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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8.09 장편연재 "바람의 아들" 55 by 아데라

바람의 아들
장혜영

 정도는 복도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나와. 점심 같이 먹자.”
 “너 지방촬영에서 언제 돌아왔어?”
 “어제. 얼른 나와.”
 “나 지금 밖에 있어. 사진관이 아니거든.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어딘데?”
 “금방 갈게. 기다려.”
 그녀와 보내야 할 시간들이 어제의 불민한 과실로 인해서인지 송구스럽고 민망할 것 같아 그러지 않아도 전전긍긍하던 차였다. 파랑이 눈치 채지 못했거나 그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손 치더라도 그자신이 스스로의 무례한 행위가 용서되지 않았다. 그것은 파랑의 인격에 대한 모독이고 순수한 이름다움에 대한 능멸이라고 생각되었다. 자아반성을 할 시간이라도 필요할 것 같았다.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라도 불러주십시오.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인사드릴게요.”
 파랑은 문가에까지만 바래준다. 나오면서 눈결에 확인했지만 더블침대는 전날과 똑같이 정결한 모습이었다. 그 위에서 벌어졌을 격렬한 정사를 떠올릴 만한 그 어떠한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녀가 몰래카메라로 촬영한 사람들은 과연 어떤 인물들일까.
 친구 준범은 오늘따라 의기소침하다. 얼굴은 파리하고 수심의 먹구름이 첩첩하다. 드라마촬영도 아내와의 대결도 아버지의 회사도 어느 하나 잘 풀려 나가는 일이 없는 것 같다. 야심작이라던 드라마『인생에는 길이 없다』가 실패한 사실과 제수씨의 잦은 외박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 뒤로 친구의 상황이 어느 정도 악화되었는지는 그도 모르고 있었다.
 “정직하게 살 필요가 없어. 그건 어리석은 놈들이나 하는 미련한 짓이야. 정직하게 살아도 차례지는 건 불행뿐이잖아. 힘들기만 하고.”
 전에는 그런 불평이 많았지만 요즘은 아예 불평마저 없이 침묵과 한숨만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정직이 그를 기만하고 우롱하고 배신하는 현실에 실망이라도 한 것인가. 그러나 준범에게 오늘은 그가 진정한 정직을 만나지 못한 것이라고 알려 주고 싶었다. 진정한, 참된 정직이라면 사람을 기만하고 배척할 리가 없는 것이라고.
 그러나 준범은 정직이라는 게 도대체 존재하기나 하느냐고 되물을 것이 틀림없다. 정직을 본 사람이 있느냐고 따지고 들 것이다.
 정도가 오는 시간도 기다리지 못하고 준범은 벌써 소주 두 병을 비웠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대낮부터 술이냐?”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 세상이 다 귀찮아.”
 “또 무슨 일인데?”
 정도는 준범이 따르는 술 한 잔을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준범의 얼굴에 누런 이끼가 돋아 있다. 눈에는 벌건 핏발이 거미줄처럼 얼기설기하다. 세수도 하지 않은 모양 염색한 머리카락은 검불처럼 푸시시하다.
 “어제 왔다며? 집에서 나온 모습이 아닌데.”
 “호텔에서 잤어.”
 “오랜만이 집에 왔는데 집을 나두고 왜 호텔에서 자. 제수씨는?”
 “촬영 떠나는 날 집을 나간대로 아직 귀가하지 않았어.”
 “뭐라고. 그럴 리가?”
 “믿어지지 않지. 나도 믿기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정실은 가정적이고 현처였잖아. 어떤 면에서는 너무 고전적이고 봉건적이기까지 했던 여자였잖아.”
 “그랬었지.”
 “전혀 아니라고. 완전히 변했어. 딴 사람이 되었다고. 그전에는 흠이 있었다면 몸매관리에 너무 신경 쓴 것 뿐이었어. 그런데 완전히 자유부인으로 변해 버린거라고.”
 “난 그게 이해가 안 돼. 그럴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잖아. 무엇이, 누가 제수씨를 그런 자유부인으로 변하게 했냐 말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알겠지. 불을 지피지 않은 굴뚝에서 연기가 날 리 없듯이 뭔가 까닭이 있을 거 아냐.”
 “까닭? 무슨 까닭이 있지……”
 준범은 또다시 대답을 망설이며 말꼬리를 사린다. 술이 거나해진 지금에도 결단을 망설이는 걸 보면 속심을 털어놓기가 힘든 사연인 것이 분명하다. 털끝 만한 일도 친구에게 속인 것이 없던 준범이었다. 하긴 정도 역시 파랑의 일을 그와 속이고 있지 않는가.
 “내가 알아서 안 되는 일이라면 굳이 묻지는 않을게. 그 대신 그냥 속에 묻어 둘거면 날 불러 내지 마. 눈 뜨고 보아 주기가 힘들단 말이야. 아예 말을 꺼내지 말던지.”
 “그게 섭섭했던 거지? 나 알아. 친구라면서 비밀을 지키는 내가 미웠을 테지. 그러나 난 널 잃고 싶지 않았어. 진실을 토로하는 대가로 널 내 곁에서 떠나 보내고 싶지 않았단 말이야. 난 영원히 네 친구이고 싶어.”
 분위기가 미묘하게 흘렀다. 진실을 토설하려는 준범이도 들으려는 정도도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진실은 언제나 이렇게 말하기가 힘들다. 정도도 지금 준범에게는 토로하라고 압력을 가하지만 그 자신은 파랑과의 이상한 관계를 숨겨오고 있다. 비난거리가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우정이라는 것이 친구의 사생활이나 자백 받아내는 악용물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호기심은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좀처럼 포기하지 않는다.
 오늘은 예감이 준범의 입이 열릴 것만 같다. 혼자서는 더 이상 버텨내기 힘든 고뇌의 극단에 이른 게 틀림없다. 그 고뇌에는 친구를 상실할 수도 있을 만큼 친구답지 못한 부당함과 패덕함이 동반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런 불리함에서 친구를 구해줄 만큼 자신의 너그러움이 어질지는 못한 것 같다. 친구의 결함을 감싸줌으로서 친구를 친구 앞에서 당당하게 세워 주는 아량이 정도에게는 부족한 지도 모른다. 호기심은 그냥 알고 싶어 몸부림이다.
 “그래 오늘은 속 시원히 털어놓을게. 그리고 오늘로서 나랑 갈라질거야. 너도 네 갈 데로 떠나거라. 더 이상 네 친구로 남는다는 건 네 인격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의미뿐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이 더러운 자식에게 침을 뱉고 멀리 떠나라고.”
 술 한 잔을 단모금에 죽 들이마시고는 드디어 흑흑 흐느끼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서막이 이렇게 기냐? 말을 해야 알게 아니야. 괜히 뜸들이지 말고 시원하게 털어나 봐.”
 “걱정 마. 털어 놓는다 털어 놔. 내가 말이지 정실일 놔두고 다른 아가씨랑 불륜관계를 가져 아이까지 임신시켰었거든. 낙태하라고 강요했는데 이 계집애가 그만 불복하고 자살해 버린거야.”
 “뭐라고!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다른 여자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그래. 난 네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정직한 놈도 결백한 놈도 아니야. 더럽고 치사하고 패덕한 망나니에 불과하지. 인제야 알았지? 실망하고! 하하하……”
 정작 속을 털어놓자 체념에서 오는 허탈감 때문인지 준범은 갑자기 껄껄 너털웃음을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는 어찌나 처절했던지 정도의 귀에는 통곡소리처럼 들렸다. 웃는다고 웃는 것은 아니다.
 “이 자식! 너 나랑 장난치고 있는 거지. 네가 어떻게?”
 “장난 좋아하네. 우리 집이 이렇게 망한게 바로 내가 저지른 죄악에 대한 대가야. 죽은 계집애의 여동생이 복수하겠다고 나선거야. 아버지벌이 되는 우리 아버지를 몸뚱이로 유혹해 새엄마로 들어와 회사를 부도나게 했고 이제는 내 아내 정실이한테까지 마수를 뻗쳐 타락의 구렁텅이로 끌어가고 있단 말이야. 그래 알아. 네놈이 날 나쁜 자식이라고 욕할 줄을. 징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저주하겠지. 네가 이런 나쁜 놈인 줄을 몰랐다고. 너 같은 자식을 친구로 둔 게 수치스럽다고. 다 알아. 그러니까 날 한 대 쥐어박고 떠나가라는 거야. 어서.”
 준범이 버럭버럭 고함을 지르는 통에 식당 안 손님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그럼 네가 지금 한 말이 모두 진실이란 말이지?”
 “진실 아니면 내가 무슨 천방야담이라도 엮는 줄 알았어. 네 생각과는 달리 난 이렇게 치사하고 구질구질하고 비열한 인간쓰레기야. 개똥같은 더럽고……그러니 날 더 이상 친구로 여기지 마. 너까지 더러워져. 나도 늘 어깨가 처지고 열등감, 죄책감에 빠져 고결한 널 친구로 가진 게 부담스러워!”
 “나쁜 자식. 알고 보니 너 양의 탈을 쓴 늑대였구나!”
 “그래 맞았어. 난 늑대야. 양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늑대라고……난 지난밤에도 다른 여자랑 잤어. 연예계에 진출시켜준다는 미끼로 돈 받고 자고……”
 정도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화들화들 떨리는 손바닥으로 광란하는 준범의 누렇게 뜬 뺨을 철썩 소리 나게 후려쳤다. 손바닥이 관골에 부딪치며 아파왔다.
 자리를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정원에는 눈부시게 하얀 목련꽃이 활짝 피어 있다. 졸졸졸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인공수차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주위에 붉고 노란 색의 살진 물고기들이 여유작작하게 노닌다. 산수유는 소박하지만 수줍음이 없이 당당하게 화려한 목련꽃과 어울려 아름다움을 은은하게 과시한다.  자그마한 인공연목속의 연꽃잎들과 부들가지위에 참개구리 몇 마리가 앉아 있다.
 “개자식!”
 꽃숲속을 지나가며 정도는 연신 준범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극도의 배신감은 증오심으로 변한 것이다. 윤정의 외조부가 배신으로 그를 실망시킨 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참을 만 했다. 어쨌든 그는 동시대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준범은 그와 동시대인일 뿐만 아니라 정직한 사람이라 믿어왔던 친구이다. 그런 친구였기에 충격도 그만큼 컸다. 이건 그냥 패덕이 아니다. 불륜도 아니다. 죄악이고 범죄이기도 하다. 어찌 내 친구가 이런 사람일 수가 있는가.
 허탈했다. 세상의 진실과 정의, 정당함에 대한 모든 기대감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는 듯한 절망적 기분이었다.
 쫓기듯 급급히 집으로 달렸다. 가속페달을 자꾸만 밟았다. 붉은 신호등도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무단 통과했고 중앙선을 초월하기도 했다. 빨리 준범이와의 거리를 벌리고 싶었고 집에 가서 그에게서 오염된 더러운 기운을 씻어버리고 싶었다. 부정을 탔다고 느끼면 그는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몸을 씻고 손을 씻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 습관은 윤정의 외조부가 쓴 자서전을 읽고 아버지의 낙향 원인을 알고 파랑을 만나고 미경의 외도를 알면서부터 증세가 더 심해졌다. 그 스스로도 그것이 병적인 증세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퇴치할 수 없었다. 세상이 너무 더럽거나 아니면 그 자신이 너무 깨끗해 때가 오르기 쉽기 때문일까.
 그러나 집에서는 또 다른 걱정거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폐렴증세로 병원치료를 받던 딸애 미미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며 고열이 오르고 망막에서 출혈증세까지 보이고 있었다. 할머니인 양진옥이 혼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아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호텔을 나올 때 휴대폰배터리가 나가 전화마저 불통이었던 것이다.
 정도는 몸을 씻을 사이도 없이 미미를 차에 싣고 서둘러 병원으로 달렸다.
 의외로 진찰시간이 오래 걸렸다. 정도는 로비자판기에서 커피를 세 컵이나 뽑아 마셨지만 딸애는 응급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점점 불안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대기석에 앉아 무슨 잡지인가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뒤적였지만 내용이 하나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은 불길한 예감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폐렴이 심한가?
 폐렴이 아무리 심해도 폐렴이겠지.
 종래로 진찰과정이 이렇게 오래 걸려 본적은 없었다.
 혹시 폐렴이 다른 병으로 넘어간 것은 아닌지? 폐렴이 다른 병으로 넘어갈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만큼도 그에게는 의학상식이 전무했다. 그냥 막연한 추측뿐이었다.
 윤정에게 알려야 되나 말아야 되나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은 전화를 걸었다. 윤정은 집에서 떠날 때는 분명 휴대폰을 가지고 갔는데 절에 도착한 날로 꺼놓은 채 한 번도 작동시킨 적이 없다. 오늘도 역시「전화기가 꺼져 있으니 소리 샘으로 연결」한다는 안내원아가씨의 기분 나쁜 음성이 들릴 뿐이다.
 딸애가 걱정되지도 않나 봐. 남들은 애가 앓으면 꿈에도 나타난다던데.
 그때에야 딸애 미미가 응급실에서 나왔다. 미미는 어머니에게 맡기고 정도는 의사의 부름을 받고 진찰실안으로 들어갔다. 의사의 얼굴표정에서는 아무것도 눈치 챌 수 없었다. 의사들의 표정은 언제나 담담할 뿐이다.
 그러나 분위기만은 심상치 않았다.
 “환자의 아버지 되십니까?”
 “네.”
 “따님의 병이 위독합니다.”
 “네. 폐렴이 심합니까?”
 “폐렴이 아니라 급성백혈병진단결과가 나왔습니다.”
 “네?! 급성백혈병이라니요. 어제까지도 폐렴이라고 했는데……”
 전혀 뜻밖의 진단결과에 정도는 마른 벼락이라도 맞은 듯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지만 의사의 차분한 표정을 보고는 충동을 자제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급성백혈병은 그 발병원인이 폐렴이나 성홍열, 충양돌기염蟲樣突起炎이나 디프테리아 등 병으로부터 시작되지요. 소아기의 악성 종양 중 하나로서 가장 빈도가 높은 병입니다.”
 의사는 그냥 과문을 낭독하듯 아무런 감정도 없이 담담하게 설명해 나갔다.
 “백혈병세포수치가 1012 개로 나왔습니다. 틀림없습니다.”
 “그 병에 걸리면 어떻게 되죠?”
 “골수에서 정상적으로 형성되어야 할 혈구들이 병적으로 분화 또는 증식되어 암세포로 대치되면서 빈혈, 감염, 출혈증상과 암세포의 기관침범과 증식에 의한 증상들이 생기게 되는 거죠. 구체적으로는 발열, 출혈, 골통, 복통, 권태감, 식욕부진 같은 증세를 보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치료하셔야죠. 일단 관해유도치료를 합시다.”
 “관해유도치료란?”
 “항암제를 투여하여 백혈병세포를 줄어들게 하는 기초치료입니다. vincristine을1.5mg/m2/weekdmf 정맥투여하고 predinsone 40mg을 3~4회분씩 복경구투여하고  l-aspaparagina 6000 u/m2을 1주 3회씩 3주간 총 9회 근육 주사합니다. 이 항암치료를 통해 완전관해가 되면 제2단계로 중추신경예방치료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 경우 약물에 의한 후유증이 심하게 발작할 수도 있으니 미리 알고 계셔야 합니다. 일단 따님을 입원시켜야겠습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꿈에도 생각 못했던 불행이 하늘이 무너지는 듯 정도의 머리위에 덮쳐든 것이다.
 진단서를 받아 쥐고 병원을 나서는 정도의 눈앞은 캄캄해졌다. 하늘과 땅이 채 바퀴 돌 듯 통째로 빙글빙글 돌아갔다.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 아내의 탓으로 여겨졌다.
 윤정이 딸애를 버리고 사찰로 떠나지 않았다면 미미는 폐렴에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절에 올라갔다 하더라도 가끔씩 내려와 미미를 보살펴 주었다면 이런 날벼락은 떨어지지 않았겠지. 남편은 갈라지면 남이라고 치자. 그러나 자식은 자신의 핏줄이 아닌가. 세상에 자식보다 더 귀중한 무엇이 또 있단 말인가. 부처님이 아무리 소중해도 자식보다 소중하랴.
 산사에 갈 때마다 윤정은 늘 부처님 앞에 엎드려 성심성의껏 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부처님이 정말 영험하다면, 윤정의 진심어린 불공을 받아들였다면 미미를 보살펴 주었어야만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딸애는 부처님의 보우는 고사하고 불치의 병에 걸려 어린 나이에 생명까지 잃을 위험에 봉착했다.
 이런데도 절에 남아 있을 것인가.
 훌륭한 아내로, 훌륭한 엄마로 살 수 없는 여자가 훌륭한 불자가 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어딘가 잘못되었음이 틀림없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불자가 되어 혼자만 서방정토에 들어가 천수를 누리고 열반에 들려고 한다면 그 역시 불교에서 반대하는 구복이요 욕망일 뿐이 아니겠는가.
 누구나 다 부처라고 한다.
 지어는 돌 하나, 풀 한 포기에도 불심이 있다고 한다. 아내가 진심으로 불심을 깨달으려면 자신 곁에 있는 부처부터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딸애도 부처일 테니 말이다.
 거리의 꽃들이 오늘따라 무심해 보인다.
 봄날의 화려함을 관망하노라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쭈르륵 흘러내렸다. 자존심이고 뭐고 인제는 정말 윤정을 찾아가 하산을 설득할 때가 된 것 같다.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미미를 위해서도 그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 윤정을 위해서도 필요한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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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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