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계간 "문학시대"82~83호에
분재되었던 소설입니다


중편소설 "그림자들의 전쟁"
 연재 12 
 
 
 
방안에 들어서자 성진은 어리둥절해진다. 침실의 테이블에 모신 자그마한 불상, 목탁과 동자스님이 선물로 준 염주, 큰어머니, 대공스님, 동자스님과 사찰을 소재로 하는 수많은 불교미술작품들…… 그에게는 이곳이 파리시내의 중심가가 아니라 한국의 어느 불교신도 댁에 들어선 기분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윤미는 갑자기 성진에게 그 물건들을 일일이 소개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녀는 울컥 발작하는 구토로 급히 입을 틀어막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구정물 같은 음식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와 옷과 침대시트위에 떨어지면서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성진이 다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여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에 머리를 틀어박고 뱃속의 음식물을 죄다 토해냈다. 성진이 가끔씩 그녀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물로 입가심까지 했지만 이번엔 옷에 묻은 분비물에서 역한 냄새가 풍겨 코를 찌른다. 단추를 벗기려 했으나 벗겨지지 않았다.

“좀 도와주세요. 샤워를 해야겠어요.”
 
성진의 손길이 가볍게 옷깃을 스쳤다. 하나의 불씨가 가슴으로부터 복부까지 쭉 굴러 내려갔다. 불씨가 지나가는 신체부위마다 뿌지직뿌지직 증기를 뿜으며 타들어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가빠지는 숨결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쳐들고 두 눈을 사르르 감았다.

“브래지어도 벗겨주세요.”
 
등 뒤로 남자의 단 쇳덩이처럼 화끈거리는 숨결이 목덜미에 닿는 순간 윤미는 전신의 경련을 체험했다. 순간의 흥분이 십여 년 전의 암자에서 동자스님의 품에 안겼던 추억의 부두에 급급히 닻을 내리고 있었다.
 
어서 절 가져요!
 
마음속으로 간청했다. 어차피 드뇌브에게 유린당하게 돼 있는 몸이었다. 사랑도 정도 없는 사람에게 앙리부인의 강요에 의해 순결을 짓밟힌다는 건 강간이나 다를 바 없었다. 오늘의 인연이 불륜이 되더라도 원하는 사람에게, 스스로 선택한 사람에게 정조를 허락하고 싶었다. 그런 결합으로 조각난 정체성을 복구하고 싶었다. 드뇌브에게, 앙리부인에게 무자비하게 탕진될 번했던 육신을 차라리 같은 혈통의……
 
사내의 심장의 고동소리가 등 뒤에서 북소리처럼 쿵쿵 울린다. 두 팔이 집게처럼 억세게 그녀의 상체를 감아 안으며 가슴을 움켜잡았다.

“동자스님~”
 
윤미는 저도 모르게 가느다란 비명을 토해내며 맥없이 성진의 품에 상체를 맡겼다. 부글거리는 욕정이 힘차게 마음의 굳은 토양을 뚫고 나와 화산처럼 분출하기 시작했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성진의 목소리는 흥분의 칼날에 맞아 토막 났다.

그러나 바로 그때 공교롭게도 출입문 쪽에서 초인종소리가 울렸다.

묻지 않아도 드뇌브일 것이다. 언제나 방 키를 휴대하고서도 신사연하며 저렇게 내숭을 떤다. 파리에서 이 방을 찾아주는 사람은 드뇌브밖에 없다. 온종일 그녀의 행방을 추적하느라 개처럼 도시를 쏘다녔을 염탐꾼!

하필이면 이런 때 나타날 건 뭔가.

그는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키로 따고 들어올 것이다.
 
용암처럼 펄펄 끓던 정욕이 냉수를 끼얹은 듯 삽시에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성진도 흠칫 놀라며 그녀의 등 뒤에서 물러서더니 부랴부랴 욕실에서 거실로 빠져나갔다.

“밖에 누가 왔나본데요. 빨리 옷을 입으시죠.”
 
“삽살개에요.”
 
“네?”
 
“앙리부인이 기르는 애완견이라고요. 후각만 발달해 냄새를 잘 맡거든요.”
 
그래도 성진은 영문을 몰라 거실 가운데 엉거주춤 서있다.

윤미는 깨어진 흥분을 줍듯 욕실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들을 집어 대충 몸에 걸쳤다. 이 소문이 앙리부인의 귀에 들어가는 날이면 어떤 벼락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그녀는 오늘따라 대수롭지 않았다. 일종의 체념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은 앙리부인에 대한 반항심이었고 자신의 무능에 대한 저주였다. 자식을 낳기만 하고 끝까지 책임지지 못한 부모에 대한 원망이고 자기답게 살려는 발악이요 오기이기도 했다.

 

윤미는 속이 쓰리고 입 안이 써 잠에서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아침 8시 15분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지난밤에 벌어졌던 일들이 의식 속에 질서정연하게 수습이 되지 않는다. 동자스님과 성진이라는 남자 그리고 술과 흥분 그리고 또 드뇌브의 돌연적인 등장……

무슨 사건인가 터진 건 분명한데.
 
침대 옆에는 어젯밤 드뇌브가 혼자 마신 듯 한 위스키 병이 바닥난 채 우두커니 앉아있다. 드뇌브는 혼자 술을 마시며 끝없이 자초지종을 캐고 들었으나 윤미는 태평스레 늘어져 잠을 잤었다.

극심한 두통발작으로 머리가 빠개지는 듯 하고 사지가 욱신욱신 쑤셨지만 참고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 신선한 아침공기가 폐부로 흘러들며 정신을 개운하게 했다. 요가를 시작한 지도 반년이 다 된다. 파리의 대학원에 오자마자 그녀는 요가를 시작했다. 요가라기보다는 절에 살 때 보았던 대공스님의 좌선법을 기억하며 나름대로 화두참구의 명상법을 개발했던 것이다.
 
방석위에 앉아 허리를 수직으로 곧게 폈다. 머리를 쳐들고 두 손을 무릎 위 단전부근에 깍지 끼고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감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가늘게 심호흡을 했다. 혀끝을 윗잇몸에 붙이고 뱃속의 혼탁한 기운을 배출하고 밖의 청정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대공스님은 선방에 들어가기만 하면 늘 이런 자세를 한 채 온종일 밖에 그림자도 얼씬 하지 않았다. 마치 돌로 깎아 만든 부처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앉아계셨다. 10여분의 경행徑行이 끝나면 곧 다시 좌선에 들어가곤 했다.

“대공스님은 왜 저기 저렇게 종일 앉아서 졸고 있는 거니?”
 
인당스님한테 물었더니 스님은 선방 쪽을 향해 고개를 숙여 합장하고 예불만 올린다.
 
“육신을 이루는 땅, 물, 불, 바람은 그 본성이 공空하여 거울속의 형상과 다름없고 물속의 달과 같은 허깨비란다. 삼독三毒으로 인해 더럽고 구린내 나고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이지. 이런 사대四大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하는 걸 깨닫고 견성성불하는 것이 도솔삼관화두참구의 목적이란다.”

Posted by 아데라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