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계간 "문학시대"82~83호에
분재되었던 소설입니다.
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연재 15
동일한 풍경에 무료해진 나는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겠다는 행선지 같은 건 없었다. 그냥 몸을 발길이 향하는 대로 실어놓았을 뿐이다 나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서도 나의 육신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신기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당황하게 한다.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의지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는 공포감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 발길은 누구에 의해 움직이고 있을까?
무의식?!
프로이드와 저 유명한 라캉의 요술 같은 연구에 의해 신비화된 『무의식이론』만 가지고는 설명이 불가능한 이 행위……
나는 춤을 추듯 어깨를 약간씩 으쓱거리며 보폭을 넓게 딛는다. 오른팔은 뒤짐을 짓고 왼팔만 씩씩하게 흔든다. 판에 박은 아버지의 걸음걸이다. 턱을 번쩍 쳐들고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모습도, 말할 때면 코를 킁킁거리고 흥분하면 주먹을 불끈 부르쥐고 허공에 휘두르는 제스처도, 침대위에서 맷돌질을 하는 잠버릇도 아버지를 꼭 닮았다. 게다가 김이 새듯 실실거리며 웃는 모습, 불그레한 피부색, 거문고소리 같은 우렁우렁한 목소리, 퉁명스런 말투까지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쌍까풀눈, 우뚝한 코, 두툼한 입술, 묵직한 귓불, 무성한 머리숱, 짙은 눈썹, 다보록한 구레나룻도 아버지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한마디로 나의 외모는 나라기보다는 아버지의 복제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방하지만 심술궂고 당당하지만 허영심이 많고 소탈하지만 교활하기도 한 성격마저도 그 복사판이다. 뿐만 아니라 곤죽이 되고 주사를 부릴 때까지 퍼마시는 폭주습관, 여자 앞에서는 흥분을 억제 못하는 바람기……
어디 그뿐인가.
내 눈매는 엄마를 닮았고 손발도 엄마의 손발과 흡사하다. 웃을 때면 내 얼굴에서 엄마가 보인다며 외할머니는 웃는 나를 귀여워했다. 그러나 입을 꾹 다물고 침묵할 때면 아버지를 닮았다며 나에게 못마땅한 눈길을 던졌다. 아버지를 닮아 쉽게 가열되어 엄벙덤벙 무슨 일인가를 저지르고는 금방 냉각되어 소침하고 우유부단하고 전전긍긍하는 성격은 내 혈관 속에 엄마의 B형 혈액이 흐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흰 양말에 티끌 한점 묻어도 벗어서 씻는 유난스러운 결벽증은 엄마를 닮았고 아버지는 한번 신은 양말을 엄마가 벗기기 전에는 씻지 않는다. 방안을 꼼꼼히 정리하고 물건마다 정해진 위치에 있어야 시름을 놓는 섬세함과 완벽함에는 엄마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는 내가 아닌 타자의 흔적과 낙서가 더 많은 셈이다. 그 속에서 나는 나라는 주체가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가? 자칫하면 하나의 새로운 흔적, 덧 낙서로도 되지 못한 채 생매장되고 무시당하고……
문득 진로가 막혀 고개를 드니 뜻밖에도 내 몸은 지하철 7호선 뇌프교역 입구에 서있다.
내가 왜 여길 온 거지. 어딜 가려고?
나는 나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내가 알 수 없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특별히 갈 곳도 없는지라 나는 내친 김에 입구로 진입했다. 마술사의 마법에라도 걸린 듯 내 생각은 (내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면) 두서없이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도대체 내 음악 속에 숨어있는, 마르셀교수를 진노케 한 연고는 무엇일까. 마르셀교수는 물론이고 나 자신도 혐오를 느껴 원하지도 않는 분위기가 왜 짓궂게 내 마음속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닐까. 내막도 모르고 마르셀교수는 그것이 마치도 내가 원해서 음악실천에 끌어들인 현상처럼 저주를 퍼붓는 일이 더 억울하다.
할머니는 무당이었고 할아버지는 고수鼓手이자 재비였다. 어린 나는 아빠, 엄마가 들에 일하러 나가면 늘 뒷집에 사는 할머니네 집에 가서 놀았다. 무속이 정부시책으로 한풀 꺾인 때라고는 하지만 할머니네 집에는 굿에 쓰이는 무구巫具들이며 무복巫服이며 굿 악기들이며 고스란히 간직되어있었다.
할머니네 안방에는 간소하지만 정성들인 신당神堂이 모셔져있었다. 삼면 벽에는 잡귀신을 물리치는, 갑옷투구에 말 타고 장검을 비껴든 최영 장군, 오른손에 검을 잡고 왼손에는 불로초를 들고 구름을 탄, 일월성신을 관장하는 신神인 일월도산장의 용 장군, 칠성님, 3불제석 등 십여 폭의 무신도巫神圖가 그려진 주렴이 걸려있고 벽 밑 선반위에는 진동항아리와 무당이 자기 집에서 받드는 신위의 하나인 점책, 점통, 촛대, 거울, 명다리 그리고 토속신앙에서 신이나 부처를 모신 상 앞의 천장 가운데 매다는 모시, 무명, 목탁, 실타래 등이 놓여있다. 그 밑에는 무복을 간수해둔 고리짝과 무악기인 징, 장구, 해금, 태평소와 방울, 부채, 삼지창, 은월도 등 무구들이 놓여있었다. 손자를 무척 아끼던 나머지 할머니는 내가 성역聖域인 신당 안에 난입하여 무구들을 닥치는 대로 만져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악기도 타보고 무구도 갖고 장난칠 수 있었다. 할아버지도 그러는 손자의 방종을 꾸짖을 대신 해금 타는 법이며 피리 부는 법이며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
장난에 싫증이 나면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노래를 들었다.
씻기노라 천도 받소 금일에 넋 신이요
진씨 넋 망제신은 탈옥대상 날에
잔치 오셨다가 만반진수에 흠향하시고
… …
씻기러 가세 씻기러 가세
진씨 넋은
넋당산에다가 넋 모시고
… …
우리 같은 초로인생 아차 한번 죽어지면
죽진 장포 일곱 배 상하로 질끈 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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