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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21 장편소설 "바람의 아들" 21 by 아데라

바람의 아들
장혜영

 “그럼 모레부터는 내보내야 되오. 그런데 이 사람이 정말 이 동무네 데릴사위가 틀림없소? 그동안 말 한마디 없더니 언제……”
 “제가 감히 위원장동무를 속일라고요. 벌써 오래전부터 두 집 사이에 중매쟁이가 오고갔어요.”
 박병술의 얼굴에 화살처럼 박혀드는 병태의 시선에서 노골적인 적의가 번뜩였다. 게다가 의혹까지 엉겨 붙어 불 꼬챙이처럼 따갑다.
 “저 사람이 전쟁 전에는 매일이다시피 내 딸을 달라고 우리 집에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네. 딸을 주지 않으면 우리 집에 불이라도 지르겠다고 윽박지르기까지 하면서 말일세. 일하기는 싫어하고 허구 헌 날 빈둥거리며 동네 짐승은 다 훔쳐다 잡아먹고 싸움질이나 하고……”
 마을을 벗어나 외진 곳의 집 근처에 이르러서야 이호남은 아까의 공손한 태도를 버리고 병태에 대한 험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농부의 아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전전긍긍했다.
 “듣겠으면 들으라지. 내 딸 갖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어느 놈이 상관이야. 개를 줘도 제 놈 한 테는……”
 “정작 앞에서는 설설 기면서 뒤에서만 입이 살아가지고. 제발 좀 그 입 다물라니까 그래요.”
 농부의 아내는 참다못해 손으로 남편의 입을 틀어막는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더 말하지 않을 테니까 이 손 치워. 숨 막혀 죽겠다.”
 그러더니 이호남은 이번에는 박병술에게 화제를 돌린다.
 “보아하니 총각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때? 내 딸이 맘에 드나? 난 자네가 마음에 드네. 그러니 자네만 좋다면 아예 말이 난 김에……”
 “아버지.”
 복금의 얼굴은 붉다 못해 목까지 새빨개진다.
 박병술도 몸 둘 바를 몰라 복금에게서 황급히 시선을 풀어왔다.
 “이 양반은 언제나 간수부터 친다니까.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인생의 대산데……”
 아내도 민망한지 농담절반 진담절반 어색한 분위기를 장난으로 슬쩍 넘겨버리려 한다.
 “내 병태 그놈의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서 그래. 내 딸에게 임자가 생기면 야망을 버릴까 싶어서.”
 아무튼 박병술은 이호남의 덕분에 위기의 순간을 넘기고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물론 위험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데 그날 밤이었다. 자정이 거의 되었을 무렵, 박병술은 한창 단잠에 골아 떨어져 있었다. 갑자기 아랫동네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무슨 예감이라도 들었던지 잠을 깬 이호남은 저고리를 어깨에 걸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박병술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밖에 나갔던 이호남이 갑자기 달려 들어오며 다급하게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박병술은 잠도 채 깨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채 일어났다.
 “자네 어서 방으로 올라가게.”
 무작정 안방으로 등을 떠민다.
 “무슨 일이 생겼게요?”
 이호남의 아내도 눈등을 비비며 의아해한다.
 “내가 그놈이 갑자기 들이닥칠 줄을 알았어.”
 급박한 상황인데도 이호남은 귀신같은 자신의 선견지명에 득의양양해한다.
 “그놈이라니 도대체 누구 말이에요?”
 “누군 누구야. 병태녀석이지. 이 사람이 정말 데릴사윈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고 밤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급습한거지. 흥! 다른 사람한테는 그런 술수가 통할지 몰라도 나한테는 어림도 없다. 내가 제 놈의 계책에 넘어갈 것 같지. 뭐하고 있나. 어서 방으로 올라가라니까.”
 “어르신……이러면 전 정말 난감……”
 그제야 어렴풋이 영문을 알아차린 박병술은 사건의 급박함을 느꼈으나 또 그만큼이나 난감하기도 했다. 이호남이 떠미는 안방에는 복금이 혼자 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도 가도 못한 채 망설이기만 했다.
 “제가 어떻게 그럴 수가……”
 “시간이 없네. 잔말 말고 어서 올라가게. 옷도 벗고.”
 “어르신……”
 “내 딸 좀 살려주게. 제발 부탁하네. 자네가 아니면 내 딸은 늑대 밥이 되고 만다네. 어서.”  
 어느새 어지러운 구둣발소리가 삽짝문밖에까지 당도했다.
 삐거덕 삽짝 문이 열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당신 우선 밖에 나가 저들을 막고 있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리고 자넨 제발 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박병술은 이호남이 시키는 대로 옷을 훌렁훌렁 벗고 안방으로 올라갔다. 이호남은 망설이는 그의 등을 떠밀어 무작정 딸애의 이불 속에 밀어 넣었다. 문득 어깨에 닿는 따스한 여체가 감촉되며 박병술은 촉한을 만난 사람처럼 전신이 화들화들 떨려났다.
 복금이도 벽 쪽으로 돌아누워 몸을 옹송그린 채 육신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호남이 사잇문을 닫고 안방에서 금방 나가자 앞뜰에서 병태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키시오! 집안을 좀 조사할 것이 있어 왔으니 방해하지 마시오.”
 병태는 농부의 아내를 밀치고 무작정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박병술은 숨을 죽인 채 사랑방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복금이 동무래 어디 있소?”
 “안방에서 잡니다. 위원장동무. 밤중에 무슨 일입니까?”
 이호남의 반문이 끝나기도 전에 사잇문이 벌컥 열렸다. 그 순간 복금은 급촉하게 몸을 돌이키더니 두 팔로 박병술의 목을 답삭 껴안았다. 그리고는 병아리새끼처럼 그의 품에 꼭 달라붙었다. 따스하고 부드럽고 탄력 있는 처녀의 알몸은 박병술의 가슴에 순식간에 뜨거운 불길을 지펴 올렸다. 긴장 때문인지 흥분 때문인지 심장의 박동이 쿵쿵 우렛소리처럼 요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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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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