거부하는 나중에 도대체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넌 피 갈이를 해야 돼!
마르셀교수의 질책, 내 몸속의 피가 간단히 교체한다고 내가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면.
이제는 자취방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 역시 누군가의 사주인지 내 의지의 결단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낯선 파리 땅에서 나를 용납해 줄 곳은 저 몽마르트 언덕 밑에 있는 그 허름한 양옥옥상의 콧구멍만한 다락방뿐이었다. 정 교수가 알선해준 방이다. 그녀의 친구가 전세를 냈던 방인데 급한 사정으로 계약기한이 되기 전에 갑자기 귀국하게 되면서 정 교수의 소개로 나에게 넘어오게 된 것이다. 덕분에 비싼 기숙사비용은 절약할 수 있었다. 공짜이긴 하지만 어쩐지 기분은 찜찜하다.
지하철 4호선을 타고 방베스barbes 역에서 2호선을 환승하고 피갈 역에서 하차하여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면 나타난다. 쪽방이긴 하지만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그 속에서 오늘 하루 있었던 사건들을 조용히 정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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