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연재 "붉은아침"8
제1부 백년빙곡冰谷
장혜영
4장 꿈틀거리는 은파강
1
땔나무를 할 수 있는 산은 강촌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읍내를 지나고 비옥한 논배미들이 아득하게 펼쳐진 벌판을 지난 다음 다시 강 두 개를 건너야만 했다. 해거름 전에 왕복 70리 길을 다녀오려면 새벽에 집을 나서야만 했다.
덕민은 첫닭이 울자 자리에서 일어나 지주 한상권네 집으로 향했다. 어제 한지주가 그들 형제더러 외양간을 늘려 지을 재목을 해오라고 당부했기 때문이다.
덕민은 종일 가도 말 한마디 없는 과묵한 사람이었다. 누가 무슨 일을 시키던 군말 않고 늘쩡늘쩡 해나갔다. 그저 벙글벙글 웃는 것이 그의 말이고 대답이다. 사람들 속에 있을 때에도 구석에 쭈크리고 앉아 굵직한 엽초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며 남들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듣기만 할 뿐 화제에 끼어들지는 않았다.
덕구는 이불을 머리 위에 뒤집어쓴 채 잠든 척하고 있었다. 곱단이가 종수의 첩실로 들어간 후 그는 한지주네 일이라면 그림자도 내비치지 않았다. 복수할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덕민이 혼자 떠날 수밖에 없었다.
덕민은 동생을 깨우지도 않고 혼자 한지주네 집으로 가서 수레를 메웠다. 부엌어멈이 챙겨주는 주먹밥 몇 덩이를 보자기에 말아 배에 두르고 길을 떠났다.
여명을 앞둔 새벽하늘은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캄캄했다. 이따금 풀벌레소리와 무르익어가는 나락이 바람에 와스스 설레는 소리만 들려올 뿐 사위는 쥐죽은 듯 괴괴했다. 밤눈이 밝은 황소는 저절로 은파강을 건너 벌판 가운데로 난 들길을 찾아 엉금엉금 걸어갔다.
덕민은 때로는 수레 위에 걸터앉기도 하고 수레 뒤를 뒤뚱뒤뚱 따라 걷기도 하고 엽초를 굵직하게 말아 담배를 뻐끔뻐끔 빨기도 하고 게으름을 부리거나 길섶의 풀을 먹으려고 한 눈파는 소잔등을 회초리로 치기도 하면서 한가롭게 걸음을 옮겨놓았다.
“이넘아, 머달라꼬 꾸물대고 있당가? 날이 볽기 아래 산에 도착혀사 낭구럴 찍어 싣고 싸게 돌아갈끼 아이가. 이 녀석이 아즉 여물얼 굶어비렜나원.”
몇 대 회초리질을 하고는 금방 맞은 자리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사람들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소와는 수다스러울 정도로 말이 많은 덕민이었다. 소는 자기 말을 들어만 주기에 부담이 없어서 좋았다.
불덩이 같은 아침 해가 동녘에 둥실 떠올라서야 덕민는 벌판을 벗어나 가파른 산비탈로 접어들었다. 거기서도 한참을 더 가야 했다. 능선을 톺느라 소가 맥이 없어 할까봐 수레에서 내려 슬슬 걸어서 올라갔다. 아침을 맞은 산속은 온갖 새들의 노랫소리로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아침햇빛을 받고 금빛으로 물든, 녹음 우거진 숲은 살지고 싱싱한 가슴을 드러낸 채 새들의 구성진 노랫소리에 흠뻑 취해 있었다.
덕민은 길가에 핀 할미꽃도 한 송이 꺾어 향기를 맡아보고 빨갛게 익은 무슨 열매인가를 따서 입에 넣고 달콤한 즙을 짜먹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외양간 짓는 데 쓸 만한 서까래감이 어디 있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능선의 숲 속에서 이따금 살진 꽃사슴이나 산토끼들이 불쑥 나타나 덕민이를 말똥말똥 쳐다보다가는 무엇에 놀란 듯 갑자기 숲 속으로 자취를 감추곤 했다. 덕민은 괜히 기분이 상쾌해져 벙글벙글 웃기만 했다.
고개 두 개를 넘고 세 번째 능선에서 덕민은 수레를 멈췄다. 소를 풀어서 풀을 뜯을 수 있도록 꼴이 무성한 곳에 고삐를 늘여 나무에 비끄러맨 후 도끼를 들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잔디며 잡초며 가랑잎들이 쌓여 땅바닥은 융단을 깔아 놓은 듯 폭신폭신하고 비옥한 땅에 뿌리를 박은 미끈한 교목들이 밀집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중 곧고도 단단하게 생긴 놈을 골랐다.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고 도끼를 쳐드는 순간 덕민은 어딘가 지척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동작을 멈췄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니 바스락거리는 짐승들의 발자취소리와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만 들릴 뿐 인기척은 없었다. 도끼를 들고 나무를 향해 내려찍으려는데 이상한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자세히 들으니 그 소리는 분명 사람의 신음소리 같았다.
불현듯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이 깊은 산중에 웬 사람이?!
공포와 두려움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덕민은 호기심에 떠밀려 인기척이 들리는 쪽을 향해 조심조심 다가갔다.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거나 가랑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공포에 질려 화들짝 놀라곤 했다.
비탈 쪽에 조그마한 바위굴 하나가 나타났다. 굴 밖으로 사내의 다 해어진 신발이 비주룩이 나와 있었는데 삐져나온 발가락은 터진 채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덕민은 용기를 내어 쭈그리고 앉아 굴 안을 들여다보았다. 체구가 건장한 젊은 사내가 몸뚱이를 모로 꼬부린 채 쓰러져있었다. 왼쪽다리는 적삼을 찢어 둘둘 감았다. 붕대 위로 스며 나온 피는 흙먼지가 묻어 적갈색으로 응고되어 있었다. 상처의 통증 때문인지 사내는 연신 으드득, 으드득, 이를 갈며 신음소리를 씹어냈다. 중태에 빠진 모양인지 사람이 옆에 다가온 것도 모른다.
잔뜩 겁에 질렸던 덕민은 부상을 입고 실신 상태에 빠진 사람을 보자 두려움이 저도 모르게 동정과 우려로 바뀌었다.
가려움이나 통증을 참지 못해 무의식중에 집어 뜯은 모양인지 붕대는 거의 풀려서 상처가 비주룩이 드러나 보였다.
“물! 물! 물!”
입술이 솔 껍질처럼 말라터진 사내는 불분명한 어조로 갑자기 물을 찾기 시작했다.
덕민은 엉거주춤 일어나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물이 보이지 않자 골짜기로 내려갔다. 골짜기에는 마침 물이 있었다. 계곡을 축축이 적시며 흘러내리는 뽀얀 개울물을 가랑잎에 담아들고 다시 비탈을 올라왔다. 환자의 입을 벌리고 물을 흘려 넣어주었다. 며칠을 굶었는지 사내의 얼굴엔 뼈와 가죽밖에 없었다.
덕민은 배에 두르고 있던 밥보자기를 풀었다. 노란 양념물이 든, 김치 잎으로 싼 주먹밥을 꺼냈다. 속에 빨간 고추장을 박아 넣은 밥덩이를 손으로 조금씩 덜어내어 그 사람의 입에 넣어주었다. 사실 그도 먹어보기 힘든 쌀밥이었다. 한지주네 일을 하는 날이고야 맛볼 수 있었다.
사내는 주는 대로 몇 입 받아먹더니 갑자기 전신을 부르르 떨며 두 눈을 번쩍 떴다. 우묵하게 꺼져 들어간 그 눈에 경계의 빛이 번뜩여 덕민은 흠칫 놀랐다. 사내의 손에는 어느새 권총이 들려있음을 발견한 덕민은 그만 얼굴이 사색이 되고 말았다.
“당신은 누구요?”
“낭구할라꼬 온……”
“농사꾼이요?”
“한지주네 소작농이지라우.”
그제야 사내는 권총을 내리며 안도의 숨을 후, 내쉰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근디 지비는 누시간디? 머땜시로 요로코롬…….”
“왜놈들의 추격을 피하다가……. 미안하지만 내 다리 상처가 어떻게 되었는지 좀 봐주시겠습니까? 어찌나 아픈지 참을 수가 없네요.”
붕대를 풀어보던 덕민은 입을 딱 벌렸다. 상처엔 벌써 구더기가 득실거리고 있었다. 덕민은 나무꼬챙이를 꺾어 상처에서 구더기를 파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살이 쪄서 통통했다.
“이 돈으로 은파에 가서 상처에 바를 약을 좀 사다 주시겠습니까. 먹을 것도 좀. 벌써 사흘째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습니다.”
덕민은 우선 가지고 온 주먹밥을 고스란히 사내에게 남겨두었다. 그리고는 사내가 넘겨 주는 돈을 받아 품속에 간수했다. 덕민은 종래로 거절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저녁에 재목을 찍어 싣고 마을로 내려온 그는 사내의 부탁대로 이튿날 아침 일찍 은파에 시내로 나갔다. 약과 건빵을 사서 보퉁이에 지고는 곧장 산중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나흘 동안 매일 산에 올라갔고 약과 음식을 날랐다.
닷새째 되던 날 덕민은 가깝게 지내던 이웃집 동갑내기 용팔이한테 산중에서 만난 그 기이한 사람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 사람이 일본군대의 추격을 받다가 다리를 총에 맞고 부상당했단 말이지. 틀림없어?”
용팔이가 덕민의 옆에 바싹 다가앉았다.
“그러탕께.”
“그럼 그 사람이 공산당이란 말이제?”
“공산당인가는 모르나 쪽발이 놈들과 쌈한닥카는 산사람인 건마는 틸림없어라우. 누헌티두 말허들 말라구 신신당부허드라우. 느그캉언 친헝께 말혀는거라우.”
용팔은 갑자기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그러잖아도 마누라가 앓아누웠으나 약 지을 돈이 없어서 속을 썩이던 터였다. 숨어 있는 공산당을 밀고하여 포상금을 받으면 마누라의 약 지을 돈은 물론이고 횡재할 수도 있었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한 용팔은 한밤중의 어둠을 타 동네사람들 몰래 읍내 주재소로 달려갔다.
밀고를 받은 한종수는 이튿날 아침 용팔이가 제공한 정보에 따라 순경들을 급파해 덕민의 집주위에 매복시켰다. 마침 야마토 경부는 은파분서에 나가고 주재소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덕민은 첫닭이 울자 자그마한 보퉁이를 옆구리에 끼고 집을 나섰다. 그는 수많은 순사들과 순경들이 용팔의 안내를 받으며 뒤를 추적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곧장 사내가 숨어 있는 산속으로 들어갔다.
덕민이 동굴 앞에 이르자 아무런 방비도 없이 굴속에서 나오던 사내는 무장한 순사, 순경들이 불시에 덮쳐드는 바람에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체포되고 말았다. 덕민은 무슨 영문인지 상황 파악도 하기 전에 사내와 함께 순사들의 오랏줄에 결박당했다.
야마토는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한종수를 칭찬했다.
“소까! 한상이 대일본제국을 위해 대공이노 세웠소까!”
심문 결과 사내의 신분이 밝혀졌다. 그는 항일빨치산 부대원이며 하바로프스크밀영의 88국제여단에서 대일작전 정보 수집을 위해 만주에 파견된 첩보요원이었다.
“왜놈들의 끝장은 이제 코앞에 닥쳐왔다. 그러니 더 이상 인민을 반대하는 죄악을 범하지 말라, 총을 버리고 혁명의 편에 돌아서라!”
사내는 조금도 굴복하는 기색이라곤 없이 당당했다. 도리어 순사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야마토는 사내를 지체없이 은파경찰분서로 넘겼다.
덕민은 빨갱이, 공산당을 도와주었다는 죄명을 쓰고 주재소유치장에 감금되어 혹독한 심문과 고문을 당했다.
“한상, 이놈이노 천장에 달아매고 쳤소까! 빨갱이놈에게노 무슨 군사비밀이노 알려주었는가 말할 때까지노 죽도록 족쳤소까!”
야마토는 하고많은 순사들 중 하필이면 한종수더러 고문하라고 등을 떠밀었다. 한종수는 덕민이가 아버지네 소작농이고 부친과 친분이 깊은 최복만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망설임이 없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최복만은 공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사실 어리바리한 덕민은 군사비밀이 뭔지, 공산당이 뭔지를 식별할 만큼 똑똑한 사람도 못 되었다. 첩보원이 공산당이 아니라 일본군이라고 해도 그는 도와주었을 것이다.
“뭘 하고노 섰소까? 빨리 저놈을 천장에노 달아매고노 족치라는 데 귀가노 멀었소까!”
야마토가 재차 독촉하자 한종수는 할 수 없이 덕민에게로 다가갔다.
“억울혀라우. 난 암것도 몰라라우.”
말주변이 없는 덕민은 아까부터 이 몇 마디 말만을 되풀이 할 뿐이었다.
오랏줄로 그의 발목을 묶어 천장의 대들보에 거꾸로 달아맸다.
“작은 나리, 질 머땜시 달아맵디여?”
“몰라서 묻는기랴? 지비가 그 빨갱이헌티 군사비밀얼 일러바쳤응께 이라는거제. 매맞들 않을락카기던 어여 군용비행장이며 수비대 사령부며 경찰서며 드나듬시로 위치, 인원, 무기장비 등 군사비밀얼 정탐혀서 그넘헌티 알려준 사실얼 이실직고 허지라우.”
“군사비밀이락카는 거시 머신디? 지는 듣다 츰인디유.”
“빠가야로! 이 자식이노 솔직하게 불어댈 때까지노 죽도록 쳐소까!”
야마토는 노발대발하며 부르짖었다.
때릴 수밖에 없었다. 종수는 눈을 지그시 감고 가죽채찍을 휘둘렀다.
짱! 짱!
소리가 날 때마다 덕민은 어이쿠! 어이쿠! 비명을 지르며 전신을 꿈틀거렸다. 한 사람이 맥이 진하면 다른 사람이 교대로 매질을 했다. 덕만이 매를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으면 야마토는 양동이에 찬물을 담아다가 얼굴에 끼얹었다.
“아직도 입을 열지노 않케쏘까?”
“머실유? 지는 암걷도 몰라라우. 밥 주고 약 사다준 일 밲에 없어라우.”
“이놈이노 아직도 덜 아파소까. 더 때려소까.”
각목으로 난타하고 숯불에 벌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벌거벗은 등짝을 때렸다. 쇠꼬챙이가 살갗에 닿을 때마다 찌르륵, 찌르륵, 살타는 냄새가 고약하게 진동했다.
모진 고문에 견디다 못해 실신을 거듭하던 덕민은 나중에는 물을 끼얹어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콘크리트바닥에 똥오줌까지 배설했다. 전신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기고 멍이 들었다.
종수와 매질을 하던 순사들도 기진맥진하여 여기저기 너부러졌다.
그러나 이튿날에도 야마토는 한종수더러 덕민을 끌어내어 매질을 하게 했다.
덕민은 걸음도 걷지 못해 두 순사가 개를 끌 듯 질질 끌어왔다. 척추가 부러졌는지 콘크리트바닥에 늘어진 채 일어나지 못했다. 가죽채찍으로 몇 번 내리치자 금방 정신을 잃었다. 반듯하게 눕혀 놓고 콧구멍에 고춧가루 물을 퍼부었다. 한참 캑캑거리더니 다시 졸도하고 말았다. 만신창이 된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종수는 이러다가 덕민이 정말 죽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의구심도 없지 않았다. 죄 없는 사람을 왜 때려죽였냐며, 왜놈을 반대하는 것도 죄가 되냐며 지엄하게 따지고 들 아버지가 두려웠다. 그러나 한쪽에서 야마토가 버티고 앉아 지켜보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최복만은 아들이 읍내 주재소에 잡혀 들어가 죽을 고문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부랴부랴 한상권에게로 달려가 땅바닥에 엎드려 구원을 애걸했다.
한상권은 두 말 없이 나들이 차비를 하고 읍내로 달려갔다.
“내 그 종수넘얼 칵 쌔리삘고 말거라우! 깝닥얼 뿌게뿔고 뼉다구럴 뿐질러 뿔기라!”
덕구는 소문을 듣자 당장 읍내로 달려가려고 으르렁거렸다.
“맨 주먹으로다 총구녁얼 당할락꼬 그라능가라우? 무산시리 설치다가 지비까장 잽힐라우. 참으이.”
동네 장정들이 달려들어 가까스로 말렸다.
용팔은 덕구가 두려워 집안에 틀어박혀 감히 밖에 그림자도 얼씬 드러내지 못한 채 숨을 죽이고 지냈다.
결국은 한상권이 촌장이라는 신분을 행사하여 야마토에게 금품을 질러주어서야 덕민은 일주일 만에 겨우 주재소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인사불성이 되어 들것에 들려나온 그는 이미 초주검이 되어있었다. 정강이뼈가 부서지고 전신에 어혈이 들고 만신창이 되어 모습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멀쩡하던 사람얼 이 모냥, 이 꼴로 맹길어뿌리다니. 즘생보담도 못헌넘! 울 성이 공산당인걸 암시로 도와준 것도 앙근디. 내 기연이 종수 느그넘의 뼉다구럴 뿌시뿔고 껍닥얼 빗기뿌리고사 말 팅게 두고보랑께!”
덕구의 두 눈에서는 불길이 활활 일었다. 이를 으드득, 으드득, 가는, 험상궂은 그의 얼굴에서는 섬뜩한 살기가 번뜩였다.
“글티만 요것이 몬타 나리의 덕분인 줄 알아사 쓰니라. 나리께서 나서서 구해중께 다해이 목숨이락도 붙어 있제. 안 그랬으먼 주검얼 들고 나왔을 기 앙그냐.”
최복만은 여전히 한상권의 은혜를 못 잊어 감지덕지해 한다.
“즈그압씨에 즈그아들이락꼬 한상권이락꼬 달브단가유. 성이 죽기만 혀보지라디 가만 있든 않을기라……”
덕민은 주재소에서 풀려나온 지 닷새 만에 말 한마디 변변히 못해 본 채 억울하게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는 임종의 순간에 동생 덕구의 손을 꼭 부여잡고 유언 한마디를 남겼다.
“덕구야. 느그성의 웬수럴 갚어줄 사램언 울 집 안에 니밲에 없지라. 지발 느그성이 눈얼 감게 혀주린.”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하던, 욕을 먹어도 빙그레 웃기만 하던, 그처럼 맘씨가 착하던 형님이 오죽이나 가슴속에 한이 맺히고 억울하고 원통했으면 동생의 손을 부여잡고 이런 눈물겨운 유언을 남겼을까. 덕구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성, 걱정혀들 말고 저승질얼 떠나소. 이 동숭이 기연이 성의 원수럴 갚아 줄 팅께.”
이를 뿌드득 갈던 덕구는 입 안에서 부러져 나간 피 묻은 어금니 한 대를 퉤 하고 땅바닥에 뱉어냈다. 그의 눈에서는 시퍼런 불길이 펄펄 일었다.
한상권은 송판으로 짠 관과 술, 고기를 수레에 가득 싣고 초상집에 나타났다.
“사램이 죽었는디 요까짓 것이 먼 소양이 있당가! 몬타 가져가 삐리이다. 대신 즈그성 목숨얼 돌려주이다.”
덕구가 어디선가 도끼를 들고 마당으로 달려 나오더니 관이고 음식그릇이고 술독이고 가리지 않고 죄다 박살냈다.
“이넘아, 이게 먼 지껄이다냐! 나리께서 성의껏 혀오신 건디 인사는 못헐 석시!”
최복만이 허겁지겁 막아 나섰지만 화가 천둥같이 치밀어 오른 아들을 당해내기에는 힘이 부쳐 헐떡거리기만 했다.
“내비 두게. 그 녀석의 심정을 가히 이해 헐만도 허이. 김 서방, 싸게 집으로 돌아가 방 목수캉 관을 다시 짜두룩 허게. 술과 고기도 더 가져 오구.”
한상권이 표정 하나 흩트리지 않고 태연한 기색을 짓자 도리어 맥이 진해 버린 건 덕구였다. 그는 행패를 멈추고 마당 가운데 펄쩍 주저앉아 엉엉 통곡하기 시작했다.
“억울하오! 성 너머 억울허게 죽었다!”
관을 다시 짜느라 발인이 늦어진 데다 관을 실은 수레 앞을 막아서는 덕구를 말리느라 동네 사람들은 그만 지쳐버리고 말았다. 가까스로 무덤 앞에까지 이르긴 했으나 덕구가 먼저 무덤 안에 뛰어 들어가서 털썩 주저앉아 버티는 통에 장례는 또 지체되었다.
“종수란 넘얼 무덤 아케 끌어오기 아랜 성얼 구더이에 묻들 못허지라우. 그넘이 성 아케 엎드려 절얼 디리고 잘못혔닥코 빌기 아래 묻들 못한닥꼬!”
누구도 위엄이 하늘을 찌르는 순사인 한종수를 데려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조차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순사나리를 종수 놈이라니? 사람들은 덕구의 뱃심과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 용기에 그저 혀를 내두를 뿐 제지할 엄두마저 내지 못했다.
“덕구야, 아베가 대신 빌면 안 되것냐? 내가 절얼 학꼬 종수넘얼 대신혀 사과 헐 팅께. 그만 무덤 앙게서 나온너라.”
한상권은 정말 많은 동네 사람들 앞에서 고인의 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덕민아, 못난 아들일 둔 이 아베를 원망 혀. 살아서는 불행학꼬 억울헌 삶얼 살았지만 저승에서락도 명복이 깃들길 이라게 빈다.”
그제야 덕구는 못 이기는 척하고 사람들이 당기는 대로 무덤 안에서 나왔다.
“성, 부디 눈 감고 편히 가소. 이 동숭이 성의 원수럴 기연이 갚어줄 팅께 걱정말구잉.”
한상권을 노려보는 그의 눈길에서 불꽃이 팍팍 튕겼다.
덕구가 난동을 부리는 통에 장례는 날이 완전히 어두워서야 끝났다.
한편 덕민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종철은 자전거를 타고 읍내로 달려갔다.
대문 안에 들어서니 종수는 첩실 곱단이와 마주앉아 푸짐한 술상을 벌려놓고 한창 취흥이 도도해있었다.
“형님 때문에 억울한 사람이 죽었는데 지금 술이 목에 넘어갑니까?”
종철은 지게문 밖에 버티고 선 채 방 안을 향해 언성을 버럭 높였다. 평소 심성이 유약한 동생이 전에 없이 흥분된 모습을 보이자 종수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으매, 니가 지끔 성헌티 호통치고 있는 거더냐?”
“덕민형이 죽었다구요. 문상이나 가봐야 할 게 아닙니까.”
“덕민이가 죽었는디 내가 머땜시 문상 간다냐?”
“형님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잖습니까.”
“니 지끔 머락카노? 억울하닥꼬. 그넘언 죽어 마땅한 넘이지라우. 즈가베의 면목을 봐서 살려중게 댑도로 후회된다. 곱단아, 머허냐? 어여 술이나 따르잖구.”
“죽어 마땅하다니요? 왜놈들과 싸우는 항일군을 도와준 것도 죄가 됩니까?”
“그놈은 항일군이 앙그라 빨갱이지라.”
“그럼 왜놈을 도와주는 형님은 죄가 없습니까?”
“아니, 쩌넘이!”
종수의 손에 들렸던 술잔이 식탁 위에 탁하고 내려앉으며 술 방울이 도처에 튕겨났다. 곱단은 겁에 질린 듯 면색이 새파랗게 되어 몸을 옹송그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느그넘도 동숭매락꼬 잡아가두도 않았드니 인젠 빨갱이 편까장 들고 있어.”
“난 당신을 더 이상 형님으로 모시지 않을 겁니다.”
종철은 몸을 돌려 마루에서 내려왔다. 신을 신고 정원을 빠져나왔다.
“그랴, 성지간 정얼 끊겠으먼 끊고 니 맘핀대로 혀보거라. 나도 니 같은 동숭이 기찮응께. 찰코 잘됐다 아이가.”
종수의 욕설이 그림자처럼 꽁무니를 물고 따라 나왔다.
종철의 발걸음은 저도 모르게 향란의 집으로 향했다. 오빠를 잃은 향란의 슬픔을 나눠 주고 싶었다.
향란은 울타리 밖에서 울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말없이 강변으로 나왔다. 은파강 물결은 예나 다름없이 유유히 흘러가고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했다. 서늘한 강바람에 버드나무숲이 와스스 설렜다.
“죄송합니다. 제가 형님을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종철은 향란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향란은 참고 있던 오열을 왈칵 터트리며 그의 가슴에 안겨들었다.
“종철 씨한테 무슨 잘못이 있어요. 인간을 부자와 가난뱅이로 나누고도 모자라서 빨갱이요 민족주의자요 하고 편을 가른 세상의 잘못이지요.”
종철은 그녀를 가슴에 꼭 품었다. 젊은 가슴과 가슴이 밀착되며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인륜에 어긋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전 형님은 물론이고 이젠 아버지까지 싫어집니다. 형님과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기가 민망합니다. 무엇 때문에 덕민 형처럼 착한 사람이 죄 없이 죽어야 합니까? 무엇 때문에 덕민 형을 죽인 사람이 나의 형이란 말입니까? 착함이 가난의 원인이 되고 탐욕이 부의 원인이 된다면 그런 불평등한 사회는 나는 싫습니다.”
이제 향란이 흘린 눈물이 엷은 적삼을 적시며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그녀의 하얗게 익은 몸뚱이가 종철의 벌겋게 달아오른 몸뚱이에 깊숙이 녹아들었다. 두 사람은 몸을 후들후들 떨었다. 슬픔과 원망의 감정은 애정을 녹이는 불길처럼 피를 끓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꿀물처럼 강기슭의 파란 잔디 위에 스르르 녹아내렸다. 그리고는 줄기차게 서로를 갈구하며 깊이깊이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세상의 모든 것이 정지되면서 그들 둘만의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은파강의 흘러가는 물소리도 풀벌레의 은은한 울음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온 세상을 쿵쿵 울리는, 힘차게 발을 구르는 소리와 철철 흘러내리는 폭포와 가슴을 불태우는 감동의 음악만이 황홀한 흥분의 터널을 지나며 오래도록 계속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도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누구도 후회하지 않았다. 잔디 위에 나란히 누워 하늘에 반짝이는 뭇별을 쳐다보았다.
“형님과 아버지가 사는 이 고장이 싫습니다. 하루라도 더 있다간 질식하여 죽을 것만 같습니다. 오늘밤으로 이곳을 떠나려고 합니다.”
종철은 그처럼 엄청난 결단을 마치 시라도 읊듯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결단을 내린 다음엔 사람은 도리어 모든 긴장과 우려가 풀리는 법이다.
“저도 함께 가요. 저도 여기가 싫어요. 종철 씨가 없는 세상은 저한테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하나의 무덤에 불과할 따름이에요.”
향란의 간청은 방금 전 그들 둘 사이에 벌어졌던 감격적인 정사로 인해 더구나 거부할 수 없는 설득력을 가졌다. 그러나 종철은 조용히 그녀의 간청을 일축해버렸다.
“난세에 여자가 밖으로 나돌아 다닌다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더구나 전 당국에서 뒤를 추적하는 몸이 아닙니까. 내가 먼저 나가서 자리를 마련한 다음 소식을 전할 테니 그때 이곳을 떠나도 늦지는 않을 겁니다.”
“그게 언제죠?”
“얼마 남지 않았다고 난 확신합니다. 일본의 패망은 아마 오늘, 내일의 일일 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전 왜놈들이 패망해도 걱정이에요. 무슨 세상이 될지?”
“귀천의 차별과 빈부의 차별이 없는, 다 같이 잘사는 세상이 돼야지요.”
“그게 생각대로 될까요?”
“생각대로 안 되면 폭력을 써서라도 그런 평등사회를 만들어야죠.”
“그런 사회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거잖아요.”
“물론입니다. 우리 형님이나 아버지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일 겁니다. 그러나 그들도 역사의 순리를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인류를 위해 기여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난 혈통에만 얽매이는 효도와 의리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밤이 깊어서야 그들은 은파강 나루터에서 헤어졌다. 어둠 속에 서서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저으며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치는 향란의 모습은 종철의 가슴을 아프게 찢었다.
향란 씨, 꼭 데리러 올 테니 기다려주세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녀는 이제 그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이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은파에 도착한 종철은 곧장 옛날 중학시절 동기인 김윤기를 찾아갔다. 김윤기는 워낙 성품이 후한 사람이라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의 집을 잠시 은둔처로 삼기로 하고 으슥한 다락방에 깊숙이 숨어 지냈다. 동기생들 중 태반은 징병에 끌려 나갔고 나머지 사람들은 향방이 모연했다. 김 윤기만은 포목점을 운영하는 삼촌이 뇌물을 먹여 징병을 면제받았다고 했다.
종철은 날마다 어스레한 다락방에 붙박여 하루 종일 라디오만 청취했다. 그러나 정전사고가 잦아 라디오 청취도 쉽지 않았다. 그 때문에 밖의 형편은 전적으로 김윤기가 전해주는 소식에 의존해야 했다.
8월 8일 소련이 일본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 뒤부터 종철은 하루를 십년처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김 윤기가 그처럼 고대하던 반가운 소식을 가지고 나타났다.
“일본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포했네. 자네도 인젠 햇빛을 보게 되었어!”
꿈만 같은 기쁨에 종철은 한동안 어리둥절해졌다.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했을 때 그의 두 볼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쭈르륵 흘러내렸다. 장장 반세기에 걸친 일본의 굴욕적인 식민통치가 드디어 그 종말을 고하고 3천 리 강토가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개무량했다.
광복이 되어서야 종철은 김 윤기가 공산당 지하 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신분을 공개하고 은파시에 진주한 소련군의 후원을 받으며 한인 계 청년들로 「민주청년동맹」을 조직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 김 윤기는 종철이 서울 A대 학생이며 영어와 러시아어를 잘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조용한 곳으로 부르더니 이런 말을 했다.
“앞으로 어쩔 셈인가? 내가 보기에 자넨 이런 편벽한 도시에서 썩을 사람이 아닐세.”
“조국으로 귀국하고 싶네.”
“내 생각에도 그게 현명한 판단인 것 같네. 조국에서는 자네 같은 유능한 인재를 수요할 테니까.”
김윤기는 종철을 데리고 소련주둔군사령부로 찾아갔다.
“여긴 뭘 하러 데리고 왔나?”
대문 밖에 총을 받쳐 들고 서 있는 초병을 본 종철은 조금 당황해졌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네. 우리 민족의 자랑이자 민족의 영웅이라네. 자네에게 도움을 주실 분일세.”
종철을 맞아준 사람은 키가 후리후리하고 눈매가 부리부리한, 어깨에 소련군 소위계급장을 단 한인 계 장교였다. 그가 입은 군복 역시 소련군장교복이었다. 계급은 낮아도 소련군 내에서는 은파시 위수부대 부사령관이라는 어마어마한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 A대 학생이라고?”
군인답게 행동에는 절도가 있고 질문은 단도직입적이며 목소리는 우렁찼다.
“네.”
“러시아어도 할 줄 아나?”
“네.”
그것으로서 부사령관과의 면담은 끝이 났다.
김 소위는 종이에 무슨 글인가를 흘림체로 몇 줄 적더니 두 겹으로 접어서 종철에게 건네주었다. 검은 가죽장화를 신고 엉덩이 품이 유난히 넓은 장교복바지를 입은 부사령관은 군인풍도와 위엄이 도도했다.
“이 쪽지를 가지고 조선으로 나가면 k동지를 찾아가시오. 내 이름을 대면 박대하지는 않을 거요. 조국에는 바로 동무 같은 인재들이 필요할 때요. 조국을 위해 헌신해 주기 바랍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부사령관의 등 뒤 벽 위에 걸린 초상화속에서 스탈린이 마치 상대방의 의중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종철을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초상화주인의 모습은 낯설었지만 멋스러운 콧수염 때문인지 친근해 보였다.
위수부대 부사령관과 작별인사를 하고 건물에서 나오고서야 종철은 잔등이 땀에 흥건히 젖었음을 비로소 느꼈다. 김 소위가 거느린 위엄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실감케 했다. 실제로 김 소위는 얼마 뒤 입북하여 조선인민군창설에 기여하고 6.25 전쟁 중 인민군 고위급장령으로서 명성을 날렸었다.
종철은 향란을 만나고 떠날까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ㄷ시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아직도 앞날의 기약이 불투명했기 때문에 공연히 데리고 나섰다가 그녀까지 덩달아 고생시킬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대기실에서 간단한 소식을 적어 역 광장의 우체통에 편지를 투입했을 뿐이었다.
열차는 북만에서 밀려 내려오는 피난민들과 고국으로 돌아가는 회향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여객열차는 말할 것도 없었고 화물열차의 지붕 위, 탄수차, 무개차도 귀향객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도로에는 도보로 걸어가는 피난민과 귀국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열차에 승차해서부터 종철은 영문 없이 갑자기 신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전신이 불덩이 같이 달아오르고 두통이 극심해지더니 ㄷ역에 도착할 무렵에는 아예 인사불성이 돼버리고 말았다. 마침 마음씨 좋은 사람 덕분에 ㄷ시 교외의 어느 시골마을로 옮겨졌다. 한 달 동안이나 변변히 먹지 못하여 몸이 극도로 허약해진데다 정신적 부담까지 겹쳐 쓰러졌던 것이다. 그가 들어간 집은 마을 학교의 교장선생님 댁이었다. 집식구들이 나서서 의원을 불러 약을 지어먹이고 미음을 쑤어 먹이며 정성껏 간호하여 이튿날에는 의식이 회복되었다. 종철을 이곳까지 데려다 준 사람은 이미 조선으로 떠난 뒤였다.
그가 정신을 차리자 교장선생님이 어려운 부탁 한 가지를 해왔다.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가고 보니 학교에 선생이라고는 저 혼자 남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셨다는 말을 조카한테 들어 알고 있습니다. 미안한 부탁입니다만 학교에 새로 선생님이 배치되어 올 때까지만 저를 도와 애들을 가르쳐 주실 수 없는지요. 애들을 가르치는 일은 한시라도 미룰 수 없는 성스러운 민족적 사업이 아니겠습니까?
하도 간곡하게 간청하는데다 신세까지 진 형편이라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애들을 가르치는 교육사업 역시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이 아니겠는가?
종철은 뜻하지 않은 급환 때문에 낯선 시골 바닥에 눌러앉아 거의 1년간이나 애들을 가르쳤다.
종철이 그 시골을 떠난 것은 해방 이듬해 7월이었다.
1년이나 지체된 귀국이었지만 종철은 김 소위가 써준 소개장을 몸 깊숙이 간수한 채 다시 조국을 향해 만주 땅을 떠나 두만강을 건넜다.
조국 땅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그는 곧바로 평양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통행도 어려운 시기여서 3일이나 걸려서야 평양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화신백화점 부근의 어느 여관에 여장을 풀기 바쁘게 김 소위가 소개해 준 k장군부터 찾아갔다. 장군의 처소에는 보안경계가 삼엄했지만 김 소위가 써준 소개장이 은을 낸 모양인지 복잡한 절차를 거치긴 했으나 무사히 장군의 집무실로 안내될 수 있었다.
k장군은 몸집이 웅장하고 얼굴이 너부죽한 40대의 중년이었다. 멋진 장군 복을 입은 그는 말없이 쪽지를 받아보더니 종철을 한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째스리 소개장에 적힌 날자는 작년인데 오늘에야 도착했슴메?”
“그게 저…….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종철은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김 장군이래 입북하신 걸 아직 모르고 있슴메?”
“네? 부사령관동지께서 입북하셨다고요. 전 전혀 모르는데요. 지금 어디 계십니까?”
“그건 동무래 알 일이 아니디. 군사비밀이니께니. 부관동무, 이리 들어와 보라우.”
키가 큰 장교가 정보로 들어오더니 장군에게 거수경례를 붙였다.
“장군님, 부르셨습니까?”
“응. 이 동무래 가족관계나 성분 같은 걸 확인해 보고스레 나한테 알리라우. 동무래 바라는 거이 머심메? 어디멜 가고 싶은가 말이오.”
“죄송합니다만 <중앙보안간부훈련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더 하고 싶습니다.”
“보안간부학교라? 알았으니께니 부관동무가 시키는 대로 하구려.”
“네.”
종철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장군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그는 부관이 묻는 대로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지주이며 형님은 순사라는 걸 하나도 속이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고향이 남쪽이라는 사실도 이실직고했다. 그런 것들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려는 그의 진심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설령 속인다 하더라도 시간이 가면 발각될 것이기도 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라요.”
기록한 서류를 들고 부관은 장군의 집무실로 다시 들어갔다.
종철은 담배를 붙여 물고 무심한 시선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 안 정면에 스탈린과 수령의 초상화가 정중하게 걸려 있었다. 중국에 있을 때 많이 들어 이름은 익숙했지만 생전 처음 보는 수령의 얼굴은 조금 낯설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부관이 장군집무실에서 나왔다.
종철은 급급히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웬일인지 부관의 표정이 아까보다 차가웠다.
“장군님께서는 중앙보안간부학교학원들은 북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엄선한 청년들로서 성분이 좋고 공산주의사상이 투철한 젊은이들을 모집하는 곳이므로 동무 같이 지주의 아들이며 남쪽에 고향을 둔 사람은 곤란하다고 말씀하셨시오. 기레니께니 지방정부에 내려가 동무의 출신과 가정상황을 신고하고 처리를 기다리라고 하셨디요. 기레니께니 그만 돌아가시라요. 공화국은 지주계급의 자식은 필요로 하지 않시오.”
종철은 한동안 어안이 벙벙한 채 입을 열지 못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지주인 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황차 나는 아버지랑 형님이랑 결렬하고 가출한 사람이 아닌가. 계급 성분이 애국을 막는 장애가 되다니, 되지도 않을 소리다.
그러나 부관은 이미 문을 열고 그더러 밖으로 나갈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종철은 가슴이 답답하여 대동강가로 나왔다. 철제교량인 대동강교 중앙으로는 궤도전차가 덜커덩거리며 굼뜨게 달리고 있었다. 강가에는 휴일이 아니어선지 산책하는 사람들조차 별로 보이지 않았다.
종철은 버드나무 가로수가 휘늘어진 강변 포석보도를 따라 방향을 잃은 발걸음만 무심히 옮겼다. 강바람이 서늘했다. 멀리 모란봉의 을밀대가 보였다.
종철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절망과 허탈 속으로 깊숙이 빠져 들어갔다. 아버지와 형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미 끝장났다는 생각으로 앞날이 막막해졌다. 과연 이 공화국 땅에는 내가 살아갈 한 치의 땅조차 없단 말인가? 내가 바라던, 계급이 소멸된 평등한 사회를 위해 내가 할일이 없단 말인가. 그렇다면 난 인젠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가?
거리에 나섰으나 시야가 캄캄해지며 앞이 보이지 않았다.
정신이 촛불처럼 가물거렸다.
내가 갈 곳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종철은 저도 모르게 아득한 남쪽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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