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아들
장혜영

 박병술은 감자 한 광주리를 다 비우고 나자 뒤미처 밀려드는  식곤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 꼬꾸라져 단잠이 들었다. 농부내외와 복금이가 상처를 씻고 오소리기름을 바르고 쑥뜸을 뜨는 것도 전혀 몰랐다. 그렇게 하루 낮, 하룻밤을 내처 자고 그 다음날 점심때에야 잠을 깼다. 주위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건장한 장정 몇 사람이 자고 있는 그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그중 어깨의 계급장과 모표를 뗀, 인민군복을 입고 허리의 가죽혁대에 모젤권총을 찬 청년이 구둣발로 박병술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동무래 이동네 사람 아니디? 괴뢰군패잔병 아니야?”
 박병술은 어리둥절한 채 일단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긴 했지만 상황파악이 안 되어 대책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농부도 그의 아내도 복금이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밭으로 나갔을까? 설마 그들이 날 인민군에 고자질했을까.
 문득 조병태라던 이름과 그가 민청위원장이고 시도 때도 없이 반동분자색출을 다닌다던 농부아내의 말이 기억 속에 떠올랐다. 게다가 아직은 서툰 청년의 평안도말씨를 보아 이 지방 사람이 분명하다. 그제야 아차 잘못 걸려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위기를 모면하기에는 늦은 상황이었다.
 “모두들 전선원호사업에 동원되었는데 동무래 어디서 굴러든 사람인데 태평스레 집구석에 틀어박혀 낮잠만 쿨쿨 자고 있는 가 말이요?”
 “전 전라도에서 왔습니다. 이 집에 데릴사위로 왔지요.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다리를 상해서……”
 “거지뿌리래 하문 누가 모를 줄 알디. 당신 숨어있는 반동분자 틀림없지?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자백하라우.”
 “반동분자라니요. 아닙니다. 농사짓는 농부지라 예.”
 “이 자식! 그래도 거지뿌리야. 뭐하고 서있는 거야. 어서 이 반동새끼를 밖으로 끌어내라우!”
 박병술은 변명이나 저항할 사이도 없이 민청원들에게 질질 끌려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건물들과 골목의 벽체들에는 낯선 구호들이 가는 곳마다에 적혀있었다.

 토지는 밭갈이 하는 농민들에게!
 모든 것은 전선을 위하여!
 이승만 괴뢰도당과 악질지주, 경찰, 괴뢰군, 반동분자를 색출하여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하자!
 인민군대는 인민의 군대이다! 무적의 강철대오 인민군대에게 영광이 있기를!
 조선로동당 만세!

 마을의 학교 앞 벽보판에는 남한지도가 걸려있고 그 위에 붉은 종이깃발을 꽂아 인민군대의 진격노선과 승전소식을 알리는 선전포스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옆의 포스터에는 인민군의 무쇠주먹에 분신쇄골이 되어 남해바다에 처박히는, 국군의 패전모습을 그린 만화가 붙어있다.
 천한는 변한 것이다.
 옛 경찰지서인 듯한 벽돌건물의 지붕에는 태극기 대신 공화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여기저기에 농민위원회, 여성동맹, 민주청년연맹이라는 간판도 눈에 띈다.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은 여성들이 어딘가로 분망하게 오갔고 청년들도 반동분자색출작업에 동원된 모양 가택들을 수색하느라 소란을 피운다.
 박병술이 압송되어온 창고건물에는 벌써 일여덟 명의 사람들이 연행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냥 맨봉당에 여기저기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었다. 그 표정들이 죽음을 앞둔 사형수들처럼 시커멓게 멍들어 있다.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체념하는 기색들도 가끔 눈에 잡힌다.
 병술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제 오래잖아 곧 심문, 취조, 고문이 시작될 것이고, 농부를 불러들여 증언을 시킬 것이고, 국군병사임이 탄로나면 끌어내다 총살할 것이고…… 
 뒈지지 말란 말이야. 구역질이 나니까!
 소대장님. 미안합니다. 아무래도 이 바보, 등신은……
 “박만수 이리 나와!”
 커다란 널대문이 덜커덕 열리더니 총을 든 민청원 한사람이 그의 이름을 호명한다. 만수는 농부가 그렇게 부르라고 임시로 지어준 가명이었다.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셔 그는 한동안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뭘 꾸물거리고 있어. 얼른 나오지 못해!”
 발목통증 때문에 가까스로 걸음을 옮기는데 민청원이 등을 와락 떠미는 바람에 그만 대문밖에 나뒹굴었다.
 “박 서방.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농부가 달려와 박병술을 부축해주었다. 농부의 아내와 딸 복금이도 불안하고 두려운 표정으로 저만큼 떨어진 곳에 우두커니 선채 우들우들 떨고 있다.
 “이호남 동무. 이 사람이 정말 당신 데릴사위요?”
 “그렇다니까요. 위원장동무.”
 “거지뿌리래 했다간 그 후과가 어떤지 이호남 동무도 알지래. 반동분자를 비호하면 똑같이 엄벌을 받는다는 걸.”
 “알고말고요. 절대 거짓말이 아니지요. 어느 안전이라고 언감생심. 어서 집으로 돌아 가세나. 다리도 아픈데……”
 박병술의 손을 잡은 이호남의 팔이 후들후들 떨렸고 손바닥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거 복금이 동문 잠시 나 좀 보자우.”
 병태라고 짐작되는 민청위원장이 엄마 등 뒤에 숨어 두려움에 파랗게 질린 이호남의 딸을 불러 세웠다. 복금이는 아예 엄마의 등 뒤에 몸을 감춰버린다.
 “여맹위원장 동무가 아까 찾던데. 인민군대원호사업에 참가하라고.”
 “얘가 요즘 몸살기가 좀 있어서. 며칠 뒤에 내보내면 안 될까요.”
 이호남의 아내가 허리를 굽실거리며 통사정을 했다. 복금의 엄마를 깐깐히 훑어보는 병태의 시선이 심상치가 않아 보였다. 이호남의 우려가 이유 없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의 강력한 눈빛에서 처녀에 대한 점유욕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복금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아예 엄마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갈 듯이 안절부절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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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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